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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성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7월
평점 :
As My Accident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일은 '오대양 사건' 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알고 싶다'였었다. 90년대 초반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새로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그 프로그램은 SBS 개국 직후 야심차게 방영된 인기 프로였다. 그런데 그날 밤은 우연히도 부모님이 안 계신 날이었고 TV에선 신도들이 무더기 변사체로 발견된 현장을 뿌옇게 처리한 사진을 보여주며 '집단자살' 혹은 '광신도', '사이비 교주'같은 무시무시한 분석들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그 한 장의 사진을 아무런 자료 도움없이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해 낼 수 있는데 희미한 영상처리 뒤에는 쓰레기가 널려있는 땅바닥에 사람들의 무리로 보이는 사체 덩어리들이 80년대 컬러사진의 색조를 연상시키는 붉은 톤을 띠며 가지런히 배치된 장면이었다. 그 충격적인 이미지의 잔상효과는 결론으로서의 진실이나 사연을 뛰어넘는 공포이상의 효력이 있었다. 당시 대학교 졸업반으로서 오로지 취직만을 궁리하고 있던 나에게 그날의 사진 한 장은 어떤 급브레이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 이 세 가지가 결국 한가지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본 그날, 돌이켜보니 그때 나는 갓 스물이 넘은 청춘이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오대양 사건'은 실제 1987년에 일어났고 마침 그때 작가의 나이도 내가 그 사건을 처음 접하게 된 나이와 거의 같았다. 나는 87년 당시엔 여고생이었고 기사로선 어떤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가 만약 87년에 '오대양 사건'을 접했더라면 분명 청춘을 고민하는데 있어 작가라는 꿈을 내딛는데 있어 크나큰 반향을 불러왔을 지 모르겠다. 2010년 이렇게 우리들에게 그때의 질문을 모티브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당시 느꼈던 의문들이 단순한 사건의 진위여부가 중요한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스무살 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고민해왔던 나름의 의문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의문들이 이번 작품을 통해 작가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상위지침의 역할을 했다면 아마도 작가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로서 사회적 관심사(숨겨진 진실)가 개인적 관심사(내재된 욕망)와 하나가 되어 작품으로 빛을 발한다면 문학적 평가와는 별도로 얼마나 자기성취감이 크겠는가. 작품의 제목이 의문의 부호를 암시하듯 A로 드러났지만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던 소재와 자신이 천착해온 주제를 잘 결합시켰으니 작가 스스로 자신의 결과치에 A학점을 매기고 싶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독자인 우리에겐 약간의 서운함으로 남는 아이러니가 아니었을까.
하성란 작가의 글은 각 문장마다의 완성도가 높다. 한 문장안에서 높은 밀도로 선택되는 텍스트의 실세가 크다보니 읽어가는 독자로선 즐거운 작업은 아닐 수 있다. 거기다가 이번 작품은 특히 작가가 이루려는 소설적 성취와 독자가 기대하는 독서적 성취간의 간극이 크게 느껴진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독자가 듣고 싶은 것이 살짝 일치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A라는 작품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아쉽게 느껴지는 독자로서의 이기심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는 서사에 집중하기 보다는 작가가 고민해온 것, 그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온 마음으로 수신하려 애를 썼다. 언뜻 보기엔 쉽게(직선적으로) 풀어도 될 이야기였을 텐데 방법적인 면에서(나선형으로) 작가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 역시 하나의 문제를 어렵게 풀어가는 성향이 다분한 입장으로서 '오대양 사건'에 대한 나름 기억의 트라우마가 있는 터라 책을 덮고는 다시 스무살 된 심정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A를 받을 만한 답인지 집요하게 그 의문을 되짚어 해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못 잘 따라왔다는 보람이 차오른다.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 묻고(Ask) 스스로 답한(Answer) A학점 리포트이다.(그러니까 우리도 스스로 묻고 답해보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독자들의 평가같은 건 두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쩌면 그녀 스스로 A 점수를 준 요소들을 내 답으로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이십년이 다 되어 가는 그 시절 스쳐 지나간 의문을 그녀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지 않는가. 그 떨리는 마음이 쉽지는 않았다.
