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전 -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서해역사책방 14
피터 게이 지음, 고유경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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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부르주아의 정신에 대해 지극히 부르주아적 관점으로 씌어진 역사서. 저자의 박학다식함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은 이미 검증이 된 듯 한데, 뭔가 좁혀지지 않는다. 19세기 bg 정신이 내포하는 극도의 다양성에 대한 규명? 이 책의 집필의도를 묻는 작업 역시 정신분석학적 탐구주제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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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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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직전의 섬광을 그려낸 매혹적인 책이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 츠바이크의 자서전과 <19세기 빈>, <봄의 제전> 정도를 끼고 본다면 훨씬 흥미로울 듯. 나올만한 대가들은 이 때 다 나왔다. 그에 비하면 오늘의 지성사는 얼마나 초라한가. 하지만 빛나던 유럽을 기다리는 것은 전쟁의 수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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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버린 사람들 -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의 기록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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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침묵의 시선>을 보았다..

사람들이 오지 않은 한적한 오후 시간대, 하루에 단 한 번, 그것도 단 일주일만 상영하는 영화.. 오늘이 그 마지막날이었다..

역시 바삐 일하며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시간대라서인지, 극장 안은 한산했다..

그리고 1시간 43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말 그대로 지옥을 보았다..

전작 <액트 오브 킬링>이 가해자의 자기부정, 합리화를 다룬 영화라면(하지만 그 합리화는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피해자 역을 맡은 살인자가 그 공포를 참아내지 못하고 구역질 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이 다큐는 피해자의 시선으로 과거의 아픈 역사를 재조명해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의 가해자들이 여전히 권좌에 앉아 있는 현실, 그리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억압과 공포가 드리워져 있는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한 채 살아간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형 람디의 죽음을 추적하며 관련자들을 찾아가는 동생 아디에게 그들은 "왜 평화로운 이 세상에서 과거의 아픈 상처를 들쑤시느냐",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잊어라"라고 말한다.. 아니, 때로는 "너같은 놈들이 숨어있는 빨갱이라며" 대놓고 위협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살인행위를 뉘우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려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웃으며 자신이 했던 살인을 무용담처럼 지껄여댄다.. 처음에는 그들 역시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며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하는 아디는 가해자들을 만날 때마다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거대한, 굳건한 장벽과 같은 것을 실감한다..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며, 오히려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고 있다며 위협하는 가해자들 앞에서 아디는 점점 말을 잃어간다.. 눈물이 고인 채 멍하게 상대방을 바라보는 그의 슬픈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

 

가해자/학살자는 여전히 승리를 멈추지 않고 있고 피해자는 여전히 패자로, 두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닫은 채 살 수밖에 없는 사회.. 아니 이것도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게 비단 머나먼 저 동남아시아의 이야기일까..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기극의 피해자들이었던 이들의 질곡의 삶을 그려낸 이 책(<조국이 버린 사람들>)을 읽노라면, 그것은 결코 과거의 이야기도, 그리고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이미 서승, 서경식 선생의 글들을 통해 서씨 형제의 사건은 한국사회에도 조금이나마 알려졌지만, 우리는 그 외 수십 명의 자이니치 청년들이 과거 70년대 군부 독재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았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왜 일본에서 살수밖에 없었는지, 왜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를 모국어로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들이 70년대 풍요로운 일본 사회를 뒤로 한 채 독재의 서슬퍼런 한국사회로 유학을 왔는지, 우리 사회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남과 북의 사회를 바라보던 그들은 공안당국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예전 <제 5공화국>이라는 드라마에서 이학봉 역을 맡은 탤런트가 실감나게 말했던 명대사, <엮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들은 정말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엮여서 줄줄이 감옥에 들어갔다.. 국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었던 그들은 형무소에서 자행되는 온갖 폭력을 몸소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세상이 정말 좋아졌을까.. 과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들의 활동으로 그나마 우리는 과거 군부 독재시절의 폭력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법적으로 많은 이들이 다시 무죄판결을 받고 복권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잃어버린 청춘의 세월을, 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을 다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시의 가해자들이 진정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한 적 있었던가.. 그들은 여전히 승리자로, 권력의 상층부에 앉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침묵의 시선>을 보면서 내내 느꼈던 불편함, 역겨움, 그리고 비참함은 그 현실이 바로 우리네 삶의 어떤 부분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느낌이었다.. 우리네 현실이 그나마 영화 속의 그 지옥보다 나은 것이라면, 그것은 그 소름끼치는 폭력에 맞서 계속해서 말하고 또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계속 과거의 상처를 응시하고 말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상처를 왜 들쑤시느냐>, <가만히 있어라>라고 말하는 <양식 있는> 사람들에 맞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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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기획 - 혁신관료와 일본 전시국가
제니스 미무라 지음, 박성진 옮김 / 소명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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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암살>이라는 영화를 보러갔다..

