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자동차를 주차해 둔 곳으로 가려고 길을 건너던 그는 교차로에서 멈추지 않고 무작정 차를 회전시킨 어느 정신 나간 운전자 때문에 거의 차에 치일 뻔했는데,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나면서 와락 분노가 치미는 자신의 반응을 보며, 요즘 들어 자기가 얼마나 죽고 싶지 않아 하는지, 삶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231p 

소개된 이 문장이 가슴을 뛰게 한다.  
가족에 이해 받지 못하는 이 시대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싶다.
또하나, 많은 분들의 리스트를 컨닝하고 그중에 나를 잡아 끈 작품이다. 
지난 달 내가 추천한 책이 하나도 간택(?)되지 않아 퍽이나 서운했던 탓인지
사실 이번달 추천 작품을 그다지 애써 골라내고 싶지 않은 소심한 심술도 한몫하였다. 

 

 







공동수상작을 낸 작품이라 두개의 작품을 모두 읽고는 싶지만,
이것도 다른 분들의 추천 리스트를 보고 비겁하게 동조하고자 한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나와 갑장이고 한의사의 명함을 가졌는데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 한 것인지 또 한번 깨우칠 좋은 자극이 될 듯하다. 

 

 

 <덧붙임>

마감날 리스트를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알게된다.
남다른 작품을 선정하고 싶지 않고(어짜피 안될 것이기에...)
기존에 추천된 작품들 중에서 될성 싶은 작품을 고르게 되는 이 무성의함이란... 

하지만, 머리가 복잡할땐 나보다 더 생각을 많이 한 평가단 여러분의
고견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터,
(이번에 도착한 <토마토 랩소디>와 <도룡뇽과의 전쟁>이 이를 증명한다)
이번달은 이 두개로 추천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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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1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간도서 페이퍼를 다른 분들이 먼저 소개한 책들을 참고하고 나중에 작성하고 올렸습니다.^^;;
저는 소설 신간도서 페이퍼를 한사람님 딱 한 분을 통해서 보고 있는데,
중앙문학상 수상작가의 책이 역시 많이 소개되고 있는가 보네요.
내용이 책에 관한 것이라서 그런지 많은 평가단원분이 이 책을 소개하네요.

한사람님의 <도룡뇽과의 전쟁> 리뷰,, 기대해도 될까요? ^^;;
사실, 이 책이 선정될 줄이야 생각도 못했답니다.ㅎㅎ ;;

한사람 2010-12-10 23:15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그 책을 오늘에서야 집어 들었어요..ㅋ
이번주말에 읽으려구요^^
이 책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제 리뷰를 기대하신다니..으흠...신경을 써야겠는걸요~~
지난번에 cyrus 님의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리뷰를 보고 저도 읽고는 리뷰썼답니다..

워낙 좋은 책들만 선정해주니..사실 아무거나 와도 상관이 없는데
이번달은 그냥 두개만 추천했네요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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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이 책을 좀 미루어 두었었다. 어떤 예감때문인 지 올해를 정리하는 시점에 책을 덮고 싶었는데 아마도 윤대녕의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통해 산다고 하는 이 대책없는 것, 그것을 또 견뎌낸 올 한해를 조용히 격려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매일을 숨쉬고 또 그 다음날을 맞는 것이 따로 칭찬받을 일이 되진 않겠지만 나는 그마저도 칭찬해 줄 사람이 필요했었나 보다. 그렇게 중요한 약속을 따로 빼어놓듯 나는 조용히 이 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곤 큰 기다림때문 이었는지 나는 책을 덮고 사뭇 경건해 지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내 입술로 가져가 버린 나...어쩐 일인지 깍지낀 두 손에 힘이 주어져 입술도 꼭 깨물어 보았다. 천천히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그런 나를 그냥 잠시 내버려 두었고 올 한해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스스로 끝내 대견해진 나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이 책은 마흔 아홉된 소설가 윤대녕의 소설작업 바깥의 사적인 풍경과 텍스트 가장 안쪽의 심상을 고백하는 산문 글이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과 가족들, 만나온 사람들, 읽어온 세월과 느껴온 자연을 지금 시점에서 정리한 글이라 나이들어 그동안 문학해 온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곧추 세우는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말하는 방식은 한눈에도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고 마치 어느 산사에서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새소리 물소리를 동무삼아 고조곤히 사연을 전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잔잔함의 여운이 내겐 얼마나 길 것인지 나는 두 어장을 넘기면서 이내 간파해 버렸다. 산사에서의 운명적 만남이라도 이루고 온 듯 나는 올 한해 이 곳 속세에서 보고 느끼고 이루어 온 것들을 차근히 되짚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가 그랬던 순서와 방식대로 내 한해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불효를 고백하던 어머니와 늘 거리를 두었던 아버지,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친 할아버지, 역마살 낀 자신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아내를 이야기 할 때엔 유난히도 '마흔 넘어', 혹은 '마흔이 다 되어', 아니면 '마흔아홉에'를 언급하며 세월 지나 돌아본 심경을 마치 참회하는 투로 고백을 하곤 하는데 나는 그가 나이를 호명할 때마다 찔린데 또 찔리는 심정으로 마음이 영 편치를 않았다. 올 한해 지겹도록 마흔을 부르짖은 나는 그의 나이를 읽어가며 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마흔의 종지부를 찍고야 말겠다는 생각도 했음이다. 그랬다. 마흔을 받아들이는데 결국 내 전 생애가 걸리게 된 것을 깨닫고만 나는 올 한해 그 과정의 하나로 무차별적인 독서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 일상에서 어떤 반복되는 패턴을 얻게 되었다. 그동안의 내 인생을 정리해 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집어 들었던 것이 지난 봄, 유래없이 폭설이 계속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곤 정말로 살아온 그간의 기억들을 정리하는 훌륭한 방편이 되어 주었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마흔을 잊어보려 했는데 오히려 더 되새겨진 꼴이 되긴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올 한해 내가 한 일과 그 중에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쓴 일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총정리의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이 마흔을 살아낸 내 자신을 격려하는 일이기도 했다. 대충 내 예감은 맞았던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는 애절한 문학청년의 시절이 분명 있었음을 술회하는 작가에 속했지만 내 경운 청춘을 다 지나고 보니 문학에의 염원이 생기게 된 늦깍이 작가 지망생...쯤 되려나. 전문적인 문학의 공부를 따로 한 것도 아니고 원대한 문학의 꿈도 품어보진 않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 그렇다면 글을 써야하는 가에 대한 대책없는 질문에 어이없이 생명이 위협당한 경우라 할 것이다.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점검해 보는 중간 단계로서 보다 안전해 보이는 독서와 서평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올봄부터 착수한 계획은 큰 차질없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 책의 후반부에도 윤대녕이 읽은 책을 소회하는 독서일기가 있는데 간단하면서도 본인이 강렬하게 느낀 인상만 핵심으로 전해주기에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부담없이 이해하고 넘어가기 편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경운 책 한권 읽고 책과 관련된 그동안의 사연을 밑도 끝도 없이 풀어내는 경향이 있어 서평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았었나 그런 생각도 드는데 결국 서평을 써가면서 책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원없이 떠들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이 만족감은 아마 내가 올 한해를 견뎌온 가장 핵심적인 기쁨의 고통, 그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레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얼마나 웃긴가. 아니 얼마나 슬픈가. 인생이여, 세월이여...여인의 변덕이여...

