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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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돌계단이 있었다. 다이스케는 몽롱한 상태로 거기에 주저앉은 채 이마를 손으로 누르고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감았던 눈을 떠보니 커다란 검은 이 보였다. 위로는 굵은 소나무 가지가 생 울타리 밖으로까지 뻗어 있었다. 다이스케는 절 입구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それから> 중에서-

 

다이스케의 그 후’(それから)는 소세키 자신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1년 뒤에 저술된 <>은 산시로에게서 다이스케에 이르는 여정의 한 종착역이다. 서두에서부터 미리 한 종착역임을 밝히는 이유는, 흔히 그의 삼부작을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필연적, 혹은 운명론(運命論)’적 귀결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시로, 다이스케, 그리고 쇼스케[宗助]로 이어지는 필연은 사후적인해석에 불과하다. 산시로에게도, 그리고 다이스케에게도 그들 앞에 펼쳐진 길은 여러 갈래일 수 있으며, <>은 그 한 갈래의 길인 것이다.

 

<>의 주인공은 이제 40대의 나이에 접어든 중년의 쇼스케이다. 소세키는 잡초가 무성한 깎아지른 절벽 밑에 자리 잡아, “해도 잘 들지 않는셋집에 살고 있는 쇼스케-오요네[] 부부의 일상을 도입부에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모를 과거를 간직한 듯한 그들 부부의 삶은 평화롭고, 단조로우며 그 때문에 권태롭기까지 하다.

 

물론 그들은 금슬이 좋은 부부이다.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6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반나절 이상 어색한 기분으로 지내본 적이 없었다. 말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적은 더욱 없었다. 두 사람은 포목점에서 옷감을 사오고, 쌀집에서 쌀을 사다가 밥을 지어 먹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사회는 생활의 필수품을 공급해주는 곳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 부부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서로 부둥켜안고 몸을 녹이듯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을뿐이다. 그러나 결코 그들은 처음부터 사회에 흥미를 잃었던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설의 쇼스케는 부유하고 붙임성 좋은 사내였다. 오히려 그들의 소슬한삶의 풍경은 사회가 두 사람만을 고립시켜 놓고 그들로부터 차갑게 등을 돌린 결과였던 것이다.

 

‘6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세키는 쇼스케와 오요네, 그리고 쇼스케의 친구 야스이[安井]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추억편(追憶篇)’으로 정리하고 있다. 추억은 판본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それから>의 과거형처럼 읽혀진다. 도쿄의 재산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학창시절을 보내던 쇼스케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야스이의 여자인 오요네와 사랑에 빠져, 창백한 이마에 불륜(不倫)의 낙인을 찍히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살아가는 이야기. 하지만 이 과거에 대한 소세키의 묘사는, <それから>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미치요를 놓고, 사회의 관습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自然에 따를 것인가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다이스케의 고뇌, 그리고 최후의 권위는 자기에게 있음을주장하는 그의 회심은 적어도 여기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둘의 관계는 아무런 준비도 안 된 두 사람에게 돌연 휘몰아친 강풍때문에 쓰러져버린 것으로 정리된다. 말하자면 다이스케의 고뇌나 회심의 계기가 적어도 <>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잔혹한 운명이 변덕을 부려 불시에 덮침으로써그들은 장난치듯 함정 속에 빠져 버렸을뿐이다.

 

<それから>에서 <>으로의 굴절을 가져온 소세키 내면의 변화를 추측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추적하는 행로는 본고의 목적이 아니다. 단지 여기서는 <それから>에서 나타났던 어렴풋한불안이 <>에서는 훨씬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근대 일본사회에서 확고한 개인주의적 자아가 살아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소세키의 불안이 극단적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불안은 후반부에 접어들어, 주인공 쇼스케가 이웃집 남자로부터 과거 오요네의 남자이기도 했던 친구 야스이가 현재 만주(滿洲)에 있으며 조만간 도쿄에 들를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이후, 한층 심화된다.

