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네지릭
기 드보르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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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는 사람에게..

직독직해는 금물이지만..

스펙터클의 시대는 어떤 사유의 번개가 떨어지는 자리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었을까..



아침에 마시는 술이 있다. 아침은 꽤 오랫동안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대부분 바로 러시아산 보드카가 당겼다. 식사 중에 마시는 술이 있는가 하면 점심과 저녁 식사 사이 오후에 마시는 술이 있다. 밤에는 와인과 증류주가 있고, 그 다음에 마시는 맥주가 또 매력적이다. 그 때 마시는 맥주는 갈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밤 끝자락에, 날이 다시 밝아올 즈음에 마시는 술도 있다. 이렇게 술을 마셔대느라 정작 글을 쓸 시간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그게 딱 적당했다. 글쓰기란 흔치 않은 행위로 남아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글을 발견해내기까지는 오랫동안 술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 음주로 인해 마침내 불면증에서부터 통풍, 현기증까지 이런저런 병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아픈 곳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알코올중독자의 손떨림처럼 아름다운"이라고 로트레아몽은 말했다. 감동적이지만 힘겨운 아침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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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 구성적 상상력에 대한 에세이
폴 벤느 지음, 김현경 옮김 / 필로소픽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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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

우리는 어떤 힘이 피동적인 물체를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식으로 사건들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므로 우리는 이해가능성과 우연성을 혼합하는 절충적 해결책을 택한다. 작은 자갈 하나가 이 움직이는 물체를 멈춰 세우거나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연에 의해 수정된) 어떤 원인 대신에, 모서리의 수가 정해지지 않은(사건의 회고적인 불빛 아래서만 모서리를 셀 수 있는) 다면체와 탄력성을 가정해보자. 발생한 사건은 그 자체로 능동적이다. 그것은 원인들 사이에 자유롭게 남겨진 공간을 기체처럼 점유하며, 또한 원인들을 (내버려두기보다는) 점유한다. 역사의 에너지는 특별한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별 이유 없이 소비된다. 예견의 가능성은 각각의 다면체의 상황적인 구성에 달려 있으며, 언제나 제한적이다. 모서리의 수가 무한하고 (또는 불확정적이고) 어느 모서리도 다른 것보다 결정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이 모서리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연성과 이해가능성의 이원적 대립-전자를 인정하면서 후자를 수정하는-은 사라진다. 또는 다른 의미에서의 우연성-클레오파트라의 코로 대표되는 우연성보다 더 풍요로운-이 그것을 대체한다. 이는 역사의 일차적 원동력(생산관계, 정치, 권력의지)에 대한 부정이자, 원동력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이다. 아니면 장애물(다면체의 모서리들)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수많은 작은 원인들이 이해 가능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다면체는 도식이 아니므로, 이해 가능성은 사라진다. 혁명을 설명하는, 혹은 문학이나 요리의 영역에서 사회적 선호를 설명하는 초역사적인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예측불가능한 발명과 얼마간 비슷하다. 사건 자체를 분명하게 서술하는 것이 작은 원인들을 나열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우며, 아무튼 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모든 게 역사이고, 혁명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다면체들이 존재한다면, 과연 인간과학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간과학은 그리스 신화에 관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어떤 것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93) 


2. 상징적 장의 발칸화

단순히 신화만이 아닌, 우리 시대의 가짜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틀.. 하지만 신화와 가짜뉴스를 동렬에 놓을 수 있을까.. 가짜뉴스는 신화가 간직한 진실을 가지고 있는가.. 가짜뉴스의 범람과 이를 믿어버리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이런 고급한 틀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사상들의 정치는 흔히 무의식적이고 내재적이다. 예를 들어 공격이나 방어를 위해 어떤 외래의도그마와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 도그마를 조금쯤은 믿게 된다. 왜냐하마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말에 부합하도록 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진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게 된다. 켄타우로스에 대한 대중의 믿음에 기대었을 때 갈레노스는 냉소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만큼, 관대하고 고상한 장광설의 늪에 빠졌을 것이고 자신이 그 전에 켄타우로스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지 잊었을 것이다. 흔들리는 믿음의 존재양식, 지적인 혼돈의 시대를 특징짓는 이 양립불가능한 진실들을 동시에 믿는 능력은 이런 순간에 태어난다. 상징적 장의 발칸화Balkanization가 개인의 마음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 혼돈 상태는 분파들 간의 동맹정책에 반영된다. 


