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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로서의 인류학자 - 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ㅣ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병화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가끔씩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어떤 차이가 있나 궁금할 때가 있었다.. 어차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한 것이 아니냐고.. 그런데 왜 인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은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
<융합>이 대세라고들 하지만, 여전히 이들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은 편이다.. 인문학은 사회과학이 뻔한 것에 힘들 들인다고, 즉 이미 결론이 나와 있는데도 그걸 밝히기 위해 과학적 방법을 들이대는 짜고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사회과학은 인문학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단적으로 사회과학자에게 당신의 사유는 매우 인문학적이군요 라고 한다거나, 혹은 인문학자에게 당신의 글은 과학적이군요 라고 말하면 그건 칭찬일까, 아니면 욕일까..
물론 일반인들에게 이런 싸움은 너무나 시시한, 혹은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동안 내겐 이 문제가 꽤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철 모르던 시절, 나는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아주 우연히>(강조) 전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인류학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경계에 있는 학문이라느니, 양자를 접합하는 학문이라느니 하며 자화자찬하는 경우가 있지만(인류학이 과로 설치된 대학을 보더라도, 어느 곳은 사회과학대학에, 또 어느 곳은 인문대학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어디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 인류학과의 풍토가 더 인문학적이냐, 혹은 사회과학적이냐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실제로 인류학은 사회과학 내에서는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또 인문학에서는 (문사철에 비해) 전통이 얕다는 이유로 이래저래 따돌림 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그 때문에 소수학문인 인류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더욱 과학적이고 싶었고, 그래서 더욱 <과학>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이 인간의 삶과 관련된 복합총체라고 한다면, 그리고 인류학이 인간의 제도만이 아닌,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인류학이 과연 인문학임을 포기할 수 있을까..
기어츠의 <저자로서의 인류학자>를, 그리고 또 베네딕트의 글 <인류학과 인문학>을 읽으면서, 이런 글들이 조금 더 빨리 번역되었더라면, 한동안 떠안고 있었던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는 나름의 길들을 보다 빨리 찾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문적 성향의 보수성 때문에 기어츠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 관계 없이현재의 인류학이 처한 곤경에 대한 그의 진단은 너무나 적확하다..
민족지가 <세계를 종이에 담아내는 글쓰기>의 일종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검토가 가로막혀 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민족지란 실용적 형태의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문학적 문제만 궁리해서는 안 된다는 편견, 2)섬세한 관심을 기울일만큼 가치 있는 인류학 문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한계, 쉽게 말해서 (아쉽지만)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인류학에는 플로베르도 콘래드도 발자크도 없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3)지식이 전개되는 방식에 관심을 쏟다 보면 어떤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능력이 약화된다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쉬운 점은 진단에 비해, 그가 풀어내는 본문의 이야기가, 자신의 섬세하고 유려한 이전의 저작들에 비해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다는 것.. 기어츠는 자신이 선정한 네 명의 인류학의 거장들에 대한 일종의 텍스트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듯한데, 바르트-푸코로 이어지는 <저자> 논의를 (아쉽게도) 아주 거칠게 건너 뛰면서, 그들을 하나의 정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끝내고 만다.. 뭐, 거기까지 기어츠에게 바란 것은 아니었으니, 그닥 아쉬움은 없지만, 그래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에 있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메시지가 퇴색되지 않을까 그게 오히려 문제다..
자신이 이미 시인이었던 베네딕트는 그 문제에 대해 훨씬 이전부터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더구나 <과학주의의 화신>이라 불렸던, 자신의 존경하는 스승 <파파 보아스> 밑에서 (서로) 눈치를 보면서(이 역시 중요하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눈치를 볼 수 있는 풍토.. 아마 초기 인류학의 진정성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인문학적 관심을 어떻게든 인류학과 접목시키려 했기에, 그녀의 고민은 더욱 컸을 것이다.. 당시 미국 사회과학계의 풍토에서는 불모에 가까운 여성 학자로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그녀가 이뤄낸 성과들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값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미국 인류학회 회장직을 퇴임하면서 <인류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름의 강연을 했던 것은 그런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과학자는 동물들에 관해 더 큰 일반화의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 동물들은 학습하고 발명하는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활방식, 즉 문화를 창조하는 종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질서를 벗어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연의 진화에 의해 인간은 상황과 본능의 동물에서 더욱 나아가 창조와 발명의 존재가 되었다.
... 인문학은 사회과학이 뻔한 것에 힘을 들이고, 또 무미건조하다고 비판한다. 사회과학은 인문학이 너무 주관적이라고 비판한다. 인류학자는 뻔한 것에 힘을 들인다는 비난이나 주관적이라는 비난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인류학자는 두 가지 방법을 모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0여년이 흐른 지금, 인류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