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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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거의 5년 전에 구입했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꺼내어 읽다..

<1984>,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 <버마 시절>,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나는 왜 쓰는가>.. 책장에 꽂힌 오웰의 책 중에 아직 읽지 않은 두 권의 책 중 한 권..

 

내게, 오웰은 무엇보다 <카탈로니아 찬가>의 저자였다.. 유명세로 따진다면야 <1984>나 <동물농장>이 훨씬 유명하겠지만.. 20대 중반에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을 보고나서 한 동안 정신없이 스페인내전에 대한 책들을 골라 읽다가 눈에 띈 <카탈로니아 찬가>는 스페인 내전을 다룬 가장 성실하고 치열한, 그리고 무엇보다 객관적인 내적 기록이었다.. 내전이 한창이던 당시 스페인 사회의 슬라이드 영상을 영국의 노동조합 지부에서 상영하면서 "우리의 투쟁을 당신의 투쟁으로 만들라"면서 영국 노동자들의 동참을 요구하던 붉은 여단 장교, 그리고 참석자들 모두 <노파사란Nopasarán: 너희들(파시스트들)을 결코 통과시키지 않겠다>을 함께 외치며 회의를 마치는 도입부의 강렬한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슬라이드 필름들과 함께 흐르던 노래가 20세기 초 <인터내셔널가>보다 더 유명했던 <바리케이트를 향해A las Barricadas>라는 투쟁가였다는 것, 그리고 그 노래가 일제 강점기 우리 항일무장투쟁대원들이 <최후의 결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곡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그리고나서 한참의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얼마 전 이런저런 일로 규슈의 탄광지대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는 모두 폐광이 되어버린 치쿠호 탄광, 미쓰이 미이케 탄광, 또 크고 작은 탄광들이 있었던 장소들을 걸어다니면서, 이상한 방식으로 기념공간이 되어버린 이 장소들에 다시 과거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역시 이 탄광에서 일했던 광부들의 잊혀진 삶들에 빛을 비출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과거 이들의 삶을 기록했던 논픽션 다큐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역시 120여년이 넘는 탄광 역사를 가진 일본 사회는 그 환경이 가혹했던 만큼이나 당시 광부들의 삶을 추적한 훌륭한 논픽션이나 사진집들이 많이 있었다. 거기에 비한다면, 적어도 노동강도에서는 일본보다 훨씬 고되었을, 한국의 탄광에 대해서는 그런 지적 기록들을 찾아보기 너무 어렵다.. 그 이유는 글쓰는 인간들의 직무유기, 혹은 태만이었을까, 아니면 당대 한국사회에서는 글쓰는 인간들이 해야 할 훨씬 중요한 다른 일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전자일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꺼내 읽게 된 것도 그런 작업의 연장선이었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때는 부두 하역노동자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읽다보니 탄광이야기였다.. 그것도 실제 오웰 자신이 스스로 탄광촌에 들어가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록한 작품.. 가장 오래 된 탄광 개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그리고 가장 강력한 노동계급 문화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 부르주아 지식인계급 출신의 작가가 탄광 노동자들의 마을에 직접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썼던 한 장의 제목 그대로 "노동계급과 정말 가까워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라고 스스로 의심하면서, 일상적으로 그들을 대변하는 척 하는 설익은 좌파 지식인들의 태도를 경계하며, 그는 1936년이라는 비상시국에서 파시즘이라는 공통의 적에 맞서, 이 사회의 여러 세력들이 어떻게 '연합'을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어려운 과제에 착수했던 것이다.. 아마 이 주제는 다른 지면에서 좀 더 길게, 그리고 깊게 고찰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에피소드로 하나만 기록해두자면..<계급과 냄새>라는 주제에 대한 오웰의 탁월한 통찰이다.. 2020년 다시 화제가 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냄새', 즉 지하의 냄새이자 계급의 냄새에 대한 언급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계급문제라는 오래 된 사회과학적 물음에서 계급과 냄새는 이전부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 온 듯하다.. 영화를 보면서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급과 아비투스>를 떠올렸었는데, 직접적으로 계급과 냄새를 연관시키는 통찰은 오웰이 한 수 위인 듯 싶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 계급 차별 문제의 진짜 비밀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요즘에는 차마 발설하진 못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꽤 자유롭게 쓰곤 하던 섬뜩한 말 한 마디로 요약된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살인자나 남색자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입냄새가 지지독한(상습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사람에겐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 아주 어릴 때부터 노동 계급 사람의 신체에는 묘하게 역겨운 데가 있다는 믿음을 습득하게 되는데, 그러고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도 모르게 그런 사람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워진다. 길에서 덩치 큰 건설 인부가 곡괭이를 어깨에 걸치고 땀을 흘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봤다고 하자. 셔츠는 색이 바랬고, 코르덴 바지는 10년 묶은 때로 뻣뻣하다. 기름때 절은 상하 누더기 속에는 벌레가 우글거리고 속옷은 말도 못할 것이며, 맨 마지막에는 씻지 않아 온통 누런 몸뚱이가 베이컨 비슷한 악취를 풍기는 것 같다. 부랑자가 시궁창에서 장화 벗는 꼴을 봤다고 하자. 우욱! 부랑자라고 해서 제 발이 시커먼 걸 딱히 즐기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통찰력때문에 오웰의 글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그런 통찰력은 심지어 섬머셋 모옴이나 혹은 다른 부르주아 작가들의 글에도 종종 엿보이는 것이니까.. 오웰의 태도가 갖는 훌륭함은 바로 그 냄새를.. 정상적인 부르주아라면 질겁을 하고 코를 쥐게 될 그 냄새를.. 부르주아들은 가끔씩 직접 맡아볼 의무가 있다고 지적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문명화된 우리랑 다른 인간들이 아니며, 그들 역시 근대 세계 특유의 산물이라는 것, 그들을 만들어낸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오웰은 한 마디 덧붙인다.. "가서 너무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 게 낫다."라고..

