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이미 오래전에 버린 줄 알았던 몸에 대한 낡은 관점이 아직도 내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 여전히 몸을 내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여기며 대상화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상적 몸, 건강한 몸, 표준의 몸‘을 설정하고, 그에 가깝지 못한 내 몸에 낙담했다. 나는 아픈 몸을 최대한 통제해서 어떻게든 건강한 몸으로 만들려 했다. 마치 장애인에게 재활을 통해서 최대한 비장애인과 가까운 몸을 만들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몸을 소외시켰고, 질병은 나를 소외시켰다. 결국 질병과 몸은 분열할 수밖에 없었다. - P187

과거에 장애인 관련 담론이나 정책은 의료인이나 사회복지정책가들이 주도해왔는데, 이들은 주로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의료적 치료를 통해 장애인의 몸을 비장애인의 몸에 가깝게 만들어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고 설명해왔다. 이를테면 경사로나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보다는 장애가 있는 몸이 계단을 걸을 수 있도록 치료하는 것을 더 중시해왔다. 반면 장애인 인권운동은 장애가 있는 몸을 교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계단이 있는 곳 어디든 경사로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평등한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구조와 문화를 ‘교정’함으로써 장애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 P196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증이 사람의 본질을 어지럽히며 파괴한다고 했다. 이는 고문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고문이란 잠을 못 자게 하거나 몸에 인위적 통증을 가해 정신을 약탈하고 지배하는 행위다. 통증 환자들은 일상에서 잠을 못 자고 종일 통증을 느끼는 ‘고문‘을 겪는다. - P208

이런 죽음을 맞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죽음의 과정에서 의료와의 긴장이 필요하다. ‘자연의 흐름대로 죽어갈 권리‘를 의료에 뺏기지 않으려면 나도 어쩌면 할머니처럼 투쟁이 필요할지 모른다. 삶에서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듯 죽음의 과정에서도 자기결정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죽음에 대한 주도권을 그 죽음의 주인이 아닌 의료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료는 죽음을 무조건 지연시켜야 하는 무언가로 만든 듯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죽음은 삶의 완성일 수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다시 들여와야 하는 이유다. 의료와 죽음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 P243

한국 사회가 OECD 가입국 중 산업재해 사망 통계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것은 알려져 있다시피 ‘안전장치 값보다 목숨값이 더 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한 사업장에서 비슷한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해도 사업주는 안전장치를 설치하기보다 약간의 벌금을 내고 만다. 정부는 재벌과 대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바빠서인지 문제가 된 기업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고사가 아니라, 독성물질이나 과도한 업무로 질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갈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아예 산재로 인정조차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 P267

심지어 기업은 노동자의 산재를 인지하면 은폐하려 드는 경우가 빈번하다. 오죽하면 직장에서 쓰러진 사람을 구급차가 아닌 트럭에 실어 병원으로 이송하는 일이 발생할까. 산재를 은폐하기 위해 생명이 위독한 노동자를 구급차에 탈 수 없게 만들고, 결국 트럭에서 응급치료도 받지 못한 채 골든타임을 놓치고 사망으로 이어지는 현실이 반복된다. 그러니 당장 죽지 않는 질병의 경우는 더더욱 ‘꼼수’를 써서 산재 처리를 하지 않도록 노동자를 종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국가인권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산재가 가장 많은 업종인 조선업계에서 하청 노동자 중 산재보험으로 처리된 노동자는 7.2퍼센트에 불과하다. - P275

하지만 한국은 직장에서 노동자 건강권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다. 1960~1970년대에는 국가가 빨리 배고픔을 면해야 해서, 1980년대엔 경제가 겨우 제대로 성장하고 있어서, 1990년대에는 IMF 금융위기가 와서, 2000년대에는 실업률이 높아져서….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 이유가 ‘발명‘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거의 매년 ‘산재 국가 1위‘ 타이틀을 놓치지 않는 데는 이렇듯 이유가 있다! - P281

쉼 없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추구한 결과, 노동환경은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계속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추구하면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죽도록 일하다가 서서히 죽거나(질병), 한 번에 죽거나(사고, 돌연사), 쫓겨나서 생계가 막막해 죽거나(해고), 혹은 그 셋에 속할 ‘기회’도 없이 실업 속에서 빈곤으로 죽게 될 것이다. - P281