 

극도의 신경쇄약에 빠진 쇼스케가 찾아간 곳은 공교롭게도 전작 <それから>의 결말부에서, 병석에 누운 미치요를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방황하던 다이스케가 맞닥뜨렸던 검은 문(), 즉 산문(山門)이다. 큰스님은 쇼스케에게 父母未生以前, 本來面目은 무엇인가라는 화두(話頭)를 던진다. 그러나 산문행은 일종의 도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의 불안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 주어진 10일이 지났지만, 그는 불안을 치유해줄 깨달음은 얻지 못한다. 다만 떠나기 전 자신의 처지를 반추하는 대목은 쇼스케가 자신의 곤경을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점에서 흥미롭다.

      

나는 나의 문을 열려고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뒤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없다. 네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문의 빗장을 열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리하여 그 수단과 방법을 분명 머릿속에 준비했다. 그러나 빗장을 실제로 열 수 있는 힘은 전혀 양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자기가 서 있는 장소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능하고 무력하게, 닫힌 문 앞에 남겨져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문 밖에서 서성이는 운명으로 태어난 듯했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통과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가는 건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는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문은 카프카F. Kafka의 단편소설 앞에서의 무대인 법()이라는 문을 연상시킨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문 앞에 서 있다. 그들은 문 앞에 내버려진’(abandonner) 존재들이다. 그들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어떻게 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둘 다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카프카의 주인공 시골 남자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 문지기와 갖은 교섭을 다해보지만, 결국 세월이 흘러 임종이 닥칠 때까지도 문 앞에 머물러 있다. 쇼스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가 드러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시골 남자는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의 문은 그가 처음 왔을 때는 열려 있는 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임종이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자, 문지기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겠다고말한다. 왜 문지기는 문을 닫겠다고 말한 것일까. 이제 죽어가는 그에게 문이 열려 있든 닫혀 있든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여기서 아감벤G. Agamben은 열려 있다는 것이 법의 침해할 수 없는 권능이자 법 특유의 힘이라면, 시골 사람의 모든 행동은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해 결국 문을 닫도록 만들려는 인내심 가득한 고도의 전략이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흥미로운 주석을 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골 사람은 잠재적인 예외 상태를 현실화시키고 문지기에게 법의 문을 닫도록 강제하는 메시아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아감벤의 이런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그가 죽어가기 직전이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 생()을 문을 통과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걸었기(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소세키의 주인공 쇼스케에게서는 그런 메시아주의의 희망을 찾아낼 수 없다. 과연 그 빗장은 실제로 걸려 있는 것인지는 고사하고, 그는 심지어 문지기와의 교섭조차 시도하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곤경에서 구해주는 것은 계절의 변화라는 섭리였다. 혹독한 겨울이 가고 다시 찾아온 봄은 야스이의 만주행을 알리는 하나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쇼스케-오요네 부부의 삶도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구원에 불과하다. 거실 문 유리창으로 비쳐드는 화창한 햇살을 바라보며 정말 고맙고 기뻐요, 이제 봄이 돼서라고 말하며, 양미간을 활짝 펴는 오요네에게, 고개를 숙인 채 손톱 깎는 가위만 움직이면서, “, 하지만 다시 또 겨울이 올 거야.”라고 내뱉는 쇼스케의 대사는 그 일시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한 비평가는 <それから>에서 <>으로의 굴절을, 소세키 자신이 밝게 빛나는 근대의 반대쪽에 빛이 비치지 않는 그림자의 영역을 인정한 것으로”, 근대적인 개인주의 원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그림자 인생에 拘碍되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는 한 개인의 인생을 반추해보더라도 당연한 진리이다. 더구나 소세키와 같이 메이지 일본이라는 과도기에 살았던 인간에게 그 음영(陰影)은 더욱 뚜렷하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소설에 묘사되는 쇼스케-오요네 부부의 삶이 아무리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해도, 이는 광장의 부재로 인한 밀실로의 침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근대 낭만주의의 기획에서 볼 때는 일종의 후퇴인 것이다.

 

소세키는 결코 섣부른 낙천주의자는 아니다. 1911년 와카야마에서의 유명한 강연인 현대 일본의 개화에서도 그는 현재 일본의 상황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진실이라는 명제를 모르고 있을 때는 알고 싶지만 알고 난 뒤부터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며 극히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단지 그가 내릴 수 있는 진단은 가능하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내발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좋으리라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은 근대 일본의 청년들의 열정이 빠지기 쉬운 검은 구멍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쇼스케의 기구한운명 때문에 감미롭고 강렬한백합 향기 속에 울려 퍼진 다이스케의 회심이 빛을 잃지는 않는다. 이 역시 또 하나의 길인 것이다.

