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최용우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인간은, 혹은 한 사회는 승리에서보다 패배에서 훨씬 많은 교훈을 얻는다..

일본 사회는, 점점 옅어져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전후>라는 시대인식을 여전히 자신을 돌아보는 중요한 출발점으로 여기는 사회다..

그리고 일본 사회의 우경화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쟁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의 감각은 여전히 어떤 균형점을 만들어내어 왔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이 책의 장점은 패전이 임박한 시기부터 패전 이후 무장해제에 이르기까지,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급장교로서, 그리고 또 1년 반의 시간 동안 미군의 포로로서 일본 육군의 생리를 현장에서 체험했던 저자가 제국 육군이라는 괴물의 실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파악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겨눈 비판의 창 끝은 전후 풍요의 사회가 도래한 현재에도, 여전히 전전의 유산을 상당부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당대 일본 사회를 향해 있다..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지만, <사고정지>, <정리하다>, <사물명령> 등등, 그가 전시기 일본 (육군) 사회의 병리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개념화한 표현은, 체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전문학자의 현학적 서술보다 더욱 생생하고 설득력이 있다.. 특히 당대 군부 파시즘을 지배하는 궁극의 원리로서 지적한 '죽음의 철학'에 대한 기술은,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돌아온 저자가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괴물과 정면으로 맞대면하면서 그 실체를 규명하고자 하는 처절한 시도라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군부 파시즘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통수권, 전쟁비용, 실력자, 조직의 명예'의 기반에 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죽음의 철학'이었다. 제국 육군이란 살아 있으면서도 '물에 빠진 시체이자 유골'과 같은 존재로서 산 자를 지배하는 그런 세계였다. 그것은 언론의 지배가 아닌 죽음이라는 침묵에 의한 지배였기 때문에 '언어가 없는' 것이었다. ...

이렇듯 제국 육군의 어두운 지배력의 배후에는 '죽음의 지배력'이 존재했다. 이는 집단 자살조직과도 유사하며, 일단 조직에 흡수되면 자신을 죽음과 동일시하는 사람의 지배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것과 매우 유사한 상태가 된다. 그것은 1억 옥쇄라는 슬로건에서 엿볼 수 있으며, 주민 7000명을 강제로 동반시켰다고 여겨지는 마닐라 방위대 2만 명의 최후에서도 나타나고, 오키나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 본토 결전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예측 가능했다.

그러나 예측이 분명해질수록 사람들은 이런 죽음의 지배자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 '죽음과의 동거를 통해 산 자를 지배'하는 세상에 자유는 없다. 인권이나 법 따위는 공문에 불과하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역시, 죽음과 동거하며 산 자를 지배하는 일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과의 동거'를 통해 산 자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사상은, 일본에서 제국 육군이 생기기 이전부터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으로 언제든지 일본적인 파시즘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예전, 일본 파시즘의 죽음의 미학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인용했던 부분인데, 번역본으로 다시 보니 새로운 느낌이 난다.. 야마모토는 그의 분석을 누군가 계승해주기를 바랐겠지만, 아직 본격적인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한 듯 하다..

 

식민지, 그리고 3년전쟁을 경험했으면서도 한국 사회에서는 몇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무용담(백선엽 류의)을 제외하고는 전장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기묘한 침묵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식민지와 어마무시한 전쟁을 치렀으면서도 그 체험에서 진정한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어딘지 알 수 없는 심연으로 폭주하는 듯한 한국사회에서 야마모토와 같은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목소리는 여전히 필요해 보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로메 2016-09-1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아주 잘 읽었는데 리뷰 반갑습니다. 오오카 쇼헤이의 <포로기>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르게 좋은 책입니다. 한국도 큰 전쟁을 치렀는데 이런 분석과 자성의 목소리가 전무하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끼는 부분도 공감하구요.

