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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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나의 병사들>을 읽고 난 후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찬가>를 읽었다.. 여러모로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처음으로 가르쳐준 영화..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지만, 지금도 장면 장면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전투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의 장례를 치러주면서 인터가를 부르는 전사들의 모습에서 해방구의 토지정책을 놓고 마을주민들과 민병대들 사이에서 격론을 벌이던 장면, 그리고 파시스트들과의 거듭되는 전투에 상처뿐인 민병대를 지원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는 정부군에 울분을 터뜨리던 전사들의 얼굴표정까지.. 영화의 메시지가 하도 강렬해서, 한동안 당시만 해도 소지하면 <불법>이라고 하던 트로츠키주의 신문을 팔러 다니던 사람들(그 때만 해도 학관 근처에 어슬렁거리면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에게 괜한 <친근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다보니, 이후의 작품인 <동물농장>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오웰이 왜 그토록 <스탈린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졌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왜 그런 장을 거기 넣었는가?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저널리즘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라는 (자신이 존경하던 비평가의) 비난도 무릅쓰고 당시 전쟁의 정치적 지형도를 트로츠키파의 입장에서 상당히 길게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동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에게 뒤에서 칼을 맞은, 혁명의 배반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자가 삼켜야 했던 <분노>의 표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스마일리의 죽음은 내가 쉽게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마일리는 용감하고 재능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글래스고 대학의 자리를 내팽개쳤다. 또한 내가 목격한 대로, 그는 흠 잡을 데 없는 용기와 흔쾌함으로 전선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저들이 그에게 해준 일이라고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고 방치된 동물처럼 죽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막대한 인명이 희생되는 대전쟁의 와중에서 한 개인의 죽음을 놓고 너무 법석을 떠는 것이 소용없는 일임은 나도 안다. 혼잡한 거리에비행기가 폭탄 하나만 떨구어도 정치적 박해를 여러 번 가하는 경우보다 더 큰 고통이 생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죽음에 화가 나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죽는 것-- 그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는 바이다. 그러나 투옥이 되고, 그것도 날조된 범죄 혐의도 없이 그저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악의로 인해 투옥이 되고, 혼자 내팽겨진 채 죽어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런 따위의 일--스마일리의 겨우는 예외적인 것 같지도 않다--이 어떻게 전쟁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가 처음부터 <트로츠키주의자/무정부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가 속하게 된 부대가 우연히 의용군들로 이루어진 <민병대>였을 뿐이고, 서두에서 밝히듯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인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심지어 그는 민병대 활동을 하면서도 <국제여단>(공산당계)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내전을 경험한서 그가 점차 무정부주의에 동조하게 된 데에는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강령이나 신념에 대한 동조라기보다는, 파시스트라는 공통의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도 당파적 이익을 앞세우는, 그 결과 이데올로기적 분란을 넘어 동지를 피로 숙청하는 <소비에트주의>에 대한 분노가 컸다. 그리고 그는 파시스트 타도를 위해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숙청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몰래 스페인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겪은 환멸에 영혼을 팔지는 않았다.. 오웰이라는 작가의 위대성을 발견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본업인 <근대 일본의 정치문화>를 연구하면서 무수히 지켜보아야 했던 지식인들의 <전향転向>.. 비단 일본뿐일까.. 과연 소위 <386>들의 현 모습에서 전향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을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소비에트에 대한 환멸이 유럽 사회에 몰고 왔을 엄청난 <전향>의 광풍에서 오웰은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다.. 물론 그것은 <당의 위대성>에 대한 맹목적인 고수는 아니다.. 대신 그는 <내부적 비판자>라는 위험하면서도 고독한 길을 걸어갔다..

내 역할에 무력함을 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런 참사--어떻게 끝이 나건 스페인 전쟁은 살육과 신체적 고통은 별도로 하고라도 경악할 만한 참사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꼭 환멸과 냉소만 생기는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오웰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는 것도 없고, 시간도 없다..<랜드 앤 프리덤>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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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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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김영하의 정의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베네딕트의 구별과 반대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듯, 또 비평가가 아무리 애써 변호해도 마지막이 너무 아쉽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내면세계를 재구성하는데 환자의 시각과 의사의 시각이 혼재된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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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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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기억들의 퇴적들로 이루어진 비통할 정도로 아름다운 산문. 독일 출신의 작가가 아우스터리츠라는, 나치로부터 어머니를 잃고 홀로 영국으로 보내진, 아픈 과거를 지닌 한 유대인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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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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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리뷰를 옮겨온다..

나는 이 책을 일본어로 처음 읽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을 구할 수 없다는 물리적 상황 때문이었다.. 최근 수업때문에 번역본을 다시 읽었지만, 2년 전과 지금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단, 아감벤의 저작이 남겨놓은 것들(remnants)이 불러일으킨 또 다른 파문들이 있지만, 그 파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적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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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책을 읽을 때 곤혹스러운 부분 중의 하나는, 읽고 싶은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서를 입수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2시간 정도의 시간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을, 6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가.. 물론 자신의 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느끼듯이 '과연 번역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은 원서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류의 인간들을 항상 경멸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서경식의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을 원어로 읽고 있다.. 한국어 번역본을 떠올리며(물론 쉽게 구하기는 힘들지만)  다소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의 책은 왠지 일본어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책들에 비해 그다지 망설임 없이 일본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작가 자신이 이전의 저작에서 종종 언급해온 <모어의 문제>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2세>라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역사적으로 주어진 신분때문에, <조선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모어로서 사용하고, 또 그 언어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작가 자신의 고민은 같은 동화 유대인이자,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프리모 레비와 장 아메리의 차이를 사유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탈리아의 <동화유대인>으로 자라난 프리모 레비에게 있어 단테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상징되는 <이탈리아문화>야말로 이탈리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의 기초를 이루는 기반이었다. 그 때문에 파시스트의 반유대조치라는 매개에 의해 이탈리아 사회로부터 <불순물>로 분류되어 배출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야만적인 파시즘>에 대한 <문명적>인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그 정체성은 단순히 한 민족, 한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인문주의 내지 계몽주의의 문맥에서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었다(129-130)..