 

 

그 세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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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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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이면 인간은 웬만한 일을 할 수 있지. 그러나 세월은 빠른 거라서 말이오. 7년쯤이야 금방이야.” 

-<三四郞> 중에서-

      

노노미야 군이 스물 세 살의 산시로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히듯, <それから>에서는 산시로와 같은 클래스에서 비슷한 수업을 받았음직한 서른 살의 다이스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는 7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배짱 없는 사내다. 하지만 산시로에게는 자신의 23년간의 약점일만큼 감추고 싶은 치부였던 그 배짱 없음도 다이스케에게는, “문명시대에는 궁술이나 검술과 다름없는 케케묵은 도구에 지나지 않은것이 될 정도로, 7년이라는 세월은 다이스케를 변모시켰다. 젊은 시절에 가졌던 사랑이나 우정, 진리와 같은 이상도 이제는 어느덧 옅어졌다. 학창 시절에 사물을 이지적으로 따지고 들며 의심할 때는 불안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것이 마치 하늘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은 섣불리 돌 같은 것을 던지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미 “‘닐 아드미라리’(nil admirari)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 경지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물론 아버지의 경제력이다. 다이스케의 아버지 나가이 도쿠[長井得]는 과거의 유신지사, 그리고 지금은 재계의 거물, 즉 메이지의 출세코스를 그대로 밟은 인물이다. “왜 일을 하지 않는 거지?”라는 친구 히라오카[平岡]의 말에 그는 일하지 않는 것은 내 탓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 대답한다. 이 대목은 나름대로 러일전쟁 이후 세계자본주의에 총체적으로 노출된 채 허덕이는 일본의 현실에 대한 다이스케의 예리한 문명비판적인 시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 예리한 감식안(鑑識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자본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다이스케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신경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해버린 고등유민”(高等遊民), 그것이 바로 다이스케의 모습이다. 물론 그 불안은 그의 몸속에서 깨끗이 사라졌다기보다는, 가장된 무신경에 의해 억눌려 있는 것이다. <煤煙>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다이스케가 불현듯 깨닫는 것처럼, 불안의 씨앗은 오히려 그의 몸속에 배태되고 있다.

 

다이스케가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미치요[三千代]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 불안의 씨앗은 그의 내면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불안의 씨앗은 일종의 암시, 복선이기도 하다. 이제는 히라오카의 아내가 되어버린 미치요는, 한 때 다이스케가 히라오카에게 직접 소개시켜 준 여자였다. 물론 히라오카와 결혼하기 전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전반부에 제시되지만, 그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는 당사자들(적어도 다이스케는) 자신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미치요는 점차 다이스케의 평온한논리(論理)의 영역을 침범해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녀의 존재는 누군가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 있는 거지요?”라는 형수의 물음을 듣고 갑자기 떠오르는대상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다음의 재회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를 서로의 얼굴에서 읽는다.” 물론 이 대목은 둘 사이의 관계에서 의미심장하다. 이후 미치요가 오기를 기다리는 다이스케의 마음을 그리는 대목에 이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진전된다. 친구의 아내인 미치요를 기다리면서 자신이 느끼는 마음, 즉 그 비논리적인 감정에 대해 부끄러워하지만,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그런 비논리적인 상태가 유일한 사실이니까 어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三四郞>에서의 헬리오트로프와 같이, 백합 향은 이 소설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처음 다이스케의 집에 홀로 찾아왔을 때, 미치요는 백합을 사온다. 그 꽃은 그녀가 결혼하기 이전 친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을 때, 오빠의 친구였던 다이스케가 사온 꽃이기도 하다. 감미롭고 강렬한 향기가 두 사람 사이에 서릴 때다이스케는 그 강렬한 자극에 멈칫한다. 미치요가 코를 꽃잎 가까이까지 갖다 대고깊이 그 향기를 들이마실 때, “그렇게 가까이서 맡으면 안 됩니다라고 엉겁결에 내뱉는 다이스케의 대사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최후의 몸짓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백합 향은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서로의 과거를 읽게 해주는 강한 매개체이다. 다이스케 자신도 예전에는 코를 대고 향기를 맡지 않았던가. 그 향기를 맡으면서 다이스케는 오랜만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 히라오카와의 재회에서 그는 히라오카 부부를 삼 년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고 그것을 기회로 미치요에 대한 연민의 정을 영원히 떨쳐버리려는 최후의 시도를 거의 무의식적으로행한다. 물론 이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이 현재의 미치요를, 병든”, “아이를 잃은”, “남편의 사랑을 잃어가고 있는”, 그리고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미치요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고, 하지만 이들 부부 사이를 정면에서 영원히 떼어놓으려고 할 만큼 대담하지는 않다고”, 그의 사랑은 그렇게 무분별하지 않다고믿고 싶었다. 하지만 <三四郞>에 나온 의미심장한 어구(물론 번역하기 힘든), “pity is akin to love”가 암시하듯, 미치요는 다이스케로 하여금 어떤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이는 다이스케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이다.

