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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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돌계단이 있었다. 다이스케는 몽롱한 상태로 거기에 주저앉은 채 이마를 손으로 누르고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감았던 눈을 떠보니 커다란 검은 이 보였다. 위로는 굵은 소나무 가지가 생 울타리 밖으로까지 뻗어 있었다. 다이스케는 절 입구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それから> 중에서-

 

다이스케의 그 후’(それから)는 소세키 자신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1년 뒤에 저술된 <>은 산시로에게서 다이스케에 이르는 여정의 한 종착역이다. 서두에서부터 미리 한 종착역임을 밝히는 이유는, 흔히 그의 삼부작을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필연적, 혹은 운명론(運命論)’적 귀결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시로, 다이스케, 그리고 쇼스케[宗助]로 이어지는 필연은 사후적인해석에 불과하다. 산시로에게도, 그리고 다이스케에게도 그들 앞에 펼쳐진 길은 여러 갈래일 수 있으며, <>은 그 한 갈래의 길인 것이다.

 

<>의 주인공은 이제 40대의 나이에 접어든 중년의 쇼스케이다. 소세키는 잡초가 무성한 깎아지른 절벽 밑에 자리 잡아, “해도 잘 들지 않는셋집에 살고 있는 쇼스케-오요네[] 부부의 일상을 도입부에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모를 과거를 간직한 듯한 그들 부부의 삶은 평화롭고, 단조로우며 그 때문에 권태롭기까지 하다.

 

물론 그들은 금슬이 좋은 부부이다.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6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반나절 이상 어색한 기분으로 지내본 적이 없었다. 말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적은 더욱 없었다. 두 사람은 포목점에서 옷감을 사오고, 쌀집에서 쌀을 사다가 밥을 지어 먹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사회는 생활의 필수품을 공급해주는 곳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 부부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서로 부둥켜안고 몸을 녹이듯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을뿐이다. 그러나 결코 그들은 처음부터 사회에 흥미를 잃었던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설의 쇼스케는 부유하고 붙임성 좋은 사내였다. 오히려 그들의 소슬한삶의 풍경은 사회가 두 사람만을 고립시켜 놓고 그들로부터 차갑게 등을 돌린 결과였던 것이다.

 

‘6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세키는 쇼스케와 오요네, 그리고 쇼스케의 친구 야스이[安井]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추억편(追憶篇)’으로 정리하고 있다. 추억은 판본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それから>의 과거형처럼 읽혀진다. 도쿄의 재산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학창시절을 보내던 쇼스케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야스이의 여자인 오요네와 사랑에 빠져, 창백한 이마에 불륜(不倫)의 낙인을 찍히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살아가는 이야기. 하지만 이 과거에 대한 소세키의 묘사는, <それから>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미치요를 놓고, 사회의 관습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自然에 따를 것인가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다이스케의 고뇌, 그리고 최후의 권위는 자기에게 있음을주장하는 그의 회심은 적어도 여기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둘의 관계는 아무런 준비도 안 된 두 사람에게 돌연 휘몰아친 강풍때문에 쓰러져버린 것으로 정리된다. 말하자면 다이스케의 고뇌나 회심의 계기가 적어도 <>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잔혹한 운명이 변덕을 부려 불시에 덮침으로써그들은 장난치듯 함정 속에 빠져 버렸을뿐이다.

 

<それから>에서 <>으로의 굴절을 가져온 소세키 내면의 변화를 추측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추적하는 행로는 본고의 목적이 아니다. 단지 여기서는 <それから>에서 나타났던 어렴풋한불안이 <>에서는 훨씬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근대 일본사회에서 확고한 개인주의적 자아가 살아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소세키의 불안이 극단적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불안은 후반부에 접어들어, 주인공 쇼스케가 이웃집 남자로부터 과거 오요네의 남자이기도 했던 친구 야스이가 현재 만주(滿洲)에 있으며 조만간 도쿄에 들를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이후, 한층 심화된다.

 

극도의 신경쇄약에 빠진 쇼스케가 찾아간 곳은 공교롭게도 전작 <それから>의 결말부에서, 병석에 누운 미치요를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방황하던 다이스케가 맞닥뜨렸던 검은 문(), 즉 산문(山門)이다. 큰스님은 쇼스케에게 父母未生以前, 本來面目은 무엇인가라는 화두(話頭)를 던진다. 그러나 산문행은 일종의 도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의 불안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 주어진 10일이 지났지만, 그는 불안을 치유해줄 깨달음은 얻지 못한다. 다만 떠나기 전 자신의 처지를 반추하는 대목은 쇼스케가 자신의 곤경을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점에서 흥미롭다.

