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외에는>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죽음 이외에는 머독 미스터리 1
모린 제닝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피시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의 제목 『죽음 이외에는』(Except the dying) 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 '그녀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밤'(The Last Night That She Lived)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보도자료에는 해석한 부분만 나와 있어 원작을 찾아보니 이해가 더 쉬웠다. 그녀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밤에도 그녀의 죽음(죽어가는 것 자체)만을 제외한다면 일상적인 밤과 다를 바가 없었다라는 뜻, 즉 그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속한 그곳에서 그녀의 죽음 따위는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과연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는 가에 대한 물음을 역설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THE LAST night that she lived / 그녀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밤도
It was a common night / 여느 때와 같은 밤이었지
Except the dying; this to us / 다만 죽어 간다는 것, 죽음 이외에는 ; 이때문에
Made nature different / 우리가 보는 세계는 달라졌도다

결론은 물론, 과연 그렇지 않다. 모두들 그렇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기에 소설 속에서 죽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상과 그 의미에 대해 궁극적인 성찰을 요구 하는 것이 이 작품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책을 덮고 이 작품이 과연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굳이 위치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이 들었다. 이미 편견으로 자리잡은 장르나 추리소설에 대한 섣부른 오해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이 작품은 고전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클래식함과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배경묘사의 섬세함이 아주 탁월한 수작秀作으로 추리나 장르의 범위에 국한되기엔 그 소설적 성취가 한층 더 높아 보였다. 특히, 총 21장으로 구성된 작품에서 매장마다 보여주는 마지막 짜릿한 문장들은 안톤 체호프의 단편선을 연상케했고 공간적 시간적 정밀묘사는 <오만과 편견>이나 <어톤먼트>같은 영화를 떠올릴 정도였다. 추리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않아 단순한 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만 '과연 범인이 누군가'에 포커스를 향하기 보다는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과 어떻게 관련 되었는가' 에 무게를 두면서 주변사람들을 거쳐 과는 과정은 초긴장, 긴박감, 스릴과 같은 단어와 어울린다기 보다는 갈등, 상처, 약점, 희망과 같은 보다 상위개념을 밑바탕에 포진시킨 덕에 작품을 좇아가다 보면 어느새 범인말고도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1890년대 캐나다 토론도이다. 캐나다는 우리에게 이민으로 익숙한 나라이다. 전체인구의 다섯 명 중 한명은 이민자이며, 토론토의 노숙자 3명중 1명 역시 이민자 라는 통계가 있어 이민자의 땅이라 할 것이다. 토론토는 옛부터 영국계 캐나다의 최대 중심지였다. 바로 모린 제닝스는 영국에서 자라 토론토로 이민 온 정신과 의사 출신이었기에 1890년대 빅토리아 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은 물론, 머독형사라는 인물을 통해 주변 이웃들의 심리적인 부분까지도 밀도 있게 그려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머독형사를 들여다 보자. 그는 불행하게 자라왔고 지금도 불행하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그로 고통 받던 어머니의 사고死, 지적장애자 였던 남동생과 수녀가 되어버린 여동생, 전염병으로 죽은 약혼자, 카톨릭 종교인 으로서의 갈등, 남성으로서의 욕망 등에 시달리며 별다른 희망이 없어 보이는, 순경보다는 높지만 경관이나 경감보다는 아래인 수사관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작가는 테레즈라는 소녀가 사망한 날 이후 주변 인물들을 하나하나 쫓아가며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머독형사를 바라보기도 하고 머독형사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라보기도 한다. 머독형사 뿐아니라 앨리스나 로즈부인같은 주변 인물들도 또 다른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라보게끔 한다. 이 서로상호적인 객관적 거리는 어느 하나의 인물에 치우치지 않고 인물 모두를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 근거 제공에의 타당성을 부여하며 각 인물의 심리를 공정하게 간파할 수 있는 묘미를 선사한다. 여기서 머독형사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가슴아픈 가족사, 젊은 날의 실수, 사랑에의 상처를 모두 안고 있기에 사람들의 밝힐 수 없는 비밀을 밝혀가는 바로미터로 존재하게 된다. 마치 정신과 의사가 환자의 은밀한 고민을 개별적으로 상담해주듯.

창녀로 살아가는 앨리스와 에티에게는 자신도 창녀를 원했던 고객으로서 경멸감과 동시에 죄책감과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테레즈가 하녀로 일했던 로즈박사네 가족에게서는 비밀을 품고서도 외양적으로 행복한척 해야 하는 위선과 이중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챌 수 있었다. 시의원이라는 자리에 오르기 까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세프컷 의원의 가식적인 연설을 들으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에선 목울대가 울렁거리기도 하고, 영국의 고아원에서 온 마구간 지기 조에게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렇듯 머독형사가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 속에서 하나씩 밝혀지는 비밀은 모두 프랑계 캐나다인 이었던 외방인으로서 외롭고 연약한 열여섯 소녀 테레즈를 죽음으로 몰고간 직접, 간접적인 원인으로 밝혀진다. 로즈 부인에게는 말동무였고 조에게는 엄마같은 누나였던 테레즈의 소녀성은 창녀들에게는 질투와 시기의 대상으로서 사회지도층에게는 쾌락과 성노리개 로서 하인에게는 관음증의 대상으로서 짓밟혀져 왔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임신한 채로 죽은 테레즈가 끝내 누구의 아이를 임신하였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쩌면 모든 인물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그들이 준 상처를 잉태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의 말미에 머독 형사가 살고 있는 키친부부네 집에 새로운 하숙인인 젊은 미망인이 이사오는 것으로 일말의 희망을 암시하는 것은 테레즈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밝혀준 댓가로서 하나의 미덕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갸우뚱하긴 했지만 영화적 결말에 익숙한 우리로선 비극 속에서 만나는 희극적 장치로 그나마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불우하고 연약한 소녀의 죽음은 반갑지 않다. 엊그제 한국으로 시집온 지 일주일만에 남편의 무식한 폭력으로 사망한 열아홉 베트남 처녀의 사연을 시사프로그램에서 접했다.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가해자는 남편이라는 사람같지 않은 인물이겠지만 이 작품처럼 그 처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변환경과 인물들을 추적해간다면 한사람의 죽음에는 한가지의 이유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한 소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소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라 할 것이다. 양파껍질처럼 한 거풀 벗겨지는 재미와 자꾸만 드러나는 속살이 꽤 탄탄하다. 비밀은 다 밝혀지고 난 다음 물론 허무하다. 밝히고 싶었고 밝혀져야 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한가지 알아버린 진실은 허무의 바닥에 무언가를 흩뿌리고 지나간다. 그녀가 죽어 갔기 때문에 달라진 것이다. 죽음이외에는 아무것도 다를 바 없었던 현실에서 우리의 가슴엔 모두가 알아야할 불씨하나가 오롯하게 떨어진다. 그다지 뜨겁진 않다 하겠지만 오래 두고 뭉근히 지펴야 할 것 같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들이 누릴 혜택임에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백에 앞서

나는 이 책을 예판으로 만났기에 벌써 책을 덮은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때 느꼈던 개인적인 감회가 아직도 생생하다. 작가의 전작인 『개밥바라기 별』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기에 그 여운도 가시지 않았었지만 대대적인 광고나 황석영 작가라는 이름 석자의 마케팅 파워를 제쳐 두고서라도 나는 이미『강남몽』을 꼭 읽어야 할 세대라 각오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말하는 작품의 주력 타겟으로 이미 정해졌다는 사회적 요구와 암묵적 인식이 한몫 했음을 부인치 않겠다. 70년대부터 시작된 강남의 개발사와 같이 하는 나의 유소년기와 오늘날 그토록 한 많은 강남夢으로 탄생한 강남 아파트에서 7,80년대를 살아왔고 부동산 버블의 핵심요인인 학군에서도 강남의 8학군을 졸업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 강남에서 사회생활을 했으니 마치 백화점이 무너지는 현장을 눈앞에서 목도한 목격자라도 된 듯한 증인으로서 이 작품을 숙제처럼 집어 들 수 밖에 없었던 터였다. 그렇게 작가는『강남몽』앞으로 나의 출석을 요구하였다는 생각이 들자 주사도 먼저 맞는 것이 낫겠다싶어 자진 출두를 하였던 것 같다.

