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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평점 :
예전에 썼던 리뷰를 옮겨온다..
나는 이 책을 일본어로 처음 읽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을 구할 수 없다는 물리적 상황 때문이었다.. 최근 수업때문에 번역본을 다시 읽었지만, 2년 전과 지금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단, 아감벤의 저작이 남겨놓은 것들(remnants)이 불러일으킨 또 다른 파문들이 있지만, 그 파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적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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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책을 읽을 때 곤혹스러운 부분 중의 하나는, 읽고 싶은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서를 입수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2시간 정도의 시간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을, 6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가.. 물론 자신의 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느끼듯이 '과연 번역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은 원서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류의 인간들을 항상 경멸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서경식의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을 원어로 읽고 있다.. 한국어 번역본을 떠올리며(물론 쉽게 구하기는 힘들지만) 다소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의 책은 왠지 일본어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책들에 비해 그다지 망설임 없이 일본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작가 자신이 이전의 저작에서 종종 언급해온 <모어의 문제>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2세>라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역사적으로 주어진 신분때문에, <조선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모어로서 사용하고, 또 그 언어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작가 자신의 고민은 같은 동화 유대인이자,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프리모 레비와 장 아메리의 차이를 사유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탈리아의 <동화유대인>으로 자라난 프리모 레비에게 있어 단테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상징되는 <이탈리아문화>야말로 이탈리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의 기초를 이루는 기반이었다. 그 때문에 파시스트의 반유대조치라는 매개에 의해 이탈리아 사회로부터 <불순물>로 분류되어 배출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야만적인 파시즘>에 대한 <문명적>인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그 정체성은 단순히 한 민족, 한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인문주의 내지 계몽주의의 문맥에서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었다(129-130)..
이에 비해, 아메리의 경우는 달랐다..
아메리는, 인간은 누구나 고향을 갖는다, 단 <끊임없이 그것을 잃어버리기 위하여>라고 말하면서, 그 말대로 진정한 고향상실자로서 죽었다. 고향이란 특정한 토지나 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어이자, 문학이나 음악, 문화 그 자체이다. 자신의 몸에 배어 있는 모어, 자신의 감성이나 지성을 만들어준 문학, 무엇보다 강하게 자극해 들어오는 회화나 음악, 정신의 근거가 되는 문화 그 자체가 어느 날 돌연, 자신을 배척한다면 어떻게 될까. 수용소에서 직업을 물으면, 고지식하게 <독일문학자>로 대답했던 수인이 나치 친위대에 반죽음을 당하도록 구타당한 에피소드를 아메리는 말하고 있다. 독일 유대인의 경험이란 실로 그러한 것이었다(132)..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기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내가 부나와 같은 생지옥에 떨어진다면, 프리모 레비의 단테에 해당하는 의지의 구석이 내게는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가 떠올리는 그 의지의 구석 역시 결국 억압자와 같은 언어를 쓰는 일본의 문학작품 일람표인 것이다.. 자신은 일본국민화를 거절하지만 일본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의 수인이라는 인식.. 이러한 인식은 자신의 형들이(서승, 서준식) 당시의 서슬퍼런 박정희 체제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어린 나이에 모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를 모어를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결단이라는 식의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늦게나마 조선어를 배웠지만, 여전히 일본어로 사유하고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괴로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의 책을 번역이 아닌 일본어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물론 내 일본어 실력이 여전히 지식과 정보의 획득 이상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언어에 담겨 있는 고민과 격투의 흔적을 번역본 이상으로 잘 읽어내는데는 역시 실패했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 사람의 문체에 깃든 사유와 감정에 교감하며, 그 책의 작가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험을 '아주 가끔씩' 하게 되는데(그나마 지금 떠오르는 이는 김현과 기형도 정도지만), 서경식도 그런 작가 중의 한 명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들을 쥐어짜내는 듯한, 한없이 여리면서도, 예민한 이런 여성적인 글을 쓰는 작가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래서인지 연구회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키가 작으면서 상당한 비만에 얼굴이 시커멓고 험악하게 생긴 아저씨를 눈 앞에 대하면서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 그를 접하고 또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버린 그의 얼굴표정과 그 표정에 서린 분노,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슬픔 비슷한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복잡다단한 감정들과 자신이 전후 일본사회와 싸워나가기 위해 체득해간 이성적 사고가 서로 응결되면서 이런 글쓰기가 나오는구나.. 물론 그의 글은 가끔씩은 질릴 정도로 독자를 힘겹게 하기도 한다..그는 절대로 타협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샌 감은 있지만, 서경식의 책은 프리모 레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에게 공감하며, 또 그를 통해 자신과 한국의 감옥에서 기나긴 옥중투쟁을 해나갔던 형들의 경험을 교차시키며 이해하고자 한 보기 드문 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그 중에서도 레비의 자살에 대해 사유하는 장(<단순명쾌함>)은 많은 울림을 던져준다..
내게 있어 프리모 레비는 <인간>의 척도였다.. 말하자면 그야말로 오디세우스였던 것이다. 그를 보라. 인간은 역유토피아를 살아남아, 귀환해서 증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한층 보편적인 것으로 드높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당시 옥중에 있던 나의 형제에게도, 나아가 내 자신에게도 언젠가 인간의 세계로 생환해서 증언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예전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명쾌>했던 것일까(124-125)..
그에게 프리모 레비는 역유토피아를 살아남은 오디세우스, 그리고 긍정적 삶의 체현자의 한 전범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같은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장 아메리와도 달랐다.. 그는 1986년 출간된 한 저서의 한 장을 자살한 장 아메리에 대해 할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자신의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프리모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단순명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윤리가 그렇게 간단히 정립될 수 없음을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적어도 아감벤 역시 이 문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감벤의 <아우슈비츠>는 프리모 레비에 대한 가장 성실한 주석의 한 작업이었다.. 그의 책에 자극을 받아, 프리모 레비를 읽게 되고, 다시 그 길은 서경식에게까지 이어졌다.. 일단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은 여기까지다.. 아직 그의 책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레비의 자살로부터 다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서경식의 글에서, 또 그의 얼굴에서 나는 종종 죽음의 냄새를 맡곤 했다. 나의 후각이 정확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