생쥐스뜨 2016-09-18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하게 포인트를 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고보니 오오카와도 비교를 해볼 수 있겠네요.. 오오카와의 차이는 역시 사병과 하급장교의 차이, 그리고 전장인 뉴기니와 필리핀의 차이인 것일까요? 그리고 여기에 조선에서 군생활을 했던 마루야마 마사오 일등병의 체험을 또 겹쳐서 본다면 어떠한 차이들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 차이들과 한계들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에 대한 성찰의 정수겠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전후민주주의>의 풍요로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버마 고산지대의 정치 체계 - 카친족의 사회구조 연구 황소걸음학술총서 1
에드먼드 리치 지음, 강대훈 옮김 / 황소걸음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야 소개되는 정치인류학의 고전적 저작. 현지노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론적 연구에 천착한 결과 오히려 더욱 빛나는 성과가 나온 역설적 사연을 가진 책. 세계의 전체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영국 사회인류학의 야심에 새삼 놀라게된다. 지루할 수 있는 민족지적 사실의 바다를 헤엄쳐야하지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8-08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6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3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6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6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4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마 뒤끝의 일요일 오후.. 책상 작업을 그만두고, 크게(아니 적당히 작게) 라디오를 켜고 의자에 앉아 타부키의 소설,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을 읽었다..

그리고, 정확히 세 시간 후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을 읽는 세 시간 동안 다만 물 한 잔과 술 한 잔을 마셨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레퀴엠>에 이은 세 번째 소설..

역시..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87년 1월 한국 사회를 뜨겁게 했던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특히 이 소설이 주는 먹먹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포르투칼의 한 조그만 도시 <포르투>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 공원 귀퉁이에 내버려진 한 목 잘린 시체를 한 집시 노인이 발견하는데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소설은 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리스본에서 파견된 한 젊은 기자와 그 사건의 범인으로 국가방위대 경관을 지목한 원고측 변호사가 암흑의 핵심으로 다가서는 과정을 작가 특유의 지성적인 목소리로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용기있게 증언에 나선 사람들.. 그리고 진실을 파헤치면서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 피르미누.. 그리고 마치 포르투의 미스 마플과 같은 도나 호자와 <역사에 대한 일종의 뒤늦은 참회>, 즉 <계급의식의 역설적 전복> 행위로서 지역 사회에서 힘없는 자들의 변호를 맡고 있는 몰락 귀족 출신의 변호사 돈 페르난두.. 

처음엔 미궁에 빠져 있던 사건은 점차 국방경비대에 의한 고문치사사건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항상 그러하듯, 소설의 마지막은 힘있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법정의 공방전으로 귀결된다.. 

 

Es ist eigentumlicher Apparat, 즉 이것은 정말 독특한 기계입니다. 그러니까, 오래전 1914년 프라하에서 한 유대인 무명작가가 독일어로 이렇게 썼는데 ... 아주 독특한 기계가 야만적인 법을 존속시키는 ... 죄수 유형지에 있는 기계일지, 혹은 유럽이 겪을 무시무시한 사건에 대한 끔찍한 예언일지? ... 기괴하고, 끔찍한, 근본규범 뒤에 숨어 있는 괴물, 흡혈귀 .... 프라하의 그 작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쓰는 민족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습니다 ... 분명 살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 고문... 감금한 사람들 ... 살해하기 전에 고통을 주고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 인간의 육체를 고문할 필요가 ... 여러분은, 그리고 우리는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역사적인 잔인성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

 

... 동시대의 위대한 작가가 1914년의 그 예언적인 소설을 해석해 인본주의적 결론에 도달했고, 지금 저는 그 결론으로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 사실이라면 그가 주장했듯이, 그 소설은 후회라는 환영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강조할 줄 알았던 겁니다 ... 그런데 그건 어떤 종류의 향수를 말하는 걸까요? 잃어버린 낙원, 인간이 아직 악에 물들지 않았던 때의 순수에 대한 향수일까요? 우리는 그걸 분명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혁명은 항상 형이상학적이라고 주장했던 카뮈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카뮈가 니체를 언급하며 주장했던, 중요한 문제들은 길거리에서 맞닥뜨린다는... 우리 앞에 있는 이 남자, 고문을 행하는 야비한 인간이라고 저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데, 어느 누구도 시신에 대고 담뱃불을 비벼 끌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 티타니우 실바 경위 같은 사람들이 일하는 우리 경찰서는 어떤 법률적 제재도 법률의 보호도 없이 ...