3. 무엇을 알 수 있는 지 아는 것. 지식의 사회적 분배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책에 독학자들이 언제나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결정적인 것은 자기들과 같은 독학자가 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이 책을 이해했으므로 자기들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속자"란, 비밀스러운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부모님이 해냈던 것처럼 자기도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숨겨진 지식이 있다면 부모님도 그것에 도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들이 안다는 것을 아는 일, 혹은 역으로, 더 이상 알아야 할 게 없다는 것을, 자신이 소유한 작은 지식의 영역을 넘어선 곳에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들만이 탐색할 수 있는 위험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은 접근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역들이 있다고 믿는다면, 연구와 창작은 마비되고 만다. 우리는 혼자서는 감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4. 여러 진실들이 존재한다는 믿음.

역사적 성찰은 하나의 비판으로서 지식의 자만심을 꺾으며, 진정한 정치나 진정한 학문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은 채 여러 개의 진실에 대해 진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비판은 모순적인가? 진실이 없다는 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리스인들에게 물려받은 거짓말쟁이 놀이를 하고 있는게 아니다. -거짓말쟁이가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식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거짓말쟁이인 게 아니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특수하게 거짓말쟁이가 된다. "나는 항상 공상을 늘어놓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을 하면서 공상을 늘어놓는게 아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면 말이다. "나의 공상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만물의 본질에 새겨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지금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것이 곧 진실이라면, 보편적인 문화는 허위일 것이고, 또 그렇다면 어째서 허위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여 진실을 아는 배타적 특권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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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 체크포인트 찰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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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읽기..

동일한 소재를 다루지만.. 감독과 연구자의 시선은 다른 쪽을 향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더구나 워낙 훌륭한 감독이니까.. 

여전히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 끌린다.. 그리고 종종 이야기한다.. 그건 어떤 궁지/아포리아에서 다시 결의를 다지는.. 마음을 다잡는 순간 나오는 말이기에.. 그건 어떤 시대정신이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있었던 것 같은.. 하지만 지금은 희미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이 시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고레에다 역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은 '그러나'라는 말을 자기 안에서 읽어간다. 그리고 그 말을 '하지만...'이라는 변명의 말로 바꾸며 살아간다. 야마노우치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라고 말할 수 없게 된 쉰세 살의 자신을 열다섯 살의 자신으로 심판한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돌려줘"라는 야마노우치의 외침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가. '하지만'이라는 시대를 향한 것이었을까. 

현실주의의 시대 속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야마노우치 안에서 사라지고, 

시대에서 또 하나

'그러나'라는 말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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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 2-2 - 폭포의 굉음 1947~1950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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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해방의 날..

정전협정 70주년에 읽기 시작한 커밍스의 2부작을, 8월 15일에 완독.. 뭐 그동안 이 책에만 매달렸다는 건 아니고(중간중간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았지만..) 어제부터 2-2권을 읽기 시작.. 오늘 오전 3부를 마치다. 우연히 날짜가 맞아떨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러고보니 난 53년(정전협정)에서 45년(해방)으로, <해방 8년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 책을 읽고 있었구나.. 이런 의미부여라도 하지 않으면 한여름에 1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그것도 내 직접적인 전문분야도 아닌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독서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징후인가..  


결국 이 책의 3부 1950년 6월의 서곡의 기나긴 이야기들은.. 한국전쟁 발발의 '직접적' 기원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약 1년의 기간의 이 <적절한 간격(decent interval)>은 1950년 6월 전쟁을 일으키는데 서로 작용한 사람과 사건과 세력들, 즉 전쟁 직전의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 워싱턴의 정치가들과 일본의 미군정, 그리고 타이완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연쇄를 두텁게 기술(thick description)하고자 하는 의도를 잘 담아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16장 타이완의 암시에 이르러서는 좀 지치기도 했지만,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18장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세 개의 모자이크에서 선명하게 제시된다.. 

