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로서의 인류학자 - 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병화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씩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어떤 차이가 있나 궁금할 때가 있었다.. 어차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한 것이 아니냐고.. 그런데 왜 인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은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

<융합>이 대세라고들 하지만, 여전히 이들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은 편이다.. 인문학은 사회과학이 뻔한 것에 힘들 들인다고, 즉 이미 결론이 나와 있는데도 그걸 밝히기 위해 과학적 방법을 들이대는 짜고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사회과학은 인문학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단적으로 사회과학자에게 당신의 사유는 매우 인문학적이군요 라고 한다거나, 혹은 인문학자에게 당신의 글은 과학적이군요 라고 말하면 그건 칭찬일까, 아니면 욕일까..

 

물론 일반인들에게 이런 싸움은 너무나 시시한, 혹은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동안 내겐 이 문제가 꽤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철 모르던 시절, 나는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아주 우연히>(강조) 전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인류학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경계에 있는 학문이라느니, 양자를 접합하는 학문이라느니 하며 자화자찬하는 경우가 있지만(인류학이 과로 설치된 대학을 보더라도, 어느 곳은 사회과학대학에, 또 어느 곳은 인문대학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어디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 인류학과의 풍토가 더 인문학적이냐, 혹은 사회과학적이냐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실제로 인류학은 사회과학 내에서는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또 인문학에서는 (문사철에 비해) 전통이 얕다는 이유로 이래저래 따돌림 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그 때문에 소수학문인 인류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더욱 과학적이고 싶었고, 그래서 더욱 <과학>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이 인간의 삶과 관련된 복합총체라고 한다면, 그리고 인류학이 인간의 제도만이 아닌,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인류학이 과연 인문학임을 포기할 수 있을까.. 

 

기어츠의 <저자로서의 인류학자>를, 그리고 또 베네딕트의 글 <인류학과 인문학>을 읽으면서, 이런 글들이 조금 더 빨리 번역되었더라면, 한동안 떠안고 있었던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는 나름의 길들을 보다 빨리 찾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문적 성향의 보수성 때문에 기어츠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 관계 없이현재의 인류학이 처한 곤경에 대한 그의 진단은 너무나 적확하다..

민족지가 <세계를 종이에 담아내는 글쓰기>의 일종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검토가 가로막혀 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민족지란 실용적 형태의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문학적 문제만 궁리해서는 안 된다는 편견, 2)섬세한 관심을 기울일만큼 가치 있는 인류학 문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한계, 쉽게 말해서 (아쉽지만)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인류학에는 플로베르도 콘래드도 발자크도 없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3)지식이 전개되는 방식에 관심을 쏟다 보면 어떤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능력이 약화된다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쉬운 점은 진단에 비해, 그가 풀어내는 본문의 이야기가, 자신의 섬세하고 유려한 이전의 저작들에 비해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다는 것.. 기어츠는 자신이 선정한 네 명의 인류학의 거장들에 대한 일종의 텍스트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듯한데, 바르트-푸코로 이어지는 <저자> 논의를 (아쉽게도) 아주 거칠게 건너 뛰면서, 그들을 하나의 정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끝내고 만다.. 뭐, 거기까지 기어츠에게 바란 것은 아니었으니, 그닥 아쉬움은 없지만, 그래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에 있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메시지가 퇴색되지 않을까 그게 오히려 문제다..

 

자신이 이미 시인이었던 베네딕트는 그 문제에 대해 훨씬 이전부터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더구나 <과학주의의 화신>이라 불렸던, 자신의 존경하는 스승 <파파 보아스> 밑에서 (서로) 눈치를 보면서(이 역시 중요하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눈치를 볼 수 있는 풍토.. 아마 초기 인류학의 진정성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인문학적 관심을 어떻게든 인류학과 접목시키려 했기에, 그녀의 고민은 더욱 컸을 것이다.. 당시 미국 사회과학계의 풍토에서는 불모에 가까운 여성 학자로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그녀가 이뤄낸 성과들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값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미국 인류학회 회장직을 퇴임하면서 <인류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름의 강연을 했던 것은 그런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과학자는 동물들에 관해 더 큰 일반화의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 동물들은 학습하고 발명하는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활방식, 즉 문화를 창조하는 종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질서를 벗어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연의 진화에 의해 인간은 상황과 본능의 동물에서 더욱 나아가 창조와 발명의 존재가 되었다.

