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애너벨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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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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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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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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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벨 리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정규웅 옮김 / 민음사 / 197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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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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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조국을 떠나 유랑을 전전했던 백계 러시아인의 문체일까.. 두 차례 대전으로 사라져버린 구유럽의 에토스와 귀족주의, 거기에서 연유하는 고독과 오만함과 냉소, 아카데미를 경멸할 수 있는 교양, 속물주의에 대한 혐오와 갈망, 이 모든 것들을 조합했을 때 나보코프의 <안개>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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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원년의 풋볼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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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에의 소설(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을 읽다가, 다시 꺼내든 작품..

등단 50주년을 스스로 기념하며(의식하며) 썼던 소설에서, 자신의 과거 작품을 다시 끄집어내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오에에게, 이 작품은 자신의 문학의 출발이자 총결산, 어찌 보면 자신이 글을 쓸 수 있었던, 아니 쓰게 했던 원천과 같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과거의 유물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자신을 <전후민주주의자>로 자칭하는 오에에게 이 작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전후 일본이라는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문제틀이었을 것이다..

한 때 오에의 소설을 꽤 열심히 찾아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전후 일본>, 정확히 말하면 <패전 이후 일본>이라는 세계사적 보편성과 특수성이이 공존하는 시공간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출판시장에서 본다면 믿을 수 없는 기획이었던 <오에 겐자부로 소설전집>을 끼고 한 권씩, 한 권씩 읽어내려갔다.. <사육>과 같은 초기작품에서 <만엔원년의 풋볼>, <동시대게임>, <하마에게 물리다>...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특히 <동시대 게임>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졌던 것은 오에 자신이 그렇게 집착하는 시코쿠의 시골마을=숲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때문이었다.. 과연 오에의 마을=국가=소우주란 대일본제국의 국가 권력의 폭위에 대한 저항을 꿈꾼 진지한 반체제적 구상으로 간주해도 될까. 마을=국가=소우주의 핵심에 존재하는 신화적 서사는 근대적 합리성을 초극하려는 새로운 사유방식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을=국가=소우주는 또 다른 마을=국가=소우주와의 연대를 지향하는 열려 있는공동체일까..

그가 70년대 전공투 젊은이들에게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취급을 받았던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시대게임>의 쓰유키, <만엔원년의 풋볼>의 미쓰(다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하마에게 물리다>의 하마의 용사는 모두 기존 사회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다고 하더라도(솔직히 나는 전공투 세대들의 이러한 나이브한 평가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만엔원년의 풋볼>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왜냐하면 전후 일본이라는 시공간에서 싸움의 위치를 찾아나가려는, <동시대게임>을 펴나가려는 그의 문제의식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위치 설정이 이후 시대의 절박한 요구에 <부응하는> 데 실패를 초래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문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반드시 그것을 <실패>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는 갈래갈래 갈린 길 중 다른 길을 갔을 뿐이다.. 아쉬운 점은 어찌 보면 전후 일본을 바꿔내야 한다는 공통의 목적의식을 지녔던 그의 아래 세대 청년들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은 그가 정치적 행동주의자들에 대해 가졌던 일종의 미안함, 부채의식의 한 표현일 지도 모른다.. “백치누이와의 근친상간과 이어지는 누이의 자살로 인하여 극도의 심적 고통에 처한 다카시가 자신의 고향으로 귀향하여 펼치는 일련의 공작을 그는 일견 무모한 행동주의의 소산처럼 그리면서도, 그는 결코 그 행동주의를 폄하하지 않는다. 오에 자신의 분신인 듯 보이는 <미쓰>가 백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의 진정한 역사를 깨달아가는 과정과, 새로운 삶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 동력원을 만들어주었던 것은, 그 무모한 다카의 행위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다카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어찌 보면 <미쓰><다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젊은 주지의 발언은, 다카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사건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다카의 <폭동>은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고정되어 있던 골짜기 마을의 인간 구성을 뒤흔들어 놓은 거야. 단적으로 말해서 다카의 그룹이었던 젊은 사람들이 촌의원을 한 사람 낼 수 있을 만큼, 머리가 굳은 우두머리들에 대해 힘을 갖게 된 거지요. 역시 <폭동>이 일어난 건 골짜기 전체의 장래를 위해서는 효과가 있었다구요, 미쓰씨! 사실 그 <폭동>에서 일단은 골짜기 인간사회의 종적인 파이프가 청소되었고, 젊은 사람들의 횡적인 파이프는 단단히 연결되었으니까. 미쓰씨, 이제야말로 골짜기 마을에 장기적으로 전망이 생길 기반이 마련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435)

 