물론 이렇게 정리해버리기에는, 1950년 1월 12일 프레스클럽의 애치슨 연설의 의미를 분석한 13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연구이다.. 그러고보니 내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예전 창비에 일부 번역소개되었던 원고도 이 13장이 아니었나 싶다.. 미국의 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한 애치슨의 연설이 무력 남침을 꿈꾸던 북한을 도발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줄기차게 들었던 이야기인데(이거 중고딩 교과서에도 나온 이야기 아님? 기억이 가물가물), 그 원류가 매카시즘의 그 매카시로부터 나왔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 아마 당시 미국의 국무부를 장악하고 있던 자유주의자들(애치슨)이 북한의 무력도발, 즉 남침을 쉽게 허용한 것에 대한 미국 보수우파(반공주의자들)의 정치적 비판이었을텐데, 한국의 보수우익 역시 북한의 무력 도발, 즉 '남침'을 강조하는데 좋은 소재로 써먹었다.. 그러고보면 매카시즘의 유령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다.. 하지만 애치슨의 연설을 그대로 믿었다면 정말 북한은 정치적으로 하수, 즉 <바보>라는 말인데, 북한=바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정리해도 좋은 걸까.. 그렇게 정리해버리는 사람이 <바보>가 아닐까.. 저자는 이러한 식의 만연한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애치슨의 논리는 2권의 초반에 자세히 논의한 1940년대 후반 미국의 세계전략, 즉 <봉쇄-반격>의 논리 그 자체라고 해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버젓이 통용된다.. 오늘 아침에 인터넷 포탈 게시판에 뜬 신동아에 실린 현 정권의 보훈부 장관의 발언을 잠시 인용해보면(왠지 신동아를 굉장히 즐겨 읽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결코 아니고.. 어쩌다보니.. "문재인, 6.25 북 책임 희석하려 국제전 언급"이라는 제목에 낚임..)


"유엔이 참전했는데 국제적 성격이 왜 없겠어요? 더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 거죠. 전쟁은 남북 사이의 도발과 냉전 구조에서 발발한 것이지, 한쪽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게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꺼낸 핵심 논리입니다. 소련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6·25가 김일성이 요청하고 스탈린이 승인해 이뤄진 남침이라는 팩트를 더는 부인할 수 없게 됐어요. 그러니 이 사람들이 그 부분은 의도적으로 말을 안 하고 국제전이라고 물타기하는 것 같아요."

  

요새 우파들도 브루스 커밍스를 인용하는게 좀 신박하긴 했는데.. 요새는 그래도 좀 공부를 하나?.. 하지만 당연히 책을 제대로 읽지는 않았을테고..(아마 바쁘신 분이라 그들 방식대로 정리한 논의를 '듣고' 하는 이야기겠지만..) 그래서 뭔가 좀 아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핵심은 텅 빈 이런 이야기가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것이다.. 소위 '입진보'들에게 내가 한수 가르쳐주마.. 이런 식의 새로운 형태의 반지성주의.. 하지만 커밍스가 이 분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정말 많이 섭섭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나쁜, 적절하지 않은 인용은 오히려 저자를 욕보이는 짓이므로.. (커밍스 아저씨가 최근 많이 '변했다(흑화?)'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음.. 자신이 평생을 바친 필드인 한국사회의 변화에의 기대가 계속 좌절된 결과일까? 아.. 이건 거의 '억측'이지만..) 