책을 덮고는 마치 나의 강남주거史를 돌이켜 본 듯한 뿌듯함도 있었고, 그 시절 부모님, 친구들과의 추억이나 강남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마냥 뛰어 놀던 옛날 아파트도 애틋하게 떠올랐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나고 나니 강남에 살았다는 것이 겉으로 보기엔 하나의 이력으로 인식되기도 했었기에 그쪽 속사정은 다 알고 있지 하는 (한번이라도 부러워 했을 사람들을 향한)우월감이나 초등학교부터, 여중고 시절을 강남학교에서 지내온 덕에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도 우리끼리 출신학교를 거슬러 유치하게 오리지널을 따져가며 패거리를 만들곤 했던 포스트 강남증후군(?)에 대한 웃음 섞인 그리움 같은 것도 슬며시 피어올랐기에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많은 것을 뒤돌아 보았다.

1995년 당시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 바로 전날 법원에 일이 있어 백화점 지하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도너츠를 먹으며 시간을 기다리던 내가 다음날 같은 시간에 논현동 회사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던 순간 붕괴소식을 듣고는 집에 돌아가 멍하니 뉴스 화면만 바라보던 그날 밤도 기억났고, 또 거짓말처럼 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레 잊고 살아왔던 우리들의 오늘을 반추해보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몇 번의 대형사고 참사가 이어진 후 유학 갔다온 직장 동료에게 한국에선 백화점에 들른 후 지하철을 타고 성수대교를 건너면 꼭 한번은 죽는다는 뼈있는 농담을 외국친구들 한테 들었다며 고개 들고 다니기 창피했다는 이야기도 이젠 추억이 되었다.

고백 하나, 타고난 바이러스

90년대 말 IMF가 터지기 전까지 우리 세대의 20대는 오렌지족과 압구정동이라는 대명사로 강남을 소비하고 성숙하지 못했던 국력에 대한 패배감을 개인적인 욕망으로 대체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강남의 탄생과 생성의 시기가 같은 1970년 즈음에 태어난 내 세대의 경우 초등학교 때부터 한반에 70명이나 되던 오전 오후반을 거쳐 80년대 컬러시대와 전두환 정권의 4S(Speed, Screen, Sports, Sex)정책에 힘입어 프로야구나 비디오 영화를 통해 취미에 눈을 뜨게 되었고, 겉으로는 두발 및 복장 자율화라는 공교육의 허울 속에서도 반공과 주입식, 획일적 교육의 억압이라는 이중성을 가장 혼란스럽게 체험한 과도기 세대였었다. 평균 대입 경쟁률이 4:1이라 한 분단(8명)에 두 명만 대학을 가는 현실이긴 했지만 청년백수가 이십대의 상징인 오늘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 때의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은 아니었고 좋은 일자리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쪽에서 부르짖던 운동권 친구들의 정의로와 보이던 모습에 동참하지 못했던 대다수의 소심한 우리 세대가 미덕으로 강요당한 것은 언제나 남들 하는 만큼만인 남들과 다르지 않음이었다. 학급회의 때도 건의사항에 손을 드는 것은 밉상을 부르는 일이라 인식되어 남들과 다른 생각, 다른 모습은 결코 다양성이라는 격려와 칭찬으로 조명받기 어려운 현실이었던 것이다.

마침 강남땅도 우리의 아노미적 성장기 시절에 불철주야 포크레인으로 아파트 숲을 창조하게 되었고 우리 세대가 국가적 패배감과 무늬만 자유로 보였던 이중성을 그 뿌리로 성장하여 사회인이 되었을 때엔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되는 한 두개의 스펙만으로도 한 계단 위를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우리 부모님들은 바로 법적인 울타리가 형성되지 않은 시기에 이미 기득권으로 획득한 부동산이라는 재산의 강남夢을 그 결과로서 우리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신 분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부모님의 재산을 무위로 받아 먹은 마지막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남들 하는 만큼은 꼭 따라잡아야 했던 우리 세대는 바로 다음 세대보다 부동산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큼이나 그 믿음이 견고하다는 생각이다. 자라온 환경적인 영향으로 부동산을 추종하는 세대가 되었다고 합리화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강남을 증오하면서 그리워하는 특유의 이중성의 기원은 내가 아닌 남이 기준이 되어야 했던 그 시절 교육에 있다고 자책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었던 우리 시대의 꿈은 그래도 낭만적이었다고 같은 세대들끼리 대화를 나누다 보면 궁극에는 결국 2010년 오늘까지 살아온 결과로 아파트(혹시라도 강남이면 다홍치마이고)를 한 채 소유하고 있느 냐의 여부가 앞으로의 인생을 판가름 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에 씁쓸한 공감을 느끼며 강남에의 애증을 안주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곤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부모님 세대의 순수했을지 모를 강남夢을 더 위악적으로 계승해온 후발 주자(우리를 포함한)들 덕에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도 많은 발전을 하였건만 강남에 대한 집착은 더 뿌리 깊고 강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세대들 중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무조건으로 받은 전세금(전세금의 규모에 따라 지역이 달라졌지만)을 가지고 되건 안되건 꾸준히 분양권에 접근해왔고 또 운 좋게 분양권을 획득한 사람들은 자고나면 하루 아침에 억 단위가 바뀌는 신기한 강남夢을 꾼 사람들도 많다. 신기한 강남夢은 무슨 전염병과도 같아 너도나도 꾸기만 하면 보물이 될 것 같은 기대감으로 꼭 강남이 아니더라도 아파트라면 무리한 대출로 일단 집문서를 확보하는 것으로 남 따라하기의 전형을 집요하게 실천해왔다. 그렇다. 우리들 대부분은 옷집에 가서도 남들과 다른 디자인 보다 남들이 제일 많이 선택하는 스타일의 옷을 고르는 것이 한결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이미 태어 날때부터 강남夢 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에 항체는 커녕 바이러스를 지니고 세상에 등장했던 것은 아닐까. 


고백 두울, 밥은 굶어도 집은 강남으로

시간은 흘러『강남몽』도 내게 멋진 교훈으로 자리 잡으려 할 즈음 아이 때문에 친하게 지내는 언니로부터 자주 볼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뉴스에선 연일 부동산 경기침체며 집값 하락과 입주 거부현상, 건설사 위기에 따른 심각한 실태를 자세히 조명하고 있었다. 곧이어 '강남'의 한 아파트 4000세대의 경우 세대 대부분은 떨어지는 집값과 대출금, 이자 등에 허덕이고 있으며 '비싼 아파트'에 살지만 '생활은 어려운', 말 그대로 '하우스 푸어(House Poor)' 신세로 전락했다는 경제관련 칼럼 메일을 받았다. 언니 역시 무리한 대출로 아파트를 구입한 처지라 네 식구 살림에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집을 내놓았으나 오다가다 물어보면 파리만 날리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3년 전 부동산 경기가 활황일 때 2억이나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마련했으니 어찌보면 집문서 하나 들고 월세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니 오히려 전세신세를 면치 못하더라도 맘 하나는 편하지 싶은 내가 부러울 지경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남夢은 장밋빛 행복을 약속할 꿈이 아니라 미래를 덮어 씌우는 거대한 암흑의 덫이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실로 씁쓸하고 허탈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충격이 컸다. 한때는 서로 집안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했던 이웃이어서가 아니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세대마다 저마다의 현실에 처한 절실한 고민들이 존재 할 것이고 그 고민들은 어느 세대가 다른 세대보다 덜하고 더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박빙의 사연인 것도 알고 있다. 사실 우리 세대는 미모를 무기로 회장님의 세컨드가 된 박선녀나, 철저하게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던 김진 회장, 초창기 부동산 수혜자인 한강개발의 심남수와 박기섭을 대 놓고 욕할 입장은 되지 못한다 생각한다. 그것은 강남의 랜드마크가 되어버린 몇몇 고급의 아파트를 지나갈 때나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패턴, 그들이 자주 들러 쇼핑한다는 백화점과 명품샵, 눈부신 아파트에서 빠져나오는 고급 외제 승용차들을 목격할 때 한번쯤은 저들이 오로지 실력과 노력만으로 획득한 자리가 아닌 운 좋게 부동산이나 주식 아니면 부모덕으로 쌓아 올린 외양적인 성공의 모습일 뿐이라 그들을 깍아 내리면서도 속으로는 늘 부러운 마음을 살짝 덮어 버리곤 했던 우리의 이중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에 나보다 먼저 입성한 사람들을 부럽지 않은 척 했기에, 드디어 내가 입성하게 되었을 때 겉으로 좋은 척 하지 않았기에, 지금 와 그것은 헛된 꿈이었다고 말할 용기도 말하고 싶지도 않기에 아직은 괜찮은 척 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서글프다.