천만이라는 숫자의 관객들이 봤다는 영화를 보시고 싶어하는 부모님의 간청과 천만 관객의 영화를 극장에서는 그다지 보고 싶어하지 않는 내 성향 사이에서 다소 주저하다가, 결국 두 분과 함께 극장에 갔다..

뭐, 역시나 진부한 스토리에, 이제는 익숙한 배우들의 애드립,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토포스의 나열>에 불과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2시간 20분 동안 열심히 봤다.. 때때로 뭉클한 구석도 있었다.. 해방 이후 7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과거청산은 커녕 독립군의 후손들이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는 <부끄러움>의 코드를 건드리고 있었다..

 

아놔.. 이렇게 풀어야 할 역사가 아닐 터인데.. 우리는 언제쯤 <비분강개>에서 벗어나 좀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36년 식민지 역사와 해방 8년사, 그리고 이후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까.. 물론 이렇듯 뒤틀려버린, 그래서 "나라를 빼앗겨도 절대 독립운동하면 안 된다"는 조소와 체념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비분강개>는 인간적인, 또 소중한 감정이지만, 그 시대를 냉철히 인식하는 지성적 언어가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해방 70주년에 대한 내 나름의 기획으로, 어제에 이어 오늘 읽은 책은..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혁신관료와 일본전시국가>(박성진 역, 소명출판, 2015)..

 

2002년의 학위논문을 10년에 걸쳐 상당부분 수정, 보완해서 완성했다는 말에 걸맞게(그런데 역자는 종종 사소한 실수를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공을 깎아내리고 있다.. 서문의 역주에 웨더헤드 동아시아연구소가 컬럼비아대학에 있는 연구기관이라고 밝혔으면서, 역자후기에는 코넬대학교에 있다고 쓴다던가, 구마모토 5고라고 썼다가 구마모토 2고라고 쓴다던가.. 이런 사소한 실수는 출판사가 충분히 편집과정에서 잡아줄 수 있는 것들임에도.. 소명출판..아..)

그 꼼꼼한 주석을 보더라도 굉장히 탄탄하게 씌어진 책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1930년대 이후, 즉 15년 전쟁기 제국 일본의 테크노크라트들의 기획에 대한 역사적 평가이다.. 저자는  동아시아 공영권, 대아시아주의와 같은 구상이 흔히 지적되는 것처럼 군국주의의 허황된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정학, 그리고 사회적으로 포괄적이고 기능주의적 사회를 지향한 진보적 개념들을 과학기술과 발전시킨 일종의 테크노-파시즘적 구상 속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테크노 파시즘을 간단히 요약하면 통제를 통한 자유의 성취, 조직을 통한 혁신의 창출, 공동체를 통한 자율성의 추구, 수직적 계층을 통한 지위 향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저자 자신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당대 제국 일본을 끌고 나갔던 테크노크라트들의 기획은 결국 그들이 보수주의적 자본주의 현상유지 지지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전쟁에 지면서 결과적으로 좌초되고 말았지만, 그들의 기획이 가진 이상주의적 속성까지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저자는 1930년대 만주국 건설에 참여했던 테크노크라트들의 사상적 배경이나 실제 기획, 그리고 이들이 결국 1930년 후반 본토 일본으로 돌아와서 참여했던 혁신주의적 기획에 대해 치밀하게 서술하고 있다..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은 역시 이들 테크노크라트의 <실체>, 즉 그들이 슬로건으로 내뱉었던 <말>이 아니라, 그들의 기획과 당대 역사적 현실 사이의 <접점>이다.. 저자는 그들이 남긴 보고서나, 논설, 그리고 그들이 이후 남긴 회상기 등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떤 기획을 하고자 했는지, 그 <의도>는 아주 상세히 그리고 있지만, 실제 그들의 모습을 그려내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만주에서 관동군과 자본가, 그리고 혁신관료라는 집단은 사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도대체 어디까지가 혁신관료인가.. 또 아시아(의 인민)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정말 질적으로 관동군이나 보수주의적 자본가들과 달랐던 것일까.. 만주국의 역사를 과연 혁신관료들의 보고서를 통해서 제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를 무능력한 악의 축으로 재단해버리는 기존의 편견에 맞서, 전시기 제국의 기획자들은 제국을 경영하기 위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규명하는데 첫 번째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전전과 전후 일본은 일면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까지 함께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다양하고 두터운 연구성과들에 의해 뒷받침된 논지라 반박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 역시 미국의 일본계 연구자로서 저자가 갖는 포지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이 제국 일본의 역사를 훨씬 다층적으로 보게 해준다는 점도 분명하다..또한 그렇다고 저자가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분명히 이러한 신체제가 갖는 반동성, 공격성, 배타성, 수직성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지지만은 않는 이유는 왠지 이러한 시도 역시 과거 제국 일본에 대한 일종의 노스탤지어로 소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 때문이다.. 예전 간단히 리뷰를 적은 바 있는 가타야마 모리히데의 책 <미완의 파시즘>과 이 책이 같은 계보에 속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억측일까..