... 인문학은 사회과학이 뻔한 것에 힘을 들이고, 또 무미건조하다고 비판한다. 사회과학은 인문학이 너무 주관적이라고 비판한다. 인류학자는 뻔한 것에 힘을 들인다는 비난이나 주관적이라는 비난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인류학자는 두 가지 방법을 모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0여년이 흐른 지금, 인류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스 베네딕트 - 인류학의 휴머니스트
마거릿 미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학계가 낳은 가장 걸출한 두 명의 여성, 미드가 쓴 베네딕트 평전이라는 점에서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과학>이기를 고집하면서 상아탑으로 도피해버린, 소수의 동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읽지 않는 글들을 쓰고 있는 지금의 (인류)학자들에게 왜 <학>이 위기에 처해있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서문화사판을 가지고 있으니 군침만 흘릴 뿐. 선뜻 구매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다. 세이초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전, 언젠가 한 블로그에 한국에 세이초붐이 일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예측을 했다. 워낙 전후 일본의 문제적 인간이라서. 하지만 펠레도 아니고 예측은 항상 빗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57년 1월 20일 규슈의 한 바닷가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남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소위 情死다. 죽은 남자는 당시 비리로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하던 한 관청의 실무대리. 직급은 낮지만 사실상의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이었기 때문에 경시청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여자는 도쿄의 한 요리집의 여급..
사건이 일어나기 6일 전인 1월 14일 18시 그들의 규슈행이 도쿄역의 플랫폼에서 목격자들에 의해 목격된다. 도쿄발 하카다행 야간기차인 아사카제에 두 사람이 사이좋게 올라타는 것을 그 요리집의 단골인 한 남자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같은 요리집의 여급들이 목격한 것이다.. 목격자들이 있었던 곳은 13번 플랫폼, 그리고 두 사람이 승차한 아사카제가 정차해 있던 것은 15번 플랫폼..

너무나 통속적인 정사, 그리고 그들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사건은 자살로 거의 굳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담당한 규슈의 한 시골 베테랑 형사의 한 마디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평일 저녁 6시처럼 혼잡한 시간대에 과연 13번 플랫폼에서 15번 플랫폼의 기차를 볼 수 있는가.. 기차시간표를 검색해보니, 그 시간대에 13번 플랫폼에서 15번 플랫폼의 기차를 볼 수 있는 것은, 즉 13번 철로와 14번 철로에 기차가 들어서지 않은 시간은 고작 4분.. 우연 치고는 너무나 절묘하지 않은가..

수사망은 14일의 현장을 목격한 인물로 좁혀진다.. 죽은 남자가 근무하는 관공서의 납품을 담당하는 회사의 사장, 그리고 비리 주범으로 지목되는 관공서의 장과는 개인적인 친분까지 있다(최근 마쓰모토 탄생 100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전전 중국전선에서 함께 생사를 나눈 상관/부하의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1957년의 일본, 사회파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마쓰모토의 작품에는 지난 전쟁의 흔적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예를 들어 마쓰모토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주인공 중의 하나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항상 범죄의 대상, 혹은 범인이 되기 쉬운 '전쟁미망인'이다). 문제는 알리바이다..

두 사람의 사망시각은 대략 1월 20일 20-21시경.. 하지만 용의자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이 시각 용의자는 도쿄에서 출발하는 야간기차를 타고 일본의 최북단인 홋카이도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21일 오후 하코다테와 삿포로 사이의 오타루 부근에서 기차에 그가 타고 있었다는 제 3자의 증언과 21일 20시 40분 경 삿포로역에서 그를 만났다는 신뢰할 수 있는 증언까지 있다.. 알리바이는 그야말로 완벽하다.. 적어도 20일 저녁 용의자가 일본 본토의 최남단인 후쿠오카에 있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1. 20 저녁 8-9시 후쿠오카의 한 바닷가에서 남녀가 청산가리를 먹음(21일 오전 발견).
1.20 우에노발 급행 '도와다'로 21일 아침 아오모리 착.
1.21 아침 9시 50분 연락선(아오모리-하코다테)으로 하코다테 착. 연이어 하코다테발 급행 '마리모'로 20시 34분 삿포로 착.

