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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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조국을 떠나 유랑을 전전했던 백계 러시아인의 문체일까.. 두 차례 대전으로 사라져버린 구유럽의 에토스와 귀족주의, 거기에서 연유하는 고독과 오만함과 냉소, 아카데미를 경멸할 수 있는 교양, 속물주의에 대한 혐오와 갈망, 이 모든 것들을 조합했을 때 나보코프의 <안개>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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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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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나의 병사들>을 읽고 난 후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찬가>를 읽었다.. 여러모로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처음으로 가르쳐준 영화..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지만, 지금도 장면 장면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전투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의 장례를 치러주면서 인터가를 부르는 전사들의 모습에서 해방구의 토지정책을 놓고 마을주민들과 민병대들 사이에서 격론을 벌이던 장면, 그리고 파시스트들과의 거듭되는 전투에 상처뿐인 민병대를 지원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는 정부군에 울분을 터뜨리던 전사들의 얼굴표정까지.. 영화의 메시지가 하도 강렬해서, 한동안 당시만 해도 소지하면 <불법>이라고 하던 트로츠키주의 신문을 팔러 다니던 사람들(그 때만 해도 학관 근처에 어슬렁거리면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에게 괜한 <친근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다보니, 이후의 작품인 <동물농장>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오웰이 왜 그토록 <스탈린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졌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왜 그런 장을 거기 넣었는가?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저널리즘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라는 (자신이 존경하던 비평가의) 비난도 무릅쓰고 당시 전쟁의 정치적 지형도를 트로츠키파의 입장에서 상당히 길게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동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에게 뒤에서 칼을 맞은, 혁명의 배반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자가 삼켜야 했던 <분노>의 표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스마일리의 죽음은 내가 쉽게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마일리는 용감하고 재능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글래스고 대학의 자리를 내팽개쳤다. 또한 내가 목격한 대로, 그는 흠 잡을 데 없는 용기와 흔쾌함으로 전선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저들이 그에게 해준 일이라고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고 방치된 동물처럼 죽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막대한 인명이 희생되는 대전쟁의 와중에서 한 개인의 죽음을 놓고 너무 법석을 떠는 것이 소용없는 일임은 나도 안다. 혼잡한 거리에비행기가 폭탄 하나만 떨구어도 정치적 박해를 여러 번 가하는 경우보다 더 큰 고통이 생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죽음에 화가 나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죽는 것-- 그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는 바이다. 그러나 투옥이 되고, 그것도 날조된 범죄 혐의도 없이 그저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악의로 인해 투옥이 되고, 혼자 내팽겨진 채 죽어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런 따위의 일--스마일리의 겨우는 예외적인 것 같지도 않다--이 어떻게 전쟁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가 처음부터 <트로츠키주의자/무정부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가 속하게 된 부대가 우연히 의용군들로 이루어진 <민병대>였을 뿐이고, 서두에서 밝히듯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인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심지어 그는 민병대 활동을 하면서도 <국제여단>(공산당계)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내전을 경험한서 그가 점차 무정부주의에 동조하게 된 데에는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강령이나 신념에 대한 동조라기보다는, 파시스트라는 공통의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도 당파적 이익을 앞세우는, 그 결과 이데올로기적 분란을 넘어 동지를 피로 숙청하는 <소비에트주의>에 대한 분노가 컸다. 그리고 그는 파시스트 타도를 위해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숙청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몰래 스페인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겪은 환멸에 영혼을 팔지는 않았다.. 오웰이라는 작가의 위대성을 발견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본업인 <근대 일본의 정치문화>를 연구하면서 무수히 지켜보아야 했던 지식인들의 <전향転向>.. 비단 일본뿐일까.. 과연 소위 <386>들의 현 모습에서 전향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을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소비에트에 대한 환멸이 유럽 사회에 몰고 왔을 엄청난 <전향>의 광풍에서 오웰은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다.. 물론 그것은 <당의 위대성>에 대한 맹목적인 고수는 아니다.. 대신 그는 <내부적 비판자>라는 위험하면서도 고독한 길을 걸어갔다..