어떤 유명한 과학자가 그랬다. 어떤 일이 일어난 후로는 절대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나는 어쩌면 소설이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사실을 인정하기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지라 나는 며칠 전 신문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에세이로 기재한 글을 대신하겠다. 소설가는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고 있는 유명한 작가인데 그녀의 책상엔 원고를 보아달라고 매달 수천페이지의 글이 도착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육십이 넘은 목사한분이 방대한 분량의 장편을 부쳐와 출간을 하고 싶으니 꼭 좀 읽어 달라 부탁을 하더라는 것. 소설가는 몇페이지 읽고는 문장의 수준과 모든 구성이 책을 내기엔 부적절하다는 답변을 하고 싶었으나 너무나 간곡한 목사의 상처를 염려해 출간하려면 대폭 수정이 필요하다고 에둘러 말을 전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며 선생님이 꼼꼼히 읽어주셨다니 책을 내지 않아도 마음이 괜찮다고 울먹이더라는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하나뿐인 의사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노인의 인생무상과 아들의 억울함에 관한 자신의 고백이었다. 아...나는 그글을 읽고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그만 얼굴이 뜨거워져 어쩔 줄 몰라 했다.

소설가는 목사의 글이 온정신과 몸을 다해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토로하는 개인적인 글일뿐 그 글이 어떠한 문학적 가치는 가지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래도 된 것이었다. 목사는 글을 썼고 소설가는 그 글을 읽어 주었으니 말이다. 소설가는 목사를 등단시키는데 조력하는 일 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것에 세상의 답이 있다고 하였다. 시켜주려 읽어보았는데 읽어주니 그만두더라...그의 마음은 단 한명의 세상이라도 풀어질 만큼 이었을까.

'오늘 오후 15시 경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미시령 동서관통도로에서 **구청 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되면서 관통도로 터널을 지나 500M 쯤에 위치한 울산바위 주차장에 정차 중이던 승용차를 추돌하여 승용차는 10m 절벽 아래로 추락, 2명이 사망...승용차는 완전히 부서져...'

3년 전 내 어머니는 이 기사속에서 당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모와 같이 즉사한 2명중 한명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 오후였다. 그날은 또 다른 칠순이모의 생일을 축하하러 형제들이 강원도로 여행을 가시던 중이었고 어머니는 정차된 차에서 막 내릴려던 찰나에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살아남은 이모들을 지금까지 외면하는 것으로 용서의 마음을 여간해서 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조카이기도 하다. 그날의 일을 그럴싸한 소설로 구성하여 두어 번 공모에 낙선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상하게도 낙선의 기쁨만큼은 후련하게 만끽하고는 했는데 아마도 그 목사님과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누군가는 내 글을 읽어 보았겠지...하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쓰기에 대한 막연한 바램이 잦아들 즈음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인데 어쩌나...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어 나중에 이런 사람이 되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또 지병처럼 들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나지막히 단정하게 적어볼 수 있다면...내 어머니와 내 고향과 아버지를 말할 수 있다면...내가 읽은 책을 말할 수 있다면...어느 잠못들던 밤의 이야기와 버리지 못한 것들을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이 책은 글을 쓰고 싶었던 나를 돌아보게 하면서 다시 내 앞날을 그려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윤대녕은 이 책의 제목이 된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이라는 글에 정지 교통신호를 기다리다 우연히 만난 어느 시인과의 계속되는 인연을 소개하며 삶은 사소한 일상의 연속이라는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시인 역시도 휴대폰을 가지러 다시 가지 않았다면 그날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일상에는 늘 극적인 요소가 내재한다는 신비로움이야말로 우리가 매순간 극적인 순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질문한다.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질끈 감고 순간의 만남, 찰나의 이별에 총이라도 맞은 듯 가슴을 쥐어 뜯었다. 내 어머니가 탄 차가 1분만 주차장에 늦게 도착했더라면... 내 어머니 차를 추돌한 차가 1분만 더 일찍 지나가 버렸다면...아니, 내 어머니가 몇초 만이라도 빨리 차에서 내렸더라면... 누군가는 그 동일한 순간에 生의 희열에 감동하고 또 누군가는 死의 절명에 운명하는 이 모든 우리 인생은 얼마나 극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또 하나 내가 고백하고 싶은 건 윤대녕의 이별방식, 그가 소설에서 보여준 헤어짐의 미학적 관념세계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개인적 사연이라고나 할까. 나는 내친김에 이 책으로 올해 나이 마흔된 내 첫사랑의 종지부도 찍고 싶어진다. 윤대녕은 꼭 내 국어선생님과도 같은 연배의 작가인데 소설가는 못되셨지만 아직도 사립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그 시절 내 영혼의 별, 한명의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십년도 더 된 내 여고시절의 앨범엔 국어 선생님과의 영화보다 더 근사한 바닷가 사진이 있고 하얗게 부숴지던 섬세한 포말처럼 같은 색의 이를 드러내고 읽어주시던 <서시>와 <별 헤는 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교무실에 비밀간첩이라도 된 듯 몰래 잠입해 선생님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아내곤 어느 일요일 아침 무작정 주소를 찾아 비장하게 몸을 던진 74번 버스도 운행중 이시다. 그때 내가 가진 옷중에 가장 예쁜 치마를 골라 입고 처음으로 건너본 한강다리는 얼마나 두려웠던지. 다닥다닥 집들이 모여 있는 언덕 아래 정류장에서 심호흡을 하고 떨어트린 동전 두 개는 얼마나 아득했는지. 선생님의 어머니로 보이는 어르신의 '지금은 없다'는 차가운 대답...실망한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마지못해 요 앞 목욕탕에 갔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바보처럼 또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그렇게 두 번은 다시 걸 용기가 없어 그대로 돌아선 발걸음은 다행히 여고생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선생님의 '거절아닌 외면'을 영원한 비밀로 간직할 수 있었음이다.

