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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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사생문寫生文>(1907, 明治 40)이라는 글에서 근대 소설novel과는 구별되는 일본의 독특한 장르인 사생문작가의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사생문 작가의 시선은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다. 물론 이는 지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하는 대상의 감정에 쉽게 동요되지 않는(“함께 울부짖지 않는”) ‘냉담함’, 하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가엾다는 생각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속으로는 애써 태연히 미소를 품고 있는그런 의미에서의 냉담함이다. “종이를 펼쳐놓고 생각을 가다듬을 때에는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인생관이 자연에서 우러나와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의식하지 않는 중에도 붓은 이미 착착 그쪽을 향해 나아가는그런 경지를 말한다. 이는 태서(泰西)의 조류에 부화뇌동하여 요코하마를 통해 들어온 수입품이 아닌, 하이쿠(俳句)적 세계이자, 동양적인 세계이며, 소세키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물론 사생문은 애초부터 하나의 장르가 될 운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구로부터 압도적인 힘으로 밀려오는 근대라는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東洋-물론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이 시기의 심상지리(心象地理)의 한 특징이라 생각해 그대로 표기한다-의 예민한 지식인들이 취했던 하나의 방어기제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영문학도 아닌 영어를 연구하기 위해 영국에 문부성 장학생으로 파견되었던 소세키는 귀국 후 집필한 <문학론>의 서문에서 두 세계 사이에 낀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즐겨 漢學을 배웠다. 漢學을 배운 시기가 비록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이와 같은 것이라는 막연한 정의를 어렴풋이나마 左國史漢으로부터 얻었다. 가만히 따져보니 영문학도 또한 이와 같은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생애를 바쳐서 배워도 반드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홀로 유행하지 않는 영문학과에 들어간 것은(明治 23, 1890) 완전히 이와 같은 유치하고도 단순한 이유에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시간은 지나 이미 문학사로 벼락출세했을 때는 그 영광스러운 학위를 삼가 받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심한 적막감을 느꼈다.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배우는 데에 시간이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배움에 철저하지 못함을 한탄할 뿐이다. 졸업한 후 내 머릿속에는 왠지 모르게 영문학에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그가 런던 유학시기 앓았다는 신경쇠약은 어쩌면, 바로 그의 전공인 영문학의 세계와 그가 어린 시절 익혔던 좌국사한(左國史漢)의 세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그의 내면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영문학에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한 징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신경쇠약과 광기는 귀국 후에도 치유되지 않고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소세키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는 고양이다>, <양허집>, <메추라기 새장>(<도련님>, <草枕>, <二百十日> 수록)과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오히려 신경쇠약과 광기가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文學論 序). 그런 점에서 <草枕>는 문명개화에 대한 단순한 반발이 아닌, 오늘의 세계를 지탱하는 사상과 얼마나 융합시킬 수 있는가, 일본적인’, 자신이 딛고 있는 토대의 허약함을 자각하면서도, 이 토대에 발을 딛고 서서 근대와 대결하려는 하나의 시도를 보여주는 귀중한 텍스트다.

 

<草枕>의 플롯은 (그 분량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비교적 단순하다. 소설의 전반을 채우는 것은 도회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 온천장을 찾아온 화공(畵工)과 그가 산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하고 담담한 대화들, 그리고 온천장의 주인집 딸인 이혼녀 나미[那美]와의 이상야릇한 조우와 감정의 흔들림이다. 그러나 사생문 작가를 선언한 소세키에게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일반 소설의 독자라는 관점에서 보면 뭔가 부족한 듯하다. 마무리가 없다. 도무지 막연하여 포착해야 할 줄거리가 가지런히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생문 작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줄거리란 무엇인가? 세상에 줄거리란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애초에 줄거리가 없는 것을 그 속에 인위적으로 줄거리를 세워본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화공이 산속을 찾아온 이유는 진절머리 나는세속에서 벗어나 비인정(非人情)의 천지를 소요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화공이 추구하는 비인정의 세계는 초연하게 세속을 벗어나 속념을 완전히 버린 심경의 세계, 해탈의 세계이다. 그것은 <파우스트><햄릿>의 세계가 아닌 왕유나 도연명의 세계이다. 하지만 산속에 들어가서도 그는 마음먹은 대로 시를 짓지 못한다. 아니, 그림 한 장 그리지 못한다. 산속 온천장에서 만난 한 여인은 계속 평온을 찾는 그의 마음의 영역을 침범하고 산란시킨다. 물론 그것은 연정(戀情)이 아니다. 화공의 동요는 자신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강렬한 개성과 자유분방한 성품의 그녀의 얼굴 표정을 그려낼 수 없다는 데서 나온다. 서두의 제사에서 인용했듯이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날수 있는 것이다. 메이지 일본에서 도연명이 추구했던 이상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얼굴에 질투를 덧붙인다면 어떨까. 질투는 불안감이 너무 많다. 증오감은 어떨까. 증오는 너무 과격하다. 분노? 분노는 조화를 깡그리 깨트린다. 원한? 원한도 춘한이라든가 하는, 시적인 것이라면 다르겠지만, 어지간한 원한이라면 너무 저속하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나중에 겨우 이것이구나 하고 생각이 났다. 많은 정서 중에서 아와레’()라는 글자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와레는 신도 모르는 정서이며, 그런데도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정이다. 나미 씨의 표정 속에는 이 아와레의 정념이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이 어딘지 불만스럽다.

