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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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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할 때 도쿄로 출장을 제일 많이 다녔다.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지하철로 연결된 거대도시는 그 끝을 알 수 없어 일본 내에선 어디든지 지하로 다닐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종류線도 많고 그보다 역驛도 많고 마찬가지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보폭이 크지 않는 일본인들이 비즈니스 가방을 들고 잰걸음으로 역사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이나 신주쿠 네거리에서 약속이나 한 듯 횡단보도를 일사불란하게 건너는 젊은이들을 보면 웬일인지 우리는 행복한 것 같다는 우월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금연규제가 심해 흡연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예 공공장소로 정해진 경우가 많은데, 중심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오면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제히 담배를 물고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된다. 거리에 꽁초가 하나라도 보이지 않는 덕에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깨끗한 일본을 느끼고 오는 것이겠지만 나는 어쩐지 역사주변 흡연 장소에서 서로 대화도 없이 담배 한개피만을 달랑 피우고 그것을 날렵해 보이는 휴지통에 넣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던 젊은이들이 잠시 동안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바라본 곳은 어디였는지 생각하고 싶어졌다. 혹시 안개에 가려져 희미한 윤곽만 떠오르는 오래된 백일몽과 같은 '탑'은 아니었을까.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지 내게는 참 새로웠다. 그리고 강렬했다. 누구누구가 뽑은 무슨 무슨 상이라는 의미 보다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지하철 역에서 자주 목격하곤 하던 그 '쓰리'의 현장이 반사적으로 떠올라 읽는 내내 호기심과 호감도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읽히는 흡입력 덕에 책을 덮고 나니 예상외로 허탈감은 컸다고 생각된다. 내 안의 숨겨진 무언가를 감쪽같이 '쓰리'당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고 또 그럴 이유도 절대로 없는 우리들이지만 살다가 한번 쯤은 그저 생각만으로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해 본 적 있었던 비밀스럽고도 신나는,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절대은밀의 욕망을 일부 빼앗긴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도쿄를 무대삼아 주로 명품 브랜드로 차려입은 사람들의 지갑을 소매치기 하는 주인공 니시무라는 몇 년전 공동의 임무를 수행하고 거짓말처럼 사라진 이시카와라는 친구를 잃었고, 사에코라는 애인의 자살을 겪기도 한 도시의 비정한 외톨이 신세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있다고 믿은 자신의 생활을 바꿀만한 의지는 전무하다. 니시무라는 몇 년전 임무를 지시했던 기자키라는 악의 신을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되고 기자키는 자신이 구성한 운명의 각본대로 니시무라의 인생을 조종하려 목숨을 건 몇 가지 임무를 내던진다. 니시무라는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의미를 상실한 채 명령대로 임무를 수행해 나가지만 예정된 결말은 그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한편의 느와르 영화같은 빠른 전개와 도시적인 영상미를 상상할 수 있었지만 나는 작품에서 상징적인 메타포로 등장하는 '탑'과 '동전'에 대해 시선을 고정하고자 한다. 소설 첫머리에 주인공은 어린 시절 실수를 한 적이 있었고 그때는 저 멀리 떠오르는 탑을 본적이 있으나 지금, 실수를 하지 않은 어른이 되어서는 더 이상 탑은 보이지 않다는 회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작가후기에서도 어린 시절 안개에 가려져 있어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환각처럼 느껴진 탑의 정경을 잊을 수 없었고 탑은 그저 나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인지 그 탑은 사라져 버렸고 지금 어딘가에 있는지 모른다는 회상을 하는 부분과 일치한다. 작품 중간 중간에도 니시무라는 지하철이나 지하통로등을 지날 때 혹은 꿈속에서도 삶의 열기를 느끼는 순간에 높은 곳에서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탑의 시선을 느끼곤 한다.

니시무라가 본 '탑'은 높고, 멀고, 단단하고, 아름답고, 엄숙하고, 흔들림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언젠가 내게 뭔가 말할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말해주는 일은 없었다. 자신이 죽는 다고해서 누구하나 슬퍼해 줄 사람이 없었던 니시무라에게 희망이나 순수는 꼭 저 멀리 탑만큼 아득해 보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너무 가닿고 싶어 차마 가볼 수 없는 세상 저 너머의 자신과 상관없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차갑고 비열한 도시 속에서 외롭고 누군가 그리울 때 몰래 숨어 기댈 수 있는 마음의 탑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탑'에 이르지 못함을 너무나 빨리 깨우친 니시무라는 남의 이물에 손을 대는 것으로 그 너머에 있을 그들의 세상에 잠시 닿고자 했다. 탑에서 벗어나고자 소매치기를 하면서 해방감을 느끼고 소매치기 기술이 향상되는 것과 비례하여 탑의 존재를 잊어간다.

하지만 나약한 니시무라에게 그것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고 현실세계에서도 이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탑같은 존재, 기자키와 맞닥뜨려지고 니시무라는 이상속의 탑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눈앞의 탑에서는 굴복하기 싫어 자신을 버림으로써 기자키라는 탑을 뛰어넘고자 한다. 기자키는 타인의 운명까지도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절대권력을 가진 신적인 존재이며 인간성이 상실된 거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니시무라가 핏물에 젖은 '동전'을 던져 올린 것은 보다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잊었다고 생각되던 그 탑을 향해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그토록 끄덕없이 무심한 탑을 향해 마지막으로 손짓하는 니시무라의 애처로운 인사일 것이다. 자신이 가끔은 남의 주머니에서 훔치기도 한 '동전'이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아 남은 욕망을 송두리째 털어 버리고 맨 처음 순수로 돌아가고픈 한가닥 소망으로서 '동전'은 '탑'에게 헌사된다.

니시무라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헐벗어 굶주린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 보이는 소년을 만나 비록 현재는 도무지 희망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나처럼 살지 말라는)메세지를 꾸준히 전달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년을 구원한다. 작품 속에서 엄마와 산책을 하는 소녀나 아빠와 공놀이를 하는 소년, 게임기나 장난감을 가지고 즐거워 하는 소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 행복한 가정을 누려보지 못한 니시무라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는 장치이자 할 수 없이 탑을 그리워 하게 되는 정당성을 부여하며 소년에게 대물림 하고 싶지 않은 이타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소년을 바라보는 니시무라를 바라보며 자꾸 마음이 쓸쓸해진다.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것은 결국 '결핍'의 정신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건의 필요유무를 떠나 훔치는 사람에게 결핍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나 이곳이나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는 오늘의 도시에 살고 있다. 니시무라는 어린시절 고가의 장남감을 가지고 노는 또래 아이를 보고 자신의 힘으로 얻었을 것 같지 않은 것에 자부하는 어린 마음에 최초 반감을 품게 된다. 각자 자신의 힘으로 얻지 않은 것일 지라도 그것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 있는 관용은 허용되지 않는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보면 불로소득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처럼 행세하는 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일개 소시민인 우리는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다. 도덕이나 준법 같은 건 잠시 잊어 버리고 책을 읽는 동안은 남의 주머니를 슬쩍하여 마음껏 훔친 것으로 조금은 서운한 마음을 달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쓰리 당해도 억울하지 않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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