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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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차의 맹렬한,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화물처럼 취급하며 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객차 속에 갇힌 개인과, 개인의 개성에 추호의 주의도 베풀지 않는 이 기차를 비교하며, 위험하다, 위험하다,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문명은 이와 같은 위험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 차 있다. 깜깜한 어둠 속을 맹목적으로 달리는 기차는 위험한 표본 중 하나이다.

- <草枕> 중에서 -

 

메이지(明治) 40, 적들 앞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해 죽어줘야겠어라고 외치며 검을 휘두르던 유신지사(維新志士)의 시대는 가고, 일본은 근대화의 빠른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三四郞>는 그 정신없이 돌아가는, 그래서 위험하기까지 한(“위험해! 위험해!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해!”) 세계인 제국의 수도도쿄 한복판 속에 던져진 구마모토 출신의 한 평범한 시골뜨기청년의 수업시대를 다룬 소설이다.

 

이미 그는 도쿄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만난 여성과의 해프닝으로 통과의례를 나름대로 톡톡하게 겪은 뒤였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었을 때 주인공 산시로[三四郞]가 겪게 되는 초조와 불안을 소세키는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묘사해간다. “산시로는 수건을 펴서 자신이 잘 자리에 두 장 잇대어 길게 깔고, 그 위에 가늘고 길게 누웠다. 그날 밤 산시로의 손도 발도 그 폭 좁은 수건 밖에는 한 치도 나가지 않았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여자로부터 당신은 어지간히 배짱이 없는 분이군요.”라는 말에 플랫폼 위에 튕겨 나온 듯한기분이 든 산시로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집어든 책은 베이컨의 논문집 23페이지였다. 소설에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지만, 논문집의 23페이지에는 ()의 노예인 인간이 갖는 오류[劇場偶像]의 대표적인 예로 연애가 갖는 폐해를 지적하는 대목이 기술되어 있다. 베이컨은 이 글에서 연애는 무방비 상태의 마음에 들어옴과 동시에 드물기는 하지만 감시를 소홀히 하면 요새와 같이 견고한 마음에도 들어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베이컨의 23페이지는 아직 젊은 산시로가 자기 무장을 위해 걸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갑옷이다. 낯선 여자와의 첫 만남에서 겪은 두려움은 이후 산시로의 미래에 암운(暗雲)을 드리운다. 그 두려움은 학교 연못에서 미네코[美禰子]를 처음 만났을 때 다시 엄습한다.

 

산시로는 분명히 여자의 까만 눈동자가 움직이는 찰나를 의식했다. 그 때 색채감은 말끔히 사라지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무엇과 마주쳤다. 그 무엇은 기차에서 만난 여자에게 당신은 배짱이 없는 분이군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어딘가 비슷하다. 산시로는 두려워졌다.

 

새로운 도쿄 생활과 함께 본격적인 수업시대에 진입하면서 산시로는 학교 주변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소심한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인 친구 요지로[与次郞], 서양에서도 인정받는 위대한 과학도이지만 고작 55엔 월급을 받는 가난한 대학원생 노노미야[], 그리고 대단한 철학적 식견을 갖췄지만 전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히로타[広田] 선생, 그리고 첫 만남에서 그에게 모순이라는 혼란을 불러일으킨 연못의 여자미네코가 그들이다. 처음으로 전차를 타보고, 강의를 듣고, 또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세 개의 세계라는 선택지가 자신 앞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첫 번째 세계가 어머니가 있는 그리운 고향의 세계라면 두 번째 세계는 먼지가 내려앉은 책으로 상징되는 학문의 세계, 그리고 세 번째 세계는 부와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 세속적 출세의 세계이다. 이 선택지들은 산시로 또래의 대다수 근대 일본의 지식 청년들이 머릿속에 품었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셔오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여, 그리고 학문에 전념할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는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산시로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며, 그의 수업시대는 이 양자 사이에서 길을 잃은 미아의 행로를 보여준다. 특히 아름다운 여성으로 대변되는 세 번째 길은 배짱 없는산시로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모순의 길이다. 부과되는 수업만으로 그 모순은 해결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최초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그 최초의 도약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산시로는 멍하니 있었다. 이윽고, 작은 목소리로 모순이다.”라고 말했다. 대학의 공기와 저 여자가 모순인지, 저 색채와 그 눈매가 모순인지,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자신의 방침이 두 갈래 길로 모순되어 있는 건지, 또는 매우 기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모순인지, -이 시골출신의 청년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뭔가 모순이었다.

 

소세키는 두 사람의 알 듯 모를 듯한 관계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 간다. 산시로에게 있어 미네코라는 존재는 이해불가능의 영역이다. 노노미야에게 시선이 가 있는 듯하면서도, 왠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않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단청회(丹靑會) 주최의 전람회에서 미네코는 노노미야를 의식하면서 산시로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이유를 묻는 산시로에게 미네코는 ,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걸요. 노노미야씨에게 실례를 할 셈은 아니었는데라고 말하며 깊은 호소력이 있는 눈길을 보낸다. 그녀의 애매한 행동은, 여자 경험이 없는 순진한 산시로를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하다. 산시로의 마음은 실제로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베르테르의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 배짱 없음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일까, 아니면 근대 일본의 프티부르주아지의 허약함일까.

