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엔원년의 풋볼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오에의 소설(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을 읽다가, 다시 꺼내든 작품..

등단 50주년을 스스로 기념하며(의식하며) 썼던 소설에서, 자신의 과거 작품을 다시 끄집어내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오에에게, 이 작품은 자신의 문학의 출발이자 총결산, 어찌 보면 자신이 글을 쓸 수 있었던, 아니 쓰게 했던 원천과 같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과거의 유물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자신을 <전후민주주의자>로 자칭하는 오에에게 이 작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전후 일본이라는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문제틀이었을 것이다..

한 때 오에의 소설을 꽤 열심히 찾아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전후 일본>, 정확히 말하면 <패전 이후 일본>이라는 세계사적 보편성과 특수성이이 공존하는 시공간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출판시장에서 본다면 믿을 수 없는 기획이었던 <오에 겐자부로 소설전집>을 끼고 한 권씩, 한 권씩 읽어내려갔다.. <사육>과 같은 초기작품에서 <만엔원년의 풋볼>, <동시대게임>, <하마에게 물리다>...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특히 <동시대 게임>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졌던 것은 오에 자신이 그렇게 집착하는 시코쿠의 시골마을=숲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때문이었다.. 과연 오에의 마을=국가=소우주란 대일본제국의 국가 권력의 폭위에 대한 저항을 꿈꾼 진지한 반체제적 구상으로 간주해도 될까. 마을=국가=소우주의 핵심에 존재하는 신화적 서사는 근대적 합리성을 초극하려는 새로운 사유방식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을=국가=소우주는 또 다른 마을=국가=소우주와의 연대를 지향하는 열려 있는공동체일까..

그가 70년대 전공투 젊은이들에게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취급을 받았던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시대게임>의 쓰유키, <만엔원년의 풋볼>의 미쓰(다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하마에게 물리다>의 하마의 용사는 모두 기존 사회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다고 하더라도(솔직히 나는 전공투 세대들의 이러한 나이브한 평가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만엔원년의 풋볼>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왜냐하면 전후 일본이라는 시공간에서 싸움의 위치를 찾아나가려는, <동시대게임>을 펴나가려는 그의 문제의식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위치 설정이 이후 시대의 절박한 요구에 <부응하는> 데 실패를 초래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문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반드시 그것을 <실패>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는 갈래갈래 갈린 길 중 다른 길을 갔을 뿐이다.. 아쉬운 점은 어찌 보면 전후 일본을 바꿔내야 한다는 공통의 목적의식을 지녔던 그의 아래 세대 청년들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은 그가 정치적 행동주의자들에 대해 가졌던 일종의 미안함, 부채의식의 한 표현일 지도 모른다.. “백치누이와의 근친상간과 이어지는 누이의 자살로 인하여 극도의 심적 고통에 처한 다카시가 자신의 고향으로 귀향하여 펼치는 일련의 공작을 그는 일견 무모한 행동주의의 소산처럼 그리면서도, 그는 결코 그 행동주의를 폄하하지 않는다. 오에 자신의 분신인 듯 보이는 <미쓰>가 백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의 진정한 역사를 깨달아가는 과정과, 새로운 삶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 동력원을 만들어주었던 것은, 그 무모한 다카의 행위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다카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어찌 보면 <미쓰><다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젊은 주지의 발언은, 다카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사건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다카의 <폭동>은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고정되어 있던 골짜기 마을의 인간 구성을 뒤흔들어 놓은 거야. 단적으로 말해서 다카의 그룹이었던 젊은 사람들이 촌의원을 한 사람 낼 수 있을 만큼, 머리가 굳은 우두머리들에 대해 힘을 갖게 된 거지요. 역시 <폭동>이 일어난 건 골짜기 전체의 장래를 위해서는 효과가 있었다구요, 미쓰씨! 사실 그 <폭동>에서 일단은 골짜기 인간사회의 종적인 파이프가 청소되었고, 젊은 사람들의 횡적인 파이프는 단단히 연결되었으니까. 미쓰씨, 이제야말로 골짜기 마을에 장기적으로 전망이 생길 기반이 마련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435)

 

물론 다카의 행동, 나아가 전후 골짜기 마을에서 일어난 폭동은 다소 우스꽝스럽고 불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국면을 한 걸음 더 진행시키는 것도 이 사건만이 갖는 힘이다. “증조부 동생의 생애를 모방하여 살아온 다카시의 최후의 자살이, 새로이 드러난 증조부 동생의 아이덴티티의 빛을 통해서 자신의 <진실>의 전체를, 살아남은 나에게 보인 처절한 최후의 모험이었다고 하는 새로운 색깔로 물들여진다(438)”고 미쓰가 고백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통해 오에가 동시대에 던지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만연원년의 봉기가 갖는 의미를 찾아나가는 작업과 전후 골짜기 마을의 폭동의 성격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미묘하게 교차해나간다. 여기서 골짜기 마을은 전후 일본사회의 축소판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전후 60년대를 거쳐 온 오에에게 해방을 위한 명확한 이데올로기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데올로기가 가진 엄청난 파괴력의 대가를 오에는 동시대를 살아나가면서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모한행동들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오에가 자신을 여전히 전후민주주의파로 규정하는 이유는 바로 그 혼란스럽고 파괴적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그 정치적 움직임의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writer)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 오에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에게 조각난 과거를 다시 일깨워(re-membering) 구축한다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과제를 지움으로써,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복원하는 차원이 아닌, 당대(전후)를 살아간 그들의 기억과 고통을 전유하고, 나아가 그 현재적 의미를 자리매김 하려는 시도를 전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만엔원년의 풋볼><동시대 게임>을 거쳐, 다시 <아름다운 애너벨 리>로 오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해버렸다.. 이제 더 이상 혁명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고, <진보>라는 말도 이제 <진부>해져버린 세상에서, 영원한 전후민주주의자를 자청하는 노작가는 다시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전향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일상화된 현실에서, 이제는 예외가 되어버린 그의 <한결같음>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며, 그의 작품을 꺼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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