어떤 낱말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일은 우리의 느낌을 바른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맞다‘는 말을 ‘합당하다’, ‘정당하다’로 바꾸어 쓰거나 ‘틀리다’는 말을 ‘오류다’, ‘착오다’로 바꾸는 것은 그 말의 쓰임이 우리 느낌에 닿지 않아서 겉돌게 하는 일이다. 내가 마구잡이로 밖에서 들여온 이른바 ‘학문용어’를 밑씻개로 씻어 낼 수도 없는 ‘똥구멍말‘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데에는 그것이 우리 삶에 잇대어 있지도, 맞닿지도 않기 때문이다. - P97
‘이’는 한자어로 ‘현재‘를 나타낸다. ‘이’제, ‘이’곳, ‘이’ 사람처럼. ‘어‘는 한자어로 ‘과거‘(지난 적)를 가리킨다. ‘어제’처럼. 제주도 말에는 있다를 ‘이시다’로, 없다를 ‘어시다‘로 쓴 흔적이 있다. ‘이시다’는‘이▲다’, ‘어시다’는 ‘어▲다’로 말 줄임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말이 바뀌어 ‘잇다‘(있다), ‘엇다‘(없다)로 되었을 수 있다. - P98
‘안’과 ‘밖’이라는 말도 더 깊이 파헤치면 이렇다. ‘임’(있음)이 밖(박, 빛)에 드러난(들어 나온) 것이라면 ‘안임‘(아님)은 속에 감추어진 것, 숨은 것, 숨으로 있는 것을 가리킨다. ‘임’이 빛이라면 ‘안임’은 그늘이다. 그것은 늘 있으나 안에, 속에 있다. (속은 〈단군신화〉에서 ‘쑥’으로 나타난다). 어제(과거)는 이제(현재)의 안으로, 속으로 들어가 이제가 아니면서 이제의 속살을 이룬다. 얼과 넋이 된다. 기억으로 바뀐다. 경상도 말에 ‘아니다‘라는 말뜻을 지닌 ‘언제예’, ‘어데예’라는 말 쓰임이 있다. ‘어데예‘는 지나간 자리, ‘언제예‘는 지나간 때를 말한다. 어제는 이제에 내침을 받으면서, 부정되면서 안으로 숨어든다. 우리가 ‘아니다‘(안이다, 이미 사라져 숨어 있고 감추어져 있다, ‘안’에 들어 있다)라고 할 때 그 말은 단순 부정이나 아예 없앰이 아니다. 그것은 ‘뜻 밖‘이되 뜻이 안에서 생기는 ‘얼럭‘(얼과 넋)이라면 ‘밖‘에서 생기는 것이다. ‘안임‘은 안에 숨은 ‘임‘이다. - P99
아이들이 보고 듣는 것마다 ‘왜’냐고 묻는 것은 나에게 ‘오는 것‘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지, 걸림돌이 될지 알고자 하는 뜻에서다. ‘아‘는 ‘이제‘, ‘이곳‘, ‘이것‘ 밖에서 나에게 올 것인데,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귓결에, 코앞에, 눈앞에 오고 혀끝과 살갗에 닿을 때까지 알 수 없다. 겪어 보지 않은 세상은 모름의 틈새를 가득 채우는데, 그것을 우리는 머리 굴려서 알려고 든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우주의 역사이고, 생명의 진화이고, 인류 역사로 알려진 부스러기 지식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뭘 모른다는 것은 안다‘(뭘 모르는지 안다)는 말을 내뱉었다는데, 이것은 입 밖에 내뱉을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참말이라고 볼 수 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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