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4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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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뒤끝의 일요일 오후.. 책상 작업을 그만두고, 크게(아니 적당히 작게) 라디오를 켜고 의자에 앉아 타부키의 소설,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을 읽었다..

그리고, 정확히 세 시간 후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을 읽는 세 시간 동안 다만 물 한 잔과 술 한 잔을 마셨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레퀴엠>에 이은 세 번째 소설..

역시..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87년 1월 한국 사회를 뜨겁게 했던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특히 이 소설이 주는 먹먹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포르투칼의 한 조그만 도시 <포르투>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 공원 귀퉁이에 내버려진 한 목 잘린 시체를 한 집시 노인이 발견하는데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소설은 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리스본에서 파견된 한 젊은 기자와 그 사건의 범인으로 국가방위대 경관을 지목한 원고측 변호사가 암흑의 핵심으로 다가서는 과정을 작가 특유의 지성적인 목소리로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용기있게 증언에 나선 사람들.. 그리고 진실을 파헤치면서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 피르미누.. 그리고 마치 포르투의 미스 마플과 같은 도나 호자와 <역사에 대한 일종의 뒤늦은 참회>, 즉 <계급의식의 역설적 전복> 행위로서 지역 사회에서 힘없는 자들의 변호를 맡고 있는 몰락 귀족 출신의 변호사 돈 페르난두.. 

처음엔 미궁에 빠져 있던 사건은 점차 국방경비대에 의한 고문치사사건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항상 그러하듯, 소설의 마지막은 힘있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법정의 공방전으로 귀결된다.. 

 

Es ist eigentumlicher Apparat, 즉 이것은 정말 독특한 기계입니다. 그러니까, 오래전 1914년 프라하에서 한 유대인 무명작가가 독일어로 이렇게 썼는데 ... 아주 독특한 기계가 야만적인 법을 존속시키는 ... 죄수 유형지에 있는 기계일지, 혹은 유럽이 겪을 무시무시한 사건에 대한 끔찍한 예언일지? ... 기괴하고, 끔찍한, 근본규범 뒤에 숨어 있는 괴물, 흡혈귀 .... 프라하의 그 작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쓰는 민족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습니다 ... 분명 살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 고문... 감금한 사람들 ... 살해하기 전에 고통을 주고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 인간의 육체를 고문할 필요가 ... 여러분은, 그리고 우리는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역사적인 잔인성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

 

... 동시대의 위대한 작가가 1914년의 그 예언적인 소설을 해석해 인본주의적 결론에 도달했고, 지금 저는 그 결론으로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 사실이라면 그가 주장했듯이, 그 소설은 후회라는 환영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강조할 줄 알았던 겁니다 ... 그런데 그건 어떤 종류의 향수를 말하는 걸까요? 잃어버린 낙원, 인간이 아직 악에 물들지 않았던 때의 순수에 대한 향수일까요? 우리는 그걸 분명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혁명은 항상 형이상학적이라고 주장했던 카뮈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카뮈가 니체를 언급하며 주장했던, 중요한 문제들은 길거리에서 맞닥뜨린다는... 우리 앞에 있는 이 남자, 고문을 행하는 야비한 인간이라고 저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데, 어느 누구도 시신에 대고 담뱃불을 비벼 끌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 티타니우 실바 경위 같은 사람들이 일하는 우리 경찰서는 어떤 법률적 제재도 법률의 보호도 없이 ...

 

물론 판사는 실제적인 고문의 지휘자인 실바 경위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에게는 "근무 수행중 경찰서를 떠난 업무 태만의 책임이 인정되므로 정직 6개월, 그리고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를 언도하며, 시체를 유기한 부하대원들에게도 "공무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시체를 은닉하고 공식 기록을 누락한 범법 행위를 저지른 데 대해 징역 2년을 선고하는" 것으로 재판을 정리한다.. 우리 사회는 항상 고문에 대해 너무나 너그럽고, 개들은 항상 너그러이 살려준다.. 그것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 재판의 결과들이 잘 보여주는 바이다..

 

물론 그러한 재판의 결과는 법제도나 법관의 타락이라기보다는 법이라는 장치가 갖는 근본적인 한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 법과 관련된 몇몇 저서들을 보면서 깨닫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거리와 언론, 또 아카데미를 포함해 거든 모든 전장을 잃어버린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남은 전장이 법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마저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현실적으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사회과학을 하는 인간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타부키가 던져준 숙제는 위에 인용한 돈 페르난두의 최후변론, 기자 피르미누가 녹음하고자 했지만, 녹음상태가 좋지 않아 결국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린 문장들이 무수한 말줄임표로 덕지덕지 남아 있는 저 <띄엄띄엄한?> 글들을 복원하는 것, 그리고 그 문장들을 보존하고 끊임없이 주석을 다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항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철지난 옛날 이야기일까.. 그런데 왜 아직도 이리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흥미로운 문장을 기록해둔다.. 루카치에 대한 타부키적인 멋진 주석이다..

 

별이 참 많군요, 성운이 셀 수도 없이 많아요. 젠장, 성운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우리는 여기서 사람 생식기에 고문할 때 쓰는 전극 같은 것에나 골몰하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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