 

앞서 언급한 세 개의 모자이크로 다시 돌아가보면, (1)소련과 북한이 극악하고 정당한 이유 없는 침공을 은밀히 준비했다는 미국과 남한의 '공식적인' 주장, (2)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가설, (3)남한이 38도선 전역에 걸쳐 정당한 이유 없이 기습했다는 북한 측의 주장.. 이 세 모자이크 중에서 저자가 많은 문헌들을 검토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 번째 모자이크이다.. (그러고보니 김동춘의 책 <전쟁과 사회>(돌베개, 2000) 역시 연구사의 계보로 본다면 이 두 번째 모자이크의 연장선상에 있었구나..)  그리고 커밍스가 검토하지 못한 소련 측 사료가 1990년대 이후(즉 이 책이 출간된 이후) 공개되면서 <남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커밍스의 해석이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다.. 커밍스 역시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주도적 선제공격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나는 북한이 6월 15일에서 25일 사이의 어떤 시점을 그 순간으로부터 선택했으며, 그것은 그들이 선호한 시점이 아니었지만 6월 마지막 주에 중첩해 발생한 여러 사건 때문에 그 시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49년 여름 옹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1년여에 이르는 기간 동안 38선 부근에서 일어난 계속적인 총격/분쟁을 염두에 둔다면, 50년 6월에 발발한 이 전쟁의 내전적 성격, 즉 그 구조적 기원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 커밍스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전쟁의 책임 운운하며, 마치 자신들만이 이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인 것처럼 색깔론으로 몰고가는, 그리고 여전히 <이념적 폭탄>이 정치적으로 유효하다고 믿고 마구 던져대는 이 한국 사회에 커밍스는 1990년에 이미 '따끔한' 일침을 날리고 있다.. 


어떤 "호랑이"가 행동을 시작했든, 한국의 역사적이고 기묘한 치매 증세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때 결과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외국인을, 필요한 경우 전 세계를 끌어들였다. 1950년에 조선의 사신들은 히데요시의 의도를 알기 위해 그의 눈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결국 침략당했고, 일진회는 일본을 도와 식민지화를 초래했으며,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국을, 이승만이나 김석원 또는 이범석은 미국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것이 하나의 유형이다. 그런 현상은 일종의 내부 파열이자 그 진공을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블랙홀"이었다. 아무튼 이것이 6월 25일 새벽에 일어난 일이다. ...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이것은 제기할 수 없는 질문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이런 질문을 멈춰야 한다. 그 대신 니체가 독일인에게 요구한 것처럼 세속적 태도를 배양하고 편협한 "국수주의"를 혐오해야 한다. -"북방에 있는 남방을 사랑하고 남방에 있는 북방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미국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생색내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은 엄격한 방법을 거쳐 이 교훈을 배웠다. 한국인은 아직도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 


"한국의 역사적이고 기묘한 치매 증세? 앗. 이거 혐한론 아니야?"라고 매도하기 전에, 커밍스가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의 모국인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 그리고 무지를 철저하게 비판해왔는지를 떠올려주기를.. 커밍스의 의도는 이 전쟁이 국제적 냉전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그 냉전 구조 하에서도 남북한의 정치행위자들이 그 범위(boundary) 안에서 나름의 자율성을 갖고, 순전히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민족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그리고 그 비합리성과 광기에 전사회가 휩쓸려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현시점에서 이 사회가 냉철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역사적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남한에서는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지 알고 싶어하는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지만, 이는 구세대에게 도덕적 분노를 느낀 젊은 세대의 정치적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처가 아물고 있다는 조짐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조짐을 바탕으로 후세대는 그 질문을 자신의 마음에서 배제하고 니체가 말한 "역사"에 구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화해를 위해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다


책이 출간된 지 30년이 흐른 지금, 상황은 과연 얼마나 나아진 걸까.. 우익의 논리(?)야 원래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소위 '진보'라 자칭하는 인간들, 과거 "구세대에 도덕적 분노를 느낀 젊은 세대들"이지만 지금은 50대가 훌쩍 넘어버린 그들도 과연 그런 "역사에 구속된 상태"에서 벗어났을까.. <백년전쟁> 운운하는 프레임을 보면 그쪽도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과거 이 땅에 찾아왔던 한 이방인(etranger)의 애정어린 충고(짐멜이 말했던 그 이방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서로 증오의 주박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8월 15일 해방의 날.. 

