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
봄날 지음 / 반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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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제목을 보고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20년 전이다. 회사에 처음 입사 면접을 왔던 날이다. 면접이 끝나고 늦은 점심이었는지, 이른 저녁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회사에 계신 학교 선배분께서 밥을 사주신다고 해서 따라갔다. 회사를 나와서, 지금은 없어진 육교를 건너서, 식당으로 향하던 길의 양쪽으로 이상한 천막이 쳐져 있고 빨간 불빛의 유리문들이 즐비하고 여자들이 있었다. 너무 놀랐다. 소위 사창가라고 하는 곳이었다(이 책에서 유리방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반성매매 활동에서는성매매 집결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지하철역에서 겨우 1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곳은 허름하고 구석진,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어, 남성들이 몰래 몰래 찾아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버젓이 길 한복판에 있다니. 지나가던 아이들도, 학생들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있으리라고 상상을 못했다. 길 하나만 건넜을 뿐인데 딴 세상이 있었다.



저자는 한 인간이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겪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 옆집 언니 삼촌의 성추행,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를 그만두게 한 부모, 항상 돈 타령을 하고 돈 버느라 힘든 어머니의 푸념, 열 여섯 살 미싱공장에서의 관리자들의 상습적 성추행, 미싱공장 셔틀버스기사에게 당한 여러 차례의 성폭행, 다른 공장에서 만난 동생의 삼촌과의 잠깐 행복했던 연애와 임신, 그 남자의 낙태 요구, 이후 남자의 변심. 겨우 열 일곱 살이었던가.


어느 날 공장이 끝나면 기숙사에서 사라지는 친구를 호기심에 따라갔다. 그냥 술 마시는 남자들 옆에서 술 주면 먹고 노래 부르면 박수만 쳤는데, 남자들이, 아저씨들이 돈을 쥐어준다. 그날 하루에 9만원. 공장에서 잔업까지 하며 한달 힘들게 일해서 받는 월급이 겨우 15만원인데, 하루 밤에 9만원이라는 돈이 손에 쥐어진다. 그 날 집에 가서 엄마에게 돈을 주니 엄마가 함박 웃음을 짓는다. 업주는 친절하고 다정하게, 언제든 놀러오라고, 와서 편하게 밥 먹고 쉬다 가라고, 언니처럼 편하게 생각하라고, 그냥 술만 따라주면 되고, 2차도 없고, 돈 많이 벌어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그 이후 이 레퍼토리는 모든 업주에게서 듣게 된다. 그들은 그런 말로 순진한 여성들을 꼬드기고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자기에게 충성하게 한다.


그날 이후 아픈 친구를 대신해 한번 아르바이트를 가게 되고, 또 하루 밤에 돈을 많이 벌고, 엄마에게 갖다 주고,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저자는 엄마와 동생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닥칠지 알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진한 겨우 열 여덝 살.


가라오케와 단란주점, 유리방, 보도방, 티켓다방까지 이름은 다르지만 여성의 몸을 돈으로 쉽게 사는 모든 곳을 옮겨 다니고, 경상도와 전라도와 제주도까지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업주들은 선불금이라는 제도로 여성들을 옮아 매고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다. 지각비, 결근비, 화장품, 옷값, 미용실, 목욕비, 숙소비 라는 온갓 명목으로 선불금을 늘리고, 선불금에 대해 1할이나 2할의 이자를 매기고, 술값을 외상으로 하거나 분란을 일으키고 술값을 내지 않는 남성들의 미수금도 접대한 여성의 선불금으로 올려서 선불금이 점점 늘어난다. 정말 지옥이 따로 없다.


저자는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돈을 아껴 써가며 적금을 들고 선불금을 갚아나가서 마침내 선불금을 다 갚고 적금으로 조그만 방을 얻어서 정말 꿈 같은 시간을,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먹고 자고 하는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결국 돈은 떨어지고 그런데 결국은 그 지긋지긋한 곳을 제 발로 다시 찾아간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 세계 이외의 세계를 모르고,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 몰랐던, 두려웠던 저자는 결국 너무 힘들고 괴롭지만 자기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다시 찾아간 것이다. 도와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엄마가 좀 더 다정했다면 그때라도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다시 보도방이라는 이름으로 단란주점에, 다시 시골의 티켓다방으로, 결국 저자를 탈출시켜 준 것은 티켓다방에서 만난 남자였고, 그 남자는 이혼남으로 어머니와 아이들과 살고 있었고, 저자의 선불금을 갚아주고 그녀를 탈출 시켰지만 그 집 또한 지옥이었다. 그 어머니의 지독한 구박과 그 남자의 반복되는 폭력에 저자는 결국 도망치게 된다.


저자는 집으로 가지만 집에서는 부모님도 동생도 반기지 않는다. 그녀가 왜 집으로 왔는지, 어디가 아픈지 묻지 않고, 며칠 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언제 돈 벌러 갈 거냐는 얘기만너무 척박하게 살고 있어서 저자의 아픔에 일말의 동정도 가지지 못하는 가족. 그녀에게는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다. 어떤 일이 있었는데 묻지 않는다.


집에서 나와 여성인권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쉼터에서 기거하며 육체적, 정신적 아픔을 치료한다. 그리고 반성매매활동 상담가라는 새로운 삶을 산다. 자기의 아픔을 보듬으며 성매매 탈출 여성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년의 그녀의 삶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겠지만 그녀는 발언하고 책을 쓰고 그녀가 일했던 업소들을 찾아가보며 그때의 삶을 보듬으려 한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성을 구매하는 남성들이, 여성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업주들이, 불법을 눈감아주고 허용하고, 성매매 여성만 탓하고 문제의 본질의 보지 않는 국가와 사회가 문제라는 것을.


저자에게 좀 더 다정한 엄마가 있었다면 저자가 그 길로 가지 않았을까. 이 책을 보면 저자의 엄마를 많이 원망했다. 딸에게 너무 무심하고 돈 타령만 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나 걱정하는 물음이 없다. 하지만 그 엄마도 아픈 몸으로 폭력적이고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서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러므로 엄마를 원망하는 것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원망의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임권택 감독의 '노는 계집 창'과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가 계속 생각났다. 그 영화들을 볼 때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저자의 삶은 그게 과장이 아닌 현실임을 말한다. 나쁜 남자는 그 당시 무지하게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폭력적인 소재의 영화인 것 같다. 그 자극적인 포스터 하며, 그 여배우가 그 영화로 인해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가졌을까.



20년 전 그곳은 지금은 모두 재개발이 되어 사라지고, 높고 번쩍거리는 주상복합 건물들이 즐비하다. 여성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장소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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