들은 것이 본 것으로
그렇다. 그녀가 묻고 답한 것은 신기하게도 스무살 시절의 충격과 사십이 넘은 끄덕임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문단에 데뷔하기 전인 87년 당시 지워지지 않을 의문으로 남은 기억을 등단 후 지금까지 되새김질하여 완성한 중견작가로서의 답안지라 할 수도 있다. 작가로서 당연히 고통스러웠을 이 행보는 작품속의 화자의 행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화자는 스물 셋에 사건에 대한 후유증으로 장님이 되며 마흔 여섯에 시력을 회복하게 되는데 이는 죽음과도 같았던 시간들이 다시 재생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죽음에 대한 의문이 삶에 대한 해답으로 결론지어지는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소설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는 화자가 식물과 동물이 썩어가는 냄새를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해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는 장면으로 끝이 났음을 알 수 있다. 화자에게 있어 냄새는 '죽음'에 대한 기억이며 코스모스는 '삶'에 대한 희망이 아니겠는가. 죽음을 맡고 들은 것에서 삶을 들이 마시고 본 것, 이 결정적이고도 감각적인 대립의 장치는 사실상 이 소설의 모든 것을 암시한다고 느껴졌다. 작가는 자신이 스무살 시절 이끌렸던 막연한 절망의 기운을 마흔이 넘어 희망의 온기로 부활시키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서도 그 장면은 어떤 논리나 증거로도 이해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였기에 빛바랜 사진이 통과의례적 추억으로 승격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그 시절 나와 비슷한 기억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문학은 이렇게 같은 시기 같은 사건 같은 충격의 공유만으로도 지극히 사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공감하는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다.
책에서는 끝까지 주인공인 화자의 이름이 불리워 지지 않는 채로 수많은 관계속에서만 화자인 그녀를 인식해야하는 고통이 따른다. '거짓말쟁이', 혹은 '할멈'등으로 불릴뿐 그녀의 이름을 호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화자는 사건당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던 죽은 엄마의 딸이며 신신양회 회장 '어머니'가 살려준 유일한 청소년이며 비교적 분명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는 언니들의 동생이지만 어쩐지 시종일관 실제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 유령같은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는 모든 상황을 전지적 작가입장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느끼게 되는 화자의 예민한 감각을 한층 높여주는 치밀한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화자의 이름이 무엇이었건 화자가 누구이었건 그녀는 사건현장에서는 물론 어린시절 내내 존재감없는 존재이었기에 이야기속에서도 줄곧 상황속에 있는 것인지 바깥에 있는 것인지 그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의 존재'로 여겨진다. 그로써 화자가 감지한 고향과도 같은 공장지대의 냄새, 식당에서 흘러나오던 음식냄새, 이모들간의 대화와 웃음소리, 짜진 시금치 된장국과 피자두의 신맛, 살인범으로 느껴진 축축한 손의 감촉까지 모든 오감을 자극하는 감각의 정서들은 '정밀묘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의 세밀하고도 완성도 높은 묘사에 의해 화자가 전혀 장님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서사를 제공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화자는 장님이었지만 작가의 투철하고 예리한 시선이 투사된 장님아닌 장님이었기에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화자의 시점이 슬며시 작가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장님이라는 장애를 십분 활용한 작가의 노련한 시점혼용 작법이 독자로 하여금 더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렇듯 죽음을 삶으로 감지하기 까지 어쩌면 작가의 전 생애, 온 감각이 쓰여진 것은 아닐까. 우리들 역시도 코스모스를 살아있는 아름다움으로 인식하기 까지 그토록 고약한 악취와 온갖 쓴 맛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화자가 스물 셋에 눈을 잃어 마흔 여섯에 다시 눈을 찾기까지 딱 살아온 시간만큼의 세월이 걸린 이 깨달음의 기간이 곧 작가가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 셋에 화자의 엄마는 화자를 낳았고 화자는 스물 셋에 이야기를 낳았고 작가는 꼭 스물 세 해가 지나서야 의문의 여정이 끝난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이어지는 여정은 끊임없이 나를 자극하고 잠잠하던 저온의 감각을 두드렸다. 궁금하긴 했었지만 그만 놓쳐버린 그래서 내가 의문을 가졌던 것 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그 날 그 곳에 남겨진 질문과 나는 우연히도 재회한 것이다.