그렇게 이 책은 내 여고시절 선생님과 나누었던 빛바랜 약속들과 다시 극적으로 조우하게 하였다. 나는 아직 선생님과 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지난 시절 나는 윤대녕의 글에서 80년대식의 사랑과 이별만을 찾아 헤메던 고집스런 독자였다. <대설주의보>에서 해란과 같은 여주인공의 낭만적 이름이나 그다지 쿨하지 못한 이별의 방식들, 몽환적인 분위기에서의 꿈과같은 안녕, 더 가까워 보이지 않는 문어체의 대화들에 나는 마치 내 첫사랑의 순정이라도 되찾은 듯 기뻐하던 독자였다. 늘 그리워 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 다시 말하면 헤어지긴 했으나 헤어진 적이 없는 관계, 그러니까 안 만나도 되지만 다시 만나도 되는 절대 헤어졌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관계...우린 얼마나 더 많이 헤어지고 더 많이 기다렸고 그래서 다시 마주쳤던가.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늘 지난 시절 헤어는 졌지만 미처 헤어지지 못한 그들, 차마 헤어지자 한마디 없이 헤어 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모두 헤어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하나둘 다시 내 앞에 나타나고는 했다. 윤대녕은 내게 이별을 말함으로써 절대 이별하지 못하게 하는, 헤어질 수 없는 작가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윤대녕이 고집한 이별방식의 기원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불교사상에 동의하며 어떤 사람과도 여간해서는 헤어지지 않는다는 인연을 보호하는 원칙,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돌아오는 24절기마다 사람을 만나는 음력의 시간과 계절을 사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의 소설에서도 희미하게나마 기약없는 약속을 다시 기억해내곤 했던 이유는 거리를 두면서도 사람과 한번 맺은 인연은 인위적으로 저버리지 않는 그의 의지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말 기도같은 독서를 마치고 돌아와 마음에 촛불하나 밝혀놓은 어렴풋한 나를 보게 된다. 나는 올 한해 그럭저럭 책들과 함께 내 글들과 함께 행복했다. 오대산으로 제주도로 원주로 강원도로 마음살이 부대낄 때마다 정처없이 떠나곤 하던 그가 부럽지 않을 만큼 나도 내 자신을 향해 한껏 웃어주고 마음다해 울어 주었다. 아무리 어렵고 도무지 재미없는 책도 신기하게 이해가 되고 눈물이 났다. 여행으로 늘 여름을 나던 내가 한여름의 열대야를 책으로 이겨내지 않았던가. 나에게 어느 하나 극적이지 않은 책들은 없었을 것이다.

늦었을까. 잊었을까.

많은 일을 했고 많은 곳을 가보았지만 늘 가슴 한구석 끄트머리에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몹쓸 병처럼, 갚아지지 않을 평생의 빚처럼 남아있는 어둠의 약속. 할 수 있는 것과 무엇이 되는 것 사이에서 늘 주저하며 언제나 한걸음 물러서던 비겁의 다짐. 나는 오늘도 확인, 또 확인하려 그를 읽고 글을 쓴다.

선생님,
아직도 그날 밤 별처럼 여전히 저를 기억하실 수 있나요.
너무 늦었지만 다시 비추어 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선생님을 뵌 지 이십 몇 년이 지난 그 어느 날
제가 선생님을 불현듯 찾아 가더라도 변함없이 저를 잊지 않았다.
말씀 해 주실 그 미소, 그려 보아도 될까요.
그땐 꼭 네가 꿈을 이룰 지 알았고 나를 찾을 지도 예감했다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그날 밤 우리가 세어보던 '별'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를 담고,
그리고 나머지 모든 '별'에 너의 '꿈'을 담아 그렇게 오늘을 기다렸다
벅차게 안아주실 수 있을까요.

윤대녕 작가님,
이 극적인 만남을 기다려 보는 것에 얼마나 동의 하실런가요.
선생님과 절대 헤어진 것이 아니라 믿어 주실런가요.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은 제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빙긋이 눈감아 주실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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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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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에 스며들다 
  

흙냄새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계절에 따른 아스팔트의 냄새나 날씨에 따른 건물냄새엔 민감하고 세밀하다. 가령, 장마가 오기 전 유월의 밤꽃향이 짙어지는 저녁 해질 무렵 주차장이나 아직 기온이 오르지 않은 아침 출근길의 텅 빈 버스 정류장, 눈길에 묻은 흙이 털어내는 아파트 현관문 같이 살아있는 자연을 제외한 온갖 인공적인 것에 내 신경들이 숨을 쉰다. 시멘트 혹은 플라스틱, 콘크리트, 유리와 대리석, 도시를 이루는 모든 소재는 언제나 코끝을 자극하고 감각의 기억을 만들어왔다. 그러다가 가끔은 예기치 않게 젖은 나무들이 뿜어대는 벌레를 부르는 향에 놀라 보면 흠칫 눈물이 난다. 하나의 생명체대 유기체의 극적인 해후라도 이룬 듯 나는 살아있음이 반가웁다. 같이 살아는 있었던 거다.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가야 할 나는 생명 그 자체로도 기쁠 일이지만 왜 이리 기쁘기도 힘든 것일까.