하지만 이 해방이 전쟁, 그리고 분단의 새로운 기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좋은 날,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그저 착잡한 심정으로 <한국전쟁의 기원 2-2>를 읽는다.. 


cf. 그러고보니 바로 얼마 전 와다 하루키 선생의 <한국전쟁전사>가 번역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주 예전에, 전작인 <한국전쟁>(창비, 1999)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논문집이 아닌 통사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가까스로 봉우리에 올라서니, 다시 새로운 봉우리가 보이네..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 우리는 적절한 세 가지 모자이크를 볼 수 있었을 뿐이며, 그 가운데 둘은 복잡하고 상충되는 증거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증명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초조한 독자들은 저자가 명확히 말하지 않고 특정 해석을 지지하지 않으려는(그래서 전문 분야의 특정 학파에게 공격받지 않으려는) 태도에 당혹스러웠을 테고, 그가 잘못된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연구를 처음 계획했을 때부터 이념적 폭탄을 품은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질문에 답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내전에 대한 질문이 아니며, 동족간의 갈등으로 직접 고난을 겪은 세대는 아직도 관심을 둘 것이다.

북한의 침공이, 다시 말해 어떻게 시작됐든, 조용한 일요일 아침의 평화를 부순 전격전이 지닌 마지막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외교기관은 없다고 애치슨은 말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외교기관이 내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미래에 자신을 맡기는 젊은이만 가질 수 있는 대담한 만용과 차가운 계산이 뒤섞인 한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예상된 결과에 대한 무관심 안에는 유아론과 열광적 애국심이 존재했는데, 이런 사실은 그 결정을 내린 주체가 한국이고 그 실패는 엉망이 된 파우스트의 도박처럼 비극적이지도 고귀하지도 않았음을 알려준다. 거기에는 조급하고, 한발 앞서가려는, 벼락부자가 되기를 고집하는,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적"인 어떤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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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시간표 전쟁 -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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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첫 번째 주말..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볕에 바깥으로 나갈 의지를 이미 상실한 채..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서가에서 고른 책 한 권..

하루만에 끝까지 읽었으면 싶었고(300페이지 미만이어야 한다).. 

제목도 흥미로웠고(이미, 슐리펜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쓸 거라는 암시를 팍팍 주고 있지만).. 

또 무엇보다도 전쟁사가로는 워낙 유명한 저자의 책인지라, 주저하지 않고 꺼내서 읽기 시작.


그러고보니 작년 이맘때쯤 읽었던(이라고 쓰려고 하다, 확인해보니 22년 6월 30일.. 같은 여름이긴 하지만, 그래도..) 바바라 터크먼의 <8월의 포성>이 생각나기도 했고.. 

당시 여름을 맞아 괜히 1차세계대전사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었는데.. 돌이켜보니 그 계기가 됐던 책이 마침 그 해 번역되었던 모드리스 엑스타인스의 <봄의 제전>이었다.. 1차세계대전 전야의 유럽의 문화사(모더니즘)에 대한 나름 흥미로운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내친 김에 한동안 서가에 방치해두던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을 오랜만에 꺼내 들어 먼지를 털고 꽤 열심히 읽었고(정리를 잘 해두지 않아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20세기 초 발칸의 지형학, 특히 당대 유럽의 트릭스터였던 세르비아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이 인상적인 책이었는데_ 바바라 터크먼의 <8월의 포성> 역시 아마 <몽유병자들>의 레퍼런스에서 발견한 책이었던 것 같다.. 