죽음의 비밀이 삶의 진실로
화자는 극중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하고 자신 스스로도 이야기를 꾸며내는 스토리텔러로서 그 입장과 역할, 자신의 각오를 우리에게 반복하여 전달한다. 마치 소설가가 자신은 왜 작가가 되었으며 무슨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쓰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 작가는 화자가 뇌종양의 후유증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증상의 하나로 '작화作話'라는 병적인 징후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스토리텔러로서의 화자의 타고난 배경을 배수진으로 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화자의 머릿속 종양은 시신경을 눌러 시력을 잃게 하였지만 그 압박으로 기억은 얼마든지 확대, 재구성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언뜻 보기에 치명적 장애일 수 있는 화자의 두 가지 약점은 그녀가 엄마와 이모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내고 자신과 언니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독창적인 감각으로 더 멋진 이야기를 꾸며 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복선이기도 하지만 그러하기에 이야기가 가지는 허구적 낭만 혹은 비약을 미리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어적 장치도 되는 것이다. 이는 소설가라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타고난 운명에 온몸으로 대처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결국 운명이기도 한 것과 같이 화자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형벌과도 같은 것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화자라는 분신을 이야기속에 출전시킨 것이다.
화자는 그 운명에 슬퍼하지 않으며 엄마와 이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화자의 이야기를 듣고 내린 작가의 판단은 아마도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감지되던 특별한 공동체 의식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공동체 의식은 원래 사건의 기사대로 신흥여성 교주가 여성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력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목소리와 사랑, 출산과 육아를 보호해주고 아버지 없이도 활기를 잃지 않는 평화지향적 태도이었음을 소설에서 천명한다. 그들의 죽음이 사건과 허구 모두에서 자살적 타살이었음에는 변함없지만 죽기이전의 그들의 삶은 여성공동체라는 낭만적 삶의 방식을 추구함으로써 실은 그들이 죽은 이유(사건의 진실)보다는 그들이 살은 이유(삶의 진실)를 더 진심으로 알아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이유는 얼마든지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 어쩌면 그들의 죽음에서 비밀을 찾기 보다는 그들의 삶 속에서 진실을 찾아 우리가 살아가야 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들의 죽음도 그녀의 작업도 모두 헛된 일은 아니라는 것. 이렇듯 작가는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허구로 복원해 내어 화자라는 제 3자를 통해 우리에게 나지막히 알려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문학안에서 겨우 이정도 밖에 진실을 발견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아무도 생각치 못했을 그 어둠속에서 찬찬히 진실을 찾아가는 그 과정만큼은 박수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진실도 좌표가 있다면 나는 수직적(x축) 진실과 수평적(y축) 진실을 그래프로 그려보고 싶다. 화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대체로 여성의 비극이 (수직적으로)대물림되는 사회현상을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화자의 엄마인 서정화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을 강간하려던 이웃남자를 이미 정당방위한 상태에서 보다 잔인하게 확인사살한 후 딸을 도주시켜 십오년의 형집행을 받고 나온 살인범이었다. 그녀는 시골 시장골목에서 촌부들 틈에 끼어 피자두를 파는 것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처지였으며 그녀의 딸인 서정화는 열여섯에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온 후 최영주의 아버지(건설부 고위관료)에게 여성을 잃고 딸 서정인을 임신하게 된다. 화자의 엄마 서정화는 서정인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유산으로 전해주고 서정인은 또다시 아버지 김준 없이 준하를 낳아 기르게 된다. 빈곤과 비천이 대물림 되는 것은 화자의 엄마뿐이 아니라 기태영의 엄마인 기영이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시달리던 어머니 밑에서 기태영의 엄마는 아버지의 학대로 괴롭힘을 당하다 견디다 못해 무작정 도주한다. 정신과 육체가 피폐된 이들을 구원의 손길로 받아 들인 것은 수직적 대물림을 단절시킬 수 있었던 신신양회의 어머니였기에 이들에게 '어머니'는 신적인 절대자로 새겨졌을 것이다.
