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 평전 - 정통을 걸어간 이단
미조구치 유조 지음, 임태홍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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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더위가 꺾이지 않는 한여름 오후. 미조구치의 유조의 <이탁오 평전>을 읽다. 분명 예전에 ‘읽은’ 기억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새로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논고를 쓰다가, 메이지 조슈 번의 반역의 정신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책이었다. 제목은 <이탁오 평전>이지만, 실제로 이 책의 전반부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분명 과거에 책을 읽었다는 뜻인데, 왜 이렇게 새로운 것일까-. 막부 말기, 쇼인은 자신이 신뢰했던 제자들이 ‘충의(忠義)’가 아닌 ‘공적’을 쌓는 데만 급급한 것에 실망, 연이어 ‘절교’를 선언하면서, 고독 속에서 이탁오의 글들을 읽어나가며,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지인들에게 200년 전 이탁오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부합한다고 쓰며, 그의 글을 읽어볼 것을 권했던 쇼인이 남긴 글들을 다시 읽으며, 쇼인에 의탁하여 이탁오의 사상의 핵심에 근접해 들어가고자 하는 저자의 방법론은 그 성공 여부를 떠나 분명 독특한 것이다. 미조구치 정도의 대가니까 가능한 방법이라고 말하면 너무 쉽게 정리해버리는 것일 테고, 사실, 그래서 결코 친절한 설명방식은 아니고, 또 그 집필 의도를 달성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아쉬운 대목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유학의 전통을 가진, 하지만 그 계승의 방식은 상이한 동아시아의 두 사회-중국과 일본-의 이단적 사상가들이 걸어간 궤적을 비교한다는 문제의식만큼은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정통을 걸어간 이단/정도를 걷는 이단”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집약한 부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게 된 계기는, (맺음말에 잠깐 쓰고 있는 것처럼) 하기(萩)의 쇼인 신사를 방문했을 때의 위화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동아시아 기억-전쟁을 재점화시킨 계기이기도 했던 메이지일본의 근대산업혁명유산(‘사도광산’은 그 연장선상의 전투이지만)의 자산군 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것이 하기의 손카손주쿠(松下村塾), 즉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인 다카스기 신사쿠, 가쓰라 고고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등을 키워낸 요시다 쇼인의 서당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제철소, 조선소, 탄광과는 결이 조금 많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손카손주쿠를 포함한 하기 전체는, 얼마 전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베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해서, 한 번 방문해보면 정말 이곳저곳 돈을 쳐바른 흔적들이 역력하다. 물론 미조구치 선생님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전에 하기를 방문하셨겠지만, 국가주의자들의 비호를 받는 위풍당당한 쇼인신사를 보며, 어떤 위화감을 느끼신 듯하다. 그래서 거기서 조금 더 안쪽의 인기척이 전혀 없는 숲으로 들어가서 찾은 쇼인의 묘지가 자아내는 청초함에 놀라워하며 문득 쇼인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고 쓰고 있는데, 이 책에서 저자가 쇼인에게서 발견해내고 있는 ‘광기’와 ‘우둔함’, 혹은 어떤 ‘회심(回心)’이 속류 국수주의나 국가주의로 회수될 수 없는 쇼인의 정신의 진수(esprit)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쇼인이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 ‘광(狂)’이라는 글자는 <논어>에서 말하는 ‘광견(狂狷)’의 ‘광’이다. ‘견’은 자신을 지키고 고수하는 것이 견고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면 ‘광’은 주위를 거부하고, 주위 사람들과 다투더라도 자신의 길을 고집스레 돌진해나가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사람들이 비정상이라 여기는 것을 자신은 어디까지나 정상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앞서서 행한다는 뜻도 있다.

