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한 일인데 그것도 시를, 그것도 내 시를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시에 나오는 단어 하나가 가진 여러 가지 뉘앙스의 비율까지 느낄 수가 있는데(왜냐하면 내가 쓴 시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아 슬픔이여‘라고 썼다면 그 슬픔이라는 단어는 그 컨텍스트 안에서 풍자 30프로, 경멸감 30프로, 진짜 슬픔 30프로 등등으로 그 뉘앙스의 비율이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비율까지 딱 맞는 영어 단어를 고르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완전한 번역이란 불가능하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그전에도 물론 알고 있었지만). - P17
강의실에 빙 둘러앉아서 학생, 작가할 것 없이 돌려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작가들의 경우엔 자기소개도 길었고 문제제기도 많았다. 특히 아프리카 작가들은 자국 내의 언어 문제, 즉 공용어는 영어인데 토착어는 수없이 많고 그래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서 자기네들끼리 치고받고 있었다. 대영제국이 만들어낸 사생아들이 세계 곳곳에서 언어를 통한 자기 아이덴티티를 얻지 못하고 언제나 이방인으로 머물면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우리나라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정신적으로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 P35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 얼굴에 웃음을 띠고서 하이, 헬로하고 돌아다니려니 얼굴에 탈바가지를 쓰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떻게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활짝 미소 지으며 돌아다닐수 있는 건지, 미국 사람들이 놀랍다. 나로서는 그게 더 힘들다. 차라리 무뚝뚝하게 인사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냥 지나치거나 하는 편이 더 쉽다. 아직도 인사하는 습관이 붙질 않아서 인사를 할 때마다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메이플라워 맨 꼭대기 8층에 약 30개국에서 온 약 서른 명의 작가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내 방문을 나서기만 하면 언제나 한두 명의 작가와 마주치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얼굴을 환하게 하고서 하이 하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인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서 상대방이 저만큼 가버린 뒤에야 아 참 내쪽에서는 인사를 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무튼 이 미소 탈바가지가 내게는 무지무지 무겁게 느껴진다. - P37
오늘 아침 부엌 식탁에서 피자를 먹으면서(아침부터 어떻게 피자를 먹을 수 있는 건지) 쇼나가 내 시에 대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첫마디가 네 시는 ‘not enjoyable‘하다, 네 시는 ‘destructive‘하다였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그런 말 많이 들었다고 대답하자, 내가 삐진 줄 알았는지 그러나 내 시가 마음에 든다고 덧붙였다. 어제 번역워크숍에 함께 가며 오며 뉴질랜드의 베릴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마 쇼나가 베릴에게 내 시들을 보여준 모양이었다. 베릴 역시 파괴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내 시가 파괴적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 P38
그녀는 언제나 공식적으로 자기 자신을소개할 때 나는 페미니스트 소설가이다라고 말하고 모든 것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는 버릇을 갖고 있다. 그녀는 내 시도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게 분명하다. 시 창작자로서보다는 시 번역자로서의 즐거움이 더 컸다. 어쨌거나 내가 번역한 시가 그들에게 얼마큼 통할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그들이 나이든 한국 여성 시인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언젠가 김혜순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원로 여성 시인이 무슨 상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추천을 위해서 김혜순과 내 시집을 어렵사리 구해 읽었는데, 김혜순의 시집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부터 이놈 저놈 소리가 나오고 최승자의 시집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부터 웬 배설물(그 시인은 차마 똥이라는 말도 발음하지 못하고 배설물이라는 단어로 대치했다) 타령이 나오는가, 그래서 자기 낯이 뜨거워져서 추천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나누면서 김혜순과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더랬다. - P39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겠다. 향수병을 치유하는 데는 쌀밥보다 라면이 더 즉각적인 효력을 갖고 있다. - P42
클라크의 설명에 의하면 이미 백인이 쓰는 영어는 그 새로운 언어 생성력의 힘이 소진되었고, 지금 새로 만들어지는 언어들은 흑인들이 쓰는 영어가 그 주요 원천이고 그다음이 히스패닉이란다. 지금도 물론 굳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유러피언 백인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클라크의 국적은 캐나다인데 그의 조상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모양이었다. 아무튼 미국 역사의 초창기부터 아메리카의 주인 행세를 했던 유러피언 백인들 자체가 이제는 마이너리티로 전락해가고 있고, 더이상 생동하는 미국문화 창조의 주역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펑키‘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흑인 사회에서나온 말이고, 원래의 뜻은 남녀 간의 정사로 인해 이불에서 나는 냄새라고 했다. 흑인 아이들이 (흑인들은 가난하니까 방이 많은 집에서는 살 수 없었을 테고 적은 숫자의 방에서 몰려 살면서 부모의 정사에서 나오는 그 냄새를 더 많이 맡았을 것이다)이 빌어먹을 펑키 시트 좀 치울 수 없어요? 하고 항의하곤 했던 배경에서 나온 단어라고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한번 각광을 받게 된 단어는 원래의 뜻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혹은 번져가는 문화 속에서 자꾸만 다른 의미로 변화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펑키는 더이상 원래의 냄새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가령 젊은이들이 머리와 몸에 무슨 장식들을 주렁주렁달고 다니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로 변했다는 것이다. - P47
