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다시 읽어보기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읽기

제인 에어의 독자라면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 우리는 오랫동안 손필드에 감금되었다가 집에 불을 질러 죽은 버사메이슨을 잊고 있었다.
버사 메이슨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진 리스 덕분이다. 진 리스는 흑인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자손인 크리올계 어머니와 웨일스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16살 때까지 서인도제도 도미니카에서 자랐다. 그는수많은 크리올 상속녀가 영국 남자와 결혼한 후 광녀로 낙인 찍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쓰기 시작한다. 진 리스는 말했다. "나는 그(버사메이슨)에게 하나의 삶을 써주도록 하겠다." - P43

스피박이 스스로를 여행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자신을 지나온 길로 설명한다는 것은, 그의 정체성을 하나로 이야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스피박은 1942년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나, 한곳에 머무르다 다시 다른곳으로, 끊임없이 길 위에서 그다음 여정을 시작해왔다.
스피박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양한 출처를 지닌 인용들로 이루어진 글로 이해했다. 스피박의 인용들은 그가 지나온 장소와 역사를 보여준다. 스피박에게 있어 ‘나’라고 말해지는 것들은 완벽하게 매끈한 하나가 아니라, 누빔 이불처럼 누벼지고 다시 누벼진다. - P47

스피박은 특히 소위 서구의 지식인들이 서발턴들을 말하는 것이 결국 서구의 시각에서 붙잡은 재현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단일하고도 매끈한 타자로 재현된 제3세계의 민중은 서구 주체의 욕망이 만든 허상이다. 서발턴은 결코 투명한 존재로 재현될 수 없다. 서발턴으로 단일하게 호명되는 존재들 사이에는 흐르는 균열이 존재한다. - P55

즉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란 주장은 그저 서발턴의 발언 불가능성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 아닌, 실존하는 거대한 인식적 폭력을 넘어서 그 이질성을 인정하기이며, 서구 중심적 배움을 벗어나 그들과의 관계 수립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 P60

‘제3세계‘로 불리는 단일한 타자를 설정하는 것은 서구 사회가 타자를 재현하고 소비하는 방식의 일환이다. 서구의 이런 방식은 자신과 ‘다른‘ 다양한 차이를 모두 제3세계라는 뭉툭한 범주 안에 몰아넣는다. 이런 범주에서 소비되는 타자는 결국 근대의 대문자인간 개념을 공고히 해주는 타자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근대적 자아를 정의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야만적 타자성을 상정함으로써만 유지되는 서구 근대주체의 환상이다. - P61

이러한 타자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곧 타자에 대한 책임이며, 타자에 대한 반응이다. 여기서 스피박은 책임있는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그는 타자를 서구의 인식 틀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그것의 표현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불가능한 것의 경험으로서의 윤리학‘을 요청한다. 이러한 윤리학은 타자를 서구의 언어와 지식으로 구성하기란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며, 타자를 완전히 알 수 있다는 아집에서 벗어나는 태도를취한다. ‘제1세계‘의 지식인이 ‘제3세계‘ 혹은 타자를 대변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일종의 오만이다. 오만에서벗어나 단일한 타자를 넘어서는 무한히 다른 타자에반응할 수 있을 때,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모색할 수 있는길이 열린다. - P63

버틀러는 사춘기 시절부터 헤겔의 저작을 읽어왔고, 특히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다룬 인정에 관한논의는 버틀러에게 중요한 주제였다. 인정은 욕망을 인식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욕망을 승인하도록 하는활동이다. 즉, 인정은 욕망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욕망을표현하면서 내가 나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 욕망을 타인에게 인정받으면서 욕망의 자리를 사회 안에 놓는일이다. 내가 내 욕망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자기 자신이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욕망이 혼자의 것에 그친다면 결국 그 욕망은 억압당할 뿐이다. 나의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때, 사람은 욕망을 표현할 수 있고 펼칠 수 있다. - P76

그러나 규범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세운다면, 그냥 죽을 수는 없다. 규범과 더불어서 살기 위해서라도, 규범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것이다. 버틀러가 인정 개념을 중요시한 것은 사회와 동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인정에 대한 성찰은인정 규범을 비판하면서, 같아지기만을 요구하는 사회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넓히고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 P78

버틀러의 사유가 지닌 혁명성은 젠더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 즉 수행성(performativity)임을 밝힌 데 있다. - P83

즉 젠더를 수행성으로 이해할 경우에, 누군가를 여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가졌다는 의미보다는 당대가 이상적 여성성이라 여기는 규범적 특질을 지녔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이상적 여성성은 담론에 의해, 문화와 정치의 영향속에서 형성된다. - P85

버틀러는 여성의 범주가 어떻게 생산되는지와 관련해 페미니즘적 주체가 전제한, ‘하나의 여성‘이라는 보편적·통일적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단 하나의 여성을 주창할 경우 여성은 가부장적 남성의 반대 항으로 기능하게 되어, 비판과 저항을 한다 해도 가부장제의 구속장 안에 갇히게 된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같은 권리를 지닌다는 의미의 평등권을 주창하는 것 또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능력과 위상을 지녔음을 증명하는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혹은 이를 거부하고, 여성만의 특질로서 감성, 모성, 수동성을 훌륭한 위상으로 치켜세우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결국 - P86

인간의 기준은 남성인 채로 여성은 명예 남성으로서 인간이 되거나, 그 인간 남성에 저항해 그 인간 남성에 의해 ‘결핍’이라 불리는 ‘여성적’ 특징들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빠지거나 할 수밖에 없다. - P87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이라는 허구성에 머물러선 안 된다. ‘여성’이 공통적인 특징과 관심사를 가진집단이라는 주장은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성 관계의 이원적 관점을 강화하면서 무의식에서부터 성 역할을 규제하고 성별화를 수행한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이 단 하나의 여성을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에 얽매여 보편적·통일적 여성상을 재현할수록, 다양한 차이를 주창하는 여성은 지워진다. - P87

지금도 버틀러는 수업을 하고 있고, 같은 대학 정치학 교수이자 파트너인 웬디브라운과 함께 살고 있다. 오랜 시간 파트너로 지내온 버틀러와 브라운은 버틀러가 전 남편과 낳은 아이 이삭을 함께 키웠고, 성년이 지난 이삭은 현재 음악을 공부하고 있다. 버틀러는 이삭이 어렸을 때, 여자 둘이 부부인 우리 가족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삭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저에게 이상하거나 어려운 게 아니고요, 진짜 어려운 건 집안에 두 명의 학자가 있다는 거예요." - P86

해러웨이와 제이는 함께 살았지만 몇 년 후 별거에들어간다. 제이는 필리핀계와 멕시코계의 혼혈인로버트와 사귀었고 해러웨이는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그의 수업 청강생이었던 러스틴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해러웨이와 제이는 각기 애인이 생긴 뒤에도 계속 함께하기를 결정했다. 제이와 그의 연인 로버트 그리고 해러웨이와 러스틴 네 명은 캘리포니아 주 힐즈버그 외곽 지역의 토지를 함께 구입해 공동생활을시작한다.
제이와 해러웨이는 섹슈얼한 사랑의 관계는 아니었을지라도, 삶의 지향점을 공유하는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그 누구보다 친밀한 애정을 나누고 있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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