옳은 것이라 말은 못하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고 또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나도 한번' 이라는 생각에 왜 강남夢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외제차가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오면 주유소 아르바이트 직원들도 허리 굽히는 각도가 틀려지는 한국의 현실에선 일단 할 수만 있다면 강남에 입성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들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토록 어렵사리 입성한 강남에서 남들에게 보이는 성공에선 성공했으나 정작 실제 행복이라는 성공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하니 그동안 뒷짐지고 구경하는 입장인 척한 나로서는 고소하다고 해야 할 지 동정해야 할 지 사실 두 가지 상반된 감정과는 별개로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열심히 가꾸었던 강남夢이 지금에 와 이토록 서글픈 우리들의 자화상이 되었다는 현실 자체가 너무나도 화가 나고 억울하고 무망하다. 불타고 있는 심정에 기름을 붓는 꼴인지 모르겠으나 강남夢을 꾼 덕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강남몽』의 이차 타켓으로 부전승의 자격을 이미 획득한 처지이니 출석 요구서와도 같은 이 작품을 외면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 세엣, to be continued

강남에서도 모두 잘 살고 공부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도 빈부의 격차와 학력격차는 엄연히 존재하였고 어쩌면 차라리 같은 강남에 살지 않는 것이 상대적 박탈감에서 더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95년 당시 삼풍 백화점은 강남에 있긴 하였으나 젊은 세대가 자주 드나들던 갤러리아 백화점(당시 압구정동 한양쇼핑센터)이나 롯데백화점(당시 역삼동 그랜드 백화점)과는 사뭇 분위가 달라 주로 샤넬풍의 사모님(박선녀 부류의)들이 자주 들르는 백화점이었다. 이미 강남중에서도 더 유달리 고위 특수계층이었던 그들이 자주 방문하던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것을 보면 그 위치를 제대로 공략한 당시 이준 회장(김진 회장)의 탁월한 안목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내 기억으로는 다른 백화점과는 달리 중앙이 시원하게 뚫린 중정 구조로 매장수가 많지도 않고 중년 대상의 고급 브랜드가 많아 언제나 붐비는 백화점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수만을 위한 공간이었기에 그나마 다른 백화점이 아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지금 생각하면 강남의 백화점 들 중 꼭 하나가 무너져야 한다면(?) 애석하게도 암묵적으로 마땅히 지목되어야 할 백화점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백화점이 무너짐과 동시에 같이 묻혀 버린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묻혀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묻혀 지는 것으로 끝나 버린 것일까. 만약 붕괴현장에서도 죽지 않고살아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다시는 꾸지 말아야 할 강남夢 이었을까.

우선 실제로 백화점에 묻혀버린 박선녀의 꿈은 안타깝게도 오늘날 면면히 이어지는 꿈이라 생각한다. 박선녀의 서울 상경 이야기는 이미 강남의 룸살롱에서 캐스팅된 것으로 알려진 어느 유명한 여배우의 경우처럼 잘 풀릴 경우 대선에 도전하는 정치인의 내조여왕으로 까지도 한 번에 올라갈 수 있는 아주 운좋은 선망적 꿈의 기회로 더 다양화 되고 있는 듯하다. 김진 회장의 경우는 단순히 개인의 욕망을 떠나 그가 걸어온 길에 우리 현대사가 질곡히 새겨져 있는 터라 나라의 운명에 따른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경우는 많지 않을지 모르나 정치권력을 이용해 자손 삼대가 누릴 만큼의 부를 축적하는 양상을 지겹도록 보아왔다. 아파트 건설회사 사장으로 암시되는 박기섭이나 심남수의 경우는 법제가 형성되기 전 초기 기득권을 대량으로 획득한 운 좋은 경우로서 오늘날에도 강남불패 신화처럼 아파트 분양권이 하나의 로또처럼 인식되는 한탕식 꿈을 계속 대량생산해 해왔다고 볼 수 있다. 홍양태나 강은촌처럼 주먹계로 대표되는 조직폭력배들은 국가의 이권사업이나 개발사업 등에서 드러나지 않게 정치와 경제권력 사이를 오가며 불법 브로커의 역할로서 더 견고하고 체계적으로 그 꿈이 변형된 형태로 이어져 온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에 비해 임정아의 부모로 등장하는 가장 하층 부류의 집 없는 서민격인 임판수와 김점순의 경우는 그들의 딸이 붕괴현장에서 기적같이 생존 하는 것으로 살아서 다시 행복에의 꿈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소박한 꿈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강남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꿈은 비록 백화점이 무너지긴 했지만 그들의 꿈도 같이 묻혀지는 것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어쩌면 요술쟁이 지니의 램프 속으로 잠시들 숨어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그렇기에 마법이 다시 살아나면 언제든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덕적이든 불법적이든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꿈은 여기까지 이어졌다.

꿈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아직도 행복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몇몇 그들이 꾼 꿈의 결과가 비록 막대한 사회적 피해로 도출되었을 지라도 꿈을 꾸었던 개인만큼은 각자 자신의 행복을 간절히 소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강남夢의 꿈을 꾼 사람들의 공통점은 꿈 이전의 도덕이나 준법같은 것을 묻기 전에 모두 현재보다는 더 높이 한 계단 씩 올라가려 했다는 것에 있다. 강남이 라는 곳이 저 높은 곳에 위치했으니 당연한 결과 이겠지만 결국 그 높은 곳에서 추락하려고 그렇게 기를 쓰며 올라 간 것이었을까. 높이 올라갔을수록 추락하는 높이와 그 고통은 더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이미 너무 멀리 너무 높이 올라 가 있는 사람들은 추락에의 안전장치가 너무 견고해 절대로 다시는 내려올 리가 없어 보이고 꼭 나중에 끝 무렵에 억지로 막차를 탄 사람들의 경우가 발버둥 치며 추락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나는 어쩐지 꿈을 꾼 사람들을 탓하기 전에 애초부터 부실했던 강남夢을 원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다음호에 계속 이어질 강남夢을 꾸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아니 강남夢을 꾸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인가.

마지막 참회, 리모델링으로 리턴

꿈도 리모델링 할 수 있을까.

7,80년대 강남의 대단위 아파트들은 2000년대 들어와 고가의 건축자재와 첨단의 인테리어로 재건축되었다. 그때보다 두세 배 높이 치솟은 아파트를 볼 때면 적어도 당분간은 붕괴될 꿈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고가로 분양된 고급의 아파트를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의 가슴에 버티던 꿈 역시 그 옛날 강남夢과 다르지 않아 보였고 오히려 욕망의 높이는 더 아득해보였다. 묻혀 지지도 묻어 버리지도 못할 꿈이었기에 몰래 가슴에 새기고 이어나갔던 것일까. '꿈'이라는 단어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공존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었다. 강남夢은 과거의 꿈이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져온 현재진행형의 꿈이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꿈이 되버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는 이쯤에서 고백을 마치고 참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 자진이든 요구에 의해서건 우연적인 것이든 여기 모인 우리 세대들이 머리를 맞대고 묘안을 짜야 할 것만 같다. 나는 그것이 자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해야만 할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날 우리세대가 실감하던 국가적 패배감은 오늘날 세대적 패배감으로 공감대를 위치이동하면서 사실상 역전의 기회를 강남夢으로 삼으려 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더 이상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막다른 골목이라는 위기감은 작가가 짚어 주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이다. 아닌 척 뒤돌아서 가슴을 부여잡기 보다 당당히 가슴속에서 꺼내어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축 하는 모습이 다음세대를 위해 우리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을까 참회해 본다.