나는 이 책을 '내일은 많은 비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를 접했던 저녁 무렵 비릿한 아스팔트향이 반가워 잠시 감각이 일렁일 때 만났다. 자기 일 들이 바빠 몇 남지 않은 여고 동창생 중에 유일하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그 친구는 남편이 해외대사관에 근무를 하는 터라 이삼년에 한번 꼴로 외국으로 타향살이를 가야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1년이 채 안되어 또다시 태국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통화를 한 것은 한 달 전 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기는 했지만 나 역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해 그 친구가 돌아오면 나는 떠나고 내가 돌아가면 그 친구가 떠나던 얄궂은 인연으로 십여 년을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정작 얼굴보고 떠들었던 기억은 손꼽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내가 컴백을 했더니 그 친구가 떠날 차례였던 것이다. 지난번 미국으로 떠날 땐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촌스럽지만 기념사진까지 박았다. 이번엔 그때만큼 아쉬움이 무뎌진 탓도 있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만 이별식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녀석 답지 않게 '책'을 보내 온 것이다. 그것도 짧은 손 편지와 함께.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이별의 징표처럼 보내온 선물 이전에 나 역시 다른 이에게 이 책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선물만 보내고 읽어보지는 않은 상태였었는데 결국 그 친구로 인해 다시 내 앞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자신은 돌아가서 읽을 테니 나는 책 읽으며 돌아올 때까지 자신 생각을 많이 하라는 이제 갓 마흔이 넘은 아줌마의 열일곱과 똑같던 글씨체가 연락도 안하고 떠난 서운함을 일시에 녹여주기는 했다. 친구가 적어준 내 이름 석자도 비온 뒤 아스팔트에 막 스며든 풀향기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 녀석은 이 책의 내용을 잘 파악했고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한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틀림없이 서점직원에게 두어마디 들어보고 별 고민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있을 법한 일이지만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닌 채로 뜻밖에 전달된 책인지라 나는 그냥 이렇게 책하나 던져주고 떠나버린 그 친구와 여느 택배상자와 다름 없이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이 이 작품의 주제이자 작가가 이렇게 멀리 있는 나에게도 끝내 전하려한 메시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남의 이야기가 구체적인 내 사건으로 
  
헨리가,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아내 올리브를 두고 일터에서의 동반자 데니지를 마음으로만 사랑한 이야기인 <약국>은 죽도록 지겨워도 결국 제 다리 한쪽과도 같은 올리브와 긴긴 시간을 견디는 이야기로 들렸다. 어렸을 때 살던 집, 그러나 그 집에서 한 번도 행복한 기억은 없어 불행의 추억만 남겨진 그 집에 가보고 싶었던 케빈의 어머니와 그의 선생님었던 올리브 아버지가 자살한 이야기, <밀물>은 그들이 얼마나 生에 대한 애착이 절실했는지에 관한 고백으로 들렸다.

눈가의 부드럽게 잡힌 오십줄의 잔주름이지만 혹독한 일이라고는 일어난 적이 없어 보이는 앤지의 옛사랑과 지금의 사랑에 대한 상처는 네 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生의 일부로 피아노를 만져온 <피아노연주자>의 변함없이 소중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 날 박학다식한 며느리를 얻으며 느껴야 할 '큰 기쁨'이 자신보다 아들에 대해 결코 아는 것이 많지 않아 보이는 그녀로부터 상실감이 되어 되돌아 왔을 때, 결국 그녀의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자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만 <작은 기쁨>은 누구의 며느리가 되어본 적 있는 내가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할 '큰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또한, 사람 좋은 인형 같던 남편 헨리와 투덜거리며 나누던 대화는 그녀 그리고 내가 남편에게 그만큼 하지 않고 묻어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세 네 편을 읽고 나서 부터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해안가 마을과 이웃들이 마치 우리 동네 와 내 이웃인 것처럼 적응이 되었고,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작가만의 방식에도 완전히 익숙해져 한편 한편의 이야기가 내 몸처럼 내 목소리인 것처럼 내 눈과 손과 귀 같은 감각에 아주 가깝게 밀착되는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이야기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회상되던 '나'의 일상이었다. 그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난처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굶주림>의 경우, 내면적 상처로 인한 거식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어이없이 죽어버린 소녀의 죽음과 외로움에 공감하기 보다는 엉뚱하게도 둘 다 공부가 끝나지 않아 생활비가 없어 부모님에게 의지하던 신혼 초, 남편이 사들고 온 몇 개 안되던 도너츠를 나누어 먹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목이 메이기도 했다. 분명 앞 작품에서도 등장한 '도넛'인데 기어이 내 기억속의 한자락을 끄집어 내고 만 소설 속 한 장면들은 큰 주제와 상관없이 늘 그 자리에 위치하던 올리브처럼 내 인생 어딘 가에서도 의미있게 자리를 차지했던 시간들 이었던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극적인 순간에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의 생각, 같이 듣거나 보았던 분명 같이 겪은 일임에도 서로의 관점차가 상반되는 사실을 깨닫게 된 <다른 길>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나에겐 통째로 펀치를 날려대는 가장 적절한 자화상과도 같았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헨리의 털없는 허연 정강이에 핀 검버섯은 늘어난 잔주름과 한웅큼 빠지던 내 머리카락 보다 더 잔인했고, '결혼하고서 당신은 무슨 일에도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헨리의 푸념은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라는 내 비판보다 훨씬 더 정당했다. 배우자의 생각을 알고, 그 생각이 영원히 불변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찬가지로 상대 또한 나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의 외로움은 언제나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은 자의 그것보다 막강하리라 믿는다. 이 소설에선 거의 모든 편에 올리브를 비롯한 부부나 연인으로 존재하는 인물들이 상대를 어떻게 사랑하고 또 어떻게 상처를 주는 지에 대해 친절히 이야기 하고 있었다. 옮긴이는 이 작품이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이라는 수식어로 헌사하였지만 나는 '부부를 위한 치유소설'이라는 조금은 덜 세련될지 모르는 또 하나의 날개를 기꺼이 달아주고 싶다. 