 

물론 판사는 실제적인 고문의 지휘자인 실바 경위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에게는 "근무 수행중 경찰서를 떠난 업무 태만의 책임이 인정되므로 정직 6개월, 그리고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를 언도하며, 시체를 유기한 부하대원들에게도 "공무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시체를 은닉하고 공식 기록을 누락한 범법 행위를 저지른 데 대해 징역 2년을 선고하는" 것으로 재판을 정리한다.. 우리 사회는 항상 고문에 대해 너무나 너그럽고, 개들은 항상 너그러이 살려준다.. 그것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 재판의 결과들이 잘 보여주는 바이다..

 

물론 그러한 재판의 결과는 법제도나 법관의 타락이라기보다는 법이라는 장치가 갖는 근본적인 한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 법과 관련된 몇몇 저서들을 보면서 깨닫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거리와 언론, 또 아카데미를 포함해 거든 모든 전장을 잃어버린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남은 전장이 법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마저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현실적으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사회과학을 하는 인간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타부키가 던져준 숙제는 위에 인용한 돈 페르난두의 최후변론, 기자 피르미누가 녹음하고자 했지만, 녹음상태가 좋지 않아 결국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린 문장들이 무수한 말줄임표로 덕지덕지 남아 있는 저 <띄엄띄엄한?> 글들을 복원하는 것, 그리고 그 문장들을 보존하고 끊임없이 주석을 다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항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철지난 옛날 이야기일까.. 그런데 왜 아직도 이리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흥미로운 문장을 기록해둔다.. 루카치에 대한 타부키적인 멋진 주석이다..

 

별이 참 많군요, 성운이 셀 수도 없이 많아요. 젠장, 성운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우리는 여기서 사람 생식기에 고문할 때 쓰는 전극 같은 것에나 골몰하고 있다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사생문寫生文>(1907, 明治 40)이라는 글에서 근대 소설novel과는 구별되는 일본의 독특한 장르인 사생문작가의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사생문 작가의 시선은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다. 물론 이는 지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하는 대상의 감정에 쉽게 동요되지 않는(“함께 울부짖지 않는”) ‘냉담함’, 하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가엾다는 생각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속으로는 애써 태연히 미소를 품고 있는그런 의미에서의 냉담함이다. “종이를 펼쳐놓고 생각을 가다듬을 때에는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인생관이 자연에서 우러나와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의식하지 않는 중에도 붓은 이미 착착 그쪽을 향해 나아가는그런 경지를 말한다. 이는 태서(泰西)의 조류에 부화뇌동하여 요코하마를 통해 들어온 수입품이 아닌, 하이쿠(俳句)적 세계이자, 동양적인 세계이며, 소세키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물론 사생문은 애초부터 하나의 장르가 될 운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구로부터 압도적인 힘으로 밀려오는 근대라는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東洋-물론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이 시기의 심상지리(心象地理)의 한 특징이라 생각해 그대로 표기한다-의 예민한 지식인들이 취했던 하나의 방어기제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영문학도 아닌 영어를 연구하기 위해 영국에 문부성 장학생으로 파견되었던 소세키는 귀국 후 집필한 <문학론>의 서문에서 두 세계 사이에 낀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즐겨 漢學을 배웠다. 漢學을 배운 시기가 비록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이와 같은 것이라는 막연한 정의를 어렴풋이나마 左國史漢으로부터 얻었다. 가만히 따져보니 영문학도 또한 이와 같은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생애를 바쳐서 배워도 반드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홀로 유행하지 않는 영문학과에 들어간 것은(明治 23, 1890) 완전히 이와 같은 유치하고도 단순한 이유에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시간은 지나 이미 문학사로 벼락출세했을 때는 그 영광스러운 학위를 삼가 받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심한 적막감을 느꼈다.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배우는 데에 시간이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배움에 철저하지 못함을 한탄할 뿐이다. 졸업한 후 내 머릿속에는 왠지 모르게 영문학에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그가 런던 유학시기 앓았다는 신경쇠약은 어쩌면, 바로 그의 전공인 영문학의 세계와 그가 어린 시절 익혔던 좌국사한(左國史漢)의 세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그의 내면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영문학에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한 징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신경쇠약과 광기는 귀국 후에도 치유되지 않고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소세키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는 고양이다>, <양허집>, <메추라기 새장>(<도련님>, <草枕>, <二百十日> 수록)과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오히려 신경쇠약과 광기가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文學論 序). 그런 점에서 <草枕>는 문명개화에 대한 단순한 반발이 아닌, 오늘의 세계를 지탱하는 사상과 얼마나 융합시킬 수 있는가, 일본적인’, 자신이 딛고 있는 토대의 허약함을 자각하면서도, 이 토대에 발을 딛고 서서 근대와 대결하려는 하나의 시도를 보여주는 귀중한 텍스트다.