이 작품의 묘미는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면서 이상의 철벽같은 알리바이를 하나둘씩 깨트려가는데 있다.. 거기에는 독자들을 몰입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수첩을 꺼내어 기차 시간표를 끄적거리면서 시간을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열차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추리소설에서 열차는 단골처럼 등장하는 무대이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떠올려보라.. 특히 기차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거의 예외없이 시간표대로 해당장소를 달린다는 점에서, 가장 결정적인 알리바이의 소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결정적이라는 믿음이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도 한다.. 전 열도가 거미줄처럼 엮어진 일본의 철도망에서는 때로 애매한 공백들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미묘한 4분의 공백이나, 상행선과 하행선의 교차 시간.. 혹은..


지금도 매달 발매되는 무려 천 여페이지에 달하는 <JR시간표>에는 (야간열차를 포함하여) 24시간 동안 일본 각지를 달리는 열차들의 타임 스케줄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가히 숫자들과 역이름으로 채워지는 풍경이다..개인적인 체험으로 보더라도 일본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때는 그 거미줄 같은 철도망을 확인하면서, 여행일정에 맞춰 기차시간표를 짜는 것이었다.. 현재 지점에서 목적지까지는 어떻게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특급을 탈까, 아니면 보통을..그리고 중간에 열차를 갈아타는 지점에서는 바로 이어지는 열차를 탈 것인가, 아니면 내려서 1-2시간 주위를 돌아볼까.. 상행과 하행은 다른 노선(철로)을 이용해볼까.. 등등..

여기에는 철도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혹은 메타포)으로 존재하는 일본 사회의 특수성도 깔려 있다.. 60년대 미국 중심의 경제개발계획으로 철도보다는 고속도로 건설에 주력한 한국에서 철도는 도로의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거미줄같은 도로망을 철도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오르한 파묵의 터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식민지 시기를 제외하고는 소설에서 철도(혹은 기차)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근대 초기부터 철도 건설에 주력한 일본에서 철도는 근대의 상징으로서, 지금까지도 가장 친근한 운송수단이며, 그래서인지 (식민지 시기를 제외하고는 철도(혹은 기차)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그다지 없는 한국과 비교해보더라도) 철도는 문학작품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이다.. 일본의 국민소설가인 나츠메 소세키의 대표작인 <산시로>의 도입이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일본의 철도사업은 계속 이어져, 그렇게 넓지 않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본의 총 철로 길이는 아마 세계에서 다섯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이다(한 때, 근대화의 기준을 국토의 총 철로 길이로 계산하던 시절이 있었다.. 홉스봄의 책에 나왔던가).

또한 1970년 일본 고도성장의 정점에서 치러진 전국적인 축제였던 오사카 만국박람회(줄여 만박)에 맞춰, 도쿄와 오사카를 3시간에 주파하는 돗카이도 신칸센이 처음 운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리고 그 철도에 몸을 싣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사카 만박을 찾아왔다.. 공식방문자수만 해도 6천 4백만.. 일본 인구의 거의 절반이 오사카에 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만박에 의해 정비된 철도 인프라와 관광산업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Discover Japan>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말 그대로 일본의 숨은 아름다운 풍경들을 찾아다니자는 캠페인인데, 이 때부터 일본인들이 철도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의 오지들을 여행하러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볼프강 시벨부시가 이야기한 근대 철도여행의 역사(특히 파노라마로서의 차창의 발견)가 그 정점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점과 선>을 읽으면서, 사건의 열쇠이기도 한 기차시간표를 수첩에 써내려가노라니, 예전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기차 시간표를 보며 일정을 짜던 기억이 떠올라 괜시리 즐거워졌다.. 다시 한 번 옛날로 돌아가 묵직한 기차시간표를 들고 일본 열도를 한 번 돌아다녀볼 수는 없을까.. 뭐 <어떤 그리움>이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이다. 나의 존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나의 영혼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책상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는 마치 내가 읽고 있던 책장들로부터 내 얼굴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러한 강력한 힘 때문이었다. 그 빛은 나의 이성을 무디게 만드는 동시에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그런 책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일까. 젊었던 한 시절을 온전히 쏟아 부었던, 하지만 이제는 왠지 건드리는 것조차 겁나는 애증어린 원고를 ‘일단’ 떠나보내고 나서, 며칠 멍하니 앉아 있었다. 3주라는 유예 기간. 시간은 이미 가득 차 있기도 했고 텅 비어 있기도 했다.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인생>. 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이 책은 왠지 늦은 밤 인적 드문 역사의 플랫폼에서 야간열차를 기다리면서, 아니면 토사와 얼룩이 눌러 붙은 시트에 앉아 깜깜한 차창을 보며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표 한 장 들고 낯선 세계로 떠나는 그런 ‘치기 어린’ 여행을 지금도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낯선 여행의 기록”에 매료된 것이 아닐까.

