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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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푸코라면 아마 이 책을 읽고 냄새와 대공포라는 장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와 겹쳐 읽어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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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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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읽다..
무슨 철지난 <쥐스킨트>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한 때 유행했던, 그것도 다른 소설(<좀머씨 이야기>)이 유명세를 타면서 덩달아 읽혔던 책 아닌가..
그런 줄 알았고, 또 그렇게 대충 읽었다.. 94년 정도의 일이었다.. 이번에 다시 꼼꼼이 읽으면서 만만치 않은 작품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미나>란 여전히 유용한 자기 훈육-장치다.. 그리고 역시 (밥맛!이긴 하지만-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

세미나의 어떤 한 분은 이 소설이 정확히 서유럽 사회에서 만들어진 <성자전>의 한 패러디였고, 그래서 많은 유럽인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그렇겠구나> 생각하면서도 내 눈을 끌었던 대목은, 사실 소설의 첫 부분이었다..
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드나 생-쥐스트, 푸셰나 보나파르트 등의 다른 기이한 천재들의 이름과는 달리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라는 그의 이름은 오늘날 잊혀져 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만, 인간에 대한 혐오, 비도덕성 등 한 마디로 사악함의 정도에 있어 그르누이가 그 악명 높은 인물들에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18세기의 천재들의 삶에 대해서는, 저명한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붓에 의해 대부분 평정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특히 그의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을 읽어보라.. 한 시대의 천재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그의 솜씨는 거의 예술에 가깝다-- 이미 대가에 의해 평정된 그 지대에 쥐스킨트는 왜뛰어들었을까(더구나 이 작품은 그의 처녀작이다).. 역시 방점은 <천재>가 아니라 <냄새>에 찍혀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왜 냄새가 그토록 중요했는가>라는 물음이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18세기 중엽의 대공포(grand peur)에 대해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주석을 달고 있다..
18세기 중엽의 몇 해 사이에 갑자기 공포가 솟아오른다. 의학용어로 표명되지만 근본을 헤아려보면 도덕적 신화에 의해 고조되는 공포가 그것이다. 수용시설에서 퍼져나가 이윽고 도시를 위협하려는 몹시 불가사의한 병을 '누구나' 두려워한다. 감옥 열병이 이야기되기도 하고,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호송 수레, 쇠사슬로 줄줄이 묶여 도시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병의 원인을 흘린다고 하며, 괴혈병의 전염이 상상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병으로 인해 탁해진 공기가 주거 구역을 오염시킬 것이라 추측되기도 한다. 그리고 중세에 퍼졌던 커다란 공포의 이미지가 새롭게 대두되면서, 격렬한 공포의 은유를 통해 제 2의 공황을 촉발시킨다..

18세기 중엽은 다름 아닌 앙시앙 레짐의 절정기, 즉, <혁명 전야>이다.. 누군가는 이 텍스트에서 혁명 전야의 <대공포>를 연상할 지도 모르지만(이미 푸코 이전에, 빛나는 혁명사가 알베르 소불은 <1789년의 대공포>라는 책을 썼다.. 물론 그가 말하는 <대공포>는 푸코의 그것과는 종류가 조금 다르지만..) <대공포>라는 당시의 혼란이 푸코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수용시설에 대한 새로운 <관리>의 출현, 나아가 <비이성>에 대한 <이성>의 무자비한 개입이 이루어지는 한 전환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뭐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있는 내용일텐데, <향기>를 읽고 있노라니, <광기의 역사>의 그 다음 구절이 상당히 흥미롭게 읽혔다는 것이다..
18세기 후반기에 전개될 개혁운동의 첫번째 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불순물과 독기를 걷어내고 그러한 발효현상을 모두 완화시킴으로써 오염을 줄이며 해악과 병이 공기를 탁하게 하고 도시의 대기로 전염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구빈원, 형무소, 모든 수용의 장소는 더 확연하게 고립되고 더 맑은 공기로 둘러싸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18세기 중엽의 광기/비이성과의 전쟁은 동시에 냄새와의 전쟁이기도 했다는 것.. 그리고 <향수>산업의 발전이 도시를 뒤덮고있는 냄새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 공포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고래로부터의 한 비책이었다면, 18세기라는 시기는 일반의 향수로도 그 냄새의 공포를 억누르지 못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의 한계점에 도달한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르누이는 이 묵시록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출현한 <사도>가 되는 것이다..