cf. 당시는 절판 상태라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난 후 출판사에 이런 책 절판 상태로 방치해둘 거냐고 댓글을 남겼었는데.. 소리소문 없이 가격을 조금 올려서 같은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과연 개정판일까.. 미리 보기가 없어 확인할 수 없다.. 그래도 이런 책은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동시대 진행형이던 우크라이나 사태(지금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를 보면서.. 세계대전이라는 것 역시 이런 우연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뒤엉키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고보니 근 1년 만에 다시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 한 권을 꺼내서 읽고 있는 셈이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1차세계대전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그 기원(origin)을 규명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있는 듯 한데(그런 점에서 과거 한국전쟁 연구와도 비슷하다).. 어쩌면 유럽인들에게 그러한 관심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으면서 세계의 부를 독점한, 그리고 유럽의 헤게모니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 되리라는 장밋빛 미래에 도취되어 있던 구대륙 유럽인들에게 있어, 제1차세계대전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그리고 왜 이런 파국적인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자신들을 파멸의 늪으로 빠트린 사건이었을테니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인 역사가 테일러의 입장은 꽤 냉정하다..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면 그런 사건에는 엄청난 원인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찾아내려는 것이 요즘 세태다. 그러나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은 어쩌면 엄청난 원인이 없을지 모른다. 이전의 30년 동안 국가 간의 외교, 세력균형, 동맹체제, 군사력 증강이 평화를 낳았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오랜 기간 평화를 가져온 바로 그 요인들이 이제 대규모 전쟁을 가져왔다. 매우 비슷한 사고방식인데, 30년 동안 사고를 내지 않기 위해 안전운전을 해온 운전자가 한 번 실수해서 사고가 난다는 것이다. 1914년 7월, 일이 잘못되어버렸다. 역사에서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말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학자인 저자가 그 기원을 규명하는 작업을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이 책은 사라예보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리기 전에 이미 독일, 그리고 다른 유럽의 국가들에서도 군사 동원을 위한 시간표(그것은 다름 아닌 20세기 근대의 상징이자 합리성, 효율성, 정확성의 상징이기도 한 철도 시간표)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점,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된 이후에도,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러시아, 그리고 영국(프랑스에 대한 분석이 거의 없다는 것도 특징인데)의 정치가들이 <동원>에 대한 절대적 믿음, 그리고 오해들 속에서 자신들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다는 점을 간결하면서도 나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가 친절하게 요점만 간추려 이야기해주듯.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한 유일한 원인은 속도와 공세에 대한 믿음의 산물인 슐리펜 계획이었다.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에 동원하지 말라고 요구할 때까지의 외교가 작동했다. 당시 상황에서 어떤 나라도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인들에게 유럽의 자유를 무너뜨리려는 계획된 의도는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계획된 의도를 품을 시간 혹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모두가 군사적 준비를 위한 기막히게 정교한 틀에 갇혀 버렸다. 특히 독일인들이 그랬다. 모든 나라 국민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러 나간다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옳았다. 모든 나라의 일반참모부가 공격이 유일한 방어책이라 믿었으므로 모든 방어작전은 다른 누군가에 대한 공격으로 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관해서 더 이상 밝혀져야 할 것은 없다. 억지책으로도 억지에 실패한 것이다. 언젠가는 그럴 것이라 생각했어야 했다. 억지책은 아흔아홉 번 성공하더라도 한 번 실패할 있다. 그 한 번의 실패로 대참사가 빚어진다. 억지책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제 1차세계대전이 남긴 교훈이다. 


좀.. 맥이 빠지는 결론이긴 한데.. 그러니까 억지책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뭐 이런 이야기가 중심인 것은 아니고.. 다만, 왜 그렇게 뛰어난 능력과 교양을 갖춘 정치 엘리트들이 다른 가능성들을 하나둘 씩 던져버린 채 불 속으로 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는가.. 그 오류의 역사를 다시금 상기함에 있어 <슐리펜 계획>과 같은 근대적 시간표가 만들어낸 <필승의 전략>에 대한 그릇된 믿음들을 다시금 재검토해보자는 메시지는 꽤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아마 오늘날 전세계적인 전쟁 게임을 주도하고 있는 전략가들 중에서도 그런 믿음들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꽤 많이 있을테니까..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감시(watch)할 것인가 일텐데.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면 그런 사건에는 엄청난 원인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찾아내려는 것이 요즘 세태다. 그러나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은 어쩌면 엄청난 원인이 없을지 모른다. 이전의 30년 동안 국가 간의 외교, 세력균형, 동맹체제, 군사력 증강이 평화를 낳았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오랜 기간 평화를 가져온 바로 그 요인들이 이제 대규모 전쟁을 가져왔다. 매우 비슷한 사고방식인데, 30년 동안 사고를 내지 않기 위해 안전운전을 해온 운전자가 한 번 실수해서 사고가 난다는 것이다. 1914년 7월, 일이 잘못되어버렸다. 역사에서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말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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