신신양회의 마스코트격인 중창단이라 불린 그녀들은 이처럼 자신들이 상처입은 부계사회가 가지는 남성적 폭력과 성의 억제, 자유억압, 권위주의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중심으로 건강한 사랑, 평화스러운 생활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 사회공동체가 바로 '여인왕국'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극중에서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폭력적이고 불안하거나 사회비리에 무감하고 이기적이며 소심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특이하게 여성적 느낌의 이름을 가진 '최영주'라는 인물만 정의나 진실을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 정도로 묘사될 뿐 남성은 저벅저벅 군홧발소리, 흔들리는 눈빛, 중년의 목소리, 축축한 손등의 실체없는 감각으로 이들 공동체와 대치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 이 수평적 공동체의 종말을 예고하는 단서는 아마도 서정인이 낳은 준하와 김준희가 낳은 재원이라는 아들(수직적 대물림의 씨앗)들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그리고 보다 확실한 건 서정인의 이복형제인 최영주가 기자된 사회적 시선을 잃지 않고 그녀들을 불행으로 몰고 간 과거세력에 일침을 가한 정의로운 행위와 편견으로부터 그녀들에 조력한 양심, 즉 수평적 감각에 있지 않았을까. 최영주의 개입은 그동안 단순히 쌀가마니나 들어주는 정도의 인력으로서의 남성만이 그들 조직내에 필요했던 여성공동체에 힘이나 성적인 역할과는 상관없이 이성적인 멘토로서 보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향한 열린 의지를 느끼게 하는데 기여했다. 이로써 여자들이 대를 물리는 이야기를 여성이 작화하는 이야기는 그 이전의 (수평적)대물림이 끊어지면서 새로운(수평수직이 조화된) 대물림을 예고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삶의 방식이 사람의 진실을 이길 수 있을까.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은 실은 남성의 조력으로 더욱 아름다워 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아우라가 결코 여성우월적인 서사로 비난 받지는 않아야 할 세심함이다. 화자는 어머니가 자신을 살려준 것은 살아남아 부디 자신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메시지로도 이해한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삶의 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 화자가 지어내어야 하는 이야기의 향방은 작가가 끌어나가야 할 화자의 인생의 방향과 일치했을 것이기에 어둠속 한줄기 빛, 그것은 결국 죽음의 진실이 아닌 삶의 진실이었던 것이리라. 그것은 죽음의 기억을 단순히 증언하고 전달하는 스토리텔러에서 발전해 자신의 삶과 진심을 이야기하는 작가로서의 길이기도 할 것이리. 그것은 이야기꾼으로서의 '거짓말 쟁이'나 '늙은 할멈'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찾는 일이기도 했으리.
연합에서 독립으로
한편 소설속 현재의 오늘에 돌아와 신신양회 어머니들의 죽음 이후 그 아이들이 재회해 뭉쳐서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쩐지 이미 헤어짐이 예견된 룸메이트와의 동거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어머니들이 저항의 흔적없이 교주인 '어머니'와 같이 죽음을 받아 들였다는 사실은 각기 자신들의 삶에서 온전히 독립하지 못한 채로 종속적인 삶을 마감하였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이들이 종교적 이유에서 죽음을 택했건 그녀들이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의 몰락에 절망적인 심정으로 죽음에 동참하였건 모두 숙연하게 '따라 죽었'다는 것에 생각이 기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다고 들었다. 임금이나 주인 혹은 남편을 따라 죽는 제도적 풍습은 고대시대부터 군주라는 '남성'을 따라 바쳐지는 인간예물과도 다름없었다. 어머니들이 일상에서는 남성에 억압당하지 않는 태도를 지향했지만 죽음을 택하는 방식에서는 가장 남성중심의 극단적인 가부장제 풍습을 택함으로써 결국 어머니들이 의지한 것은 여성을 뛰어넘어 지배하는 남성성을 가진 군주로서의 '어머니'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 아닐까. 이는 신신양회의 어머니가 최초 설립한 회사가 건설의 밑거름이 되는 시멘트를 생산하는 본거지 였다는 사실에서도 공장에 우뚝선 사일로가 그들 지역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도 '어머니'는 다분히 권위주의적 수직체계와 남성적 폭력양식을 두루 내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이중적인 태도는 그녀가 신신양회를 하나로 응집시키기 위해 사용한 종교적 가르침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애초부터 생물학적인 '아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르치고 외우게 하여 남성우월주의적인 가치관에 의지하도록 한 것이다. 작은 키에 홍수로 폐허가 된 마을에 아이하나를 데리고 시발택시를 타고 도착한 그녀, '어머니'는 여성성을 잃어버린 남성으로서 존재하면서 모성의 권리를 추구한 중성적 존재로 여겨진다. 혹시 '어머니'가 아무것도 안보이기에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한 화자를 살려 준 의미는 네 안의 여성성을 버리지 말고 한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라는 충고가 아니었을까.