오늘은 메이플라워 맞은편 잔디밭을 가로질러 아이오와 강변으로 갔다. 잔디밭에 달맞이꽃들이 피어 있었다. 강변 벤치에 누워 오리들이 떠 있는 강물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건 로드 맥퀸이라는 싱어송라이터가 쓴 시집 중에 나오는 구절로 대학교 1학년 때 그의 시집을 읽다가 기억해둔 것인데, 이상하게도 몇십 년이 지나면서 그의 다른 시들은 다 잊어버렸으면서도 그 구절만큼은 잊히지 않고 내 기억의 서랍 속에 그대로간직되어 있다. 글쎄 오늘은 좀 외로웠나, 아니면 나의 앞날이 불안해졌나. 그 구절은 이렇다. "Lonely rivers going to the sea givethemselves to many brooks." 이건 내가 슬며시 외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다시 되살려보곤 하는 구절이다. "바다로 가는 외로운 강물은 많은 여울에게 저를 내준다." - P49
어떤 나무들은 바다를, 바다의 소금기를 그리워하여 바다 쪽으로, 그 바다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바다 쪽으로 구부러져 자라난다고 한다. 그런 나무들이 생각났다. - P51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세 사람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게 모두 국민학교 들어가면 배우는 노래였다. 서로 다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대영제국의 사생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육과정에서 똑같은 노래들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 노래들 중에는 영어 가사는 모르지만 멜로디는 아는 노래들도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대영제국의 사생아들 중의 하나는 아니지만 아마도 대영제국의 후손의 사생아의 친구쯤 되는 건가 뭔가. - P57
내가 성적으로 얼마나 폐쇄된 사회에서, 아니 성에 관해 벌어질 수 있는 일은 다 벌어지면서, 아니 성적 행위와 성적 논의가 거의 일방에서만 이루어지는 그러니까 남자들 편에서만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살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 P59
여기 와서 갖게 된 생각 중의 하나는 한 사회가 그것이 소속되어 있는 보다 큰 사회 내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언어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사회적 면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의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으려면 우선 언어로 표현해야 되는데, 그것이 사회학자의 언어 혹은 경제학자의 언어가 아니라 문학가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 때 그 작은 사회 내에 소속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덴티티를 그보다 큰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도 인식시켜줄 수 있다는 얘기다. - P68
영어로 쓰인 한국인의 작품이 나오지 않는 한 한국인은 문화적으로는 미국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민족이 된다. 지금 미국에선 순수 유러피언 백인들의 문화, 문학이 무너져가고 있다. 최근에 노튼출판사에서 나온 최신 작가들의 『New Worlds of Literature』라는 책을 사서, 작품들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거기 실린 작가들의 이력을 대충 훑어보았는데 이 책이야말로 그런 각도에서 만들어진 책이었다. 거기엔 순수 백인들의 작품은 별로 없고 거개가 이민 온 혹은 국적을 바꾸지 않고 영주권만 갖고 미국에서 사는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그런 작가들의 작품은 그 작가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얻는 데그치는 게 아니라 그 민족의, 그 국적의 아이덴티티를 미국 사회에서 획득하게 해준다. 미국은 이제 순수 유러피언 혈통을 가진 백인의 나라가 아니라 ‘nobody‘s land‘이며 동시에 ‘anybody‘s land‘로 변해가고 있고, 그런 사회 안에서 문화적 시민권을 얻자면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가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회 내에 사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 P69
작가가 자기 작품을 써놓고서 이건 내 게 아니다라는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처럼 낭패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내 자식인 줄 알았는데 내 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처럼. 그러나 그렇지 않은, 그 반대인 사람들도 있다. 이게 헬레나와 남서태평양 세 자매 간의 차이일 것이다. 누가 좋고 나쁜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 P79
아메리칸 섹스라는 게 어떤 건지 감은 안 잡히지만 어쨌든 성에 관한 논의 자체는 엄청나게 개방되어 있다. 우리 같은 한국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런 말을 여자든 남자든 꺼낼 수 있고 논의할 수 있다는 건 어쨌거나 좋은 일이다. 논의 자체가 경직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경직되어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있고 억압을 당해야 하는 집단이 있다. - P92
거기 함께 갔던 모든 사람에 대한 언급이 한구절씩 나왔다. 그 모든 언급은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고, 다만 아미르에 관해서는 보이 역시 그의 섹시한 특성에 주목하고 있었고, 마크에 대해서는 "자연의 수도승 마크"라고 표현했고, 승자에 대해서는 "승자는 행복을 두려워한다"라고 쓰여 있었다는 게 기억날 뿐이다. 내가 보기엔 보이가 행복을 두려워하는(두려워한다기보다는 거부하는) 것 같은데, 바로 그 보이가 나에 대해 그런 말을 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도 우거지상을 하고 다니는 건가? 나의 미소 마스크를 다시 한번 윤나게 손질해야겠다. - P99
사실 나도 대부분의 파티에서 솔직히 말해 지겨움 밖에 느끼는게 없고 이 미국인들은 왜 이리 쓸데없는 말들을 열심히 지껄이는 걸까 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그러다가 급기야는 내가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쇼나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걸 느낀다 하더라도 파티에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건 옳지 않다고, 이성으로 판단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감수성 자체가, 그게 옳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자연히 나오지 않을 거였다. 모르겠다. 정확히는 하지만 분명 아시아인과 백인 간에는 센서빌리티와 멘탈리티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여기 와서 한두 번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런걸 들어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는다는 건 때때로 이상한 충격을 준다.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건지.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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