      

여기서 그는 하나의 딜레마에 봉착했다. 그는 자기와 미치요와의 관계를 앞뒤 가리지 않고 자연(自然)이 시키는 대로 발전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옛날로 돌아갈 것인지, 그 어느 쪽이든 선택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잃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외의 모든 어중간한 방법은 거짓으로 시작해서 거짓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전부 사회적으로는 수용 가능하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미치요와의 관계를 하늘의 뜻에 따라서-그는 그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발전시켰을 때에 뒤따를 사회적 비난의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늘의 뜻은 따르지만 인간의 법도를 어기는 사랑이란 보통 그 사랑의 주체가 죽어야만 비로소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그는 만일의 경우에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 지도 모르는 비극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는 또 그 반대의 경우로서 미치요와의 영원한 이별을 상상해보았다. 그때는 하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의지에 충실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그 수단으로서 아버지나 형수가 권유하는 결혼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는 그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모든 관계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위 인용 대목에서 소세키는 자연하늘’()을 동격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때 하늘은 동아시아의 유교 전통에서 형성되어 온 하늘 개념, 즉 불변의 도리로서의 오륜오상’(五輪五常)보다는 서구의 낭만적 사랑에 전형으로 등장하는 자연개념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마담 보바리를 유혹하면서 불랑제가 자신들의 사랑을 자연적인 것, 혹은 하늘에 따르는 것이라고 속삭일 때 등장하는, 인간의 법도를 넘어서는 사랑=자연=하늘의 뜻이라는 등식을 소세키는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담 보바리>의 로맨스가 일종의 풍자satire인 반면, 소세키는 다이스케의 사랑에 조금 더 순수한 낭만주의적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치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그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다이스케의 심경을 그리는 대목은 소세키의 다른 작품, 아니 근대 일본의 어떤 작품과 비교한다 하더라도, ‘치명적 사랑에 대한 묘사에 있어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이스케는 백합을 바라보면서 방을 가득 채운 강한 향기에 스스로를 송두리째 내맡겼다. 그는 그런 후각적인 자극 속에서 지난날의 미치요의 모습을 분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과거 속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의 옛 그림자가 연기처럼 휘감기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 오늘 비로소 自然의 옛 시절로 돌아가는 구나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안위를 온몸에 느꼈다. 왜 좀 더 일찍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왜 自然에 저항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는 비속에서, 백합 속에서, 그리고 재현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완벽하게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은 어디에도 욕망이 없고 이해관계를 따지려들지도 않았으며 자기를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自然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사회학자 N. 루만은 17-8세기 서구 유럽의 사랑의 코드화 과정을 분석하면서, 18세기 중반에 자연개념이 섹슈얼리티와 격정적인 감정의 공통분모를 찾게 되고, 동시에 이 공통분모는 사랑이 사회의 족쇄로부터 풀려나 자연으로서 사회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표현하기에 이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이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열정을 그들의 본성으로 묘사하며 자연의 이름으로 사회의 도덕적 관습을 전복하는 소설들이 18세기 근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과연 괴테의 이 소설에서 아름다운 자연은 주인공의 심적 상태와 교묘하게 융합되어 한 인간의 생명력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물론 소세키의 전체 작품세계에서 자연은 서구 낭만주의의 자연 개념이 보여주는 격렬함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소세키의) ‘자연이 자신에게서 시작해서 자신에게로 끝나는 의식의 바깥에 전개되는 비존재(非存在)의 어둠이며, 소세키는 그것을 신으로도 하늘로도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자연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소세키의 자연은 인간주체에 있어 에로스적인 살아 있는 자연이라기보다 타나토스thanatos적인 죽은 자연’, 즉 자신에게서 시작해서 자신에게로 끝나는 개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존재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후기저작들, <行人>, <道草> <明暗>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성격의 자연관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게 본다면 <それから>는 소세키의 저작 세계에서 예외적으로 에로스적인 자연을 그린 작품이며, 다이스케가 보여준 결단’, 그리고 그 상징물로서 백합이라는 꽃의 이미지는 그런 예외성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라면 그의 결심이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히라오카가 미치요와의 결혼 이야기를 친구인 그에게 꺼냈을 바로 그 때, 분명히 자신의 의사를 밝혔어야 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는 친구의 도리, 혹은 섣부른 의협심이라는 치기 때문에 자연에 반하여 오히려 히라오카와 미치요의 결혼을 주선하고 말았다. 그는 그 때의 행동을 후회하며 히라오카에게 너무도 자연을 경멸했기 때문에, 자연에 복수당한것이라고 말한다.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두고 갈등하는 대목에서, 마치 자신의 대선배베르테르의 운명을 떠올리듯, “하늘의 뜻은 따르지만 인간의 법도를 어기는 사랑이란 보통 그 사랑의 주체가 죽어야만 비로소 사회(社會)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고 토로한다. 괴테는 베르테르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함으로써, 베르테르를 不滅의 존재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소세키는 낭만주의의 화신 괴테만큼 능청스럽지못했다. 자연과 사회는 원래부터 양립하기 어려운 대척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힘이 강할수록 자연은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들이 모인 사회라기보다는 개인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억압하는 세간’(世間)에 가까운 근대 일본 사회에서 그의 죽음은 자칫하면 개죽음이 될 지도 모른다. 소세키는 메이지 일본의 허약한 사회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소세키는 도덕이나 윤리를 모르는 사랑의 예측 불가능한 힘에 스스로 놀라 뒤로 물러선 것인지도 모른다. 소세키가 자신의 주인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스캔들을 폭로시킴으로써, 다이스케를 사회/세간이라는 심판대에 올려놓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파멸이었다.

