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나오기를가장 고대했던 책이 드디어 번역 출간된다는 소식이다. 이 책의 번역출간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반지성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장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해본다. 도처를 둘러봐도 팩트는 차고 넘친다. 그것들을 엮어내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을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지음, 정인환 옮김 / 서해문집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칠레의 현대사는 이 땅의 현대사와 너무나 흡사해서, 가끔씩 소름이 돋는 경우가 있다. 아옌데는 쿠데타군의 무력에 맞서 홀로 모넬라궁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했다. 마치 80년 광주 도청의 이름 없는 전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책은 그 소중한 꺼지지 않는 반딧불의 이미지에 대한 기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30년대 혁명운동사에서 소비에트를, 그리고 스탈린주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세계 인민들에게 유토피아와 악몽을 동시에 주었던 그 공과 과를 과연 누가 평가할 수 있을까..

 

스페인 내전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점은 프랑코의 칼이 공화국을 둘로 가르고 마침내 그 심장에 칼을 꽂기 전에 이미 공화국은 내분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무정부주의 vs. 공산주의..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공화국을 수호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어느 노선이 옳았는가에 대한 답을 앤터니 비버는 교묘히 피해간다. 패자에 대한 감정적 연대 속에서 공산당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심지어 혁명을 위해 함께 싸웠더 과거의 동지들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하거나 심지어 반역죄와 같은 무고죄로 처형당해야 했던 아나키스트들에게 좀 더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듯 하지만, 아나키스트의 낭만주의적 전술이 1930년대 당시의 현대전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도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다..

어쩌면 저자에게 역사란, 그가 인용하는 W. H. Auden의 말처럼, "패자에게 "아, 가엾어라!"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패자를 돕거나 용서할 수는 없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당연히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의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의 불간섭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저자 역시 이 부분을 몇 차레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은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뭇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병사들의 노골적인 개입,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 실질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독일 콘도르 군단(비행대)와 같은 화려한 팀플레이에 비해, 서구의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은 공화국의 운명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당시 그들이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공산주의>였기 때문일까.. 아니, 프랑코적인 권위주의 체제가 그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더 들어맞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내전은, 그것도 이념의 충돌에 의해 빚어지는 내전은, -누가 승리하든-, 그 사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생채기를 낸다.. 스페인, 한국, 칠레.. 이 나라들은 모두 근대사에서 내전과 그에 버금가는 쿠데타를 겪었고, 그 상처는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에도 아물지 않은 채 계속해서 고통을 주고 있다.

몇 개월째 지속되는 촛불집회, 그리고 이를 저지하고자 나선 정체불명의 <반촛불집회>(태극기집회?)를 보며 그런 생각이 부쩍 들었다.. 얼마 전 심지어 군대에 <궐기?>를 호소하는-한 마디로 쿠데라를 권유하는 <반촛불집회> 참가자들의 무시무시한 선동을 보면서 그들의 행동을 단지 <광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레드 컴플렉스>, 그리고 그 공포를 밑바닥에서 만들어내는 감정의 구조에 대해 우리 사회가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감정의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양자 사이의 이성적인/합리적인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절망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탄핵이 되든, 되지 않든 이 사회의 분열의 고랑은 당분간 메워질 수 없을 것 같다.. 따라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그 밑바닥의 감정의 구조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이해의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 학문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선의>를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물론 그 어려운 분석 작업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다..  방법론조차도 떠오르지 않는다.. 공동작업이 아니면 불가능할텐데.. 과연 선입견을 버리고 선뜻 시작할 사람들이 있으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지성주의 - 미국이 낳은 열병의 정체
모리모토 안리 지음, 강혜정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모리모토 앙리의 <반지성주의>를 읽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부터 계속 반지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부쩍 생겨서, 이런저런 책들을 검색하다가, 지난 가을 일본에 갔을 때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었는데, 중반까지 읽다가 조금 지루해져서 덮었던 책이었다..

일본 평단의 요란한 관심에 왠지모를 궁금증이 일기도 했었는데..

번역본이 나온 것에 감사하며 어제 밤 내내 편안히 읽었다..

 

책을 완독한 후의 느낌은..

일본 평단 혹은 매스컴의 요란한 말들은 다소 과장이고..

다만, 미국 사회에서 반지성주의가 출현하게 된  배경으로 미국 사회의 개신교가 갖는 독특함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개설서같은 느낌이었다.. 