그런데 막상 리모델링을 하려하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고 어제까지 꿈이 같다는 '경쟁자' 였다가 오늘부터 같은 꿈을 꾸는 '동반자'가 되려하니 여간 쑥쓰러운 게 아니다. 우선 리모델링 사업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동안 강남夢을 '수단'이나 '목표'로 인식해왔던 관행에서 '가치'혹은 '열정'의 개념으로 과감한 전환이 필요함을 대전제로 하기로 한다. 우리 세대가 주로 남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에 집착하며 남에게 근사하게 보이는 겉모습으로 남을 속이고 이득을 취하려 했으니 분명 수단으로서의 강남夢이었다. 또 남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성공에의 만족감을 얻었으니 목표로서의 강남夢이기도 했다. 이러한 우리의 꿈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대로 강요되어 남에게 뒤쳐져서는 안 되는 아이들로, 정글시대에서 살아남기라는 꿈보다 해몽이 더 처절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루종일 시발택시를 대절해 좋은 땅을 물색하던 그들의 도전정신만큼은 인정해 줄 만하지 않은가. 알몸뚱이 하나로 강남에 상경하여 타관객지에서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버텨내었던 그들의 열정만은 다시 불태워 보고 싶지 않은가. 욕심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려던 그들의 양심만은 기억할만하지 않은가. 그저 마음하나 편하게 살고 싶었던 그들의 소박한 꿈만큼은 소중하게 담고 싶지 않은가.

어렸을 적 장독대가 있던 뒤뜰에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내 눈앞에서 어른거린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마음에 너무 높지도 않고 꼭 내가 두 손을 뻗어 올려 잡을 수 있을 만큼만 높아 보였던 나비의 나풀거림이 너무나 생생했다. 몇 번이나 뒤좇아가 잡으려 했지만 애꿎은 손뼉소리만 찰랑거리던 봄날이었나 보다. 그렇다. 우리는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재발견 해야 할 것이다. 뿌리가 깊거나 꼭꼭 감추어져 있다손 치더라도 바보같은 꿈이 아니라면 다시 찾아 내어 보석같이 세공해야 할 것이다.

나는 봄날처럼 꿈을 꾸겠다. 다시 돌아와 똑똑한 꿈을 그린 후 불신이라는 동반자를 배신하여 떳떳하고 튼튼하게 가꾸고 싶다. 혹시 이루지 못할 꿈이라도 얼마든지 다음 세대가 도전할 만한 가치있는 꿈으로 남기고 싶다. 그들은 그들의 강남夢을 꾸었지만 우리의 강남夢은 우리가 꾸자. 지금 우리의 꿈이 다음 세대의 예지몽이 될 지 모른다. 그들은 남의 시선을 향한 수단과 방법을 물려주었지만 우리는 자기 스스로의 시선에 진실할 가치와 열정을 전해주자. 이렇게 약속하자고 하는 것 자체가 꿈만큼이나 벅찬 오늘, 꿈을 다시 만드는 시간을 다짐한다. 지난 강남夢에 숨겨진 가능성과 여기 모인 동세대인들의 약속과 믿음을 더해 나는 오늘밤 강남夢을 다시 한번 제대로 꾸어 보겠다. 혹시나 꿈속에서 그대 마주치게 된다면 이번엔 손 내밀어 웃어보겠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같은 꿈이라 더욱 반갑다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이조부 2010-11-09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동아에서 이 작품에 표절혐의에 관한 기사를 실었더군요.

삼풍백화점과 관련된 이야기는 생각할 여지를 주네요. 물론 주인장의 의도는 인지했지만 말이죠.

 
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어색한 만남, 그 후  

사실 '요네하라 마리'라는 일본인을 알게 된 것은『미식견문록』이 먼저였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취재한 맛나는 음식여행에 관한 에세이쯤으로 생각하고 경쾌하게 집어 들었지만 다 덮고 나서 음식자체 라기 보다는 음식에 관련된 다양한 문화를 맛본 것으로 느껴졌다. 책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던 '러시아 문화'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나 음식을 소재로 하면서도 밑바탕에 평화를 기원하는 바램을 느낄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것의 모태가 된 그녀가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교육받았다던 프라하에서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학교를 다니며 여섯 끼를 먹었다는 그녀의 끼니마다의 식사메뉴는 과연 그 시절이 60년대인가 싶을 정도로 호화생활과 고급메뉴였기 때문이다. 『미식견문록』의 이야기는 러시아속담에서부터 시작해 러시아 술 보드카나 케비어에 관한 사회경제적 배경, 러시아에 감자가 보급된 역사, 프라하 시절 친구들과 사먹었다던 터키사탕, 러시아 친구가 건네준 할바등에 관한 추억을 지나 그녀가 읽었다는 책, 동료나 친척들과 생긴 에피소드를 회상할 때에도 늘 러시아는 근원적인 배경으로 뚜렷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20년간 러시아 동시 통역사를 하면서 200번이나 러시아를 왔다 갔다 했다는 사실을 염두 해 두고서라도, 거의 러시아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의 사고방식과 통찰력의 기원은 일본을 넘어선 그 어딘가로 느껴졌기에 색다른 인생길을 걸어온 그녀의 실제 이야기가 궁금했던 터였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요네하라 마리'라는 러시아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일본인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체험을 당시 만났던 동구권 유럽친구들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해 줄 것으로 믿었다. '프라하'라는 다분히 낭만적으로 보이는 배경과 '소녀시대'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미식견문록』을 통해 더욱 촉발 되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7,80년대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낸 내가 기억하는 당시 소련과 동독, 동구권 유럽은 거의 올림픽과 같은 스포츠에서의 칼같은 피겨스케이팅이나 절도있는 동작의 체조선수들의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얼음같은 이미지가 전부였다. 체조요정 코마네치나 드라큘라의 나라이기보다는 김일성을 추종했다는 독재자 차우세스쿠 정권으로 인식되어 버린 루마니아나 주로 구기 종목에서 우리보다 머리하나는 더 커보였던 장신선수들로 우리선수들이 무릎을 꿇기도 했던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프라하의 봄'으로 상징되던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무시무시하던 공산주의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국가들이 아니었다.

1989년 대학입학과 동시에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성인이 된 후 유럽공산주의의 몰락, 소련의 붕괴도 한참이나 지난 오늘날엔 동유럽여행도 낭만적인 휴가상품으로 치부되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은 세대로서 무의식중에 남아있을 적대적 감정은 동유럽 소녀들의 이야기를 향한 호기심보다 더 오래된 객관적 거리를 두려했음이다. 그렇게 호기심 반 거리감 반으로 선뜻 다가서지 못해 어정쩡한 발걸음으로 이 작품『프라하의 소녀시대』를 만나 버렸던 것 같다.