 
남의 불행으로 내 상처를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부터는 그런대로 평정심을 찾아 보려던 나에게 좀 더 예리하게 직접적인 면도날을 그어대고 하얀 포말이 부숴 지는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마을이 아니라 한명 한명 끊임없이 파도가 몰아치는 고독한 섬에 난파된 듯한 고립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제인부부의 <겨울음악회> 나들이에서 만난 딸 친구 엄마의 뭔가를 아는 듯한 '세상 참 좁기도 하지' 이 한마디는 결국 무덤까지 가지고 갈수 있었던 남편의 말하지 않은 실수로 밝혀지고, 방금 전까지 같이 보았던 크리스마스 전구 불빛을 삼켜버리는 듯했지만 앞으로 남은 生의 시간에 서로를 뺀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신의 손만큼이나 친숙한 상대의 손을 잡고 결국 서로를 바라본다. 남의 걱정이나 불행을 부러 접하는 것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이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올리브의 처절하고 참담한 현실 속으로 당당하게 침입한다.

헨리가 급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올리브는 한때 학교동료이기도 했던 루이즈를 찾아가 살인범 아들을 둔 부모로서의 고통이나 그로인해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불행해진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그러한 속내만 들켜버리고 결국은 조롱까지 당하게 되는 <튤립>에서는 작품이 끝난 후라도 올리브가 차라리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튤립을 심지는 말기를 바랬었다. 남의 자식의 치명적인 허물을 보고 내 자식의 잘못에 안도한다거나, 배우자의 어린사진을 보고 내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던가, 간병인 엄마보다 늘 입원한 아버지의 안부만 궁금했던 내 자신도 튤립을 심을 자격은 없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여행바구니>에서도 올리브는 남편을 잃은 옛 제자 말린의 장례식을 도와주러 간 자리에서 크나큰 슬픔에 닥친 그녀의 실의에 찬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의외로 무너지지 않은 제자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의 상처만 더 커지고 제자가 생전 남편과 같이 여행을 약속하며 간직해온 속절없는 바구니처럼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다.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자기 허물보다 남의 약점이나 실수를 발견하고 관찰해 내는데 보다 특출나다. 하지만 남의 불행으로 운 좋게 얻은 안도감은 정작 내가 불행해졌을 때 나와 똑같을지 모를 상대들로부터 주지도 않은 상처를 덤으로 받게 되는 악순환의 씨가 된다는 점에서 묻지도 받지도 말아야할 것임에 틀림없지만 작가는 올리브를 감정의 始原을 상대에게서 찾은 우범의 결과로 상대적 감정의 피해당사자이자 자기 감정의 가해자로 만들어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꽤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이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에. 

 
세상에 자리 발견하기
 
올리브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던 젊은이가 등장하는 <병속에 든 배>와  <범죄자>는 그 나이가 비켜간 입장과 시각으로 주인공과 올리브와의 거리만큼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어짜피 아빠가 각각 다른 비현실적인 가족관계속에서의 줄리, 위니자매(병속에 든 배)와 아빠는 죽고 엄마로부터는 버림받은 레베카(범죄자)의 이야기는 그래도 그들에게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의 상처와 그들만의 치유방식에 공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친구에게 총구를 겨누던 미인대회출신의 엄마나 하루 종일 지하실에서 물에 떠보지도 못할 것 같은 배를 만드는 아빠가 오히려 안쓰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들에게 팬케?을 만들어 같이 먹자는 아빠의 일상이 비오던 날 부쳐주시던 어머니의 부침개처럼 그리웠다. 레베카가 옛 남자친구를 못잊고 헤어짐에 슬퍼하던 것 보다는 나이가 들어 버터를 더 찾는 아버지를 보고 버터가 아버지를 끝장 낼 거라 아버지의 버터사랑에 기대를 걸었다는 레베카의 애증에 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의 병환이 길고 깊어지자 긴병에 효자 없다고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기다리곤 했던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줄리나 레베카는 가출과 물건을 도난 하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려했지만 훗날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역할과 자리를 발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올 것이라 믿고 싶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올리브의 심리묘사가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진 <불안>과 마지막 수록작품인 <강>역시, 죽을 땐 제발 숨이 금세 끊어졌으면 싶다가도 끝까지 포기 할 수 없었던 인간관계 속에서의 역할과 자리에 관한 물음을 조용히 던져 주었다. 앞선 단편들에서 올리브는 가끔씩 '말풍선'으로만 등장하는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주인공의 이웃으로 등장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바닷가 마을 한 자리에 선생님으로 부인과 어머니로 위치해 있었다. 하찮아 보이는 주변인 혹은 어엿한 사건 속에서도 그렇게 모여진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였고, 남들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올리브는 도와달라는 아들의 부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는 비로소 희망이 무엇인지 기억났고, 소박해 보이는 아들의 새 부인과 부인이 낳아온 두 명의 아이들 틈 속에서 일상을 같이 하며 작지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행사할 때 가족이라는 기쁨을 다시금 맛보기도 했다. 어디든지 같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던 마흔 넷에 만난 사랑을 지키기 위해 헨리와 헤어지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아들 내외가 아침에 나누던 대수롭지 않은 대화에 마음이 상한 올리브는 아들과 해묵은 서로의 상처를 긁어대며 작품들 중에서 가장 크게 화를 내고는 쓸쓸히 돌아선다. 9.11로 야기된 미국시민의 불안을 글 속에 투영하였다는 <불안>에서 드러난 올리브의 분노는 '불안감은 분노'라는 새 며느리 앤과의 대화에서 암시하듯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 것으로 희망을 느꼈던 감정과 평행을 이루며 역할이 사라진 가족관계에서 분노로 남겨진 올리브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다.