 

산시로는 어떻게든 두 사람 사이에 쳐진 엷은 막과도 같은 것을 찢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뭐라 말해야 찢을 수 있을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말해본다. “그저,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갔던 겁니다.” 그 때 산시로의 귀에 들린 것은 미네코의 입에서 새어나온 희미한 한숨소리였다. 미네코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난 후 산시로는 교회 앞에서 다시 미네코를 만난다. 결혼을 앞둔 미네코가 산시로에게 건네는 손수건에서 풍기는, 예전에 그 자신이 멋모르고 골라주었던 헬리오트로프향은 분위기를 한층 긴장시킨다. ‘헬리오트로프향의 신화적의미는 영원한 사랑이다.

 

결혼하신다지요.” 미네코는 흰 손수건을 소맷자락 속에 집어넣었다. “아세요?”라며 쌍꺼풀진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산시로를 멀리 두고, 도리어 멀리 있는 것을 너무 마음 쓴 눈매다. 그러면서도 눈썹만은 분명 안정되어 있다. 산시로의 혀가 윗 턱에 착 달라 붙어버렸다. 여자는 잠시 동안 산시로를 바라본 후, 듣기 어려울 정도로 한숨을 희미하게 쉬었다. 마침내 가녀린 손을 짙은 눈썹 위에 대며 말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게임은 끝났다. 그러나 이렇게 끝을 내기에는 뭔가 아쉬운 느낌이 남는다. 왜냐하면 결말에 이르러서도 미네코라는 존재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산시로에게 있어 그녀는 모순의 상징적 구현물이다. “뭔가 요염한 그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있는”, “그리하여 확실히 관능에 호소하고 있는”, “그렇지만 관능에 뼈를 뚫고 골수에 통하는”, “달콤한 것을 견딜 수 있는 정도를 넘어, 격렬한 자극으로 변하는”, “달콤하다고 하기보다는 고통인”, “천박하게 교태를 부리는 것과는 다른”, “마주보고 있는 쪽이 반드시 교태를 부리고 싶어질 만큼 잔혹한눈매를 가진 여자.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차분하면서도 거친” “입센의 여자이기도 하다. 소세키의 소설에서 이처럼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여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그 개성에 있어 <草枕>의 나미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 존재감에 있어 미네코를 따라올 수 없다.- 그녀는 주위 남성들의 관음증적 시선의 대상으로 남아있기를, 화폭(畵幅)의 소재이기를 거부했지만, 그런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겨왔던 히로타 선생도, 노노미야 군도, 그리고 산시로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다. 산시로를 바라보는 미네코의 우울한 검은 눈은 바로 영혼의 피로”, “육신의 나른함”, “고통에 가까운 호소에 다름 아니다.

 

제가 그렇게 건방지게 보여요?” 그 말투에는 변명하려는 마음이 있다. 산시로는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는 안개 속에 있었다. 안개가 걷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한 마디로 안개가 걷혔다. 분명한 여자가 드러났다. 걷힌 것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산시로는 미네코의 태도를 원래대로, -두 사람 머리 위에 펼쳐진 맑다고도 흐리다고도 할 수 없는 하늘처럼- 의미 있는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건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인사치레 정도로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돌연히, “그럼, 이제 돌아가죠?” 하고 말했다. 불쾌한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산시로에게 있어서 자기는 흥미가 없는 여자인가 보다고 단념하는 듯한 조용한 말투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메이지 사회의 다 큰 미아”, “스트레이 쉽[Stray Sheep]”이다. 그 말의 이미지는 작은 소리로 혼잣말처럼 스트레이 쉬입하고 천천히 길게 끌어 말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그녀는 결국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소설 종반부의 급작스런 그녀의 결혼은, 주체적인 인물들을 그려내려 했던 작가 소세키의 패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색인(索引)이 붙어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맞추어 보려고도 하지 않는 태평한메이지 일본의 무심한남성들에 대해 미네코는 마지막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도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폭이 다섯 치가 넘는 금테두리를 붙인 숲 속의 여인이라는 그림으로. 그 압도적인 그림에 그려진 미네코의 모습은 산시로가 연못가에서 처음 만났던 부채를 들고 있던 미네코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결국 근대 일본에서 개인주의적 자아를 모색하려는 소세키의 실험 1라운드는 작가의 패배로 끝났다. 에도(江戸)의 전통과 메이지의 근대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당대 일본 사회에서, 산시로의 낭만주의의 싹이 꽃을 피우기에는 그 토대가 너무 박약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에게는 다시 한 번의 각성, 즉 회심(回心)이 필요했다. 다이스케[代助]는 그 회심의 일환으로 소세키가 만들어낸 전사(戰士)였다.

 

예전에 어딘가에 썼던 산시로 전기 삼부작에 관한 글을 조각조각 분해해본다. (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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