 

영화 <암살>에서 보듯, 우리는 식민자에 대해 하나의 표상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것 역시 하나의 만들어진 기억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식민자들은 다양한 얼굴들을 가지고 있다.. 그 얼굴은 때로는 사회주의와도 인도주의와도, 또 근대주의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다양성에 주목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식민자>라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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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라는 이데올로기 - 일본 전후를 둘러싼 기억의 노이즈
고영란 지음, 김미정 옮김 / 현실문화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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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5일

전후 70주년

해방 70주년(도대체 <광복>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언제 출현했고, 또 성원권을 얻은 것일까.. 물론 <광복>이 아니라 <건국>을 기념해야 한다고 공개석상에서 공영방송 사장이 발언하는 나라에서 <광복>이라는 말도 감지덕지하며 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전후라는 이데올로기: 일본 전후를 둘러싼 기억의 노이즈>(고영란, 현실문화, 2013)을 읽었다..

 

타이틀이 퍽이나 매력적인 책이었다.. 이 책을 샀던 것도,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책을 꺼내들어 읽었던 것도 책의 제목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종종 그러하듯이 기대는 배신을 수반하는 법이다..

 

물론 전후 일본사회, 특히 1945년부터 60-70년, 즉 일본 사회가 가장 역동적이던 시절에 대한 정보가 매우 빈약한, 그래서 저 무시무시하고 가증스러운 <대일본제국>과 너무도 소프트하고 사랑스러운 현대 일본 대중문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들었던 한 가지 의문은 왜 이 책에 굳이 <전후라는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을 썼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데올로기와 같은 논쟁적인, 그리고 다의적인 개념을 쓰기 위해서는 적어도 책의 서두에서 어느 정도 서술을 해줘야 함에도, 이 책은 아무런 언급 없이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제목을 보고 책을 구입한 이들에게 <낚였다>는 실망감을 줘서는 안 되는 법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아주 거칠게 요약한다면, 일본 사회에서 종종 신화화되는 <전후>의 균질화된 기억과는 다른 전후의 표상들을 <부락민>, <재일> 등 일본 사회 내의 소수자/타자의 기억들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연구자답게 저자는 소설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특히 전시기 일본 제국 내에서 작동하는 위계/차별의 정치에서, 부락민과 조선이 차지하던 위치가 전후 어떤 방식으로 소거되는지, 또 패전 직후 일본 공산당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공투라는 신화 속에 가려진 양자 사이의 갈등과 모순이 1955년 6전협의 결정으로, 재일조선인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공민'의 자격을 얻게 된 이후, 다시 말하면 각자의 에스닉 아이덴티티가 부여된 이후 어떤 방식으로 망각되고 비가시화되는지, 당대의 문학 텍스트들을 기존의 문학사적 정전 읽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어냄으로써 그려내고 있다..

 

물론 일본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한국인 연구자의 위치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그 물음이 그다지 신선해보이지는 않는다는 점.. 더구나 그 위치성이 (구)제국의 학계가 (구)식민지 출신 연구자에게 할당해주는 자리와 겹쳐진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전후 비판이 전후 일본의 균질화된 기억에 그다지 커다란 균열을 가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문제다.. 

더구나 서사가 응집적이지 못하고 산만해서 저자가 던지려고 하는 메시지가 종종 <생소한> 인용 텍스트들 사이에 끼어, 잘 전달되지 못한다는 점도, 이 책이 가진 약점이다..

 

굳이 한국어판을 내고자 했다면, 한국 독자들을 위해 구성상의 변화를 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을텐데, 일본 독자를 위해 쓴 책을 그대로 번역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아쉬운 점이다..

 

8월 15일이 아니었으면, 전후 70주년이 아니었으면 조금 더 부드럽게 평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미 해는 지고 있고, 오후까지 가독성이 떨어지는 책을 읽느라 기력을 소진해버린 내 마음은 황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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