<강>이라는 마지막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유독 제목이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에 집착하도록 했다. <종합병원>이나 <전원일기>같은 매주 주제는 다르지만 같은 형식의 틀과 뼈를 이루는 주인공들로 구성된 주간드라마의 마지막 회 같았다고나 할까. 이야기의 시점이 헨리가 죽은 후이기도 하고 일흔둘의 올리브가 죽음을 앞둔 노년으로서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슬기롭게 정리하는 듯한 메시지를 곱게 접어 우리에게 전달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혼자는 죽고 싶지 않다는 잭에게 사람은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다는 올리브의 대답이나 올리브가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친구와 전화를 할 때엔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먼저 과부가 된) 어머니가 이따금 친구들과 나누던 전화통화를 엿듣는 기분도 들었다. 올리브는 잭이 병원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 그 곳에 작지만 아직도 세상의 자리가 존재함에 다시 희망을 느끼고 이른 아침의 산책을 이어간다. 올리브의 자리(노년-silver)는 강변에 다시 봄이 오고 그런 봄이 오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견딜 수 없을 지라도 계속 흘러가는 금빛 강물(Gold)과도 같았고, 강물이 흘러가는 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일상인으로 다시 만나
 
이 책은 사실 나에게 비일상으로 다가왔던 뜻밖의 감사와는 달리 이야기에 빠져 몰두하기는 어려웠다. 주인공들의 일상 속에서 유난히도 개인적인 '잡념'이 많이 떠올라 생각의 가지치기를 극복하느라 힘겨웠다. 그래서 더더욱 어떠한 한 문장이라도 놓칠 수 없었고, 책을 덮고 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늘 과식을 한 것처럼 머리가 더부룩했다. 아침에 펼치면 산책이 하고 싶었고, 낮에 읽으면 누군가와 맛난 점심을 먹고 싶었고, 밤에 덮으면 일기라도 쓰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배우의 경우라면 실제 극중에서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면 물 만난 듯 잘 표현해 내겠지만 독자인 나는 거울같은 이야기에 합체 되지 못하고 그저 '같다는 것', '같을 것'이라는 무거운 공감만 껴안은 채 며칠을 끙끙대었다. '죽도록 지겨워', '하루가 또 갔네요', '난 괜찮아' 와 같은 짧은 한마디는 잘 구워진 생선을 맛있게 먹다가도 갑자기 목에 가시가 걸리는 순간과도 같았고 바로 내입에서 나온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녀석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똑같이 자신의 엄마와 아버지와 동생과 남편과 시어머니를 그리고 한번은 친구인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그녀석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었을 것이고, 행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과 내가 똑같을 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힘겨움 없는 같음'은 일회적인 행운이나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토록 '힘겨운 같음'이 일상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새삼 벅차고 감격스럽다.

얼마전 신문에서 '늙으면 엄살이 심해지고 원래 요구가 많은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간호사들끼리의 주고받던 무심한 한마디 때문에 대장암을 견디고 끝내 이겨버린 어느 老교사의 사연을 접했다. 나이가 들수록 일상에서 접하는 감정의 씨줄날줄간의 간격이 더 촘촘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나이로부터 얻을 거라 생각되는 관용, 포용이나 후덕함은 커녕 오히려 사소한 먼지 같은 것들도 일단 들어오면 잘 빠져나가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고 튕겨져 나가는 순간을 맞이할 때가 많다는 것에 얼마나 놀라곤 하는지 모른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에 대한 경외감은 그래서 더 커져만 간다. 내 어머니는 일평생 하루의 시작과 끝이 얼마나 경건한지 그리고 그것을 변함없이 지켜가는 일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인지 몸소 실천하는 '최고의 일상인'이었다. 이 책의 서두에 작가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라고 밝혔다. 아마 작가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나는 어머니가 가신 후에야 일상을 존중하고 신념하며 그로부터 얻은 힘으로 가족의 일상을 지원해주신 내 어머니께 비로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것이 내 삶의 마법이자 지팡이였음을 너무 늦지는 않게 깨달았던 것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친구의 분주한 일상도 눈에 그려진다. 크리스마스를 밝혀줄 꼬마전구가 녀석의 집에서도 반짝이고 있지 않을까. 내가 보지 않아도 여전히 열심일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우린 서로가 손꼽는 '최고의 일상인'이 되어 만날 것이고 늘 그렇듯이 적지 않은 세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건 서로를 등지지 않은 것에 수줍은 한마디를 건낼 날이 올 것이다.

살아는 있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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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실은 와인을 많이 좋아했다. 처음엔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잔씩 훌쩍 거리다가 어느날인가 부터 와인맛을 알게 된 경우인데 심각하게 소믈리에 공부를 해볼까도 생각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나는 급기야 와인 장사도 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은 와인생산지로도 유명한데 바로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토착품종인 산지오베제(Sangiovese)를 그 품종으로 재배하는 곳이다. 중장년층은 프랑스의 카베르네 소비뇽 위주의 풀바디한 와인을 즐겨 찾지만 패셔너블한 젊은 층은 과일향이 독특한 이탈리아산 산지오베제를 많이들 찾는다. 남자손님보다는 여자손님에게 더 반응이 좋은 편인데 뭐라고 할까...맛이 상당히 관능적이라 목으로 넘기기 전에 느껴지는 미감이 살짝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19금이긴 한데 와인을 마시고 키스를 하면 입안이 텁텁한 느낌 때문에 썩 유쾌하지(?) 않은 경향이 있으나 산지오베제는 향수같은 과일향이 나는 덕에 시간이 지나도 안심(?)할 수 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커플인 경우 산지오베제를 주로 권해왔다. 또 프랑스와인은 마음을 가라앉혀 대화를 심각하게 하는 반면 이탈리아 와인은 사람을 수다스럽게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일년 간 잊었던 와인이 어찌나 당기던지 잠시 죽어 지내던 미각이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듯 했다. 하필 내가 운영하던 가게는 이탈리안 음식들로 낮장사를 했기 때문에 스파게티를 지겹도록 삶아야 했는데 주방장이 도망을 가는 바람에 한 삼개월 토마토 소스를 뽑느라 고생한 적도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홀에서, 주방에서 시끌벅적했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와인과 토마토의 추억에 젖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덮었다. 인생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가 어떻게 된다고 하던데 나는 와인레스토랑을 하면서 웃다가도 울고 울면서도 웃어버린 적이... 더럿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울다가 웃는, 아니 웃다가도 우는 책이다.