내 역할에 무력함을 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런 참사--어떻게 끝이 나건 스페인 전쟁은 살육과 신체적 고통은 별도로 하고라도 경악할 만한 참사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꼭 환멸과 냉소만 생기는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오웰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는 것도 없고, 시간도 없다..<랜드 앤 프리덤>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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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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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도청에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를 보면서 울컥했다.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백대영인 게임을 51:49까지 끌고온 것도 대단한 것일까. 학문적으로 훌륭한 책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진심>과 <용기>만은 너무나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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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파시즘 -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 철학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 김석근 옮김 / 가람기획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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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다보면 가끔씩 갸우뚱해지는 때가 있다..

이 책을 어떤 범주에 놓아야 할까.. 저자의 입장은 도대체 어디쯤일까..

혹은 번역자는 어떤 동기로 이 책을 번역했을까.. 그리고 한국의 경우 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출판사는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내놓았을까..

 

왜냐하면 이 책은 엄밀한 의미의 학술적 역사서가 아니면서도, 대중서라고 하기도 애매한..

또 저자의 입장 역시 군국주의에 비판적인 것 같으면서도 꼭 그렇지도 않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다층적인 텍스트라든가, 폴리포닉하다던가 그런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은 2013년 일본이라는 사회가 전쟁을 바라보는 애매한 시각의 한 일면을 반영한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 같다.. 

 

이 책은 엄밀하게 말하면, 총력전이었던 1차대전을 부분적으로 경험한 일본 육군이 왜 그 교훈을 살려내지 못하고, 결국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자멸의 길을 밟게 되었는가를 분석한 책이다.. 예전에는  일본육군은 러일전쟁 이후 근대전다운 근대전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돌격전술을 1940년대까지도 아무 의심없이 구사했다는 방식의 설명이 일반적이었다.. 또 야만적인 육군 vs 합리적인 해군과 같은 도식, 즉 해군사관이 전후 일본 사회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어찌됐건 이 확실하지 않은, 하지만 일반적으로 믿어져 오던 이야기들이 남겨놓은 공백지대에 깃발을 꽂았다는 점에서 그 존재의의를 확보할 수 있다. 저자는 1차대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비록 소수 엘리트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일본 육군의 이론가들의 텍스트들을 검토하면서, 왜 그들이 앞으로의 전쟁은 총력전이며, 따라서 인적 물적 자원을 더 많이 확보한 나라가 결국은 이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정신주의>로 귀일하게 되었는지, 그 내적 논리를 추적하고 있다..

물론 그 추적의 방법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학문적으로 엄밀하지 않고, 자주 인상비평이나, 과도한 해석으로 치닫는 등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역자인 김석근 선생은 흥미롭다고 말했지만, <시라스>와 <우시하쿠>, 또 <마코토>와 <마고코로>에 대한 해석은 과다하다.. 왜냐하면 "근대 일본의 통치원리는 시라스이다"라는 논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엄밀한 반박이 있어왔음에도 저자는 그 전제를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여 논의를 진행시켜버리고 있다.. 또한 파시즘에 대한 정의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파시즘과 전체주의는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정설이다). 마지막으로 일본 연구자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밀교-현교> 논리의 잦은 사용은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의 속내는 이러했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보듯, 과다한 추측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 책의 보다 더 커다란 문제는 (육군에 한정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세운 가진 나라와 가지지 못한 나라라는 도식에 도취되어 1930년 이후 일본이 치른 전쟁을 <가진 나라>(미국, 영국, 소련 등)에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흔히 15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결코 이들 나라와의 전쟁만은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최근의 전쟁표기가 의미하듯, 일본의 전장은 그 어느 곳보다 중국 대륙이었던 것이다.. 과연 중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저자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또 하나 불편한 대목은 만주국에 대한 해석이다.. 저자의 논리대로 본다면 만주국 수립은 갖지 못한 나라를 가진 나라로 만드는 계획의 일환이었고, 이는 당시의 세계 정세 하에서 갖지 못한 나라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였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배, 만주국의 불법성/폭력성에 대한 고려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왜 우리는 당시 진정한 파시즘, 통제경제를 만들어내지 못했는가>라는 물음이 이 책의 제 1전제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논리의 귀착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리 얇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들을 몰입하게 하는 힘을 가진 책임에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 제국 육군의 실세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출판사가 선전하는 것처럼 <군국주의와 천황의 잘못된 만남에서 왜곡된 성장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그릇된 논리의 원류를 뿌리부터 샅샅이 파헤친 문제적 걸작>인지에 대해서는 입장을 아주 많이 유보하고 싶다.. 마치 예전에 창비에서 카토 노리히로의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원제: 패전후론)을 내놓았을 때와 같은 당혹감이다..