 

<草枕>의 플롯은 (그 분량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비교적 단순하다. 소설의 전반을 채우는 것은 도회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 온천장을 찾아온 화공(畵工)과 그가 산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하고 담담한 대화들, 그리고 온천장의 주인집 딸인 이혼녀 나미[那美]와의 이상야릇한 조우와 감정의 흔들림이다. 그러나 사생문 작가를 선언한 소세키에게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일반 소설의 독자라는 관점에서 보면 뭔가 부족한 듯하다. 마무리가 없다. 도무지 막연하여 포착해야 할 줄거리가 가지런히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생문 작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줄거리란 무엇인가? 세상에 줄거리란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애초에 줄거리가 없는 것을 그 속에 인위적으로 줄거리를 세워본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화공이 산속을 찾아온 이유는 진절머리 나는세속에서 벗어나 비인정(非人情)의 천지를 소요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화공이 추구하는 비인정의 세계는 초연하게 세속을 벗어나 속념을 완전히 버린 심경의 세계, 해탈의 세계이다. 그것은 <파우스트><햄릿>의 세계가 아닌 왕유나 도연명의 세계이다. 하지만 산속에 들어가서도 그는 마음먹은 대로 시를 짓지 못한다. 아니, 그림 한 장 그리지 못한다. 산속 온천장에서 만난 한 여인은 계속 평온을 찾는 그의 마음의 영역을 침범하고 산란시킨다. 물론 그것은 연정(戀情)이 아니다. 화공의 동요는 자신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강렬한 개성과 자유분방한 성품의 그녀의 얼굴 표정을 그려낼 수 없다는 데서 나온다. 서두의 제사에서 인용했듯이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날수 있는 것이다. 메이지 일본에서 도연명이 추구했던 이상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얼굴에 질투를 덧붙인다면 어떨까. 질투는 불안감이 너무 많다. 증오감은 어떨까. 증오는 너무 과격하다. 분노? 분노는 조화를 깡그리 깨트린다. 원한? 원한도 춘한이라든가 하는, 시적인 것이라면 다르겠지만, 어지간한 원한이라면 너무 저속하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나중에 겨우 이것이구나 하고 생각이 났다. 많은 정서 중에서 아와레’()라는 글자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와레는 신도 모르는 정서이며, 그런데도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정이다. 나미 씨의 표정 속에는 이 아와레의 정념이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이 어딘지 불만스럽다.