 

파멸의 예감은 미치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을 때 이미 스쳐지나간 바 있다. 다이스케는 이 순간적인 행복에서 생기는 영원한 고통이 갑자기 그의 머리를 침범하면서 이 선택이 결국 그의 파멸을 몰고 올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들어맞았다. 히라오카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한 후 곧바로 그는 히라오카, 아버지, 형 등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례로 의절 당한다. 그것은 닐 아드미라리적 생활을 가능케 했던 본가로부터의 금전적 지원의 단절이자 사회에서 내팽개쳐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의에 빠져 일자리를 알아보러 길거리로 나선 다이스케의 머리 위로 태양이 내리쬐고”, “메마른 먼지가 불티처럼 그의 맨발에 달라붙어서”, 그는 오글오글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빨간 우체통이 눈에 띄었다. 그러자 그 빨간색이 갑자기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양산집 간판에 빨간 양산 네 개가 겹쳐진 채 높이 매달려 있었다. 양산 색깔이 또 다이스케의 머리로 들어와 뱅글뱅글 소용돌이를 쳤다. 네거리에 새빨간 색의 커다란 풍선을 팔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전차가 갑자기 모퉁이를 돌자 풍선이 쫓아와서 다이스케의 머리에 들러붙었다. 소포 우편물을 실은 빨간 차가 잠시 전차와 스치듯 지나갈 때 또 그 빨간색이 다이스케의 머릿속에 흡착했다. 담뱃가게 입구에 쳐놓은 布簾이 빨갰다. ‘대매출이라고 쓰여 있는 깃발도 새빨갰다. 전신주가 빨갰다. 빨간 페인트칠을 한 간판이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세상이 온통 새빨개졌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해서 뱅글뱅글 불길을 내뿜으며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겠노라고 결심했다

    