 

오히려 이 책은 지극히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아시아-태평양 전쟁 사관의 한 변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이 2012년 <시바 료타로 상>을 수상하고(시바 료타로라니, 의미심장하다) 인문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2012년의 일본 대중들의 욕망의 한 부분을 이 책이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전후 70년을 앞둔(아직까지 일본이 전후라는 말을 시대구분으로 차용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그것은 아직 전후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의 <정치적 무의식>을 탐색하는 데 있어서는 융용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8월 15-16일 광복절에 이 책을 읽었다.. 미완의 파시즘이라니, 파시즘을 완성시켰으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별은 세 개 주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이 2013년 일본 사회의 정치적 무의식을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별 넷, 번역의 가독성에 대해서는 별 다섯, 하지만 텍스트의 엄밀함에 대해서는 별 셋, 그리고 이 텍스트를 한국사회에 내놓으면서 이에 대한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출판사의 무성의에 별 하나.. 대략 통계를 내보니 별 셋이다.. 이것도 조금 후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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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문제적 인간 1
장 마생 지음, 최갑수 머리말, 양희영 옮김 / 교양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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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 피에르..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왠지 피냄새가 난다.. 물론 그 냄새는 공포정치, 학살, 기요틴에게서 풍겨나오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 피냄새는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고자 했던 그와 그의 동료들의 끓어오르는 육체 너머로 피어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바로 짧은 일생을 혁명과 함께 했던 그들을 위한 송가이다.. 

90년대 중반에 학교에 들어와서, 그 해 여름 처음 접했던 프랑스 혁명사는 그 뜨거운 여름 내내 나를 중독시켰던 주제였다. 구체제의 모순, 그리고 왜 혁명은 1789년 프랑스에서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는가.. 초기 혁명의 진행과 좌절, 제 2혁명의 발발과 공화국, 혁명의 내적 모순, 나아가 제 3혁명으로의 길과 혁명의 몰락.. 드라마틱한 사건사건들과 너무나 매혹적인 혁명의 주인공들,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생쥐스뜨.. 특히 20대의 생쥐스뜨가 국민공회 연단에 서서 프랑스, 나아가 전유럽을 향해 "혁명은 유럽에서 새로운 사상"이라고 외쳤을 때, 나는 숨을 죽이며 다음 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사실 프랑스 혁명사는 학회 세미나의 커리였다..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프랑스 혁명사>, <프랑스 혁명 이후의 유럽정치사> 등등 1학년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빽빽한 커리들.. 그리고 평등이란 무엇인가?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있는가? 공포정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민중의 역량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등등.. 지금 생각하면 하나도 제대로 답할 수 없는 물음들을 던지면서 치기어린 감상들을 쏟아내던 시기였다.. 

최근 <로베스 피에르, 혁명의 탄생>을 읽고 있노라니, 그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다시 아른아른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때의 나도 이제 나이 서른을 훌쩍 넘어버렸고, 이제는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책을 꺼내 읽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물음들에 대해 치기 어린 답변을 할 수 도 없는(끊임없이 주저하게 되는) 나이가 되었지만, 이 책은 바로 그 시절의 생생한 감동을 다시 내게 던져주었다.. 

저자는 혁명의 전시기 로베스 피에르의 궤적을 밟아나가면서, 공포정치, 단두대, 학살의 그늘에서 그를 구해내고자 한다.. 그의 이름 앞에 항상 따라 붙는 "부패할 수 없는"이란 형용사는 전시기 반혁명과 음모로 점철되었던 프랑스 혁명사에서 그의 위치를 더욱 굳건히 해준다. 나아가 저자는 지롱드파와의 대립, 에베르파, 관용파(특히 당통)와의 대결 등을 상세히 그려내면서, 로베스 피에르가 결코 맹목적인 원칙론자가 아닌, '살아있는' 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한때 혁명의 동지가 혁명의 적이 되는 가슴아픈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가 겪었을 고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대의명분을 따르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저자는 로베스 피에르의 연설문들을 통해 훌륭하게 형상화한다.. 

