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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ㅣ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9
공진성 지음 / 책세상 / 2010년 7월
평점 :
테러를 추억하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그 해 나는 우연히 미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두 번째 방문에 그만 secondary 조사를 받은 것이다. 그날의 순간을 생각하면 다시는 미국을 방문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혹시 다시 방문하더라도 secondary이력이 내게 미칠 영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는 미국 전 공항에서 자국인이 아닌 외국인 중에서도 특히 아시아인,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보안검색을 까다롭게 할 시기였다. 나는 그날 샌프란시스코 공항 입국심사에서 어느 덩치 큰 흑인의 뒤를 따라 미국입국검사대 바로 뒤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사무실로 인솔되었다. 영어로 내 자신을 변호할만한 실력은 되지 않았던 내게 무슨 일로 한해 두 번씩이나 미국을 방문했느냐, 직업에 대해 자세히 말해달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고서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삼십 여분 동안 되지도 않은 영어로 열을 올리고 나니 그제서야 공항 내 한국직원이 들어왔고 그 한국인 덕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다른 외국인들과는 다른 출구에서 생화학적 세균을 제거하는 방역가스를 한차례 확실하게 살포한 후에야 보내주었다.(당시의 굴욕적이고도 창피했던 심정이란...) 지금도 여권엔 주홍글씨의 낙인처럼 secondary가 빨갛게 찍혀있다. 나중에 한국직원으로부터 들은 것이지만 secondary라는 것은 미국입국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재조사 하는 곳이며 당신은 테러 유발 위험 인물로 기재된 중국인 여성과 인물이 흡사해 재수없게 조사를 받은 것이라고 했다.(테러유발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니...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소식인지) 돌아와서 우스개 소리로 그날의 일화를 이야기하곤 했지만 나에게 '테러'는 그저 뉴스에서만 접하던 아주 상관없는 남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9.11테러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을 지 모르지만 지구상에 미국을 알고 미국과 인연이 있거나 미국을 방문하려는 아시아인들에게 '테러'는 어이없게도 가장 피부체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테러' 소식이 '오늘의 교통사고 사망자' 소식만큼 진부해졌다며 굳이 책을 사서 읽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소재는 아니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다. 나 역시 9.11 테러와 미국방문 전에는 '테러'에 대해 그 단어가 가지는 실상과 피해, 그리고 영향만큼 진지한 성찰을 해온 독자는 아니었다. 요즘엔 보도, 교양, 시사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상황을 '테러'에 빗대며 관용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secondary사무실에서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해도 억울하긴 마찬가지 였겠지만(한국직원은 꽤 오래 나를 위로하기 까지 했다) 당시 영문도 모르고 방역작업까지 당한 나로서는 이 책이 일종의 보상장치로서 조금이나마 테러 해프닝에 위로를 제공해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알고나 당하자...하는 진부한 의지였지만 책에 대한 기대는 내심 남달랐음이다.
책은 얇은 두께에 비해서 상당히 논리적이고 그리하여 설득적이었다. 책을 덮고 난 지금 그동안의 내 오해와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은 물론 앞으로 발생하는 어떠한 '테러'에 대해서도 나름의 진지한 해석과 그로인한 시사적 견지를 시도해 보겠다는 야무진 태도를 심어주었으니 '실천하는 삶'이라는 뜻의 라틴어 Vita Activa 시리즈로서 '주체적인 삶과 실천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출판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된 듯하다. 하지만 행동이 아닌 개념적인 사고전환에의 실천은 그 시작과 과정, 결과 모두 많은 시간이 걸리고 효과 역시 눈에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한계 앞에 그동안 '폭력의 정치학'에 천착해온 저자의 질문들은 '정치'에 무심하고 '테러'를 외면해온 보통의 시민독자들을 위한 가깝고도 친절한 서비스로 느껴졌다. 그동안 '테러'와 '도덕', '테러'와 '정치'를 연결 지어 현상을 분석하기 어려웠던 나 같은 독자들은 이번 '테러의 정치학'에서 속속들이 얻어가는 영양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테러에 질문하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은 '테러리즘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설득력있게 결론지은 질문 들일 것이다. 도덕과는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이는 테러와 도덕성사이에 펼쳐지는 직접 간접적인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개념의 변화들도, 상당히 흥미롭고 위험해 보일 수 있는 논조에서도 나름의 품격을 잃지 않는 객관성은 마지막 부분의 저자의 결론을 한층 부각시키는 일등공신이었다.