아.. 계속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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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전쟁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1
조 홀드먼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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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SF소설>이라는 장르의 벽은 높아만 보였다.. 그건 흔히 말하는 <장르 문학>에 대한 편견(그 반대항이 순문학에 대한 고집일 것이다)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단지 접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고, 호기심이 생겼을 때는 이미 얇지만 강력한 마니아층들이 설치해 놓은 <부비트랩>때문에 넘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뭐 그런 <부비트랩>이야 학계도 엄청나게 깔아놓지 않는가.. <맑스>니 <베버>니, <프로이트>니, 아니면 <푸코>나 <아감벤>에 이르기까지, 뭔가 커뮤니케이션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심급을 확인하는 일련의 절차들.. 거기서 자신의 정체성이 <현문정종>인지 <사파>, 아니면 <마두>인지가 결정나고, 또 한 번씩 장풍을 날려봄으로써 그 내공의 심급을 결정하는 그런 세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만나야 한다는 것이 조금 거북했던 것이다..
실제로 나는 SF라는 장르를 동경해왔다.. 왜냐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인류학이 필사적으로 그려내고자 하는(하지만 끊임없이 실패하고, 그래서 재현불가능이니, 성찰이니 하며 논쟁을 벌이는) < 세계>를, SF작가는 너무도 훌륭하게 창조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의 두 세계를 다룬 그 어떤 민족지보다, <빼앗긴 자들>(어슐러 르귄, 이수현 역)이 그려내는 <우라스>와 <우나레스>가 더 생동감 있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SF 영화>가 그토록 대중적이면서도, <SF 소설>이라는 장르는 소수의 마니아층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건 어쩌면 SF소설이 그려내는 세계를 이 시대의 영상언어로는 도저히 재현해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가 소수의 마니아층을 더욱 굳건하게 결집시켰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순수>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SF소설이라는 세계는 내가 사는 세계에서 몇 백만 광년 떨어진 은하계 저 너머의 행성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물론 가끔씩 우연은 찾아오는 법이다.. 마치 갑자기 <스타게이트>가 나타나 <콜랩서 점프>를 이용해 누군가를 몇 백만 광년 떨어진 저 너머로 데리고 가기도 하는 것처럼.. 물론 거기에는 두 가지 주의 사항이 수반된다.. 하나는 그 여행을 견뎌내기 위해 들어가야 하는 <가속 탱크>의 유쾌하지만은 않은/을 경험, 그리고 또 하나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참 변해버렸을 지도 모를 자기-세계와 다시 조우해야 하는 충격.. 하지만 그런 주의사항에도 불구하고 한 번 떠나보고 싶었다.. 더구나 실로 오랜만에 이루어진, 지금은 저명한 SF문학 번역가이자 소설가가 되어 있는 후배와의 접속을 계기로 내 앞에 스타게이트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타협을 거쳐 그리 멀지 않은 행성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밀리터리 마니아>로서 친연성이 있는 <밀리터리 SF>의 세계로.. 로버트 하인라인의 <스타십트루퍼스>(아쉽게도 이 책의 번역판은 절판되었다)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1975)의 세계로..

이 두 소설은 분명히 대구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는 2차대전/한국전 세대인 하인라인과, 어린 시절 하인라인의 소설을 탐독했고 베트남 전쟁에서 불구의 몸이 되어 돌아온 조 홀드먼이라는 두 작가의 세계관의 차이이기도 하다(미국사회에서 두 전쟁의 이후를 이야기하는/그려내는 방식의 차이, 그리고 일본사회에서 전후를 그려내는 방식과의 비교는 이미 이전에 블로그에 올린 바 있다)..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인라인의 소설이 진정 파시즘적 혹은 적어도 군국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군복무>를 마친 시민들만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화정인 것은 분명하다.. 진정한 책임있는 정치적 주체가 되기 위해 군복무는 필수적이고, 또 군 경험은 그들을 이런 주체로 성장시키는 데 분명히 유익한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하인라인은 소설 곳곳에서 여러 인물들(윤리철학 교사나 부대의 상관)의 입을 빌어, 자신의 철학을 설파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투표권자들과 과거의 주권 행사자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충분할 정도의 추측을 했네. 그러니까 이제는 명백한 사실을 말해주지-- 현 체제 하의 모든 투표권자와 공무원들은, 자발적이고 힘든 사회 봉사(물론 군복무)를 통해서, 자신의 개인적 이익보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복지를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람들인 거야.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실제적인 차이점이네. 그는 현명하지 않을 지도 모르고, 시민의 의무를 잘못 수행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평균적으로 봐서 그는 역사상의 어떤 지배 계급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거야..

