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우스터리츠>, <공중전과 문학>에 이어 읽은 제발트의 세 번째 책..

 

서울로 오는 버스 안에서 쉼없이 계속 <토성의 고리>를 읽었다..

오늘 집을 나서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들고 나온 책이었다..

그러고보니 지난 가을에 읽다가 중도에 그만 둔 기억이 난다.. 왜 멈춰섰던 것일까.. <폐허>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글을 쓰다가 아무래도 제발트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꺼내들었다가, 다른 바쁜 일들에 밀려 한동안 펴보지 못한 채, 책상 앞 책꽂이에 그대로 놓아둔 것 같다..

먼지가 부옇게 쌓여 있다..

4장까지 읽은 흔적은 나는데, 앞부분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갈까 하다 5장부터 읽기 시작.. 언젠가 다시 읽을 날이 또 오겠지..

버스 차창으로 펼쳐지는 눈이라도 내릴 듯한 음산한 겨울 풍경과 제발트의 소설은 왠지 썩 나쁘지 않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토성과 발터 벤야민의 삶을 엮어 꽤 흥미로운 스케치를 해낸 수전 손택의 에세이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발트 역시 토성과에 속하는 인물..

문장 곳곳에 멜랑콜리의 검은 담즙이 배어나온다.. 제발디언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 역시 아마 거기에 있겠지.. 나는 제발디언은 아니기에 이 책의 모든 장들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래도 낯선 영국 지역에 대한 여행의 기록을 다루는 장들은 조금 지루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마주친 어떤 사물/풍경에 정신을 빼앗기면서, 거기서부터 자유연상이 전개되는, 그의 독서의 기록을 다루는 5장, 6장은 낯설면서 아름다웠다.. 

 

5장은 여행지의 한 호텔방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로저 케이스먼트의 다큐멘터리로부터 시작해서, 콘래드로, 그리고 케이스먼트로, 다시 콘래드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케이스먼트와 콘래드의 연결고리는 그들이 만났던 콩고였다. 콘래드는 탐욕으로 타락해가는 콩고의 유럽인들 가운데 오직 케이스먼트만을 올곧은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콩고의 열대에서 암흑의 핵심을 보아버린 콘래드에게 벨기에 왕국의 수도인 브륏셀의 화려한 풍경은 "검은 시신더미 위에 솟아오른 묘비"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브륏셀 거리의 행인들에게서 콩고의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콘래드의 시선을 의식하며, 오늘날까지 콩고 식민지를 서슴없이 약탈하던 시대의 낙인이 찍힌 특정한 살롱들의 섬뜩한 분위기와 주민들의 눈에 띄는 기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추함을 목도하면서-이러한 기형은 그들이 자행한 폭력과 식민주의의 죄과라는 것일까-, 19세기 유럽 제국주의의 추악한 면모를 기록하는 제발트의 음울한 기술은 읽는 이들의 마음에 비통함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로저 케이스먼트의 생에 대한 간략한 역사도 특기할만한 것이다.. 케이스먼트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예전 마이클 타우직의 푸투마요 인디언 사회에 대한 섬뜩한 민족지에서 처음 접한 적이 있었다.. 타우직 역시 푸투마요 인디언에 대한 케이스먼트의 리포트로부터 폭력과 폭력에 저항하는 문제에 대한 사유를 풀어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제발트는 영국의 외교관이었던 그의 반제국주의적 성향이 점차 자신의 조국이자 고향인 아일랜드의 식민지적 상황에 대한 각성과 독립운동으로, 그리고 결국 독립운동이 무위로 끝난 채 체포되어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하게 되는 그의 비극적 일대기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체포된 케이스먼트의 가택수색 과정에서 동성애 관계가 기록된 일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일기의진위여부를 둘러싸고 영국 측의 흑색선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한동안 제기된 적도 있지만-실제로 아일랜드 측은 독립투사인 그가 제국의 오염된 악의 산물인 동성애에 빠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 일기는 나중에 케이스먼트가 쓴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제발트는 오히려 "이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바로 케이스먼트의 동성애가 그에게 사회계급과 인종의 벽을 넘어서 권력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 노예화와 불구화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었다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정치적 입장(지지/반지지)에 상관없이 소수문학의 힘에 대한 인정이라는 점에서 그의 평가는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낯선 여행의 기록을 남길만한 여력이 지금의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런 공간이 나에게 허여되어 있기는 한 것일까..  

 

  

여전히 대부분 기록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식민주의의 역사를 통틀어 이른바 콩고의 개발보다 더 어두운 장(章)은 없다. 1876년 9월에는 지극히 선량한 의도가 선포되고 모든 민족적, 사적 이익을 제쳐둔다고 선언되는 가운데, 아프리카 연구와 문명을 위한 국제협회가 창립된다. 사회 전영역의 최고 인사들, 상류 귀족과 교회, 학계, 경제 및 금융계의 대표자들이 창립총회에 집결하고, 이 모범적인 기업의 후원자인 레오폴드 왕은 인류의 벗들이 오늘 더할 나위 없이 고상한 목적을 위해, 다시 말해 지금까지 문명의 은총을 받지 못한 지구의 마지막 부문의 희망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고 선언한다. 이어서 레오폴드 왕은 여전히 여러 민족들이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어둠을 부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세운 기획이야말로 진보의 세기를 비로소 완성으로 이끌 십자군의 기획이라고 강조한다. 이 선언문에서 표현된 드높은 대의가 이후 날이 갈수록 퇴색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85년 콩고자유국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된 레오폴드는 이미 이때부터 누구 앞에서도 책임을 질 의무가 없는 단독 지배자로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강 유역 백만 제곱마일을 포괄하는, 다시 말해 모국보다 면적이 백배나 큰 영토를 마음대로 통치하고, 이 땅의 무한한 자원을 가차없이 착취하기 시작한다. 착취의 도구는 콩고 상업주식회사와 같은 무역회사드인데, 이 회사가 오래지 않아 획득한 전설적인 이득은 모든 주주와 콩고에서 활동한 모든 유럽인에 의해 승인된 강제노동체계와 노예체계에 바탕하고 있다. 콩고의 여러 지역에서 원주민 인구는 강제노역으로 급격히 감소하고,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과 대서양 너머에서 강제로 끌고 온 사람들도 이질과 말라리아, 천연두, 각기병, 황달, 기아, 기력소진과 쇠약으로 집단사망한다. 1890년에서 1900년까지 매년 50만 명의 이름없는 사람들, 어느 연감에도 기록되지 않은 희생자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기간에 콩고 철도회사의 주식은 320 벨기에 프랑에서 2850 벨기에 프랑으로 급등한다.

오스텐드에 도착하자마자 마르그리트 보라도브카가 사는 브뤼셀로 떠난 코르제니오프스키는 이제 날이 갈수록 거창해져가는 벨기에 왕국의 수도를 검은 시신더미 위에 솟아오른 묘비처럼 느낀다. 거리의 행인들도 그의 눈에는 저마다 콩고의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실제로 벨기에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콩고 식민지를 서슴없이 약탈하던 시대의 낙인이 찍힌, 특정한 쌀롱들의 섬뜩한 분위기와 주민들의 눈에 띄는 기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추함이 발견되는데, 이런 종류의 추함은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쨌든 나는 나는 1964년 12월 브뤼셀을 처음 방문했을 때, 다른 곳에서는 일 년 동안 볼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곱사등이와 정신병자를 보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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