사람들은 당통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위험이 내게도 미칠 수 있다고 나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패라고들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당통의 친구들이 내게 편지를 보냈고 내가 그들의 연설에 사로잡혀 있다고 썼습니다. 그들은 예전의 관계에 대한 기억, 거짓 덕성에 대한 옛 믿음이 나로 하여금 자유에 대한 나의 열정과 사랑을 억제하게 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아! 이 동기들 중 어떠한 것도 내 영혼에 아무 가벼운 인상조차 남기지 못하리라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위험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나의 목숨은 조국의 것이고 내 심장은 두려움을 모르며, 만일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비난받을만한 것도 치욕스러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 책이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로베스 피에르를 위시한 18세기 혁명의 수행자들은 깨닫지 못했을 혁명의 내적 모순의 진정한 원인, 즉 18세기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793년 7월 공공교육위원회에서 자신의 마음을 담아 그의 벗 르펠르티에의 보고서를 낭독한다.

3년 전부터 진행된 혁명은 다른 여러 계급의 시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진 것이라고는 노동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빈곤의 혁명이 있습니다.

로베스 피에르를 비롯한 18세기 산악파들이 가졌던 사회민주주의적인 진지함,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계몽주의의 아들, 나아가 루소의 아들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회정치적 문제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오직 '계몽'의 확산으로 해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공화력 2년 말 빵과 최고가격을 요구했던 상퀼로트와 에베르 파의 요구에 대해 온당한 답변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로베스 피에르는 공화국의 덕성을 주장했지만, 그 덕성은 바로 밑바닥을 이루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로베스 피에르의 개인적인 한계라기보다는 18세기의 한계인 것이다. 로베스 피에르의 연설 곳곳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의지가 엿보이지만, 그 의지는 다시 한계라는 장벽에 가려진다. 테르미도르 반동은 로베스 피에르가 거둔 승리 자체의 '변증법적 대응물'일 뿐이다. 저자는 이 한계를 돌파하는 임무를 바뵈프에게 나아가 19세기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에게로 넘긴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사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모든 면모들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는 없다(만약 이 부분에 관심이 있다면 소불의 <프랑스 대혁명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 책은 오히려 지금까지 너무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인물,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인 로베스 피에르에 대한 책이다. 혁명사의 주요 주제들, 예를 들어 1789년 인권선언의 의미, 91년, 93년 헌법의 성격, 그리고 빠트릴 수 없는 상뀔로트의 성격에 대한 문제들은 이 책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이 하나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책들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영웅전을 쓰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몇몇 순간에 혁명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이 모두 소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거나 가장 중요한 시간에 수동적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데 머물렀다는 것은 혁명사가에게,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전기 작가에게는 더욱 의미심장한 일이다." 로베스 피에르(당통, 마라, 생쥐스트 등등)가 프랑스 혁명의 주역이기는 하지만, 혁명의 고비고비마다 그 위기를 극복하고 넘어섰던 힘은 이들 소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이름 없는 민중들에게 나왔음을 저자는 결코 잊지 않는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들 주인공들은 바로 그 힘을 인정하고, 그 힘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린 주체들일 뿐이다. 혁명은 결코 "단지 몇몇 선수들이 말을 옮기고, 공격을 계산하고 반격을 선택하는 장기 시합"이 아닌 것이다. 로베스 피에르에 대한 평전의 밑바닥에는 혁명기를 내달았던 민중들의 열정,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살아숨쉬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름 없는 그들에 대한 송가이기도 하다. 

역사는 여전히 존재하는 이러한 위험을 경계하라고 우리를 가르친다. 어떤 순간에 로베스피에르의 재능은 상테르, 알렉상드르, 국민방위대의 어떤 포병, 어떤 연맹군 병사, 포부르들의 어떤 상퀼로트만큼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치 지도자들의 지성 이상으로 다른 요인이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요인이란 우연이 아니라 민중이다. 8월 10일의 봉기의 성공에서 우연은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혁명적 봉기들 중 이보다 더 오래, 더 체계적으로, 더 공개적으로 준비된 것은 별로 없다. 그것은 로베스피에르의-또는 마라의- 위대한 정치적 용기, 위대한 지성이 민중의 집단적 의식과 영웅적 행위가 없었더라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로베스피에르의 위대함은 전적으로 최선을 다해 민중을 계몽하면서 민중의 힘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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