이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심지어 주인공은 이 상관의 말에 감화를 받아, 인간이 우주로 팽창해갈 '권리'를 통고해주는 것은 '우주'이며, 그 때까지 기동보병은 <우리 종족 편에 서서, 당당하고 절도있게> 그 곳에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결론을 도출해내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홀드먼의 소설이 그리는 미래 세계는 훨씬 암울하다.. 다가올 외계 생명체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세계정부(이미 이 때쯤이면 국민국가들은 모두 <지구연합>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우수한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이들을 <엘리트군대>로 양성시키지만, 그 부대의 일원인 주인공이 보기에 자신들이 거쳐야 할 <훈련>이나 <미션>은 너무도 불합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처음으로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지만, 그들이 자행했던 것은 그다지 뚜렷한 공격적 성향을 보이지 않는(그는 상당히 긴 페이지를 할애해서, 새로운 외계 생명체와의 첫번째 접촉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대등한 화력도 갖추지 않은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심지어 군 상층부는 병사들이 감당해야 할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면암시>까지 해놓은 상태다.. 이는 하인라인의 소설에 등장하는 적, 즉 커뮤니케이션도 불가능하고, 그래서 학살을 하더라도 아무런 정신적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는 <왕거미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지른 일은 학살이었고, 도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일단 놈들의 대공무기를 파괴한 후에는, 우린 실제적으로는 어떠한 위협에도 처해 있지 않았다. 토오란들(외계 생명체)은 개인 대 개인 전투에 관해 아무런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는 그냥 그들을 몰아붙인 다음 도살했을 뿐이다. 인류와 다른 지적 생물 사이의 첫 번째 접촉에서 말이다. 곰인형들을 계산에 넣는다면 아마 두 번째 접촉일지도 모른다. 혹시 충분히 시간을 두고 곰인형들과 의사소통을 시도했더라면? 그러나 그들도 역시 같은 취급을 받았다.
... 가장 끔찍했던 것은 나의 행동이 알고보면 그렇게 비인간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몇 세대 전의 조상님들은 굳이 최면 암시를 받지 않아도 같은 인류에게조차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인류 전체가 역겨웠고, 군대가 역겨웠고, 앞으로 남은 일세기 동안 이런 나 자신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귀환> 이후의 삶이다.. 하인라인의 소설대로라면 제대 이후 그들은 책임있는 주체로서 국가정치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귀환 이후 홀드먼의 주인공들이 만난 세계는, 폭력이 만연하고 계급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 늙어버린 지구였다.. 심지어 70이 넘어버린 고령자들에게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조차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들의 수명을 연장하려는 시도는 사회적생산성의 측면에서 볼 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더구나 저 머나먼 우주에서 빛의 속도를 뛰어넘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신보다 3-40년 늙어버린 가족들과 지인들이었다(정확한 물리적 계산법은 모르겠지만, 상대성 이론의 시간팽창 효과 때문에 객관적으로 몇 세기의 세월이 흘러도 초광속으로 이동하는 우주선 내부의 사람들은 몇 살밖에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해하기 어려우면 그냥 어린 시절 보았던 <혹성탈출> 같은 공상과학영화를 떠올려보라).. 다시 말하면 돌아온 그들이 다시 사회적 유대를 맺고 살아갈 공동체 자체가 사라져버린, 그래서 그들은 <뿌리뽑혀진> 것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결코 SF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대전쟁을 거치고 살아 돌아온 귀환병들이 겪는 <사회적 부적응>의 문제는 우리가 살았던 20세기의 공통적인 테마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고통을 호소한다.. 하지만 이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있었던 <전장>과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무 현실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그가 군복무로 받은 연금은 최저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버거운 것이었다.. 결국 주인공은 돌아온 고향에 환멸을 느끼며 다시 군으로 복귀한다..

