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으로 이름을 되뇌어 봅니다. 기억하기 위해.
박자혜, 김옥련, 정칠성, 남자현, 안경신, 김알렉산드라

"당신이 남기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 당신의 괴로움과 분함과 설움과 원한을 담은 육체는 2월 22일 오전 11시, 남의 나라 좁고 깨끗지 못한 화장터에서 작은 성냥 한 가지로 연기와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여! 가신 영혼이나마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 P114

그래도 견뎠어. 주모자를 불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자칫하면 우리 선생님들이 고초를 겪을 테니까. 우리한테 선생님들은 부모보다 더한 분이야. 부모는 어디 사상이나 공부에 대해서 얘기해주나? 다들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분들이 우리를 공부시키고 눈을 뜨게 해줬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참았지. 나중에는일제 경찰들도 우리 해녀들의 강인한 기질과 단결심에 탄복을 하더라고. - P131

해방이 되고 이리 잘사는 나라가 됐지만 가끔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우리가 한 일은 자랑스럽지만 세상이 너무 박하고 빨리 잊는 것 같아서. 하지만 후회는 안 해. 우리가 누구야? 제주 바다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해녀잖아. 자랑스러운 설문대 할망의 후손인 제주 해녀라고! - P133

그이는 우리처럼 머리로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하고는 달랐습니다. 젊어서는 나도 사회주의 공부하고 여성해방, 민족해방을 부르짖었지만 현실과는 괴리된 관념론, 이상론에 가까웠지요. 한데 정칠성 씨는 일제를 왜 타도해야 하는지, 여성해방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가능한지, 몸으로 마음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내가 진작 그걸 깨달았으면 삶이 좀 달라졌을까…. - P144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글도 참 잘 썼어요. 1926년에 삼월회 간부 자격으로 《조선일보》에 <신여성이란 무엇>이라는 논설을 발표했는데 어찌나 명쾌하게 잘 썼는지, 장안의 화제가 됐답니다. 신여성 하면 자유연애부터 떠올릴 땐데, "신여성이란 구제도의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무산여성"이고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려는 정열이 있는 새 여성"이라고 선언했다고. 어떤 작자가 그걸 보고 기생이 이런 글을 쓸 수가 없다고, 누가 대필해준거라고 해서 내가 아주 혼쭐을 내줬어요. - P146

나는 그의 배려로 군정서에 입단하여 다른 여성들과 함께 대원들이 입을 옷을 짓고 음식 준비를 했다. 남의 땅에서 많은 대원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그 자체로 작은 나라 하나를 경영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만큼 고되고 큰일이었다. 부인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는 자랑도 없이 묵묵히 이 힘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감동적인 헌신이로되, 독립투쟁에서조차 남녀유별이 있는 듯해 속상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군자금과 식량을 마련하는 등 독립군 지원 활동을 하면서 망명 생활에 적응해갔다. - P163

"독립 청원이나 협상으로는 결코 오늘의 사태를 해결할 수 없소. 협의로 안 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무엇이겠소? 무력으로 응징하는 것 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느냐 말이오?"
단호한 대답에 김보원은 낯을 붉혔다. 화가 난다기보다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컸다. 일부 사람들처럼 보원도 처음에는 경신의 작고 못생긴 외모만 접하고 얕잡아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게 얼마나 한심하고 못난 생각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의 작은 몸에 깃든 커다란 내면, 이 내면세계를 관통하는 알차고 강인한 투쟁 정신을 알기 때문이었다. - P187

차르의 전제정치에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이나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살길을 잃은 조선 민중이나, 지배계급의 억압 아래 똑같이 고통받고 있음을 알렉산드라는 절감했다. 두 나라 민중이 자유롭고 사람답게 사는 길은 독재와 제국을 무너뜨리는 혁명뿐이었다. - P207

알렉산드라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나는 볼셰비키다. 나는 억압받는 민족과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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