      

나는 나의 문을 열려고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뒤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없다. 네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문의 빗장을 열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리하여 그 수단과 방법을 분명 머릿속에 준비했다. 그러나 빗장을 실제로 열 수 있는 힘은 전혀 양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자기가 서 있는 장소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능하고 무력하게, 닫힌 문 앞에 남겨져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문 밖에서 서성이는 운명으로 태어난 듯했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통과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가는 건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는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문은 카프카F. Kafka의 단편소설 앞에서의 무대인 법()이라는 문을 연상시킨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문 앞에 서 있다. 그들은 문 앞에 내버려진’(abandonner) 존재들이다. 그들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어떻게 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둘 다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카프카의 주인공 시골 남자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 문지기와 갖은 교섭을 다해보지만, 결국 세월이 흘러 임종이 닥칠 때까지도 문 앞에 머물러 있다. 쇼스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가 드러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시골 남자는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의 문은 그가 처음 왔을 때는 열려 있는 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임종이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자, 문지기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겠다고말한다. 왜 문지기는 문을 닫겠다고 말한 것일까. 이제 죽어가는 그에게 문이 열려 있든 닫혀 있든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여기서 아감벤G. Agamben은 열려 있다는 것이 법의 침해할 수 없는 권능이자 법 특유의 힘이라면, 시골 사람의 모든 행동은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해 결국 문을 닫도록 만들려는 인내심 가득한 고도의 전략이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흥미로운 주석을 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골 사람은 잠재적인 예외 상태를 현실화시키고 문지기에게 법의 문을 닫도록 강제하는 메시아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아감벤의 이런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그가 죽어가기 직전이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 생()을 문을 통과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걸었기(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소세키의 주인공 쇼스케에게서는 그런 메시아주의의 희망을 찾아낼 수 없다. 과연 그 빗장은 실제로 걸려 있는 것인지는 고사하고, 그는 심지어 문지기와의 교섭조차 시도하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곤경에서 구해주는 것은 계절의 변화라는 섭리였다. 혹독한 겨울이 가고 다시 찾아온 봄은 야스이의 만주행을 알리는 하나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쇼스케-오요네 부부의 삶도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구원에 불과하다. 거실 문 유리창으로 비쳐드는 화창한 햇살을 바라보며 정말 고맙고 기뻐요, 이제 봄이 돼서라고 말하며, 양미간을 활짝 펴는 오요네에게, 고개를 숙인 채 손톱 깎는 가위만 움직이면서, “, 하지만 다시 또 겨울이 올 거야.”라고 내뱉는 쇼스케의 대사는 그 일시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한 비평가는 <それから>에서 <>으로의 굴절을, 소세키 자신이 밝게 빛나는 근대의 반대쪽에 빛이 비치지 않는 그림자의 영역을 인정한 것으로”, 근대적인 개인주의 원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그림자 인생에 拘碍되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는 한 개인의 인생을 반추해보더라도 당연한 진리이다. 더구나 소세키와 같이 메이지 일본이라는 과도기에 살았던 인간에게 그 음영(陰影)은 더욱 뚜렷하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소설에 묘사되는 쇼스케-오요네 부부의 삶이 아무리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해도, 이는 광장의 부재로 인한 밀실로의 침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근대 낭만주의의 기획에서 볼 때는 일종의 후퇴인 것이다.

 

소세키는 결코 섣부른 낙천주의자는 아니다. 1911년 와카야마에서의 유명한 강연인 현대 일본의 개화에서도 그는 현재 일본의 상황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진실이라는 명제를 모르고 있을 때는 알고 싶지만 알고 난 뒤부터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며 극히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단지 그가 내릴 수 있는 진단은 가능하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내발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좋으리라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은 근대 일본의 청년들의 열정이 빠지기 쉬운 검은 구멍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쇼스케의 기구한운명 때문에 감미롭고 강렬한백합 향기 속에 울려 퍼진 다이스케의 회심이 빛을 잃지는 않는다. 이 역시 또 하나의 길인 것이다.

 

 

그 세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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