이에 비해, 아메리의 경우는 달랐다..
아메리는, 인간은 누구나 고향을 갖는다, 단 <끊임없이 그것을 잃어버리기 위하여>라고 말하면서, 그 말대로 진정한 고향상실자로서 죽었다. 고향이란 특정한 토지나 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어이자, 문학이나 음악, 문화 그 자체이다. 자신의 몸에 배어 있는 모어, 자신의 감성이나 지성을 만들어준 문학, 무엇보다 강하게 자극해 들어오는 회화나 음악, 정신의 근거가 되는 문화 그 자체가 어느 날 돌연, 자신을 배척한다면 어떻게 될까. 수용소에서 직업을 물으면, 고지식하게 <독일문학자>로 대답했던 수인이 나치 친위대에 반죽음을 당하도록 구타당한 에피소드를 아메리는 말하고 있다. 독일 유대인의 경험이란 실로 그러한 것이었다(132)..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기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내가 부나와 같은 생지옥에 떨어진다면, 프리모 레비의 단테에 해당하는 의지의 구석이 내게는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가 떠올리는 그 의지의 구석 역시 결국 억압자와 같은 언어를 쓰는 일본의 문학작품 일람표인 것이다.. 자신은 일본국민화를 거절하지만 일본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의 수인이라는 인식.. 이러한 인식은 자신의 형들이(서승, 서준식) 당시의 서슬퍼런 박정희 체제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어린 나이에 모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를 모어를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결단이라는 식의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늦게나마 조선어를 배웠지만, 여전히 일본어로 사유하고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괴로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의 책을 번역이 아닌 일본어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물론 내 일본어 실력이 여전히 지식과 정보의 획득 이상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언어에 담겨 있는 고민과 격투의 흔적을 번역본 이상으로 잘 읽어내는데는 역시 실패했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 사람의 문체에 깃든 사유와 감정에 교감하며, 그 책의 작가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험을 '아주 가끔씩' 하게 되는데(그나마 지금 떠오르는 이는 김현과 기형도 정도지만), 서경식도 그런 작가 중의 한 명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들을 쥐어짜내는 듯한, 한없이 여리면서도, 예민한 이런 여성적인 글을 쓰는 작가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래서인지 연구회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키가 작으면서 상당한 비만에 얼굴이 시커멓고 험악하게 생긴 아저씨를 눈 앞에 대하면서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 그를 접하고 또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버린 그의 얼굴표정과 그 표정에 서린 분노,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슬픔 비슷한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복잡다단한 감정들과 자신이 전후 일본사회와 싸워나가기 위해 체득해간 이성적 사고가 서로 응결되면서 이런 글쓰기가 나오는구나.. 물론 그의 글은 가끔씩은 질릴 정도로 독자를 힘겹게 하기도 한다..그는 절대로 타협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샌 감은 있지만, 서경식의 책은 프리모 레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에게 공감하며, 또 그를 통해 자신과 한국의 감옥에서 기나긴 옥중투쟁을 해나갔던 형들의 경험을 교차시키며 이해하고자 한 보기 드문 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그 중에서도 레비의 자살에 대해 사유하는 장(<단순명쾌함>)은 많은 울림을 던져준다..

내게 있어 프리모 레비는 <인간>의 척도였다.. 말하자면 그야말로 오디세우스였던 것이다. 그를 보라. 인간은 역유토피아를 살아남아, 귀환해서 증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한층 보편적인 것으로 드높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당시 옥중에 있던 나의 형제에게도, 나아가 내 자신에게도 언젠가 인간의 세계로 생환해서 증언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예전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명쾌>했던 것일까(124-125)..

그에게 프리모 레비는 역유토피아를 살아남은 오디세우스, 그리고 긍정적 삶의 체현자의 한 전범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같은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장 아메리와도 달랐다.. 그는 1986년 출간된 한 저서의 한 장을 자살한 장 아메리에 대해 할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자신의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프리모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단순명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윤리가 그렇게 간단히 정립될 수 없음을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적어도 아감벤 역시 이 문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감벤의 <아우슈비츠>는 프리모 레비에 대한 가장 성실한 주석의 한 작업이었다.. 그의 책에 자극을 받아, 프리모 레비를 읽게 되고, 다시 그 길은 서경식에게까지 이어졌다.. 일단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은 여기까지다.. 아직 그의 책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레비의 자살로부터 다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서경식의 글에서, 또 그의 얼굴에서 나는 종종 죽음의 냄새를 맡곤 했다. 나의 후각이 정확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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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수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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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레비나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너무 착하다>는 것이었다. 홉스적인 사회에서 레비나스와 같은 타자론이 과연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여전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레비나스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효과>를 만들어내나보다. 우치다의 책은 바로 그 효과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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