거듭되는 전투에서 그는 두 발을 잃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지만 극적으로 살아남는다(하지만 불구가 되었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 이미 그 시대가 되면 의료기술의 발달로 지금과 같은 <흉칙한> 의수/의족에 의지하며 평생을 살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홀드만이 그려내는 전투는 결코 영웅적이지도, 그렇다고 숭고한 것도 아니다.. 그건 주인공에게 있어 하나의 <일과>일뿐이다.. 더구나 이미 세대가 다른, 그리고 언어와 성적 취향도 다른(이미 시대는 이성애에서 동성애로 코드가 바뀌어 있었다) 병사들과 <전우애>는 커녕, 일상적인 감정적 교류도 어려울 정도이다.. 부대에서 유일한 이성애 취향의 늙은 병사로서(생물학적 연령이 아닌), 그는 고독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기지로 쳐들어오는 토오란과의 운명의 마지막 전투를 끝으로 그는 다시 귀환한다..

귀환.. 물론 세계는 변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몇 백년이 흘렀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이미 끝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코 영웅적인 대우도 그렇다고 따뜻한 환대도 아니었다.. 그들을 맞이한 책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여러분이 견뎌야 했던 일에 대해서 유감으로 여기고 있고, 그것이 훌륭한 대의를 위한 것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책에 쓰여 있듯이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전쟁의 성격도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지구를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에서 <허위에 의해 시작된 인류의 우매함의 기념비>로.. 이미 <푸에블로호>, 그리고 최근의 <천안함>(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태를 목도한 우리들로서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스토리일 것이다.. 21세기 초 드디어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구에서 여전히 권력을 갖고 있는, 그래서 국제 연합 우주탐사 및 식민화 그룹을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있는 <노병>들이 새로운 우주사업을 개시하고, 때마침 초기의 우주선 중 다수가 사고를 당해 사라졌다.. 전직 군인들은 이 사실에 의혹을 제기하고 식민 우주선을 무장시켜, 처음으로 다른 외계 생명체의 우주선을 만났을 때 그것을 파괴했다.. 그리고 <전쟁은 시작되었다>라는..  
 
그렇다면 전쟁은 어떻게 끝났을까.. 홀드먼은 꽤 친절하게, 그리고 상당히 리얼하면서도 코믹하게 전쟁의 경과와 끝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모든 잘못을 군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식민화 초기의 피해가 토오란의 책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이 내놓은 소위 증거라는 것들은 실소를 금할 수 없을 만큼 빈약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지적한 몇몇 사람들은 무시당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구의 경제는 전쟁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토오란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돈을 얼마든지 처넣을 수 있는 멋진 구멍이 생겼고, 전쟁은 인류를 분열시키는 대신 통합해주었던 것이다.
(원래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토오란들은 그럭저럭 전쟁을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결코 그 일에 숙달되지는 못했고, 궁극적으로는 패배했을 것이다. ... 토오란들에게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인류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몇 백만 년동안 자연발생적인 클론으로서 살아왔다. 마침내 지구의 순양함들에는 칸의 클론인 맨이 탑승하게 되었고, 그제서야 처음으로 상대방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을 때 제일 먼저 나온 질문은 "왜 너는 그런 일을 시작했지?"였다고 한다.. 물론 그 대답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시작했다고)?" 물론 클론 대 클론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뭐, 상관 없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의 주인공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멋진 결론과 이를 정리해주는 주인공의 클로징 멘트로 이미 그 의미는 충분히 차고 넘치지 않을까.. .

알았네, 친구. 아직도 뭔가 미심쩍긴 했지만, 나는 그 설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주기만 한다면, 설령 위가 아래라고 한들 믿을 용의가 있었다.

충분하지 않은가..거기에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던 연인 <메리게이>와의 재회까지 덧붙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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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파시즘 -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 철학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 김석근 옮김 / 가람기획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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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가끔씩 갸우뚱해지는 때가 있다..

이 책을 어떤 범주에 놓아야 할까.. 저자의 입장은 도대체 어디쯤일까..

혹은 번역자는 어떤 동기로 이 책을 번역했을까.. 그리고 한국의 경우 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출판사는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내놓았을까..

 

왜냐하면 이 책은 엄밀한 의미의 학술적 역사서가 아니면서도, 대중서라고 하기도 애매한..

또 저자의 입장 역시 군국주의에 비판적인 것 같으면서도 꼭 그렇지도 않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다층적인 텍스트라든가, 폴리포닉하다던가 그런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은 2013년 일본이라는 사회가 전쟁을 바라보는 애매한 시각의 한 일면을 반영한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 같다.. 