 

그러고보니 봉준호 감독 역시 사회과학 전공이었으니.. 계급과 냄새라는 이 오래된 학문적 통찰에 어느 정도 빚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식장에서 조지 오웰에게도 한번쯤 오마주를 바쳤다면, 그의 발언이 훨씬 빛나는 것이 되었을텐데.. 너무 뜬금없는 먹물의 생각일까..

 

 

이제 남은 한 권의 책은 <버마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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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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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의 작품에 별 넷을 주다니.. 하지만 규슈의 탄광들을 거닐다보니, 탄광은 소세키 역시 들어갈 수 없는 장벽이었음을 거듭 실감한다. 교양소설로서의 가치, 또 몇몇 잊을 수 없는 장면들도 있지만, ‘갱부‘의 삶이 갖는 리얼리티는 소세키에게도 버거운 것이었나보다. 물론 그 역시 고백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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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연행
도노무라 마사루 지음, 김철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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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를 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다소 의아.. 원본이 ‘신서‘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강제연행에 대한 규정,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노무정책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역사의 피해자들에 대해 박유하씨가 이 정도의 공감능력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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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알렉세이 유르착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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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시기를 살았던 저자가 쓴 자가기술민족지.. 이론적인 틀은 그닥 새롭지 않지만, 구미의 소비에트학이 철저히 외면해왔던 후기 사회주의(late socialism) 시기 젊은 세대들의 자화상을 풍부한 민족지적 사례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실로 오랜만에 흥미롭게 본 인류학 민족지.

 

라고.. 100자평을 쓴 다음, 조금 부족하다 싶어 이어 쓴다..

 

저자의 소개를 보더라도, 80년대 소비에트의 마지막 10년을 20대 청년기로 보내고.. 이후 미국으로.. 소비에트의 체제의 붕괴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구미 소비에트학의 참담한 상황에서..

(물론 예언이 학문의 몫은 아니다.. 학문은 항상 사건이 일어난 다음을 뒤따라가는 것일 뿐.. 생각해보면, IMF사태를 예언했던 한국의 사회과학이 있었던가.. 그렇다 하더라도 냉전체제 당시의 주적이었던 소비에트를 이해하기 위하여 천문학적 액수의 자본이 이 학문분과에 투입되었다는 점에서 아마 그들로서도 할 말은 없었을 것 같지만..)