이렇듯 아이들은 어머니들의 감추어진 종속적 마인드를 유전자로 태어났기에 홀로 떨어져서는 삶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들의 연합공동체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해보지 못한 이들이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시행착오로도 느껴졌다. 화자와 서정인, 안은영, 김준희가 중심이 되어 구축한 공동체에선 어머니들과의 추억을 공유하면서 어머니들의 사랑, 출산, 육아방식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여성공동체를 지향했지만 어머니들이 신신양회의 정신적 교주격이었던 '어머니'를 중심으로 현실에 만족하면서 생활했다면 아이들은 카리스마있는 절대자가 따로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어머니들이 교단의 규율과 일정한 노동및 역할에 얽매여 있었던 것과는 진일보된 방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집단에서 허용된 자유에는 늘 예측못한 상황이 생기듯 서정인과 기태영이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교제를 하며 은밀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기도 했고 준희처럼 아이아빠와 가정을 이루려는 이탈자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무엇보다 창의적이었던 사건은 바로 화자의 아이디어로 추진된 발신인 A의 '편지보내기' 프로젝트 였다. 이들은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이름난 젊은 남성에게 메시지로서만 자신들을 알리며 의문의 부호로 프로포즈한다. 이들이 보낸 메시지는 '나와 사랑할 수 있느냐'는 수동적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서 발전해 '나와 사랑을 만들어 볼래'하는 능동적 추진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선택은 우리가 했으니 내키면 손을 잡으라는 메시지는 주체적이면서 다분히 남성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연합공동체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던 종속적 태도가 자신들의 삶은 자신들이 결정한다는 개인적 욕구가 스며든 행위로 보여지며 세상으로부터 편견과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촉발된 대안적인 탈출구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화자의 역할이기도 했으며 그 이야기를 전개시켜야 할 언니들의 몫이기도 했다. 결국 작가도 소설이라는 편지를 자신의 부호로 독자들에게 보내는 것이라 보았을 때 화자의 편지는 지극히 문학적인 해결방식으로 보였다.
이 연합공동체는 기태영과 최영주라는 다소 뜻밖의 인물로 인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비밀이 벗겨지면서 차츰 균열이 생긴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화자와 같이 기거하는 언니들과 기태영, 최영주의 출생의 사연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가 어머니들의 죽음에 다가간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역동성을 지닌 채 자꾸 미래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아이들 모두는 어머니들처럼 죽음을 택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고 모두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이유만 있었다. 이들이 같이 있으면서 서로 느낀 것은 같이 죽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더라도 혼자 잘 사는 것이었다. 연합(Association)의 붕괴가 곧 모두의 절망이 아니라 혼자(Alone)서 일어서야 할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하는 순간으로 인식하게 되기까지 이들은 서로의 모순과 각자의 욕심을 깨닫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 했던 것이다. 그 추억의 시간들은 최영주가 입수한 사진속의 어머니들이 곧 자신들이 밟아야 할 전철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의 필연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About All's A
그런데 내가 주목한 것은 A라는 의문의 부호로 편지를 보낸 사람이 화자를 비롯한 여성들 말고도 또 한사람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화자가 속한 연합공동체와 최영주가 발신인으로서, 연예인 김준과 이성복이 수신인으로서 A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A를 오해했건 이해했건 이들 젊은이 모두가 A라는 의문의 부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각자 서로 다른 의문이 A로 대표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인 것은 아닐까. 이는 과거 똑같은 분장으로 서로를 구분짓기 어려웠던 공동체속에서의 조직원이 아니라 조직이 붕괴된 후에도 홀로 남겨진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개성을 갖게된 인격체를 암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여기서 고교시절부터 연예인 김준과 친구였으며 서정인의 이복형제이기도 한 최영주의 A는 화자가 창안안 편지 A에 대한 일종의 회신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 대상과 의미는 보다 사회적이고 교훈적이라는 점에서 퍽이나 의미심장했던 장치였다. 