그리곤,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덮고 나서는 그제서야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참 귀중한 기록을 남겨준 분을 잃었구나'라는 뒤늦은 애석함을 '그래도 살아 생전에 남겨주어 그나마 다행이다'라는 더 늦은 고마움으로 스스로를 달래어야 했었다. 진실로 더 할 수 없이 귀중하다고 자각했다. 더불어 내가 알고 있었던 혹은 안다고 생각하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 그 국적을 가진 우리와 다르지 않던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은 애국심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한 인간으로서 행복하고자 했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간과하고 살아왔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었다.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그녀가 사망한 이후였고 벌써 3,4년이 지났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8,90년대에 활발하게 러시아 동시 통역사라는 직업으로 이미 사회적 성공을 거둔 유명인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러시아라는 선택은 그녀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고 당시 일본공산당 간부였었던 아버지의 행보를 따르는 것으로 시작된 운명이었다. 그녀는 1960년에서 1964년까지(아홉살에서 열네살까지) 5년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소비에트 학교(외교관들, 공산당 간부의 자제를 위해 소련 대사관이 운영했던 국제학교)를 다녔다. 일본 내에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터라 그녀의 아버지가 프라하에 본부를 둔 국제 공산주의 운동 이론지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에 일본 공산당을 대표한 편집위원이었다는 사실도 무슨 빨치산의 후손을 만나는 것처럼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녀는 1995년 일본 방송사의 도움으로 소비에트 학교 시절 친하게 지낸 세 친구를 찾아 나선 것이 계기가 되어『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집필했다고 한다. 그 시절 친구들인 그리스 출신의 리챠, 루마니아 출신의 아냐,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야스나를 찾아가 만나는 과정이 책의 각 챕터 후반부를 장식한다. 마치 우리로 본다면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 유명인사가 그 옛날 시골마을에서의 첫사랑이나 소꿉친구를 만나기 위해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는 눈물나는 여정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60년대는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고 50개국에서 모인 다국적의 외국 소녀들이 머나먼 타국 프라하라는 도시의 어느 학교에 모여 모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를 가지고 세계 다른 지역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울고 웃고 화내고 즐기며, 그들만의 소녀시대를 보내었다는 것은 굉장한 특수상황의 흔치 않은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공산주의가 사라진 지금의 프라하도 멀기만 한 내게 어쩌면 그녀가 제시한 사진 몇 장이라도 없었다면 혹시 그냥 소설 속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렇게 세 명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원제가 '거짓말쟁이 아냐의 진홍색ㆍ眞紅色 진실' 인 것을 보면 세 명 중 애국심이 남달랐던 루마니아 출신의 아냐를 통해(아냐를 찾아가며 생각을 펼치는 과정이 다른 친구들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저널리즘 적이기에)아마도 자신의 조국인 일본인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해주려 한 것은 아닐까 싶었고 세 명의 친구에 비해선 선진국이자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데올로기나 이념부분에선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녀만의 강대국 특유의 우월감을 여러 차례 느끼기도 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녀가 이야기 하고자 한 내셔널리즘(민족주의)에 관한 통찰보다는 그녀들과 같은 소녀시대를 지내온 한 인간으로서 세 친구들에게서 느낀 '소녀적 감수성'과 그를 통해 그녀들의 인생에 밑거름이 된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그녀들이 나눈 우정속에서 자라난 '자아의 성장'에 보다 주목하고 싶었다. 30년이 지난 후에 단순히 옛 친구에 대한 향수나 추억에 대한 그리움만으로 그녀가 친구들을 찾아 간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오랫동안 러시아 문화를 주고 받는 역할로 살아온 그녀가 일본인이 아닌 전 세계를 향해서라면 끈질기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답을 얻고 싶었다.

자유를 향한 푸른 안테나

그리스 공산당 대표로서 프라하로 망명한 아버지를 둔 리챠는 개방적인 어머니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오빠, 핸섬한 외삼촌을 둔 말괄량이 소녀였다. 수학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일찍 '성'에 눈을 뜬 리챠는 스포츠 만능에, 영화광에 배우가 꿈인 외향적 성격의 친구였다. 한번도 본적이 없었지만 쨍하고 깨질듯이 눈부신 조국 그리스의 하늘을 늘 자랑스러워했던 리챠의 감수성은 훗날 그 하늘 만큼이나 넓고 깊은 포용성으로 발전해 내적인 성장을 이룬 듯하다. 예상 밖의 진로와 이어지는 불운에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잃지 않았던 리챠의 마음 한구석엔 늘 고향의 하늘을 향한 자유의지가 꼿꼿한 안테나 처럼 푸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독일에서는 특권계층으로 인식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노동자 출신의 남성과 결혼을 하였고, 학비가 무료인 사회주의 체제 덕에 교육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소련군에 반대 입장을 표명해 많은 기회를 잃었던 아버지이지만 공산주의라는 정체성만큼은 잃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를 떳떳하게 생각하며 보따리 무역상으로 전락한 아버지의 자동차 사고를 절망으로만 인식하지는 않는다. 오빠 미체스의 불운은 그동안 많은 여자를 울린 댓가로 생각하며, 다운 증후군으로 태어난 아들에게서도 행복과 감사를 느끼는 리챠는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고국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리스의 방송을 시청하는 것으로 오늘의 자신을 저버리지 않는다. 서독의 나우하임이라는 마을에서 터키, 그리스, 동유럽에서 온 일용 노동자들과 그의 가족을 위한 진료소를 운영하는 모습으로 만나게 된 리챠는 특유의 낙관적인 성격과 독일인, 체코인, 러시아인, 그리스인의 장단점을 모두 이해하고 다문화, 다민족의 다양성을 몸으로 체험 한 후 가장 자신답지 않았을 모습으로 자신다움을 찾아간 꽤 기특한 친구로서 그녀의 걱정을 무색케 했다. 의사라는 직업은 배우를 지망했던 리챠로선 의외의 선택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사람들을 진료할 때 진솔함과 자유로운 사고방식, 편안함을 매력으로 환자들과 소통하고자 한 리챠의 본성은 십분 발휘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기인하는 건강함과 그를 향한 그리움은 오랜 세월 어디를 가서 무슨 일을 하든 그를 그답게 할 수 있는 순수의 모티브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리챠가 그리워한 그리스의 하늘과 바다는 많은 이들이 손에 꼽는 베스트 여행지이기도 하다. 그리스에 갈 기회가 온다면 꼭 눈부신 하늘을 뚫어져라 보고 싶어 질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 보다 떳떳한

루마니아 공산당 대표를 아버지로 둔 아냐는 어린 나이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여 과장된 혁명적 표현을 쓰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하려는 성향의 친구였다. 똑같이 공산주의라는 지하생활을 파란만장하게 견뎌온 아버지를 두었다는 동지의식이 그녀와 아냐를 가깝게 하기도 했지만 이념으로서만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정작 실천적인 면에서는 귀족과도 같은 부르주아적 생활과 그를 지향한 선택 및 상반되는 행보를 보여주며 훗날 재회할 때까지도 거리감과 의문점을 지울 수 없었던 친구이기도 하다.

일상에서도 쉽게 거짓말을 하는 버릇이나 과다한 형용사로 치장한 이야기 꾸며대기는 아냐가 거창하게 예찬하는 공산주의적 성향을 지녔음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부모나 가족의 허황된 자랑은 유대인으로서의 아냐의 내재된 민족적 열등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 이런 친구들은 거짓말 하는 사실만 빼면 학급에서 친구들에게 상냥하고 혹시나 친구들이 다치거나 위험에 빠질 때 굉장히 의협적인 행동으로 친구들의 믿음을 사곤 한다. 즉, 자신을 괴롭히는 민족적 정체성에 관련된 부분이 아닌 모든 것에는 평등적 시선을 주장해 친구들로부터 거짓말에 대한 어느 정도 관용을 미리 확보해두는 미워하기 힘든 존재 인 것이다.

아냐는 독재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특권층의 생활을 향유했던 아버지덕에 영국으로 유학은 물론 영국인과 결혼하여 여행잡지의 편집이라는 다분히 자본주의적인 직업을 가지며 그토록 유창했던 러시아어를 까마득하게 잃어버린다. 아냐가 러시아어를 잃어버렸던 것은 그 시절 루마니아를 찬양하던 자신을 거짓말처럼 버려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궁극에는 국적이나 민족, 언어에 대한 고집보다는 현실에 맞추어 자신을 합리화 하게 된 아냐는 또다시 90프로는 영국인이라는 거짓말 속에서 자신다움을 버리는 것으로 자신다움을 찾은 친구였다. 그녀는 아냐가 프라하 시절 가장 따스한 가슴으로 기억하는 친구였기에 재회의 반가움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냐를 보며 같은 길을 택했더라면 자신을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황폐한 거리의 어두움과는 달리 부쿠레슈티의 호화맨션에서 아냐의 부모님과 조우한 그녀는 유난히도 걸끄럽다고 생각되는 질문들을 마치 심문하듯이 조목조목 이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본의 아니게 그녀의 내셔널리즘을 엿볼 수 있었다. 아냐의 아버지를 보면서 그녀(마리)의 아버지가 꿈꾸었던 공산주의는 가짜가 아니었고 법적,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모순을 느껴 당신의 혜택을 모두 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역으로 강조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기도 했고 가이드에게 사회의 변동에 자신의 운명이 놀아나는 일은 없었다고 자신있게 언급하는 부분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에 이은 조국과 자신의 운명에 대한 떳떳함을 의미심장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비열한 아버지와 특권을 거절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냐의 오빠 미르차의 인생을 자세히 소개한 부분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도 들어 아냐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녀의 조국에 간접적으로 자신이 걸어 온 길에 대한 못다한 고백이자 사회적 동의를 구하는 진홍빛 사연이 아니었을까.