요즘도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니 작가가 나와 갑장인데 모르긴 해도 이 사람 아마 대가족속에서 '재미난 이야기 시끄럽게 떠들기'를 취미와 특기로 가진 가족구성원들과 습관처럼 화끈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지 싶다. 최근에 이렇게 서사의 밀도가 높은 소설을 만나본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시나리오로서도 완성도가 높아 극영화를 염두해 둔 작업으로도 느껴진다. 언뜻 보기엔 영화로도 유명해진『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라우라 에스키벨, 1989)과 같은 요리문학의 장르로도 볼 수 있는데 요리자체에 페미니즘이나 에로티즘을 반영해 여성의 자아를 부각하는 것에서 진일보해 하나의 식자재가 나라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종과 종교, 문명의 충돌및 역사적 배경을 남녀간의 금지된 러브스토리와 잘 조합해 훌륭한 문학적 레시피를 완성했다는 고전적 성취를 거뜬히 이룬 듯하다. 영화로 본다면 비극적 요소가 결국엔 희극이 되는 해피엔드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벗어날 수는 없어 보이나 작가의 연출은 다분 중세 이탈리아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블록버스터형 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이야기와 표정이 섬세하게 살아있어 개성강한 조연들이 남녀주인공 못지 않게 활약이 클 듯하다. 이력에는 영화를 전공하고 CF감독과 시나리오작가, 주방장, 요가강사등의 꽤 다양한 직업을 두루 거친 것으로 보아 영화감독의 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날도 멀지 않은 것 아닐까.

이야기는 논노라는 유대인 노인의 나귀가 고독하고도 처량한 울음소리로 마을의 새벽을 깨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나귀는 16세기 중반 에스파냐의 종교박해를 피해 토마토를 이탈리아에 가져온 유대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당시시점의 고독과 회한을 상징하는 동물일 것이다. 요즘의 판타지 영화로 치자면 주인공의 수호정령을 의미하는 데몬의 성격을 가지는데 소설의 후반부에 이 나귀가 손자를 위해 큰 역할을 하고 근사하게 죽자 바로 노인도 유사한 모습으로 죽게 되는 삶의 연계성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이야기는 生을 자극하는 나귀의 울음소리와 死를 받아들이는 나귀의 울음소리 사이에 위치하는데 처음 울음소리를 듣고 주인공 모두가 각자 자신의 인생에 감지되는 불편한 심기를 느꼈다면 마지막 울음소리에선 비로소 사랑과 용서로 인생의 의미를 깨우친다는 서사적 대칭구조를 취하고 있다. 늙은 군주를 떠올리게 하는 나귀와 동일시되는 노인은 이 나귀의 새벽울음소리에 카톨릭교도의 마을에서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에 회한을 느껴 같이 눈물을 흘리지만 죽을 때는 나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함박웃음을 머금고 기꺼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 가장 슬픈 순간에 가장 기쁠 수 있는 삶의 아이러니가 이 작품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노인은 소설속의 가장 기쁘고 다행스러운 순간에 어이없게도 죽음을 맞이하면서 작품의 주제를 가장 멋들어지게 실천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유대인 노인의 손자 다비도는 토마토를 재배하고 토스카나 마을의 카톨릭처녀 마리는 올리브를 재배한다. 청년과 처녀는 모두 땅을 사랑하고 토마토와 올리브에 있어 전문가로 등장한다. 다비도에게 있어 토마토는 빨강의 풍요와 생명의 기운을 의미하며 마리에게 올리브는 아버지와의 초록빛 추억과 조상에 대한 경의를 상징한다. 청년의 토마토가 자신의 심장이라면 처녀의 올리브는 혈관에 흐르는 피와도 같아 보인다. 이 두 사람은 하나의 심장에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랑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표면적으로는 토마토청년과 올리브처녀의 로미오와 줄리엣식 금지된 사랑이라는 서사의 큰 줄기가 핵심인 것은 틀림없지만 막상 이들이 만나는 장면은 그리 빈번하지 않으며 첫만남과 첫키스, 마을의 축제, 그리고 심판의 날이 되기까지 이들을 지탱해주는 더욱 탄탄한 스토리는 오히려 마을사람들의 웃기다가도 짠한 사연들에 있다고 보여진다. 즉, 토스카나 마을의 대공이면서도 마음편하게 농사를 짓는 것이 꿈인 코시모 대공과 분노를 요리할 줄 아는 그의 요리사 루이지, 마리의 의붓아버지이면서 온갖 음모와 계략으로 두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주세페, 주세페의 가엾은 똘마니 베니토, 대공의 어린 시절 친구이면서 남장으로 바보행세를 하는 보보, 가장 공정하면서도 지혜로운 마법사 굿 파드레 신부와 복사 베르톨리, 그리고 무카와 시뇨레, 벤체초를 비롯한 왁자지껄한 시장사람들의 유머러스하고 생생한 목소리, 이들의 잡음과 소음이야 말로 이 작품의 가장 진솔한 매력으로 생각된다.