어느정도 비밀을 간파한 최영주가 관련자들에게 보낸 A의 편지는 당신은 적어도 이 A를 알고 있는 사람일것이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최영주의 아버지는 건설부 고위관료이면서 화자의 언니 서정인의 친부이기도 했다. 신신양회 어머니가 지칭한 '그분'에 해당되는 윗분들 중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최영주는 어머니들과 연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분들에게 의문의 A를 던짐으로써 당신이 (비밀에 대한)답신을 하지 않아도 우리(사회)는 알고 있음을 정중히 알려준 것이다. 마치 서로가 알고는 있지만 공개해선 안될 A급 비밀 문서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때 알았다. 작가는 화자가 자신들 연합체에 건강한 남성이 필요하여 그것을 제안하기 위해 편지이름이 A가 된 것이 아니고 실은 그때 그 사건의 비밀을 알고 있을 그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A라는 발신인이 필요했다는 것을.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당신들의 A는 무엇인지’ 묻고 있는 작가의 질문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것은 작품속 인물들의 A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오대양 사건’은 정국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되며 시원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의문만 남겨졌지만 상당부분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았다는 정황적 증거들이 잔여물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다니며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군가는 입을 닫았다는 사실만은 아무도 모르지 않는 다는 것. 그렇게 본다면 최영주의 A는 권력의 그분을 상징하는 Authority 가 아니었을까. 최영주는 서정인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인후가 약해 편도선염을 달고 사는 도시인으로 기자이면서도 사회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심한 지식인을 표상한다. 최영주가 기자된 양심으로 선택한 최선은 그분은 누구인지 혹시 당신은 아닌지에 대한 양심의 부호로서 A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그림자 같은 기태영에게 A는 신신양회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은 놀라운 추진력에서 알 수 있듯이 야망이나 야심을 상징하는 Ambition으로서의 A였을 것이다. 아버지를 찾지 않았던 다른 여자아이들에 비해 유독 아버지와의 만남에 집착한 어린시절 행보도 그의 A를 설명해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기태영은 자신의 A를 반사회적, 반도덕적, 반환경적으로 추구한 덕에 신신양회의 두 번째 몰락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기업인이 지양해야할 자세이겠지만 그들이 주홍글씨 처럼 지니고 가는 비밀의 낙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배우겸 가수이면서 최영주와 고교동창생이기도 했던 김준은 그의 불안을 감지한 서정인과 안은영의 덫에 걸려 그녀들의 타겟이 되고도 훗날 그 결과로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언제 추락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전형적인 자기중심적 인물이었기에 그의 가슴에 자리잡은 불안Anxiety은 김준의 트레이드 마크로서의 A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때 인기가수 김준의 코디네이터이기도 했던 의상학과 출신의 안은영은 지인들에게 성기가 없는 허수아비나 인형으로 인식되며 여성성을 감지하기 힘든 중성적 존재로 표현된다. 김준이 허물없이 인간적인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던 그녀. 타자의 단점을 외적, 내적으로 보완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실현했던 그녀에게 A는 섹스와는 무관한 Asexsual이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남성, 여성과 상관없이 외적인 아름다움을 공정하게 추구한 정직한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약한 인후와 후천적으로 형성된 양미간의 세로주름이 인상깊었던 서정인에게 A는 여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매혹의 Attraction이 아니었을까. 화자의 엄마이기도 한 서정화의 눈에 띄는 미모와 외향적이고 낙천적인 성격, 아버지의 출세욕을 물려받아 어딜가도 주목받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대 최고의 가수 김준을 노란색 컨버터블로 유혹해 준하를 낳기까지한 그녀의 도전정신이 왜 그런지 연합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와 조금은 어긋나보였던 것도 그녀만의 치명적 매력때문이 아니었을지.
어린 시절부터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김준희는 아기아빠의 헌신과 구애를 뿌리치지 못하고 공동체를 벗어나 단란한 가정을 선택하게 된다. 그녀의 내재된 욕망한켠엔 삶의 동반자와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소원으로 자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진다. 현모양처는 가족구성원에 대한 희생을 밑바탕으로 하기에 그 대상이 곁에 실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준희의 A는 동행으로서의 Accompany였던 것일까.