저자는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 때에 오히려 우리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는 것 또한 비판할 수 있다”는 논리로 기실 도덕과 테러를 연결짓기 어려운 최초부담감을 테러를 진압하는 쪽을 향한 도덕성에 대한 질문으로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곤, 이어지는 결론으로 “기존 권력에, 또는 테러리즘에 어떻게 맞서 싸우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질문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이러저러한 올바름을 전제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가장 위험한 적이며 테러리즘에 가장 우호적인 토양"이라며 어느 정도 현 정부를 의식한 질타성의 결론을 그것을 인식하는 다수 시민들에게 포커스를 이동해 '질문하지 않는 비도덕' 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결국 끊임없이 비판하고 '질문하는 도덕'성이야 말로 테러리즘에 맞서는 가장 현명한 방안이라 주장한 것이다. 나는 도덕성의 여부를 질문이라는 학문의 가장 기초적인 동기유발 항목으로 기초화한 저자의 참신함과 우아함에 깜찍하고도 지적인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TV에서 테러관련 보도를 접하면서 얼마나 질문하고, 무엇을 질문하였던가. 누가 나서서 일절 질문하지 말라고 억압한 사람도 없었건만 대부분 시각적인 이미지와 그 결과 몇 명이 죽었는지에 대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다행히 이곳, 우리에겐 미치지 않는 사안이라 다행임에 안도하고 측은지심에 공감하는 것으로 테러를 감성적 컨텐츠화 해 오진 않았던가. 저자는 테러를 감성적 컨텐츠에서 이성적 컨텐츠로 느끼는 뉴스에서 질문하는 뉴스로, 시각적 정보에서 인지적 정보로 수동적 동정에서 능동적 도덕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차근차근 부추기고 있었다.
그동안 일반인들이 테러에 두려워하고 공포감을 느꼈던 이유는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테러의 대상이 정작 정치 종교와는 무고한 시민이자 무작위로 선출된 사람들이라는 데 있었다. 그 대상에는 갓난아이를 포함한 여성, 노약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버스나 지하철,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 관청이나 백화점, 호텔, 관광지등의 불특정 장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속된 말로 재수 없으면 여름휴가지 나이트 클럽에서도 목적지를 향하던 버스 안에서도 폭탄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다소 운명적인 자조성의 두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마치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하여도 상대방이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온다면 재수없이 충돌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종류의 누구나 어쩔 수 없는 만연된 두려움과 다르지 않다는 본질적 모순을 안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혹시 어쩌다가 '나' 일 수도 있겠지만 설마 '나'이지는 않길 바라는 그 냉소적이고 소극적인 비겁함을 꼬집는다.
우리가 당연시 해왔던 학교나 군대에서의 테러의 방식과 연대책임 논리는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 통렬했다. 학기 초에 수업분위기를 바로 잡기 위해 작은 실수를 저지른 학생을 필요이상으로 처벌하여 공포 분위기를 확산한다든가 간혹 가다 선택의 무작위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모범생에게도 같은 체벌을 가함으로써 체벌자로서의 공평한 권력을 강조하는 것 모두 무고한 사람을 무작위로 계획하는 테러의 작동방식을 의미한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군대에서 한명의 낙오자라도 생기면 전체인원이 동일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은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면 억울하거나 무고한 사람은 없다는 연대책임론에 입각한 것이라며 그 정당화 논리 역시 테러리스트들의 논리이기에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는 '무고한 사람은 없다'의 의미를 '공존의 거부'로 인식하고 공존을 거부하고자 했던 반정치적 사고는 민족주의적, 종교적 테러리즘 뿐 아니라 우익의 백색테러도 마찬가지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공포를 이용한 지배와 저항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로마 제국의 통치술부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예로 든 것은 '테러'라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에 테러는 이미 통치 방식으로서 자리 잡은 고도의 계산된 행위였음을 쉽게 알려주는 일종의 도입부 흥미 전략이었다. 특히, 한 두 사람을 본보기로 잡아 희생양을 만들고 지배적 분위기를 확고히 다지는 조직폭력배들을 빗대어 흔히 마키아벨리스트라 지칭하지만 '정치적인' 자비로움과 '개인적인' 자비로움을 구분한 그의 주장이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부정적 주의로 결론짓기 보다는 그가 주장한 '최소도덕'으로서의 공포를 '비도덕적 정치'가 아닌 '정치적 도덕'으로 해석해야 함을 지적한 부분은 참신하고 주목할만 했다. 비로소 '테러'와 '도덕'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한 기분이었고 결국 정치적인 시각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혁명의 시대를 질러오며 뇌리에 인상 깊었던 문구는 "두려워 하지 않는 대중"이었다. 스피노자에 의해 공표된 이 말이 "대중이 느끼는 공포"와 상반되는 "대중이 불러 일으키는 공포"라는 의미의 "공포의 상호성"으로 해석되었음을 서술하는 부분이었다. 두려움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귀족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역사적 현상은 오늘날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두려움이야 말로 시민을 가장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심리적 통치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긴장이 없으면 목표를 달성 할 수 없듯이 두려움은 철저하게 계획되어진 후 알맞은 시기에 제공되는 지배자의 선심과도 같다는 불신과, 테러는 그 연장선에서 이용되는 '최소도덕'일지 모른다는 회의에서 자유롭기 힘들었음이다.