      

화공은 그녀의 표정 속에는 이 아와레의 정념이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그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근세 일본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에 따른다면 이 아와레’, 혹은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는 적막하고 쓸쓸하여 마음에 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감동, 무상적 애수(無常的 哀愁)를 말한다. 그것을 일본적인 라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 일본의 여장부나미의 얼굴표정에서 이 아와레의 정념을 찾으려는 시도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와츠지 테츠로[和辻哲郎]가 쓴 것처럼, 영원(永遠)의 근원에 대한 사모의 감정으로서의 아와레는 철저함이나 충동, 혹은 박력이 결여된, 더욱이 감수성은 예민하게 발달했던 일본 귀족문화의 꽃이 피어났던 고대 헤이안시대의 문화적 감성인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화공은 비인정의 세계에서 떠나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근대소설의 세례를 받은 <草枕>라는 작품에 애초부터 내재하는 긴장이기도 했다. 작가는 그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생문 작가임을 표방하지만, 메이지 일본에 최초로 근대소설 개념을 정리한 <小說神髓의 저자 츠보우치 쇼요[坪内逍遥]가 이미 밝혔듯이 소설의 목표는 인정(人情)의 골수(핵심)을 뚫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무대인 기차 정거장, 작가 자신도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문제를 민족애로 변환하기 위해 <無情>에서 이광수가 삽입한 삼랑진 홍수와 같은 장치처럼 보인다. 전장(아마도 시대 배경상 러일전쟁)으로 떠나기 위해 기차에 오르는 사촌동생을 전송하다가, 스쳐지나가는 기차의 차장 안에 비친 또 하나의 얼굴, 즉 돈을 벌기 위해 만주로 떠나는 옛 남편과 얼굴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면서, 화공은 바로 자신이 애써 구했던 바로 그 아와레를 확인한다는 설정이다. “그거야! 그거야!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 추구했던 그림의 완성이 과연 화공에게, 혹은 나미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는 적어도 이 소설의 결말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근대문명의 상징인 기차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에서 드러나듯, 근대 문명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개성을 발전시킨 후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이 개성을 짓밟아버린다.” 철도의 등장과 함께 유사 이래 늘 있어 왔던 물질도, 공간도, 시간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레리P. Valéry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며 자신이 느꼈던 무시무시한 전율을 토로하는 하이네H. Heine의 단상(斷想)은 단순히 예민한 시인으로서의 감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도는 더 이상 마차와 길처럼 전경이라는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공간을 관통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공간과 시간을 소멸시켜버리는 이 압도적인 힘이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를 비인정의 세계에 머물면서 그려내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결국 수세적인 자세로는 근대와 대결할 수 없다. 소세키는 근대라는 가공할 세계에 한 걸음 더 다가서기로 결심한다. 문학을 업으로 삼은 소세키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은 자신이 만들어낸 주인공에게 혹독한 수업시대편력시대를 거치게 함으로써, ()를 혹독한 근대세계에서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수업시대와 편력시대의 핵심은 사랑’, 그것도 치명적 사랑’fatal love의 경험이었다. 서구 근대의 낭만주의 운동이 시사하듯, 자유와 사랑은 언어의 이성을 넘어 인간을 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마술의 힘이었다. 하지만 자유는 물론이고 사랑이라는 감정/행위는 결코 서구에서 그대로 수입해서 이식할 수 없는 것이며, 근대 초기 비서구 문학가들의 공통된 고민 역시 바로 거기에 있었다.

 

 

소세키가 전기 삼부작을 쓰게 된  나름의 배경을 떠올리면서 썼던 글.. 예전에 썼던 글의 서문의 일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길가에 돌계단이 있었다. 다이스케는 몽롱한 상태로 거기에 주저앉은 채 이마를 손으로 누르고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감았던 눈을 떠보니 커다란 검은 이 보였다. 위로는 굵은 소나무 가지가 생 울타리 밖으로까지 뻗어 있었다. 다이스케는 절 입구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それから> 중에서-

 

다이스케의 그 후’(それから)는 소세키 자신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1년 뒤에 저술된 <>은 산시로에게서 다이스케에 이르는 여정의 한 종착역이다. 서두에서부터 미리 한 종착역임을 밝히는 이유는, 흔히 그의 삼부작을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필연적, 혹은 운명론(運命論)’적 귀결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시로, 다이스케, 그리고 쇼스케[宗助]로 이어지는 필연은 사후적인해석에 불과하다. 산시로에게도, 그리고 다이스케에게도 그들 앞에 펼쳐진 길은 여러 갈래일 수 있으며, <>은 그 한 갈래의 길인 것이다.