한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 ‘운명과도 같이’ 한 권의 책이 찾아온다. 그리고 책을 읽어버린 ‘나’는 어제까지 친숙했던 이 세계에 더 이상 속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때마침 같은 책을 읽었던 한 여인(자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물론 ‘외사랑’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연인(메흐메트)이 있었다. 오래 전에 그 책에 홀려 먼 여행을 떠나 돌아온, 이제는 ‘그 세계’의 존재를 믿지 않은 회의주의자. “난 그 세계를 찾아낼 거야” 라고 들떠 말하는 나에게 그는 경고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욕망에서 그의 경고를 물리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거리에서 총을 맞아 쓰러지고 자난은 어딘가로 사라진다.

사라져버린 자난을 찾아, 또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주인공은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수단은 버스이다. 왜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근대화 계획을 수립하던 터키 정부가 철도 활성화 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에. 주인공의 즐거웠던 유년시절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르크프 아저씨’는 자신의 인생의 전부를 철도청에서 일했던, 철도가 터키를 부흥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 때문에 ‘소년소녀 꿈나무’들을 위해 철도 만화를 그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 철도가 점점 쇠퇴해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정년을 맞이했고, 또 어느 날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어린 시절 아저씨와 ‘나’는 기차역 이름 대기를 종종 하곤 했다. … 헤킴한, 퀴식헤프레,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 아저씨는 캐러멜 하나를 주었고, 그 캐러멜을 입에 넣자마자, 나는 다음 역을 기억해냈다. “비라바”, “브라보” 세월이 흘러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는 어느 날 밤 딸아이와 함께 기차역에서 그 놀이를 한다. 그 다음 역은? 딸아이에게 캐러멜을 주던 순간, 나의 머릿속엔 “비라바”라는 역 이름이 떠오른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 르프크 아저씨와 나눴던 그 다음 대화도 기억해냈다.

언젠가 책 한 권을 쓸 거란다. 주인공에게 네 이름을 붙일 거란다.
<페르테브와 피터>같은 책이요? 이렇게 묻고 있는 나의 심장은 쿵쿵 뛰었다.
아니 그림이 없는 책이란다. 그러나 너의 이야기를 쓸 거란다.