다이스케를 사회라는 심판대 위에 올려 세운 소세키의 의도에 대해 여러 비평가들은 이후 작품에 대한 소세키 자신의 평을 인용하면서, 머뭇거림의 의미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그 머뭇거림은 소세키 자신이 메이지 일본 사회라는 벽 앞에서 느낀 공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여러 강연에서(現代日本開化, 文藝道德) ‘자연주의 도덕혹은 개인주의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文藝道德(1911)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소세키는 낭만주의 문학과 자연주의 문학이 각각 메이지 이전의 도덕과 이후의 도덕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말하면서, 자연주의적 도덕은 인간의 자유를 지나치게 중시하여방종에 빠질 우려가 있고, 그 때문에 이에 대한 부분적인 반동으로 낭만주의 도덕이 일어나게 될수 있지만, “아무래도 자연주의 도덕은 앞으로 계속 전개되어 나갈 것으로 전망한다. 결국 이후의 일본인에게 바람직한 도덕이란, “실현할 수 있는 이상을 품고서 거기에다 미래의 이웃 동포들과 조화를 추구하고, 또 종래의 약점을 관용하는 동정심을 가지고 현재의 개인들과 융합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이 강연을 듣고 있노라면 왠지 소세키 자신이 만들어낸 다이스케라는 인물에 대해 자기 자신이 질타를 가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이스케의 회심이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자, 소세키 자신이 가장 공력을 기울여 만들어낸 대목이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계몽가이자 동시에 문학가인 소세키의 두 면모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계몽가로서 근대 일본 사회에서 자연주의 도덕과 낭만적인 도덕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위는 결코 문학의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문학이라는 실험을 통해 메이지 일본 사회에 저항하며 최후의 권위는 자기에게 있음을주장하는 다이스케라는 근대적 개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다이스케의 회심이 있었기에, 근대 일본은, 사회, 혹은 관습의 요구에 저항하는, 근대적 개인의 한 자화상을 불완전하게나마 갖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두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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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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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차의 맹렬한,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화물처럼 취급하며 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객차 속에 갇힌 개인과, 개인의 개성에 추호의 주의도 베풀지 않는 이 기차를 비교하며, 위험하다, 위험하다,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문명은 이와 같은 위험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 차 있다. 깜깜한 어둠 속을 맹목적으로 달리는 기차는 위험한 표본 중 하나이다.

- <草枕> 중에서 -

 

메이지(明治) 40, 적들 앞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해 죽어줘야겠어라고 외치며 검을 휘두르던 유신지사(維新志士)의 시대는 가고, 일본은 근대화의 빠른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三四郞>는 그 정신없이 돌아가는, 그래서 위험하기까지 한(“위험해! 위험해!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해!”) 세계인 제국의 수도도쿄 한복판 속에 던져진 구마모토 출신의 한 평범한 시골뜨기청년의 수업시대를 다룬 소설이다.

 

이미 그는 도쿄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만난 여성과의 해프닝으로 통과의례를 나름대로 톡톡하게 겪은 뒤였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었을 때 주인공 산시로[三四郞]가 겪게 되는 초조와 불안을 소세키는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묘사해간다. “산시로는 수건을 펴서 자신이 잘 자리에 두 장 잇대어 길게 깔고, 그 위에 가늘고 길게 누웠다. 그날 밤 산시로의 손도 발도 그 폭 좁은 수건 밖에는 한 치도 나가지 않았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여자로부터 당신은 어지간히 배짱이 없는 분이군요.”라는 말에 플랫폼 위에 튕겨 나온 듯한기분이 든 산시로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집어든 책은 베이컨의 논문집 23페이지였다. 소설에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지만, 논문집의 23페이지에는 ()의 노예인 인간이 갖는 오류[劇場偶像]의 대표적인 예로 연애가 갖는 폐해를 지적하는 대목이 기술되어 있다. 베이컨은 이 글에서 연애는 무방비 상태의 마음에 들어옴과 동시에 드물기는 하지만 감시를 소홀히 하면 요새와 같이 견고한 마음에도 들어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베이컨의 23페이지는 아직 젊은 산시로가 자기 무장을 위해 걸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갑옷이다. 낯선 여자와의 첫 만남에서 겪은 두려움은 이후 산시로의 미래에 암운(暗雲)을 드리운다. 그 두려움은 학교 연못에서 미네코[美禰子]를 처음 만났을 때 다시 엄습한다.