‘패(悖)’는 사리에 어긋나다는 뜻이며, 도에 어긋나고 도에 위배된다는 뜻이다. 세상이 신봉하는 어떤 규칙이나 습관을 파괴하는 것도 ‘패’라고 한다. ‘우(愚)’는 지혜가 무디고, 우둔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기(氣)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도 ‘우’라고 한다. ‘당(戇)’은 우직(愚直)하다, 고지식하다는 뜻으로 사고의 폭이 몹시 좁고 정직하여 기가 움직일 여유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광패(狂悖)’ ‘우당(愚戇)’ 등의 표현을 써서 자신을 조롱하는 글에서 쇼인은 몰래 이탁오로부터 자신과 같은 부분을 찾아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그가 서하책을 추진할 때는 거기에 몰두하여 전체 국면의 승패를 걸었다. 그때 그는 그러한 책략의 성패를 전체 국면의 성패로 간주했다. 그래서 거기서 죽음의 의미를 찾았던 것이다. 결국 쇼인이 ‘죽음이라는 글자’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이룸으로써 시점 자체도 바뀐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어둠 가운데서 한 점의 죽음을 응시하고 있었던 협소한 시야가 와이드스크린처럼 넓어졌다. 쇼인은 거기서 유구한 미래를 관망했는지도 모른다. 고립된 가운데 사건 하나하나에 희비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강인한 신념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과의 연대 속에서 느긋하게 관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신념의 확대가 이 시기의 그에게서 느껴진다. 회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의 대전환이 ‘죽음이라는 글자’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탁오의 글에 나타난 ‘광(狂)’ ‘패(悖)’ ‘우(愚)’ ‘당(戇)’과 같은 한자의 의미를 풀이해가며, 이탁오의 어리석음과 직관적으로 일체화해가는 쇼인의 감정을 정리해나가는 대목, 그리고 비정상적일 만큼 정직하고 성실하게 추구하며, 또 주위로부터 이단시되고 소외되면서도 그 고독을 감내하면서까지, 거짓을 끊고 순수하게 참다운, 즉 비타협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쇼인의 태도에서 막부 말기 “정통을 걸어간 이단”의 모습을 찾아내는 대목은 과연 탁월하다. 물론 마지막 회심에 대한 기술은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지만, 그건 요시다 쇼인을 악마화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내 몸 속에 깃든 어떤 '생리적 거부감’ 정도로 정리해두자.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논고도 어찌 보면 정한론의 주창자(동아시아 침략의 화신)나 보수 우익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혹은 쇠퇴해가는 지역경제 부흥을 주도하는(지역소멸이 가속화되는 일본 사회에서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관광대사의 이미지에 가려진 ‘반역의 정신’이 갖는 의미를 재사유해보자는 취지의 글이긴 한데..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글읽기와 글쓰기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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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리마스터판)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정세랑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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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다닐 때마다 유심히 보는 것 중 하나가 도보 거리에 구립 도서관이 있는지 여부다..

사정상 <자기만의 방>과 상당 기간 떨어져 지내야 하는 처지로선.. 그래도 어느 정도의 장서를 갖추고 있는 구립 도서관이 근처에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조건인 것이다.. 한여름 늦은 오후의 피난처(shelter)로도 이만한 곳이 없다.. 도서관에 다녀올 때마다 도서관 예찬론을 부르짖는 내게 함께 사는 이는, 사람들의 손때가 너무 묻어 낡은 책들을 빌려올 때면 "도서관 이용료라고 생각하고, 새 책 사서 기부해" 라고 말하곤 한다.. 정말 그래야 할 지도 모르겠다..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도 그런 손때가 가득 묻은, 이미 겉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책이었다.. 

언젠가부터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그닥 찾아 읽지 않게 되면서.. 정세랑 작가의 책도 내겐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솔직히 이 책을 찾아 읽게 된 것 역시, 얼마 전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보고서를 읽다가, 보고서에 인용된 흥미로운 문장 하나에 마음이 갔기 때문이다..


너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 거야.

정말?

몇백 년 전부터 그랬더라. 먼 나라들에서도 언제나 그랬더라.


예전, <미나마타병 사건>에 대한 글을 쓰면서 느꼈던 여러 복잡한 심정들을 꿰뚫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적한 어촌 마을에 찾아온 이름 모를 '괴질'이 전세계 최초의 '공해병'이 되기까지 12년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 그리고 정식 공해병으로 인정된 이후에야 시작된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과 인정투쟁, 그리고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미나마타병 재판에 이르기까지 미나마타병 사건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주체들은 환자들, 그리고 유가족들이었다..  