<
새로운 인생>의 기원?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찾아낸 메흐메트는 왜 이름을 ‘오스만’이라고 바꿨을까? 아니면 왜 주인공은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에 그렇게 매료된 것일까? 모든 의문들이 풀리는 지점. 또 그 ‘비라바’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마침내 메흐메트가 정착한 마을이자, 주인공이 그를 발견하고 총으로 쏘았던 바로 그 마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의 이야기다. 아직 우리는 버스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야 한다.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 사고, 죽음, 그리고 버스 사고의 현장에서 ‘나’는 운명적으로 그녀와 재회한다. “나는 ‘이 곳엔 어쩐 일이야?’라고 묻지 않았어. 그리고 내게 이곳엔 웬일이냐고 묻지 않았고.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둘만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했던 한없이 두근거렸던 버스여행. 도시에서 도시로, 마을에서 마을로. 그 사이에 ‘나’는 자난과 함께 버스 안 운전석 위에 설치된 텔레비전 영화에서 ”천 번이 넘는 키스신“을 보고, 그 때마다 ”복잡하면서도 심오하고 격하고 의미 있는 뭔가“를 욕망한다. 그리고 다시 운명적인 사고를 겪으면서, 그들은 나린 박사를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흔한 청춘 로망이다. 여기에는 하루키적인 ‘상실’의 냄새도 강하게 풍긴다. “책을 쫒는 모험” 하지만 ‘메흐메트’, 아니 한 때의 ‘나히트’의 아버지이자, 어떤 ‘음모’의 중심인물인 ‘나린 박사’와 만나면서 이 여행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나린 박사’,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사상을 오염시키는 책과 글의 공격, ‘거대한 음모’에 대항하기 위해, “주의 깊고 인간적이며 겸손한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 조직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위대한 보물”인 “기억”을 잃고 속수무책의 얼간이가 되지 않게 할 것이고, 그리하여 이 비참한 망각의 시간이 아무리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해도, 마침내 영광스럽게 “절멸의 위기에 놓인 우리 자신의 순수한 시간, 그 역사를 통치할 주권”을 새로이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그가 생각한 것은 모든 친구들에게, 물건들을, 그들의 손과 팔이나 다름없으며 시처럼 영혼을 완성시키는 그 진실한 것들을, 허리가 들어간 찻잔을, 기름병들을, 필통들을, 이불들을, 당신이 진실되게 만드는 그 어떠한 물건이든지 보존하는 것이었다. 책에 대한 그의 불타오르는 분노는 자신의 과업의 ‘계승자’가 되어야 할 유일한 아들이 책에 의해 오염되어 집을 버리고 결국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뜬 자신의 아들 때문이기도 하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선택하는 길은 결국 책을 읽은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라는 가장 비이성적인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린 가문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 역시 나중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히트’라는 이름의 그 아들은 결코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자난’의 연인으로, 그가 몇 개월 전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메흐메트임을.

린 박사의 ‘조사원’들이 열심히 수집한 정보들을 토대로 나는 메흐메트를 찾아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지들에서 보았던 것은 한 때 책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그 이후의 삶들이다. 하지만 이제 여행의 목적은 바뀌어버렸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어버렸다. 자난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책에 나오는 세계와 나의 적을 찾고,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길을 지나오는 동안 나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나린 박사의 ‘조사원’들이 열심히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나는 메흐메트를 찾아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지들에서 보았던 것은 한 때 책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그 이후의 삶들이다. 그것은 내 여행의 목적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어버렸다. 자난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책에 나오는 세계와 나의 적을 찾고,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길을 지나오는 동안 나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나는 수많은 메흐메트들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어느 날 운명적으로 자신이 찾던 ‘메흐메트’와 재회한다. “다리를 꼬고 앉아 세상을 잊은 채 내가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평온함에 가득 차 신문을 읽고 있는”, 이제는 자신의 이름인 ‘오스만’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는 메흐메트를. 이제 책이 주었던 빛은 그에게서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철자, 마침표 하나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책을 베껴 쓰지만, 그가 이런 일과를 되풀이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도시의 부자들, 전통주의자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의 노력과 신념, 현신, 인내심을 존경하는 사람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고집하며 사는 바보가 자기들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만족하며 산다는 사실에 일종의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 속에서 ‘작은 전설’이 되기도 했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신선한 빵을 치즈 조각과 함께 먹을 때, 그의 인생이 이미 자리를 잡았고, 책 속의 표현처럼 '정상궤도에 들어섰음'을 나는 보았다. 그도 나처럼 책 때문에 길을 나섰지만, 그 여정 속에서 그는 내가 발견하지 못한, 죽음과 사랑과 재앙으로 충만한 여행과 모험과 평화를 발견해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영원히 변치 않을 어떤 균형을 찾아냈다. 내면의 평화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가 매일같이 손, 손가락, 입, 턱, 머리로 작은 동작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치즈 조각을 조심스럽게 깨물면서 찻잔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의 차를 음미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찾았던 균형의 평온은 그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영원한 시간을 주었다. 나는 호기심과 긴장 때문에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떨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질투심에, 상실감에, 아니 어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폭발에,  ‘나’는 컴컴한 극장에 앉아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과 가슴에 대고 정면으로 세 방을 쏘았다.” 그리고 총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나린 박사의 자택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자난은 떠나고 없었다. 여행은 끝나고 만 것이다.

이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