저자는 무고한 시민들이 막연한 불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테러집단과 그 대응집단이 서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교묘하게 '정치적 맥락의 불안정'을 이용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서로가 가한 폭력이 각자의 입장에서 더 정당함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저자는 이데올로기가 사람들 간의 정서적 연계를 차단하여 공포의 확산마저 차단하여 온 단적인 사건,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제시한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인과 유대인간의 정서적 연계를 이데올로기 적으로 차단하여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국가적 테러를 그저 '유고한'자들에게 가해진 것으로 따라서 '무고한'자신들과는 상관이 없게끔 인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로 올 초에 있었던 천안함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내가 북한의 인민이었다면 북측이 남측에 가한 테러 역시 '유고한' 남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것이기에 '무고한' 자신들에게는 미치지 않을 폭력으로 받아 들였을 것이라는 추측에 이르자 나는 테러와 도덕이면에는 각자 테러시행집단과 테러대응집단 그 하부에 소속된 무고한 시민들 마저도 '도덕성'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테러와 도덕은 결국 정치와 도덕, 그리고 인간과 도덕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매스미디어가 발달된 오늘날에는 테러의 목적 자체가 공포라는 심리를 확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종족적, 계급적, 사회적, 민족적으로 뿌리 뽑혀있는 자신들의 정치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제 3자를 끌어 모으는 홍보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섬뜻하게 다가왔다. 또한 자살공격같은 희생정신이 부각되는 영웅적 심리나 죽음으로 구원받겠다는 순교자적 태도가 마치 지배자와 강자를 대하는 약자의 최후선택인 것처럼 면죄부를 획득하는 현상을 경계하자는 부분 역시 날카로왔다. 대중의 지지와 도움을 구할 수 없는 또는 구하려고 하지도 않는 정치적 약자가 가장 손쉽게 선택하는 수단이 테러이므로 물리적으로 약하다는 것 자체가 테러리즘을 호소하는 것에 당위성을 부여받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모든 정치가 결국은 테러리즘이라며 냉소적인 치부로 정치집단을 매도하는 것도 정당성 없는 공권력을 사용하는 집단에게 부도덕함을 희석시키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설득한다. 테러를 일으키는 입장과 대응하는 입장, 그리고 바라보는 입장을 골고루 반영하여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공평함을 느낄 수 있었다.
테러에 자유롭다
저자는 마지막에 도덕적으로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는 것이 정치집단에게만 해당되는 의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늘상 테러에 노출되는 무고한 시민일지라도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라는 충고가 이해는 되면서도 선뜻 자신있게 실행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테러리즘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내 나름대로 '공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판단'이라는 조금은 쉬운 강령으로 전환해 보았다. 우리는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 수용소에 배치될 것 같지는 않아도 언제든지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지하철에서 폭탄이 터질 수 있다는 공공장소에서의 테러불안에는 어쩐지 익숙하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궁극에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살금살금 누적된 공포는 사실 야금야금 빼어먹은 자유의 질량과 동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1차적 사건 발생이후 2차적으로 이러한 공포를 가공, 확산시키는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이 언론이 되었건 정부가 되었건 공포의 늪에 빠지지 않는 것이 우리가 자유로와 질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여진다. 무고한 민간인이자 테러와 폭력 혹은 정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시민들이 테러발생이후 이러한 통찰력을 지니기는 쉽지 않아 보이지만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면 다음은 선택의 문제이기에 원인을 알면 두렵지 않다는 두렵지 않은 것이 자유의 첫걸음이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구는 상당히 고마운 말씀임에 틀림없었다.
이 책은 테러라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부터 역사적으로 시도되어온 테러리즘의 실례와 그 배경에서부터 혁명의 시대,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도덕이라는 테러와 이율배반적인 주제를 쉽고도 공감하도록 논지를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퍽이나 유용한 독서였다. 테러에 '무고한' 일반인 독자를 '유고한' 관계된 독자로 만들어 준 것에 감사하며 되도록 많은 유고한 독자가 늘어나길 기대한다. 테러를 나름대로 도덕적으로 비판해보기 위해 어쩌면 다음 테러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겨버렸음을 나지막히 비밀로 하고자 한다. 타자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테러 정치학은 독자와의 공생을 추구하는 실천하는 삶으로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