 

알렉세이 유르착과 같은 저자의 입학은 그들로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만하다.. 그리고 유르착은 착실한 모범생처럼, 학위과정을 이수하면서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비밀의 집, 소비에트의 마지막 10년의 사회적 삶의 모순을 르포르의 역설을 비틀어서 멋지게 표현해낸다..

 

<이데올로기적 발화와 이데올로기적 통치 사이의 균열>.. 유토피아적 계몽의 이념에 기초한 근대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은 외부에 자리한 상상적 위치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며, 그러한 상상적 외부의 자리가 의문시되고 파괴될 때 그 정당성은 위기를 겪게 된다..

 

물론 이러한 역설은 프랑스혁명기 자코뱅의 자유의 역설에서 이미 명확히 드러난 바 있지만, 그러한 이상주의적 근대성의 또 다른 계승자인 소비에트 체제 역시 이러한 역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주의적 맥락에서 창조성의 독립과 창조적인 작업에 대한 당의 통제는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한다.. 확실한 외부의 적이 있을 경우, 이러한 모순은 생산적으로 봉합될 수 있다. 프랑스혁명기 외부의 반혁명 세력과 싸우면서 혁명전쟁을 수행해나갈 때도, 또 제 3제국의 침공에 의해 절대적 위기에 직면했던 소비에트 체제에서 이러한 모순들은 쉽게 봉합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된지 30여년이 지나면서 누적된 모순으로 인한 제도적 피로가 사회에 드리워졌을 때, 그것을 걷어낼 수 있는 내적 역량이 이 사회에는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러한 모순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간파하고, 또 봉합해가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종종 저자는 '스보이', '브녜'니 '스툐프'와 같은 러시아어를 그대로 쓰면서 이것이 번역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러한 단어들이 진정 소비에트적/러시아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왠지 이런 단어들을 이탤릭체로 쓰는 것이야말로 지역학의 일종의 존재 증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붕괴 전야의 어떤 사회나 이런 아이러니의 미학들이 발생하고.. 또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은신처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마치 중세의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처럼.

 

권위적 담론의 전 영역에서 발생했던 수행적 차원과 진술적 차원 간의 이런 널리 퍼진 전환에 의거한 다중적인 내적 전치와 시스템의 재해석은, 소비에트 마지막 세대 사이에서 스툐프라는 은어로 불렸던 특별히 부조리한 아이러니의 미학이 발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아이러니 형식은 앞에서 살펴본 다중적인 전치의 결과로 생성된 역설적인 담론적, 사회적, 심리적 효과들에 종사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왜 소비에트 체제는 어느 순간 갑자기 붕괴되었는가.. 그러한 장의 전환을 가져온 힘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국면의 전환이 가져온 어떤 역설을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언어를 빌린다면, 페레스트로이카란 권위적 담론이 일상 속에서 기능했던 원칙들에 관해 토론을 하는 새로운 장소, 즉 공론장의 도입이며, 이제 언어가 투명해지기 시작하면서 후기 사회주의를 작동시킨 수행적 전환의 원칙이 점점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이미 후기 사회주의 체제에서 계속 자라고 있던 종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언어와 의례를 비롯한 여타 행위들을 통해 시스템의 권위적 형식들이 주도면밀하게 만장일치로 더 많이 재생산될수록, 그것의 진술적 의미와 형식 사이의 연결은 더 많이 끝어지고, 이는 결국 더욱 다양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허용하게 되므로."

 

이러한 시각은 분명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데도 유용할 것 같다.. 500년간 조선왕조 체제를 지배해온 성리학적 담론질서가 왜 구한말 갑자기 붕괴하고 말았는가.. 이를 단순히 서세동점,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라는 외적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혹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화, 즉 군사파시즘, 권위주의 체제의 붕괴 역시 조금 더 다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다시 프랑스혁명사를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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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알렉세이 유르착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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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시기를 살았던 저자가 쓴 자가기술민족지.. 이론적인 틀은 그닥 새롭지 않지만, 구미의 소비에트학이 철저히 외면해왔던 후기 사회주의(late socialism) 시기 젊은 세대들의 자화상을 풍부한 민족지적 사례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실로 오랜만에 흥미롭게 본 인류학 민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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