물론 다카의 행동, 나아가 전후 골짜기 마을에서 일어난 폭동은 다소 우스꽝스럽고 불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국면을 한 걸음 더 진행시키는 것도 이 사건만이 갖는 힘이다. “증조부 동생의 생애를 모방하여 살아온 다카시의 최후의 자살이, 새로이 드러난 증조부 동생의 아이덴티티의 빛을 통해서 자신의 <진실>의 전체를, 살아남은 나에게 보인 처절한 최후의 모험이었다고 하는 새로운 색깔로 물들여진다(438)”고 미쓰가 고백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통해 오에가 동시대에 던지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만연원년의 봉기가 갖는 의미를 찾아나가는 작업과 전후 골짜기 마을의 폭동의 성격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미묘하게 교차해나간다. 여기서 골짜기 마을은 전후 일본사회의 축소판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전후 60년대를 거쳐 온 오에에게 해방을 위한 명확한 이데올로기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데올로기가 가진 엄청난 파괴력의 대가를 오에는 동시대를 살아나가면서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모한행동들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오에가 자신을 여전히 전후민주주의파로 규정하는 이유는 바로 그 혼란스럽고 파괴적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그 정치적 움직임의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writer)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 오에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에게 조각난 과거를 다시 일깨워(re-membering) 구축한다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과제를 지움으로써,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복원하는 차원이 아닌, 당대(전후)를 살아간 그들의 기억과 고통을 전유하고, 나아가 그 현재적 의미를 자리매김 하려는 시도를 전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만엔원년의 풋볼><동시대 게임>을 거쳐, 다시 <아름다운 애너벨 리>로 오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해버렸다.. 이제 더 이상 혁명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고, <진보>라는 말도 이제 <진부>해져버린 세상에서, 영원한 전후민주주의자를 자청하는 노작가는 다시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전향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일상화된 현실에서, 이제는 예외가 되어버린 그의 <한결같음>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며, 그의 작품을 꺼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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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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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나의 병사들>을 읽고 난 후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찬가>를 읽었다.. 여러모로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처음으로 가르쳐준 영화..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지만, 지금도 장면 장면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전투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의 장례를 치러주면서 인터가를 부르는 전사들의 모습에서 해방구의 토지정책을 놓고 마을주민들과 민병대들 사이에서 격론을 벌이던 장면, 그리고 파시스트들과의 거듭되는 전투에 상처뿐인 민병대를 지원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는 정부군에 울분을 터뜨리던 전사들의 얼굴표정까지.. 영화의 메시지가 하도 강렬해서, 한동안 당시만 해도 소지하면 <불법>이라고 하던 트로츠키주의 신문을 팔러 다니던 사람들(그 때만 해도 학관 근처에 어슬렁거리면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에게 괜한 <친근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다보니, 이후의 작품인 <동물농장>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오웰이 왜 그토록 <스탈린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졌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왜 그런 장을 거기 넣었는가?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저널리즘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라는 (자신이 존경하던 비평가의) 비난도 무릅쓰고 당시 전쟁의 정치적 지형도를 트로츠키파의 입장에서 상당히 길게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동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에게 뒤에서 칼을 맞은, 혁명의 배반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자가 삼켜야 했던 <분노>의 표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스마일리의 죽음은 내가 쉽게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마일리는 용감하고 재능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글래스고 대학의 자리를 내팽개쳤다. 또한 내가 목격한 대로, 그는 흠 잡을 데 없는 용기와 흔쾌함으로 전선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저들이 그에게 해준 일이라고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고 방치된 동물처럼 죽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막대한 인명이 희생되는 대전쟁의 와중에서 한 개인의 죽음을 놓고 너무 법석을 떠는 것이 소용없는 일임은 나도 안다. 혼잡한 거리에비행기가 폭탄 하나만 떨구어도 정치적 박해를 여러 번 가하는 경우보다 더 큰 고통이 생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죽음에 화가 나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죽는 것-- 그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는 바이다. 그러나 투옥이 되고, 그것도 날조된 범죄 혐의도 없이 그저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악의로 인해 투옥이 되고, 혼자 내팽겨진 채 죽어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런 따위의 일--스마일리의 겨우는 예외적인 것 같지도 않다--이 어떻게 전쟁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가 처음부터 <트로츠키주의자/무정부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가 속하게 된 부대가 우연히 의용군들로 이루어진 <민병대>였을 뿐이고, 서두에서 밝히듯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인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심지어 그는 민병대 활동을 하면서도 <국제여단>(공산당계)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내전을 경험한서 그가 점차 무정부주의에 동조하게 된 데에는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강령이나 신념에 대한 동조라기보다는, 파시스트라는 공통의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도 당파적 이익을 앞세우는, 그 결과 이데올로기적 분란을 넘어 동지를 피로 숙청하는 <소비에트주의>에 대한 분노가 컸다. 그리고 그는 파시스트 타도를 위해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숙청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몰래 스페인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겪은 환멸에 영혼을 팔지는 않았다.. 오웰이라는 작가의 위대성을 발견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본업인 <근대 일본의 정치문화>를 연구하면서 무수히 지켜보아야 했던 지식인들의 <전향転向>.. 비단 일본뿐일까.. 과연 소위 <386>들의 현 모습에서 전향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을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소비에트에 대한 환멸이 유럽 사회에 몰고 왔을 엄청난 <전향>의 광풍에서 오웰은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다.. 물론 그것은 <당의 위대성>에 대한 맹목적인 고수는 아니다.. 대신 그는 <내부적 비판자>라는 위험하면서도 고독한 길을 걸어갔다..

내 역할에 무력함을 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런 참사--어떻게 끝이 나건 스페인 전쟁은 살육과 신체적 고통은 별도로 하고라도 경악할 만한 참사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꼭 환멸과 냉소만 생기는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오웰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는 것도 없고, 시간도 없다..<랜드 앤 프리덤>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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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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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김영하의 정의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베네딕트의 구별과 반대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듯, 또 비평가가 아무리 애써 변호해도 마지막이 너무 아쉽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내면세계를 재구성하는데 환자의 시각과 의사의 시각이 혼재된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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