 

이 책은 엄밀하게 말하면, 총력전이었던 1차대전을 부분적으로 경험한 일본 육군이 왜 그 교훈을 살려내지 못하고, 결국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자멸의 길을 밟게 되었는가를 분석한 책이다.. 예전에는  일본육군은 러일전쟁 이후 근대전다운 근대전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돌격전술을 1940년대까지도 아무 의심없이 구사했다는 방식의 설명이 일반적이었다.. 또 야만적인 육군 vs 합리적인 해군과 같은 도식, 즉 해군사관이 전후 일본 사회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어찌됐건 이 확실하지 않은, 하지만 일반적으로 믿어져 오던 이야기들이 남겨놓은 공백지대에 깃발을 꽂았다는 점에서 그 존재의의를 확보할 수 있다. 저자는 1차대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비록 소수 엘리트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일본 육군의 이론가들의 텍스트들을 검토하면서, 왜 그들이 앞으로의 전쟁은 총력전이며, 따라서 인적 물적 자원을 더 많이 확보한 나라가 결국은 이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정신주의>로 귀일하게 되었는지, 그 내적 논리를 추적하고 있다..

물론 그 추적의 방법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학문적으로 엄밀하지 않고, 자주 인상비평이나, 과도한 해석으로 치닫는 등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역자인 김석근 선생은 흥미롭다고 말했지만, <시라스>와 <우시하쿠>, 또 <마코토>와 <마고코로>에 대한 해석은 과다하다.. 왜냐하면 "근대 일본의 통치원리는 시라스이다"라는 논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엄밀한 반박이 있어왔음에도 저자는 그 전제를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여 논의를 진행시켜버리고 있다.. 또한 파시즘에 대한 정의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파시즘과 전체주의는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정설이다). 마지막으로 일본 연구자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밀교-현교> 논리의 잦은 사용은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의 속내는 이러했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보듯, 과다한 추측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 책의 보다 더 커다란 문제는 (육군에 한정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세운 가진 나라와 가지지 못한 나라라는 도식에 도취되어 1930년 이후 일본이 치른 전쟁을 <가진 나라>(미국, 영국, 소련 등)에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흔히 15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결코 이들 나라와의 전쟁만은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최근의 전쟁표기가 의미하듯, 일본의 전장은 그 어느 곳보다 중국 대륙이었던 것이다.. 과연 중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저자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또 하나 불편한 대목은 만주국에 대한 해석이다.. 저자의 논리대로 본다면 만주국 수립은 갖지 못한 나라를 가진 나라로 만드는 계획의 일환이었고, 이는 당시의 세계 정세 하에서 갖지 못한 나라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였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배, 만주국의 불법성/폭력성에 대한 고려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왜 우리는 당시 진정한 파시즘, 통제경제를 만들어내지 못했는가>라는 물음이 이 책의 제 1전제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논리의 귀착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리 얇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들을 몰입하게 하는 힘을 가진 책임에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 제국 육군의 실세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출판사가 선전하는 것처럼 <군국주의와 천황의 잘못된 만남에서 왜곡된 성장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그릇된 논리의 원류를 뿌리부터 샅샅이 파헤친 문제적 걸작>인지에 대해서는 입장을 아주 많이 유보하고 싶다.. 마치 예전에 창비에서 카토 노리히로의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원제: 패전후론)을 내놓았을 때와 같은 당혹감이다..

 

오히려 이 책은 지극히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아시아-태평양 전쟁 사관의 한 변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이 2012년 <시바 료타로 상>을 수상하고(시바 료타로라니, 의미심장하다) 인문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2012년의 일본 대중들의 욕망의 한 부분을 이 책이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전후 70년을 앞둔(아직까지 일본이 전후라는 말을 시대구분으로 차용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그것은 아직 전후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의 <정치적 무의식>을 탐색하는 데 있어서는 융용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8월 15-16일 광복절에 이 책을 읽었다.. 미완의 파시즘이라니, 파시즘을 완성시켰으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별은 세 개 주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이 2013년 일본 사회의 정치적 무의식을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별 넷, 번역의 가독성에 대해서는 별 다섯, 하지만 텍스트의 엄밀함에 대해서는 별 셋, 그리고 이 텍스트를 한국사회에 내놓으면서 이에 대한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출판사의 무성의에 별 하나.. 대략 통계를 내보니 별 셋이다.. 이것도 조금 후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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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6
최정운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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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복간! 언젠가부터 오월 연구는 이 책의 전과 후로 양분되었다. 문제는 그 뒤를 잇는 이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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