 

<>의 주인공은 이제 40대의 나이에 접어든 중년의 쇼스케이다. 소세키는 잡초가 무성한 깎아지른 절벽 밑에 자리 잡아, “해도 잘 들지 않는셋집에 살고 있는 쇼스케-오요네[] 부부의 일상을 도입부에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모를 과거를 간직한 듯한 그들 부부의 삶은 평화롭고, 단조로우며 그 때문에 권태롭기까지 하다.

 

물론 그들은 금슬이 좋은 부부이다.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6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반나절 이상 어색한 기분으로 지내본 적이 없었다. 말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적은 더욱 없었다. 두 사람은 포목점에서 옷감을 사오고, 쌀집에서 쌀을 사다가 밥을 지어 먹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사회는 생활의 필수품을 공급해주는 곳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 부부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서로 부둥켜안고 몸을 녹이듯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을뿐이다. 그러나 결코 그들은 처음부터 사회에 흥미를 잃었던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설의 쇼스케는 부유하고 붙임성 좋은 사내였다. 오히려 그들의 소슬한삶의 풍경은 사회가 두 사람만을 고립시켜 놓고 그들로부터 차갑게 등을 돌린 결과였던 것이다.

 

‘6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세키는 쇼스케와 오요네, 그리고 쇼스케의 친구 야스이[安井]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추억편(追憶篇)’으로 정리하고 있다. 추억은 판본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それから>의 과거형처럼 읽혀진다. 도쿄의 재산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학창시절을 보내던 쇼스케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야스이의 여자인 오요네와 사랑에 빠져, 창백한 이마에 불륜(不倫)의 낙인을 찍히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살아가는 이야기. 하지만 이 과거에 대한 소세키의 묘사는, <それから>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미치요를 놓고, 사회의 관습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自然에 따를 것인가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다이스케의 고뇌, 그리고 최후의 권위는 자기에게 있음을주장하는 그의 회심은 적어도 여기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둘의 관계는 아무런 준비도 안 된 두 사람에게 돌연 휘몰아친 강풍때문에 쓰러져버린 것으로 정리된다. 말하자면 다이스케의 고뇌나 회심의 계기가 적어도 <>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잔혹한 운명이 변덕을 부려 불시에 덮침으로써그들은 장난치듯 함정 속에 빠져 버렸을뿐이다.

 

<それから>에서 <>으로의 굴절을 가져온 소세키 내면의 변화를 추측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추적하는 행로는 본고의 목적이 아니다. 단지 여기서는 <それから>에서 나타났던 어렴풋한불안이 <>에서는 훨씬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근대 일본사회에서 확고한 개인주의적 자아가 살아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소세키의 불안이 극단적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불안은 후반부에 접어들어, 주인공 쇼스케가 이웃집 남자로부터 과거 오요네의 남자이기도 했던 친구 야스이가 현재 만주(滿洲)에 있으며 조만간 도쿄에 들를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이후, 한층 심화된다.

 

극도의 신경쇄약에 빠진 쇼스케가 찾아간 곳은 공교롭게도 전작 <それから>의 결말부에서, 병석에 누운 미치요를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방황하던 다이스케가 맞닥뜨렸던 검은 문(), 즉 산문(山門)이다. 큰스님은 쇼스케에게 父母未生以前, 本來面目은 무엇인가라는 화두(話頭)를 던진다. 그러나 산문행은 일종의 도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의 불안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 주어진 10일이 지났지만, 그는 불안을 치유해줄 깨달음은 얻지 못한다. 다만 떠나기 전 자신의 처지를 반추하는 대목은 쇼스케가 자신의 곤경을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점에서 흥미롭다.