  

호프스태터의 <미국사회의 반지성주의>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이처럼 개설서와 같은 느낌의 일본 책이 나오는 한국의 출판시장이 흥미로웠고.. 이러한 상황은 지성intellect의 맥락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의 요지는 단순명료하다..

1. 반지성주의란 "지성 자체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지성이 세습적인 특권적 계급의 소유물이 되는 것에 대한 반감"과 같은 것으로, 종교적 확신을 근거로 한 철저한 평등관이 지배적인 미국 사회의 특유한 정신구조라는 것.. 

2. 종교적 기득권층(공정교회)에 대한 반감은 침례파나 감리교 등 소수파 기독교와 세속적 합리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완전히 비종교적인 계몽주의의 합리적 정신과 경건한 복음주의의 뜨거운 신앙심이라는 기묘하지만 무척이나 강한 연대가 <정교분리>라는 독특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

3. 이러한 종교적 기득권에 대한 반감이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크게 보면) 4차에 걸쳐 나타난 신앙부흥(리바이벌리즘)으로 이어졌으며, 이 리바이벌리즘에 비즈니스적 실용주의가 더해진 것이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의 원형이라는 것..

이다..

 

물론 이는 철저히 현상적인 분석이며, 미국 사회 반지성주의의 종교적 기원을 잘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나름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음 과제는 이러한 선택적 친화가 왜 발생했는가, 즉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일 것이며, 또 그러한 종교적 기원이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모든 면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규명일 것이다..  

또한 미국사회의 반지성주의를 미국 예외주의의 부산물로 단정지어버리기보다,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와 일본, 혹은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어떠한 지점에서 서로 결을 같이 하며, 또 어떤 점에서 특수한 것인지.. 그리고 그 특수성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지, 적어도 일본 사회의 맥락 속에서 분석해냈다면,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여전히 이 부분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유교적 앎이 통치의 근간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식민지, 포스트 식민지, 그리고 최근의 글로벌화의 파고 속에서 흔들리면서, 전 사회에서 지성의 힘이 소멸해가고 있는(심지어 지성의 상징이라는 대학의 교수 임용도 영어 경시대회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를 <반지성주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반지성주의가 출현하게 된 배경들은 무엇일까..

 

아니, 오히려 호프스태터가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반지성주의 자체도 지성의 권력화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지성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지성을 스스로 값싸게 팔아버리고 있는, 혹은 그 현실을 수수방관하며 "내가 어쩔 수 있겠나"며 체념하면서 그 경향에 동조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은 도대체 뭐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몇 년전부터 일본 사회에서는 그나마 반지성주의에 대한 하나의 담론이 형성되면서, 그 수준이 어찌됐건 사회 일각에서 조금씩이나마 논의가 이루어지는 듯 하다.. 하지만 글로벌, 혹은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에 영혼을 팔아넘기면서 스스로 지성을 포기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아카데미는 현재의 위기에 대한 자각마저 결여하고 있다..

 

이 도저한 <비지성주의> 앞에서 글 쓰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참담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 황현이 본 동학농민전쟁
황현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본업인데도 불구하고.. 

요새 책을 읽을 때마다 어딘가 뜨끔뜨끔한 느낌이 들어 책을 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얼마 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금 한국사회의 풍경이 흡사 신소설의 풍경과 유사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매천의 <오하기문: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을 읽노라니 19세기 구한말의 풍경과 지금의 시국이 겹쳐지면서 자꾸 한숨이 나오게 된다..

 

몸과 마음이 내려앉아서 더 이상 글쓰기가 쉽지 않다.. 다만 글을 읽다가 또 뜨끔한 대목이 나와 잠시 적어둔다.. 예나 지금이나 궁궐에 계신 분들은 우주의 기운을 받기를 좋아하나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임오년(1882, 고종 19년) 변란 당시에 왕비는 충주에 머물면서 요사스러운 한 무당과 자주 왕래했다. 그 무당은 길흉화복을 기막히게 알아맞혔다. 왕비가 몇 월 며칟날 복위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다. 왕비는 그 무당에게 홀딱 반해, 마침내 서울로 불러들여 북묘에 살면서 기도를 주관하게 했다. 무당은 왕비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를 쓰다듬었는데, 그 손길을 따라 통증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잠시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왕비는 그 무당을 '언니'라고 불렀으며, 때에 따라서는 '진령군' 또는 '북관부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무당은 궁중을 출입한 지 겨우 1년밖에 안 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윤영신, 조병식, 이용직 등이 그 무당과 의형제를 맺고 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그녀의 도움으로 관찰사 자리를 꿰찼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세기컴맹 2018-04-2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시감이라니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