 

산시로는 분명히 여자의 까만 눈동자가 움직이는 찰나를 의식했다. 그 때 색채감은 말끔히 사라지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무엇과 마주쳤다. 그 무엇은 기차에서 만난 여자에게 당신은 배짱이 없는 분이군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어딘가 비슷하다. 산시로는 두려워졌다.

 

새로운 도쿄 생활과 함께 본격적인 수업시대에 진입하면서 산시로는 학교 주변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소심한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인 친구 요지로[与次郞], 서양에서도 인정받는 위대한 과학도이지만 고작 55엔 월급을 받는 가난한 대학원생 노노미야[], 그리고 대단한 철학적 식견을 갖췄지만 전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히로타[広田] 선생, 그리고 첫 만남에서 그에게 모순이라는 혼란을 불러일으킨 연못의 여자미네코가 그들이다. 처음으로 전차를 타보고, 강의를 듣고, 또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세 개의 세계라는 선택지가 자신 앞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첫 번째 세계가 어머니가 있는 그리운 고향의 세계라면 두 번째 세계는 먼지가 내려앉은 책으로 상징되는 학문의 세계, 그리고 세 번째 세계는 부와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 세속적 출세의 세계이다. 이 선택지들은 산시로 또래의 대다수 근대 일본의 지식 청년들이 머릿속에 품었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셔오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여, 그리고 학문에 전념할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는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산시로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며, 그의 수업시대는 이 양자 사이에서 길을 잃은 미아의 행로를 보여준다. 특히 아름다운 여성으로 대변되는 세 번째 길은 배짱 없는산시로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모순의 길이다. 부과되는 수업만으로 그 모순은 해결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최초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그 최초의 도약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산시로는 멍하니 있었다. 이윽고, 작은 목소리로 모순이다.”라고 말했다. 대학의 공기와 저 여자가 모순인지, 저 색채와 그 눈매가 모순인지,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자신의 방침이 두 갈래 길로 모순되어 있는 건지, 또는 매우 기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모순인지, -이 시골출신의 청년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뭔가 모순이었다.

 

소세키는 두 사람의 알 듯 모를 듯한 관계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 간다. 산시로에게 있어 미네코라는 존재는 이해불가능의 영역이다. 노노미야에게 시선이 가 있는 듯하면서도, 왠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않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단청회(丹靑會) 주최의 전람회에서 미네코는 노노미야를 의식하면서 산시로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이유를 묻는 산시로에게 미네코는 ,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걸요. 노노미야씨에게 실례를 할 셈은 아니었는데라고 말하며 깊은 호소력이 있는 눈길을 보낸다. 그녀의 애매한 행동은, 여자 경험이 없는 순진한 산시로를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하다. 산시로의 마음은 실제로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베르테르의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 배짱 없음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일까, 아니면 근대 일본의 프티부르주아지의 허약함일까.

 

산시로는 어떻게든 두 사람 사이에 쳐진 엷은 막과도 같은 것을 찢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뭐라 말해야 찢을 수 있을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말해본다. “그저,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갔던 겁니다.” 그 때 산시로의 귀에 들린 것은 미네코의 입에서 새어나온 희미한 한숨소리였다. 미네코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난 후 산시로는 교회 앞에서 다시 미네코를 만난다. 결혼을 앞둔 미네코가 산시로에게 건네는 손수건에서 풍기는, 예전에 그 자신이 멋모르고 골라주었던 헬리오트로프향은 분위기를 한층 긴장시킨다. ‘헬리오트로프향의 신화적의미는 영원한 사랑이다.

 