      

나는 나의 문을 열려고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뒤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없다. 네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문의 빗장을 열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리하여 그 수단과 방법을 분명 머릿속에 준비했다. 그러나 빗장을 실제로 열 수 있는 힘은 전혀 양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자기가 서 있는 장소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능하고 무력하게, 닫힌 문 앞에 남겨져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문 밖에서 서성이는 운명으로 태어난 듯했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통과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가는 건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는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문은 카프카F. Kafka의 단편소설 앞에서의 무대인 법()이라는 문을 연상시킨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문 앞에 서 있다. 그들은 문 앞에 내버려진’(abandonner) 존재들이다. 그들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어떻게 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둘 다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카프카의 주인공 시골 남자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 문지기와 갖은 교섭을 다해보지만, 결국 세월이 흘러 임종이 닥칠 때까지도 문 앞에 머물러 있다. 쇼스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가 드러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시골 남자는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의 문은 그가 처음 왔을 때는 열려 있는 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임종이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자, 문지기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겠다고말한다. 왜 문지기는 문을 닫겠다고 말한 것일까. 이제 죽어가는 그에게 문이 열려 있든 닫혀 있든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여기서 아감벤G. Agamben은 열려 있다는 것이 법의 침해할 수 없는 권능이자 법 특유의 힘이라면, 시골 사람의 모든 행동은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해 결국 문을 닫도록 만들려는 인내심 가득한 고도의 전략이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흥미로운 주석을 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골 사람은 잠재적인 예외 상태를 현실화시키고 문지기에게 법의 문을 닫도록 강제하는 메시아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아감벤의 이런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그가 죽어가기 직전이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 생()을 문을 통과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걸었기(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소세키의 주인공 쇼스케에게서는 그런 메시아주의의 희망을 찾아낼 수 없다. 과연 그 빗장은 실제로 걸려 있는 것인지는 고사하고, 그는 심지어 문지기와의 교섭조차 시도하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곤경에서 구해주는 것은 계절의 변화라는 섭리였다. 혹독한 겨울이 가고 다시 찾아온 봄은 야스이의 만주행을 알리는 하나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쇼스케-오요네 부부의 삶도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구원에 불과하다. 거실 문 유리창으로 비쳐드는 화창한 햇살을 바라보며 정말 고맙고 기뻐요, 이제 봄이 돼서라고 말하며, 양미간을 활짝 펴는 오요네에게, 고개를 숙인 채 손톱 깎는 가위만 움직이면서, “, 하지만 다시 또 겨울이 올 거야.”라고 내뱉는 쇼스케의 대사는 그 일시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한 비평가는 <それから>에서 <>으로의 굴절을, 소세키 자신이 밝게 빛나는 근대의 반대쪽에 빛이 비치지 않는 그림자의 영역을 인정한 것으로”, 근대적인 개인주의 원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그림자 인생에 拘碍되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는 한 개인의 인생을 반추해보더라도 당연한 진리이다. 더구나 소세키와 같이 메이지 일본이라는 과도기에 살았던 인간에게 그 음영(陰影)은 더욱 뚜렷하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소설에 묘사되는 쇼스케-오요네 부부의 삶이 아무리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해도, 이는 광장의 부재로 인한 밀실로의 침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근대 낭만주의의 기획에서 볼 때는 일종의 후퇴인 것이다.

 

소세키는 결코 섣부른 낙천주의자는 아니다. 1911년 와카야마에서의 유명한 강연인 현대 일본의 개화에서도 그는 현재 일본의 상황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진실이라는 명제를 모르고 있을 때는 알고 싶지만 알고 난 뒤부터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며 극히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단지 그가 내릴 수 있는 진단은 가능하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내발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좋으리라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은 근대 일본의 청년들의 열정이 빠지기 쉬운 검은 구멍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쇼스케의 기구한운명 때문에 감미롭고 강렬한백합 향기 속에 울려 퍼진 다이스케의 회심이 빛을 잃지는 않는다. 이 역시 또 하나의 길인 것이다.

 

 

그 세 번째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