의연함으로 남은 하얀 우수

지금은 여러 개의 나라로 분리되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독립선언이 발단이 된 다민족 전쟁보다는 유럽 축구의 전통 강국인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를 합친 옛 국가로서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더 친근하다.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개최된 80년대 동계올림픽도 같은 맥락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보헤미안의 거리로 상징되는 '하얀도시'라는 뜻의 베오그라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유고슬라비아의 소녀 야스나는 천재적일 정도로 놀라운 두뇌와 어른스러움, 그림에 대한 재능으로 너무나 완벽해서 다가갈 수 없었던 친구였다. 야스나의 아버지는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우스타시에 대항한 파르티잔 출신이었는데 사실 그녀가 야스나의 집에서 우연히 야스나의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일화는 작품 전체를 통털어 가장 뭉클한 에피소드였다. 야스나의 아버지는 그녀들의 나이일 무렵 학교에 갑자기 들이닥친 우스타시들의 검열당시 파르티잔 마크를 지니고 있던 친구를 대신해 연행된 선생님의 숭고한 희생을 계기로 파르티잔에 가담하게 되었다. 훗날 보스니아의 마지막 대통령으로서 탈출을 거부한 채 언제 폭격당할 지 알 수 없는 사라예보의 방공호에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한 리챠의 아버지나 비겁한 루마니아의 특권층으로 떳떳하지 못했던 아냐의 아버지나 지하생활을 16년 동안이나 감행했다는 그녀의 아버지와 더불어 격동의 시대에 역사와 민족, 이데올로기에 자유롭지 못했던 개인의 운명에 이념을 떠나서 인간적 연민을 느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야스나는 내전의 혼란속에서 보스니아 무슬림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외교부 통역 번역관이라는 일자리도 잃고 인간관계에서도 외면과 상처를 받지만 학생시절의 당당하던 모습 그대로 착실하게 삶을 이어간다. 깨진 다음 맛볼 슬픔이 늘어나는 것이 싫어 컵 하나도 새로 사지 않은 아스냐지만 자신다움을 감내하고 받아 들임으로써 자신다움을 의연히 지켜나갈 수 있었기에 세 명의 친구들 중에 가장 아프게 다가왔다. 여고시절 늘 1등을 놓치지 않고 모든 과목에 완벽하던 미모의 내 친구는 5공화국 시절 유명한 국회의원의 딸이기도 했고 훗날 중견 건설사 집안의 며느리도 되었지만 남편이 교통사고로 결혼한 지 1년도 안되어 사망하는 불운과 정권이 바뀌어 집안이 몰락하면서 소식이 끊겨버렸다. 시대와 환경과 조건이 다르긴 하지만 나는 그 친구가 어떻게 자신다움을 지켜 나왔을 지 새삼 궁금해졌고 아마 아스냐처럼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꼿꼿이 그 상황을 담담히 받아 들이는 것으로 자신을 세우고 있을 것 같다는 믿음도 느껴졌다.

세 명의 친구들 중 가장 조마조마 했던 야스나를 찾아 가는 과정은 ‘명쾌하다’라는 뜻을 가진 애칭으로서의 야스나 같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끝내 그녀가 친구를 찾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만약 찾아가는 도중에 야스나의 불행의 소식을 접하게 되지는 않을까 내내 초조하고 긴장스러웠다. 30년 만에 소식이 끊긴 친구들의 진실을 알아가는 두려움과 비슷한 감정 때문에 “두려운 작품”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은 아니었을지.  

그리고 곧 그 두려움은 조금은 더 복잡한 감정으로 확산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프라하라는 과거의 공간과 소녀시대라는 과거의 시점으로 우리를 데려다준 요네하라 마리에게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저 회상이나 기록의 의미에서 한번의 박수로 고개를 숙이는 것 그 이상의 의무감이 무의식중에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같이 웃고 말자는 연예인도 아니고  자신의 여행에 같이 울어 달라는 리포터도 아닌 작가로서 우리에게 질문과 같은 대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다운 그녀

'나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세 명의 친구들을 끝내 찾아 내고 말던 그녀를 보며 난 '그녀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그녀가 그녀로서 그녀다웠다면 그것을 느낀 나는 과연 어떤 것이 나다운 것일지 그녀를 보며 반문하게 되었다. 그녀는 서문에 다른 나라, 다른 문화를 접하고서야 자기를 자신답게 하고 타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애쓰게 되었다 했는데 그렇다면 혹시 세 명의 친구들에 비해 가장 순탄한 길을 걸었던 그녀가 자신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행운의 수혜자로서 친구들을 찾아야 했던 것이 그녀 자신이 꼭 해야 할 의무와도 같은 일이라 여겨왔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찾았던 것은 그렇게 어렵사리 다시 만나게 된 친구들은 물론이고 혹시 프라하에서의 소녀시절 그녀들 속에 있던 그녀자신의 자신다움은 아니었을까. 작품 속에는 그녀가 친구들과 재회 했을 당시 자신의 감회와 반가움만 표현되었기에 친구들이 그녀를 보며 어떠한 생각을 했을 지는 우리 몫이 되었지만 아마도 세친구들 역시 그녀를 보며 똑같이 조국을 사랑하고 많은 꿈을 가졌었던 누구보다 자신다웠을 소녀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답다는 것', 사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내가 일치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상처를 받게 된 시기는 거의 성인이 되고 난 후 였던 것 같다. 나다움을 한창 만들어가는 시기인 유년기, 사춘기엔 크고 작은 좌충우돌의 시행착오적 사건들로 나다움의 피와 살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격동의 시기에 나다움의 태도와 방식과 표현을 만들어간 세 명의 친구들과 그녀의 소녀시대가 참으로 진하고도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지금은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 세 명의 친구과 재회한 그녀는 무슨 약속을 하였을까. 그들이 나눈 시간들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는 것을 서로 약속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나도 그녀와 약속을 하나 하고 싶다. 나다운 나, 나이고 싶은 나를 잃지 않고 살고자 가끔은 당신을 생각하겠다고. 당신은 참 당신다웠음을 오래오래 기억하겠다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0-08-03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리 리뷰대회 2등 당선작이 이거였군요.
상금도 빵빵하던데~~ 축하드려요!^^
정말 대단하네요~~~ 리뷰 내용도 내용이지만 어쩜 이리 길게 쓰는지 감탄했어요@@

한사람 2010-08-03 17:02   좋아요 0 | URL

어머, 순오기님이다 !!!
글쎄..제가 좀 길죠..? 잘 줄이질 못해서^^
리뷰야 언제나 운인 것같아요, 글잘쓰시는 분들 워낙 많아서요
자주 놀러갈께요~~다른 분들 블로그에 잘 안들어가봤는데
순오기님한텐 가보고 싶었어요 ㅋㅋ
감사합니다!