결혼하신다지요.” 미네코는 흰 손수건을 소맷자락 속에 집어넣었다. “아세요?”라며 쌍꺼풀진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산시로를 멀리 두고, 도리어 멀리 있는 것을 너무 마음 쓴 눈매다. 그러면서도 눈썹만은 분명 안정되어 있다. 산시로의 혀가 윗 턱에 착 달라 붙어버렸다. 여자는 잠시 동안 산시로를 바라본 후, 듣기 어려울 정도로 한숨을 희미하게 쉬었다. 마침내 가녀린 손을 짙은 눈썹 위에 대며 말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게임은 끝났다. 그러나 이렇게 끝을 내기에는 뭔가 아쉬운 느낌이 남는다. 왜냐하면 결말에 이르러서도 미네코라는 존재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산시로에게 있어 그녀는 모순의 상징적 구현물이다. “뭔가 요염한 그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있는”, “그리하여 확실히 관능에 호소하고 있는”, “그렇지만 관능에 뼈를 뚫고 골수에 통하는”, “달콤한 것을 견딜 수 있는 정도를 넘어, 격렬한 자극으로 변하는”, “달콤하다고 하기보다는 고통인”, “천박하게 교태를 부리는 것과는 다른”, “마주보고 있는 쪽이 반드시 교태를 부리고 싶어질 만큼 잔혹한눈매를 가진 여자.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차분하면서도 거친” “입센의 여자이기도 하다. 소세키의 소설에서 이처럼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여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그 개성에 있어 <草枕>의 나미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 존재감에 있어 미네코를 따라올 수 없다.- 그녀는 주위 남성들의 관음증적 시선의 대상으로 남아있기를, 화폭(畵幅)의 소재이기를 거부했지만, 그런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겨왔던 히로타 선생도, 노노미야 군도, 그리고 산시로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다. 산시로를 바라보는 미네코의 우울한 검은 눈은 바로 영혼의 피로”, “육신의 나른함”, “고통에 가까운 호소에 다름 아니다.

 

제가 그렇게 건방지게 보여요?” 그 말투에는 변명하려는 마음이 있다. 산시로는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는 안개 속에 있었다. 안개가 걷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한 마디로 안개가 걷혔다. 분명한 여자가 드러났다. 걷힌 것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산시로는 미네코의 태도를 원래대로, -두 사람 머리 위에 펼쳐진 맑다고도 흐리다고도 할 수 없는 하늘처럼- 의미 있는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건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인사치레 정도로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돌연히, “그럼, 이제 돌아가죠?” 하고 말했다. 불쾌한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산시로에게 있어서 자기는 흥미가 없는 여자인가 보다고 단념하는 듯한 조용한 말투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메이지 사회의 다 큰 미아”, “스트레이 쉽[Stray Sheep]”이다. 그 말의 이미지는 작은 소리로 혼잣말처럼 스트레이 쉬입하고 천천히 길게 끌어 말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그녀는 결국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소설 종반부의 급작스런 그녀의 결혼은, 주체적인 인물들을 그려내려 했던 작가 소세키의 패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색인(索引)이 붙어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맞추어 보려고도 하지 않는 태평한메이지 일본의 무심한남성들에 대해 미네코는 마지막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도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폭이 다섯 치가 넘는 금테두리를 붙인 숲 속의 여인이라는 그림으로. 그 압도적인 그림에 그려진 미네코의 모습은 산시로가 연못가에서 처음 만났던 부채를 들고 있던 미네코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결국 근대 일본에서 개인주의적 자아를 모색하려는 소세키의 실험 1라운드는 작가의 패배로 끝났다. 에도(江戸)의 전통과 메이지의 근대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당대 일본 사회에서, 산시로의 낭만주의의 싹이 꽃을 피우기에는 그 토대가 너무 박약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에게는 다시 한 번의 각성, 즉 회심(回心)이 필요했다. 다이스케[代助]는 그 회심의 일환으로 소세키가 만들어낸 전사(戰士)였다.

 

예전에 어딘가에 썼던 산시로 전기 삼부작에 관한 글을 조각조각 분해해본다. (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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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적 인간의 출현 - 법의 인류학적 기능에 관한 시론 현대의 고전 7
알랭 쉬피오 지음, 박제성.배영란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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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적 인간homo juridicus의 출현을 서구 기독교 문화와의 관계에서 규명하는 대목, 그리고 한 사회의 유지에 있어 도그마가 갖는 중요성, 그리고 이를 통해 법의 인류학적 기능을 설명하는 논의는 실로 인상적이다. 근대 동아시아에서 만국공법의 수용과 법률적 인간의 진화라는 문제설정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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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대기 샘터 외국소설선 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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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SF문학은 잘 쓴 인류학적 민족지 10편보다 훨씬 많은 영감과 성찰을 준다. 화성연대기 역시 그러한 책이다. 타자와의 조우가 빚어내는 비극적 폭력, 그리고 그 악순환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나야 할 것인가를 브래드버리는 철학적이면서도 너무나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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