질병을 정의하고, 발생 맥락을 규정하며, 치료 과정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행위다. 질병을 어떻게 규정하고 질병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몸을 만나게 된다. - P292

국민들의 오랜 염원이던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마침내 실현된 것은 1989년이었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강권은 요구에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싸워서 얻어진 인권"이라고 했던 코피 아난Koh Annan 전 유엔사무총장의 말이 떠오른다. 이미 수많은 시민들은 민간보험으로 각자도생하기보다 월 1~2만 원을 더 내고 무상의료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점점 더 드러내고 있다. - P314

음악과 몸의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막춤을 자주 추다 보니, 언젠가부터 통증과 질병에 갇혀 있던 몸이 조금씩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열려 꿈틀거리는 듯했고, 늘 천근만근 무거워서 싫기만 하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공기와 섞이며 유쾌한 기분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춤을 출수록 몸을 더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호흡에 따라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허리를 숙일 때 얼마나 많은 뼈와 근육이 협동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춤을 추다 보니, 내 몸에서 통증이나 질병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매 순간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내가 생존해나간다는 사실도 새롭게 발견했다. 수많은 근육과 조직의 움직임에 경이롭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P339

사람은 모두 건강왕국과 질병왕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무리 좋은 쪽의 여권만 사용하려 해도 결국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우리가 다른 영역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 P341

그런데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이가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왜 돌아다녀, 집에 있어야지." 굳어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게 본인한테도 안전한 일이고 ..." 라며 말끝을 흐린다. 익숙한 말이다. "휠체어 타고 버 - P347

스는 왜 타, 집에 있지. 네가 고생스러우니까 하는 말이야", "애기 데리고 복잡한 식당에 왜 와, 집에 있지. 애가 힘들어하니까하는 말이야", "노인인데 왜 시내까지 나와, 집에 있지. 어르신이 지칠까 봐 하는 말이야."
무지가 만든 폭력적인 말이 지겹다. 하지만 이럴수록 아픈 몸이 사는 세계를 둘러싼 면밀한 설명이 더욱 절실하다. 아울러 다양한 몸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 나와야 하고, ‘이런 몸‘이지만 당신처럼 우리도 여전히 계속되는 생 위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켜 줘야 한다. - P348

내가 고마움을 표할 때마다 친구들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서로의 집이기로 했잖아", "우리가 서로한테 보험 가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가 서로의 엄마인 거 아니었나?" 친구들이 독립해 1인 가구로 삶을 시작하거나, 비혼주의자로 자신을 정체화正體化했을 때 서로에게 좋은 울타리가 되어주자며 나눈 이야기들이다. 처음에는 다소 진지한 태도로 말했지만, 이후에는 집에 문제가 생겨 잘 곳이 필요하거나, 술값을 내거나, 서로에게 잔소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할 때 농담처럼 쓰기도 했었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한 번씩 서로에게 ‘집’, ‘보험’, ‘엄마’ 노릇을 해주고 있다. - P359

몇 년 전부터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 말이 맞다. 비혼은 기존 가족제도를 위협한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들어가길 거부했더니 지금과 같은 불평등한 가족제도의 재생산을 위협하게 되었다. 개인의 가치를 수용하지 못하고, 가부장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이고, 여성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지금의 가족제도가 하루 빨리 균열되길 바란다. 게다가 비혼이면서 1인 가구인 이들은 노동시장의 전형적인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마저 흔들고 있다. - P363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시선과 언어의 차이를 가장 크게 느끼는 곳은 미투 운동일 것이다.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장이 경합하는 모습은 동일한 현실을 서로가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는지 새삼 확인시켜 준다. 동일한 행위를 놓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성폭력은 해석 투쟁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폭력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억압을 해방으로 바꿔가는 사회운동‘은 기본적으로 그렇다고 본다. 억압받고 차별받는 존재들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위한 논리를 ‘개발‘하며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사회가 좀 더 평등해지는 과정이다. - P378

여성운동에서 누가 여성인가는 논쟁적 주제다. 장애인운동에서도 무엇이 장애인가는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주제다. 각각은 고정된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며, 그것을 질문하는 행위 자체가 운동의 좌표를 계속 질문하는 주요 과정이기도 하다. 건강권 운동(보건의료운동)에서도 마찬가지로 건강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싶다. 더 풍부한 논쟁이 다양한 소수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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