2010-08-03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3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쓰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직장생활 할 때 도쿄로 출장을 제일 많이 다녔다.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지하철로 연결된 거대도시는 그 끝을 알 수 없어 일본 내에선 어디든지 지하로 다닐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종류線도 많고 그보다 역驛도 많고 마찬가지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보폭이 크지 않는 일본인들이 비즈니스 가방을 들고 잰걸음으로 역사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이나 신주쿠 네거리에서 약속이나 한 듯 횡단보도를 일사불란하게 건너는 젊은이들을 보면 웬일인지 우리는 행복한 것 같다는 우월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금연규제가 심해 흡연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예 공공장소로 정해진 경우가 많은데, 중심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오면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제히 담배를 물고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된다. 거리에 꽁초가 하나라도 보이지 않는 덕에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깨끗한 일본을 느끼고 오는 것이겠지만 나는 어쩐지 역사주변 흡연 장소에서 서로 대화도 없이 담배 한개피만을 달랑 피우고 그것을 날렵해 보이는 휴지통에 넣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던 젊은이들이 잠시 동안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바라본 곳은 어디였는지 생각하고 싶어졌다. 혹시 안개에 가려져 희미한 윤곽만 떠오르는 오래된 백일몽과 같은 '탑'은 아니었을까.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지 내게는 참 새로웠다. 그리고 강렬했다. 누구누구가 뽑은 무슨 무슨 상이라는 의미 보다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지하철 역에서 자주 목격하곤 하던 그 '쓰리'의 현장이 반사적으로 떠올라 읽는 내내 호기심과 호감도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읽히는 흡입력 덕에 책을 덮고 나니 예상외로 허탈감은 컸다고 생각된다. 내 안의 숨겨진 무언가를 감쪽같이 '쓰리'당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고 또 그럴 이유도 절대로 없는 우리들이지만 살다가 한번 쯤은 그저 생각만으로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해 본 적 있었던 비밀스럽고도 신나는,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절대은밀의 욕망을 일부 빼앗긴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도쿄를 무대삼아 주로 명품 브랜드로 차려입은 사람들의 지갑을 소매치기 하는 주인공 니시무라는 몇 년전 공동의 임무를 수행하고 거짓말처럼 사라진 이시카와라는 친구를 잃었고, 사에코라는 애인의 자살을 겪기도 한 도시의 비정한 외톨이 신세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있다고 믿은 자신의 생활을 바꿀만한 의지는 전무하다. 니시무라는 몇 년전 임무를 지시했던 기자키라는 악의 신을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되고 기자키는 자신이 구성한 운명의 각본대로 니시무라의 인생을 조종하려 목숨을 건 몇 가지 임무를 내던진다. 니시무라는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의미를 상실한 채 명령대로 임무를 수행해 나가지만 예정된 결말은 그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한편의 느와르 영화같은 빠른 전개와 도시적인 영상미를 상상할 수 있었지만 나는 작품에서 상징적인 메타포로 등장하는 '탑'과 '동전'에 대해 시선을 고정하고자 한다. 소설 첫머리에 주인공은 어린 시절 실수를 한 적이 있었고 그때는 저 멀리 떠오르는 탑을 본적이 있으나 지금, 실수를 하지 않은 어른이 되어서는 더 이상 탑은 보이지 않다는 회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작가후기에서도 어린 시절 안개에 가려져 있어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환각처럼 느껴진 탑의 정경을 잊을 수 없었고 탑은 그저 나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인지 그 탑은 사라져 버렸고 지금 어딘가에 있는지 모른다는 회상을 하는 부분과 일치한다. 작품 중간 중간에도 니시무라는 지하철이나 지하통로등을 지날 때 혹은 꿈속에서도 삶의 열기를 느끼는 순간에 높은 곳에서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탑의 시선을 느끼곤 한다.

니시무라가 본 '탑'은 높고, 멀고, 단단하고, 아름답고, 엄숙하고, 흔들림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언젠가 내게 뭔가 말할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말해주는 일은 없었다. 자신이 죽는 다고해서 누구하나 슬퍼해 줄 사람이 없었던 니시무라에게 희망이나 순수는 꼭 저 멀리 탑만큼 아득해 보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너무 가닿고 싶어 차마 가볼 수 없는 세상 저 너머의 자신과 상관없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차갑고 비열한 도시 속에서 외롭고 누군가 그리울 때 몰래 숨어 기댈 수 있는 마음의 탑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탑'에 이르지 못함을 너무나 빨리 깨우친 니시무라는 남의 이물에 손을 대는 것으로 그 너머에 있을 그들의 세상에 잠시 닿고자 했다. 탑에서 벗어나고자 소매치기를 하면서 해방감을 느끼고 소매치기 기술이 향상되는 것과 비례하여 탑의 존재를 잊어간다.

하지만 나약한 니시무라에게 그것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고 현실세계에서도 이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탑같은 존재, 기자키와 맞닥뜨려지고 니시무라는 이상속의 탑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눈앞의 탑에서는 굴복하기 싫어 자신을 버림으로써 기자키라는 탑을 뛰어넘고자 한다. 기자키는 타인의 운명까지도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절대권력을 가진 신적인 존재이며 인간성이 상실된 거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니시무라가 핏물에 젖은 '동전'을 던져 올린 것은 보다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잊었다고 생각되던 그 탑을 향해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그토록 끄덕없이 무심한 탑을 향해 마지막으로 손짓하는 니시무라의 애처로운 인사일 것이다. 자신이 가끔은 남의 주머니에서 훔치기도 한 '동전'이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아 남은 욕망을 송두리째 털어 버리고 맨 처음 순수로 돌아가고픈 한가닥 소망으로서 '동전'은 '탑'에게 헌사된다.

니시무라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헐벗어 굶주린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 보이는 소년을 만나 비록 현재는 도무지 희망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나처럼 살지 말라는)메세지를 꾸준히 전달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년을 구원한다. 작품 속에서 엄마와 산책을 하는 소녀나 아빠와 공놀이를 하는 소년, 게임기나 장난감을 가지고 즐거워 하는 소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 행복한 가정을 누려보지 못한 니시무라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는 장치이자 할 수 없이 탑을 그리워 하게 되는 정당성을 부여하며 소년에게 대물림 하고 싶지 않은 이타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소년을 바라보는 니시무라를 바라보며 자꾸 마음이 쓸쓸해진다.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것은 결국 '결핍'의 정신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건의 필요유무를 떠나 훔치는 사람에게 결핍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나 이곳이나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는 오늘의 도시에 살고 있다. 니시무라는 어린시절 고가의 장남감을 가지고 노는 또래 아이를 보고 자신의 힘으로 얻었을 것 같지 않은 것에 자부하는 어린 마음에 최초 반감을 품게 된다. 각자 자신의 힘으로 얻지 않은 것일 지라도 그것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 있는 관용은 허용되지 않는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보면 불로소득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처럼 행세하는 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일개 소시민인 우리는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다. 도덕이나 준법 같은 건 잠시 잊어 버리고 책을 읽는 동안은 남의 주머니를 슬쩍하여 마음껏 훔친 것으로 조금은 서운한 마음을 달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쓰리 당해도 억울하지 않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슬람 정육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해였었다. 이슬람도 그렇고 정육점은 더욱 더 제목부터가 벌써 엽기나 그로테스크한 살인에 어울릴 법하여 갸우뚱 했었고, 혹시나 역설을 이용한 유머가 짜릿할 것인가 나름의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모두 다 설익은 편견에 불과했고 오해를 한만큼 고개를 숙이도록 하는 진중함을 선사한다.  

'내 몸에는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내 몸에는 여전히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는 문장으로 끝나는 소설 속에는 필연적인 '피'도 출현하고 흉측한 '흉터'도 등장한다. 하지만, 읽는 내내 불편한 소재로도 의문스러운 편안함을 제공하고 마는 작품의 미덕을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작가의 문체와 시종일관 낮은 목소리로 들려오는 모노톤의 절제된 문장력도 있었겠지만, 소설의 서사와 서사를 이어주는 작가만의 논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진부하거나 평범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알고는 있지만 드러내 놓지 않고 살짝 건드려 주었으면 하는 그 부분을 찬찬히 긁어 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피'는 결국 보이지 않게 연결된 내면의 '핏줄'일 것이며 그 결과로 각인된 흉터는 과거의 상처가 아닌 '미래로의 충동'으로서 아리게 돋아나는 새살일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작품 속 주인공의 상처와 흉터는 왜 끝내 우리들의 그것을 아물게 하는 힘을 가지는 것인지...그래도 많이 아프다. 그저 그러하고 말 것이 아니라 염치 없지만 이번에도 무언가 돋아나는 순간이길 바래본다.  