      

화공은 그녀의 표정 속에는 이 아와레의 정념이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그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근세 일본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에 따른다면 이 아와레’, 혹은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는 적막하고 쓸쓸하여 마음에 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감동, 무상적 애수(無常的 哀愁)를 말한다. 그것을 일본적인 라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 일본의 여장부나미의 얼굴표정에서 이 아와레의 정념을 찾으려는 시도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와츠지 테츠로[和辻哲郎]가 쓴 것처럼, 영원(永遠)의 근원에 대한 사모의 감정으로서의 아와레는 철저함이나 충동, 혹은 박력이 결여된, 더욱이 감수성은 예민하게 발달했던 일본 귀족문화의 꽃이 피어났던 고대 헤이안시대의 문화적 감성인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화공은 비인정의 세계에서 떠나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근대소설의 세례를 받은 <草枕>라는 작품에 애초부터 내재하는 긴장이기도 했다. 작가는 그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생문 작가임을 표방하지만, 메이지 일본에 최초로 근대소설 개념을 정리한 <小說神髓의 저자 츠보우치 쇼요[坪内逍遥]가 이미 밝혔듯이 소설의 목표는 인정(人情)의 골수(핵심)을 뚫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무대인 기차 정거장, 작가 자신도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문제를 민족애로 변환하기 위해 <無情>에서 이광수가 삽입한 삼랑진 홍수와 같은 장치처럼 보인다. 전장(아마도 시대 배경상 러일전쟁)으로 떠나기 위해 기차에 오르는 사촌동생을 전송하다가, 스쳐지나가는 기차의 차장 안에 비친 또 하나의 얼굴, 즉 돈을 벌기 위해 만주로 떠나는 옛 남편과 얼굴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면서, 화공은 바로 자신이 애써 구했던 바로 그 아와레를 확인한다는 설정이다. “그거야! 그거야!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 추구했던 그림의 완성이 과연 화공에게, 혹은 나미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는 적어도 이 소설의 결말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근대문명의 상징인 기차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에서 드러나듯, 근대 문명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개성을 발전시킨 후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이 개성을 짓밟아버린다.” 철도의 등장과 함께 유사 이래 늘 있어 왔던 물질도, 공간도, 시간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레리P. Valéry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며 자신이 느꼈던 무시무시한 전율을 토로하는 하이네H. Heine의 단상(斷想)은 단순히 예민한 시인으로서의 감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도는 더 이상 마차와 길처럼 전경이라는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공간을 관통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공간과 시간을 소멸시켜버리는 이 압도적인 힘이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를 비인정의 세계에 머물면서 그려내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결국 수세적인 자세로는 근대와 대결할 수 없다. 소세키는 근대라는 가공할 세계에 한 걸음 더 다가서기로 결심한다. 문학을 업으로 삼은 소세키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은 자신이 만들어낸 주인공에게 혹독한 수업시대편력시대를 거치게 함으로써, ()를 혹독한 근대세계에서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수업시대와 편력시대의 핵심은 사랑’, 그것도 치명적 사랑’fatal love의 경험이었다. 서구 근대의 낭만주의 운동이 시사하듯, 자유와 사랑은 언어의 이성을 넘어 인간을 신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마술의 힘이었다. 하지만 자유는 물론이고 사랑이라는 감정/행위는 결코 서구에서 그대로 수입해서 이식할 수 없는 것이며, 근대 초기 비서구 문학가들의 공통된 고민 역시 바로 거기에 있었다.

 

 

소세키가 전기 삼부작을 쓰게 된  나름의 배경을 떠올리면서 썼던 글.. 예전에 썼던 글의 서문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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