다행히 대출 가능한 책 한 권이 남아 있어, 늦은 오후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항상 그렇듯 일단 첫 페이지부터 읽는다.. 

초판 2016년, 리마스터판 2021년..



제목 그대로.. 50명.. 아니 정확히는 51명의 사람들의 이야기..

연작들에 이전 인물들이 겹치기 출연을 하는 경우가 많아, 기억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나로서는 전날 읽은 이야기로 페이지를 되돌리게 된다.. 그래서 책을 완독한 어젯밤, 그냥 무심히 다이어리에 51명의 인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봤다..

문화인류학 시간에 배운 계보도와, 친소관계, 혹은 우연한 마주침 등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 사이를 점선으로 표시해보니, 다소 산만해보였던 <정세랑의 세계>가 조금 더 한 눈에 들어왔다. 2010년대에도(아니, 2020년대인 지금도) 여전히 <참사공화국>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무너져 내리는' 땅에서 살아가는(생존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주된 목적이었나보다.. 그러다보니, 작품의 주 공간은 병원과 환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과 지인들의 세계다. 

 

감수성이 예민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찰력도 훌륭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묘한 감정들을 표현해내는 언어적 감각이 좋았다..


물론 희락은 현을 좋아했다. 아꼈다. 하지만 현은 그 호감의 성질이 도로시가 오즈를 떠나며 허수아비에게 사실은 네가 제일 좋아, 말했을 때 정도의 호감인 걸 알고 있었다. 

희미한 선들을 보는 법을 배웠다. 넘기 전에는 희미하다. 넘고 나면 선이 아니다. 벽이 된다.


이런 문장들을 읽다 보면, 아~ 하는 탄식이 절로 난다.. 과연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언어다.. 


어젯밤 51명의 사람들의 관계도를 종이 위에 그리면서 정세랑의 세계는 아직 <자기만의 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작가가 이 작품을 쓰면서 어떤 세계를 구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이건 순전히 오독이고, 어쩌면 독자로서의 바람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작품을 중반 정도까지 읽어나가면서, 어떤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구성을 좀 더 발전시킨다면 우리 시대의 <인간 희극>(human comedy)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어쩌면 21세기 한국사회에 대한 발자크 식의 <풍속 연구>가 가능할지도..


하지만 그런 세계를 구축해내기에 작가의 시선은 지나치게 따뜻하고 또 말랑말랑하다.. 병원과 환자 이야기가 많다 보니, 가끔씩 <슬의생>의 다소 진부한 에피소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또 KBS의 <인간극장> 같은 휴먼 다큐 같은 느낌도 강하게 묻어 나온다.. 보트랭같은 악마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사생활 정경>을 그리고 있는 작가에게 사회학/인류학을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민족지(ethnography)를 쓰는 것이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을 테니. 


그럼에도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19세기 근대 서구 사회에 대한 가장 훌륭한 민족지를 썼던(자신의 꿈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발자크를 떠올리며(역시 맑스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 정세랑이 만들어낸 아직은 조그만 세계가 점점 더 확장되기를 바랐던 때문인 것 같다.. <인간극장>을 넘어서는 <인간희극>으로.. 

그리고 이러한 바람은 우리 사회의 총체성을 파악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큰 언어가, 아쉽게도(난 문학 전공자가 아니니까..), 그리고 여전히, 문학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때 우리 사회에도 <사회과학의 시대>라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물론 '전설!'로만 남아 있다).. 사회과학을 향한 그 뜨거운 열기들은 다 어디로 흩어져 버린 것일까.. 태생이 '쪼개기 신공'(discipline이라는 단어가 갖는 절묘함을 새삼 떠올리며..)의 산물이긴 하지만 사회과학은 한때 자신이 꿈꿨던 <세계의 산문>을 쓰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해버린(망각해버린) 것이 아닐까.. 