작품에 마치 산을 내려와 일선에서 은퇴한 느낌의 이름을 가진 '하산'아저씨라는 터키인이 등장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얼마 전에 모 방송에서 6.25특집으로 방영한 '터키군 장교와 한국소녀의 60년만의 재회'를 다룬 다큐프로를 시청했다. UN군의 일원으로 6.25에 참전한 터키군 장교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전쟁고아인 5살 한국소녀 ‘아일라’(터키어로 달그림자)와 찍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가지고 60년 동안 그녀를 위해 기도한 사연이었다. 장교는 1년 반 동안 부대 막사에서 아일라를 키웠지만 귀국명령을 받고 그녀를 한국의 고아원에 맡겼다. 제작진은 어렵게 그녀를 찾게 되고 결국 장교와 백발이 된 할머니 아일라와 극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에선 가족 모두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군은 미국 영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파병되었기에 전사자 또한 많다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을 읽은 후 터키 참전 용사들이 당시 전쟁고아들을 하나둘 모아 직접 고아원을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바로 그렇게 자신이 치른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를 데려다 살붙이로 정을 붙이며 살았던 하산아저씨가 어쩌면 실제인물인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고,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형제의 나라', '우리는 형제의 피를 나누었다'는 문구들이 새삼 온몸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흉터라는 비밀과 만나다

어쩌다보니 나는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했는데, 또 어쩌다보니 그만 내 몸에는 십센티나 되는 거룩한 칼자국이 새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건 살면서 그다지 그 순간을 기억하거나 특별히 흉터라고 인식하지 않다가도 대중 사우나만 가면 나처럼 아랫배에 칼자국이 남아 있는 여자들을 잘도 골라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같은 상처와 흉터를 가진 사람들은 애초부터 서로 자석처럼 이끌리게 되어있기라도 하는 걸까. 그런데 또 미안한건 그렇게 찾아낸 사람들이 반갑기는 커녕 될 수 있으면 저만치 떨어져 두번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새겨진 흉터가 새삼 창피하다기 보다는 고통을 알만한 사람들끼리 당시의 상처를 부러 회상할 것 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암묵적인 회피가 인지상정인 듯하다. 그러니까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흉터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꽤나 위로받을 만한 일이지만 만나서 들쳐보며 반추하는 것은 보다 신중하고 싶다는 뜻이려니.

여기 그 끔찍한 흉터가 원인과 결과에 있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총상에 의해 부모님과 헤어져 고아가 되었으리라 짐작되는 '나'와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인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모스크 근처 허름한 정육점을 운영하는 '하산아저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다른 국적, 다른 환경의 이방인 관계지만 같은 전쟁에서 총상에 의한 흉터가 같다는 표면적인 이유는 혈연이상의 관계로 발전시키는 상호운명적인 비밀의 열쇠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들의 주변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인 야모스 아저씨와 한국 군인으로 참전했던 대머리 아저씨, 충남식당이라는 국밥집을 운영하는 안나 아주머니, 소설가가 꿈인 말더듬이 친구 '유정', 4차원으로 생각되는 '맹랑한 녀석'이 각자의 상처와 흉터를 간직한 채 한마을에 살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정확치는 않으나 전쟁직후와 비교적 가까운 시점에 이들이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처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소설 속 인물들의 상처는 곧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처가 삶 자체가 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지독한 외상후유증과의 싸움일 것이다. 하산 아저씨는 전장터에서 폭격과 동시에 우연히 날아든 사람의 살점을 달콤하게 한입 먹어버린 충격으로 오히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파는 것으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려 하고, 야모스 아저씨는 그리스 내전 당시 전투기를 몰다가 적병으로 오인한 사촌 일가를 죽인 죄책감 때문에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숨어 속죄의 삶을 살아가려 하고, 대머리 아저씨는 참호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후 전쟁 당시의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는 늘 군복을 입고 군가를 불러대며 모든 전투 상황을 공부하여 자신이 참전한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으로 잃어버린 기억에 속죄를 구하려 한다. 이들은 전쟁의 결과로 가슴이나 어깨, 얼굴, 뇌에 치명적인 흉터가 남겨지게 되고 그것은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비밀로 자리잡는다. 이들처럼 흉터의 기원을 알지 못하는 '나'는 이들 앞에서 알 수 없는 비밀에의 매력만 감지 할 뿐이지 구체적인 탐구나 분석같은 건 해볼 수 조차 없는 공허한 흉터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비밀이 된 그들의 흉터가 늘 그립고 반가웠던 것은 아닐까.

미래와 공유하는 비밀을 알다

두렵긴 해도 비밀에 접근하고 비밀을 알아가는 '나'의 논리는 말더듬이 친구 유정의 말만큼이나 힘겹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감격적이다. 기억의 돌팔매질을 뛰어넘지 못한 고아원 담장에 대한 원망이나 누군가를 그리워 할 때의 심정과 흡사한 기분이라는 석유 사르는 냄새가 비밀에 다가가는 첫 걸음이었다.

'나'는 스스로 비밀을 알게 되기까지 운명론에 깨우침이 남달랐는데, 운명은 면식범처럼 우리주위에 기거하면서 호시탐탐 우리를 수렁에 처 넣으려고 기를 쓰는 녀석이기에 안다고 믿어 방심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최초이면서 최후인 발길질로 끝장을 내버린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운명론에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그림자나, 흉터, 비밀, 고아를 따져보면 남루한 동네는 비밀마저 남루하다든가 죽기 위해서는 먼저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져야 한다든다, 그림자가 어둡고 검으며 잿빛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는가 하는 피해의식이 낭자하지만 그 흉터가 폭력에 의한 것이든 실수에 의한 것이든 혹은 선천적인 것이든 모든 흉터는 언어처럼 서로 관계를 맺는 다는것, 고아는 오래전 부모에게 피를 물려 받기는 했지만, 그 피가 누구에게 물려 받은 것인지를 날마다 상기시키는 피붙이가 없기에, 그렇게 녹슬어 버리는 존재라는 것,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지진의 진원은 과거이며, 행복이나 고통도 실내를 채운 공기처럼 공유 할 수 있다는 것에 이르면 그의 운명론은 필시 절망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앞선 흉터의 상징 3인방과 함께 치유를 상징하는 세 명을 다시 운명처럼 조우할 수 있다. 유머와 속담으로 인생을 낙관하는 안나 아주머니는 하산, 야모스, 대머리 아저씨를 해학적인 위로와 모성으로 감싸안는 인물이다. 남편의 부고를 듣고 트럭을 한 대 빌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교외로 나가는 소풍을 추진하게 되고 등장인물들 모두가 바람 속을 거닐며 소박하지만 자연과 서로에게 위로받는 치유의 장을 마련한다. 소설가가 꿈인 연탄장수의 아들 유정은 말더듬이지만 동물들과 의사소통의 매개체가 되어 사람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모든 일에 희망이 없어 보이는 맹랑한 녀석도 대머리 아저씨와 6․25 참전용사들의 모임에 다녀온 후 그의 상처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그의 군복 등속을 태우는 것으로 의리를 선사한다. 이처럼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아니라 머무는 동안 무얼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것이라 말해준다.

등잔 밑이 어두운

흉터를 가졌으나 그렇다고 치유만을 바라지는 않았던 '나'는 잡지나 신문에서 사람 얼굴을 오려 스크랩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스크랩을 하기 위해 신문을 뒤적이면 매번 같은 얼굴을 만나고 그 안에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다 있었다. 그렇게 스크랩된 사진들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여 하나의 세계지도를 만들었더니 결국 인종이나 국가, 종교 등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는 없고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하나의 표정으로만 인식되어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만 확인 할 뿐이었다. 나라와 성별, 생김새가 다른 얼굴만을 오려 스크랩하는 취미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후반부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해 주는 친절함에 일말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형제란 그런 것이니까...결국 인간은 서로를 공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깨닫게 될 것이니까.

얼굴의 세계지도를 그려가며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인간의 표정이란 어떤 모습일까. 모든 사람들이 서로 깔고 앉았다 일어나면 생겨나는 하트모양의 엉덩이 자국, 바로 우리가 가장 수치스러워 하는 곳에 감춰진 비밀처럼 그 엉덩이 속에 있었던 것이라 말한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하산아저씨가 물려준 의붓아버지의 피에 '사랑'이라는 색깔을 칠해도 무어라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의자에 남겨진 흉터는 인간에겐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사랑으로 재생되고 있었던 것이리라. 작품에서 군대, 사회, 국가와 같은 것들에 맹렬한 증오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물 흐르듯 작가의 논리에 순응한 결과 얻어지는 최고치의 비밀이자 진실이라 할 것이다. 비밀은 여기, 우리 사는 이곳에 있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8-31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