마지막, 그날의 생존자 화자에게 A는 무엇이었을까.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화자가 그리워한 것은 대추나무가 있던 집에서의 삶이었다. 그녀는 혹시 세숫대야 물속에서 흔들리는 대추나무 이파리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자연의 미세함에 그리움을 느끼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답다. 현장에서 살아 남았지만 오랫동안 죽음의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화자가 다시 찾게 된 그리움은 들판 가득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살아있음’이었다. 코스모스의 생명성을 온몸으로 느낀 화자에게 A는 ’살아남음’이 ’살아있음’ 이 된 Alive가 아니었을까.
A는 이렇게 주인공을 부르는 이름이 되어 자신들의 의문에 스스로 답을 했다. 권위Authority, 야망Ambition, 불안Anxiety, 무성Asexsual, 매력Attraction, 동행Accompany, 생존Alive ...이 모든 A는 실은 우리의 A이기도 했다. A는 이 세상의 사람들 만큼이나 많았다. 작가는 어쩌면 그것을 노린 것이 아닐까. A라는 부호를 소쉬르의 기호체계로 보자면 알파벳 A라는 기표 하나에 얼마나 많은 기의가 가능한가. 어떤 사람은 보자마자 혈액형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고, 어느 걸그룹의 노래제목을 연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독자들 뜻대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의미작용을 원했다는 생각이...이제서야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부호로서 A는? 당장 무엇하나 내세울 게 없는 나...분명 이후가 중요할 것이다. After, After....
After A
이야기가 끝이 났다. 중세 유럽의 고성 내부 나선형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갔더랬다. 작가는 외롭다(Alone)고 말했고 나는 돌아온 가슴속에 무언가가 일어났다.(Arise) 삶과 죽음, 여성과 남성, 신념과 배신, 집단과 개인, 조직과 독립, 사건과 진실, 비밀과 폭로...내 안에서 서로 상반되는 가치들이 저도 모르게 여러 개의 굴뚝을 세워가며 서로 키재기 경쟁을 하고 있다. 그녀들의 어머니들은 공예공장의 관광용품 인형의 눈썹을 붙이며 인공(Artificial)의 굴뚝을 세우고 있었고 어머니의 아이들은 그 굴뚝에 감람나무 이파리를 문 비둘기와 고글을 쓴 파란 꼬마펭귄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그것들도 진짜(Authentic) 가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비가오면 굴뚝이 스러지고 난 들판에 자연의 정화가 시작되듯 이제 우리네 가슴에 맺혀있던 죽음의 정화가 시작될 시간이다. 대립의 분진과 이기의 악취와 위선의 오수가 사라진 그곳에 들판 가득 코스모스가 하늘 거릴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것보다 고마운것. 화자가 생존한 이유가 어머니가 살려준 이유이듯 화자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이후에도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문득 화자가 지니고 다니던 흰 지팡이가 떠오른다. 어떤 삶을 살아도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할 제 3의 눈으로서 작가는 사회적 사건을 복원하였고 화자는 자신의 사건을 복원하였다. 이제 내 사건을 기다릴 차례다. 눈뜨고도 장님이 되는 세상에서 방향성을 잃지 않고 진실만을 짚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몰라도 절대 진정성을 잃지 않는 것, 진정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진짜배기 굴뚝하나를 영원히 마음에 박아 넣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내 가슴에 진실의 지팡이 하나 오롯하게 세워두고 싶다. 이 작품은 진실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고 진실을 느끼고 보는 눈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것은 혹시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할지라도 영원히 잃지 말아야 할 우리 가슴속 소중한 눈인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엔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지팡이에 조금은 덜렁이는 오늘을 걸어본다. 설령 다시는 짚고 싶지 않을 땅이라도 두렵지 않을 나만의 눈을 만져본다. 어제의 흔들림이 못내 기꺼웁다. 내일도 살아있다 하면 진실로 내딛을 수 있기를. 그 걸음 분명 고마웁기를. 그 마음 오래오래 변치 않기를.
<덧붙임>
알파벳 A의 타이포그래피를 Application 하였다.
출처가 분명치 않다.
폰트에 네이밍 해준 값으로 치고 용서를 바란다.
리뷰 쓰면서 글자와 그림짝짓기가 제일 즐거웠다.
Artist와 Author는 Audience의 Apology를 원치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