정세랑 작가에게 괜한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마지막 변명으로 남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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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사람들 (증보판) - 101예비경찰대대와 유대인 학살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지음, 이진모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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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독서.. 재독서의 영예에 대해 이사야 벌린이 했던 말.. 독자를 매혹하는 능력. 하지만 본질상 언제나 모순을 경험한다는 것! 이번엔 2판(1998년)과 3판 후기(2017년)를 중심으로 읽는다. 아마 이 책은 앞으로도 홀로코스트와 가해자 연구의 고전으로 계속 읽힐 것이다. 4판 후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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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 - 김명인 회성록回省錄
김명인 지음 / 돌베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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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86세대'들의 현란한 정치적 변신들과 내로남불의 행태들 때문에 80년대의 투쟁 자체가 도매급으로 평가 절하되는(물론 지금까지의 신화화에 대한 반동이라는 측면에서는 건강한 것일 수도 있지만).. 또 공정과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공화주의보다는 독재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상한 나라'(갑자기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 떠오르는 것은..)에서 이런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우선 반가웠다. 

투병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지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치열한 성찰의 기록-회성록-을 써준 저자에게도 감사를..


물론 <70년대 말 서울대 언더 출신>으로서의 저자의 삶이 70-80년대를 거쳐간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삶을 대변해줄 수는 없고.. 아마 그래서 저자 역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계속 성찰하는 것이겠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엘리티즘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대 법대 출신 판검사들의 전횡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해 꿋꿋하게 살아온 그들의 삶마저 엘리티시즘으로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예전.. 한국 사회에서 현대 지성사/사상사가 부재한 이유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급격한 집단적 전향(그것이 자발적인 것이든.. 공권력/폭력의 강제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자본주의의 승리와 스펙터클한 소비 사회의 도래로 인한 현실 추수적인 것이든)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개석상(공론장)에서 던졌던 이 질문에 불쾌감을 느낀 많은 80년대 세대들의 공분을 사면서 서둘러 논의를 수습해야 했던 아찔한 기억이 떠오른다.. 자격의 문제였을 지도.. 슈피겔만의 지적처럼, 그들의 '치열했던' 20대 시절을 나는 경험한 적이 없고.. 나의 20대는 레고 파크(?)의 놀이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비판의 여지가 없는 그들의 80년대 경험이 <승리의 신화>로 채색되면서, 그 이후 일어났던 아찔한 변신과 전향들에 스스로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합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인간은 사상적으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전향할 수는 있다.. 또 전향은 결코 변절과 같은 것이 아니다.. 다만 변절과 다른 전향의 특징은.. 전향자 스스로가 자신의 전향의 궤적을 성찰적으로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DR/NDR, 민중적 민족문학을 둘러싼 논쟁들.. 지금 세대들에게 이 담론들은 어쩌면 신화적 주술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지금 읽어보면 그 무모한 논리구조에 가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지만.. 저자의 지적처럼 그 역시 어느 진영에서든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기 어려웠던 그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빈곤한 우리의 지성사/사상사가 만들어지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은 어쩌면 우리 사회 내부에서 나온 거의 유일한 이 사상사적 논의들-흔히 사구체 논쟁으로 요약되는-에 다시 정당한 자리를 만들어주면서 그 의미를 검토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화로 만들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한 때의 '치기'로 폐기처분해버리지도 않으면서.. 그 논의를 역사적인 시공간 속에 자리매김하면서 공과 과를 검증해내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80년대는 정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세대들 간의 야만적인 몸싸움으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 그리고 자신들이 꿈꿨던 이상과 지금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현실의 괴리에 스스로 책임을 지기 위해서도 이러한 작업은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 신화와 폐기처분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의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끔찍한 <반지성주의>가 아니겠는가.. <문송>은 언어/사유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일 것이고.. 그래서 유일하게 -이다/아니다 정도를 판별해주는 언어인 법의 언어가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현실.. 고함과 괴성이 거리를 지배하고, 때로는 극악무도한 폭력이 지배했다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80년대에도 없었던, 법원을 테러하는 상황.. 마치 현재의 사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법/소송인 것처럼 모든 패널을 변호사들로 채우고 있는 미디어들.. 모국어로 이루어지는 사유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내용 검증을 스스로 포기한 채 영어라는 권위에 모든 것을 의존해버리는 반지성주의의 극치인 학계(아카데미).. 물론 그러한 현실을 초래한 가장 일차적 책임이 자신의 소명인 언어와 사유를 방기해 버린 채, 프로젝트와 각종 용역에 매달리고 있는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있음은 분명할 터이고..


4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오랜만에 정말 집중해서 읽었던 책이다.. 끊임없는 성찰들 속에서도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꼰대스러움은 시대의 소음과 맞서고자 하는 한 노 비평가의 고군분투의 발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과연 그의 글을 이후의 세대들은 어떻게 읽을까.. 그리고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70년대 후반 남성 엘리트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이 책은 어떤 <젠더 트러블>을 일으키게 될까.. 세대, 그리고 젠더 등의 이슈도 함께 고려하면서 여러 층의 연구자들과 함께 조촐한 북토크를 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직접 만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만.. 1991년에 대한 단상만은 기록해두기로 한다.. 내게도 익숙하지 않은.. 이제는 머나먼 과거가 되어버린 해.. 하지만 광주라는 도시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나로선, 자욱한 최루탄 연기를 피해 금남로 지하상가로 내려가는 계단 옆 벽면에 붙여 있던 무수한 죽음의 사진들을 잊을 수 없다.. 과연 그 이미지가 91년의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의 것인지 정확히 기억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물론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라는 논설을 무려 조선일보(1)에 실었던 김지하와 자신의 입장은 다르다고 선을 긋지만(그런데.. 왜 그의 글을 2페이지에 걸쳐 인용했을까..), 그 역시 당시의 연이은 죽음의 행렬에는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이전에도 민주화 투쟁의 '전선'에서 수많은 자발적, 비자발적 희생자들이 있었지만 이전까지의 희생은 숭고한 비장함, 또는 비장한 숭고함의 아우라를 남겼고 그것은 투쟁의 열기를 북돋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1991년 봄 두 달 동안의 죽음의 행렬에는 그런 아우라보다는 어떤 허무주의적 감각이 짙게 착색되어 있었다. 돌아가신 분들과 유족에게는 모욕이 될 것을 감수하더라도, 나는 그행렬을 승리를 향한 투쟁 행렬이 아니라 퇴조하는 운동과 함께 생명을 바치는 일종의 순장 행렬로 느꼈다. 아니, 더 이상 희망 없는 세상에 대한 이별 의식이라 해도 좋았다. 퇴조기의 절망감이 만든 타나토스! 그때 나는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 그룹과 일본의 적군파를 떠올렸다. 같은 퇴조기에 독일인들은 적을 죽였고, 일본인들은 서로를 죽였으며, 한국인들은 자기를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91년, 거리에 있었던 이들은 이 문장을 어떤 느낌으로 읽게 될까.. 최근 91년 투쟁에 대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들이 새로이 출간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평가되지 못한 91년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하지만 그 죽음의 행렬에 깃든 비이성적인 충동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도. 그 죽음들에서 어떤 계급성을 감지하는 저자의 이 '씁쓸한' 감각(근거 없는 억측?)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독자인 나로서도 암담하다..


그때 하나뿐인 목숨을 내던진 분들의 행동 하나하나의 존엄성을 폄훼해서가 아니다. 퇴조기의 죽음으로 제대로 기림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분들의 결단과 행동이 지니는 절대적 의미가 희석될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죽음의 행렬에 어쩐지, 서울대, 연고대 등 이른바 당시 학생운동권의 '메이저 캠퍼스' 학생들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마치 지진이 날 것을 미리 알아채고 도망취는 쥐들처럼 운동권의 중심부에 있던 자들이 일찌감치 변혁운동의 퇴조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발을 빼고 있는 동안 변혁운동의 가치를 머리가 아니라 몸에 새긴 이름 없는 투사들이 온몸으로 이 퇴조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설사 이것이 근거 없는 억측이라 해도.


2025년 7월의 어느 여름 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다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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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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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워 보이는 책이지만, 필드워크의 수고로움, 그리고 자신의 필드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런 경쾌한 글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원래 집필 목적인 필드 노트로서는 백점.. 하지만 청킹맨션의 보스는 정말 알고 있는 걸까. 본격적 민족지 version의 청킹맨션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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