작가는 이들 개성강한 주변 인물들의 사연을 하나씩 늘어 놓으면서 과연 우리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 지 스스로 생각을 유도해 내는 작법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 답으로 토마토 청년과 올리브처녀를 바라보게 하고 있다. 그런데 구태의연하게 선은 좋은 것이요 악은 벌을 받는 것이라는 권선징악으로 인생을 마무리하지는 않고 산다는 건 토마토처럼 상큼발랄하다가도 올리브처럼 쌉싸름한 것이라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하나가 되어 그럭저럭 누구도 견뎌볼 만한 것이라는 꽤 서글픈 그러나 끄덕이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생을 견디는 이유는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고 올리브로 올리브유를 만들고 토마토로 소스를 만드는 이야기로 설명이 되어 진다며 이 과정은 꼭 기쁨과 슬픔이 늘 공존하는 우리네 인생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인물의 역학구조를 보면 가장 대립되는 인물은 다비도의 할아버지 논노와 마리의 의붓아버지 주세페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을 중간에서 조율하는 중립의 역할이 가짓빛 피부를 가진 신비의 인물 굿 파드레 신부라 할 수 있다. 다비도의 할아버지는 원래 에스파냐의 재무장관출신으로 뛰어난 두뇌덕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항해에 참여했다가 신세계 원주민들과 10년을 산 후 유럽으로 돌아온 기적의 생환자였다. 논노는 수학과 언어가 뛰어난 유대인 지도자를 표방하며 이기고 쟁취하는 것 보다는 지고 빼앗기더라도 살아남는 생존이 곧 미덕이라 생각하는 현실주의자 이기도 했다. 논노는 원주민으로부터 토마토 씨앗을 선물로 받아 이탈리아의 비옥한 땅에 열매를 맺는 '헌신'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데 그는 극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면서 많은 상처를 겪은 현자賢子로서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조언을 남긴다. 씨앗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으나 심고 가꾸면 열매를 맺게 되고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루고 나면 열매를 먹을 수 있으며 축복받았다면 그 열매의 맛까지 달아서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손자에게 전해준다. 즉, '노력없이 단맛을 원하지 말라'는 논노의 인생원칙은 그대로 다비도와 마리의 삶의 원칙에 복제되기도 하며 토마토가 온갖 희생을 치르며 이탈리아에 정착하게 되는 고단한 과정을 암시하기도 한다. 나는 책을 덮고도 다비노와 마리보다는 노인의 말과 행동이 더 오래 남았다. 그는 주연보다 더 멋진 조연이었다.

이에 반해 주세페는 마리의 아버지를 죽이고 올리브 농장을 빼앗아 마리에게 노동을 착취하며 논노의 땅까지도 넘보는 파렴치하고도 탐욕적인 인물로 작품속 악의 축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주세페의 비열한 인간성을 익히 알고는 있지만 재력을 가진 그에게 행여 피해를 입을까 입바른 소리를 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군중심리에 편승한 우매한 농민들의 마녀사냥식의 열띤 토론은 흡사 연극무대의 한 장면처럼 한명 한명의 대사에 강렬한 힘이 실려 있어 작가의 인물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었다. 주세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끝까지 베니토와 보보, 시장 상인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하는 사기꾼으로 악역으로서 성실을 다했다. 원래 포도주를 양조하는 사람들이 아주 지혜롭거나 사악하거나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곤 하는데 비밀이나 진실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그 비밀과 진실을 약으로도 혹은 독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뇌졸중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올리브 농법을 더 창의적으로 개발해 자신만의 레시피를 가지게 된 마리는 이탈리아의 생활력 강한 진취적 여성상을 표방한다. 실제로 이탈리아 국민성이 우리와 비슷해 다혈질의 여성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마리에게 시종일관 유대인이라는 열패감으로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다비노가 마을의 '술취한 성인의 축제' 나귀경주에 참가해 늠름하게 우승하는 모습이나 마지막 심판의 광장에서 모든 것은 유대인의 마법과 책략으로 여자를 농간한 것이니 마리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장면은 누가 주인공이 되었건 영화라면 반드시 하이라이트 장면이 될 것으로 보였다.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워낙 구조가 탄탄해 매 순간 매 단락 극적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서사의 흐름이 약간의 피곤을 유발하는 경향은 있으나 신기하게도 캐릭터 모두에게 몰입하게 하는 이야기 추진력도 무시할 수 없어 적지 않은 조연급의 인물들이 또 매 신(scene)에서 주인공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연출을 꼽으라면 아마 선술집에서 한판 벌어지던 보보의 시칠리아 인형극과 박진감 넘치던 나귀경주 장면이 아닐까. 이 두 장면은 시나리오 작가출신 답게 빼어난 영상미와 현란한 카메라 촬영기법을 적절히 취사하여 글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에선 어느 허리우드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우리가 영화를 많이 본 것인지 작가가 상상력이 뛰어 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사의 호흡과 주인공의 액션등은 분명 극본의 형식을 많이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찬에 참석한 고위직 손님들 앞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인형극은 귀족의 약점과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꼬집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박첨지놀이와 같은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인형극놀이를 연상케 했다. 특히 다비도가 경주의 출발선에서 논노의 늙은 나귀를 타고 할아버지의 자존심을 알아채는 장면, 경주 당사자가 아닌 낯선 이로서 루이지의 시선으로 군중과 경주자들을 바라보는 광경, 축제속에서 한데 어울려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각자의 상처들을 씻어 내리는 모습,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인 다비도와 베니토의 시선으로 숨막히는 경주를 중계하는 부분은 이 작품에서 가장 화려한 성찬을 선사한 절정의 코스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중요한 장면이니 만큼 겉으로 드러나는 대사외에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입체적으로 크로스 시키는 능력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해도 좋았다.

또 하나 소설속에서 화자는 마치 변사라도 되는 듯 이탈리아 극작가 포초 멘초냐의 <극작법에 관한 신뢰할 만한 논문>을 예로 들며 논문에서 밝힌 원칙을 자신의 소설작법을 완성해 나가는 원칙으로 사용하여 그것을 재차 설명하는 아주 영리한 기법을 시도하고 있는데 나는 이 작법을 가시적으로 활용하는 작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의 삶에 장애와 고통을 부여하라'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에서부터 '급류와 소용돌이', '낯선 이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기',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가야한다'등의 작법을 언급하며 자신의 의도에 논리를 부여하며 동의를 구하는 센스가 미리 연출된 계산임을 알면서도 계속 설득당하고 싶은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신선했다. 형식을 서사와 일치시킨 작가의 재치와 기지에 박수를 보낸다.

올리브처럼 짭쪼롭하고 토마토처럼 물컹한 독서였다. 덕분에 책을 덮으며 느닷없이 철지난 토마토가 먹고 싶어졌다. 사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토마토에 설탕을 쳐주시는 바람에 진짜 토마토의 맛을 모르고 자랐고 학생때는 햄버거에 뿌려진 토마토 케첩이 내가 아는 토마토의 전부였고 이제 건강에 좋다고 토마토를 갈아 먹기 시작한 것도 십년 정도 될까. 토마토는 고추처럼 맵지도 않고 딸기처럼 달지도 않다. 그런 만큼 메인요리에 스며들어 어디든지 잘 어울리고 다른 음식의 풍미도 자극하는 과일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사교적이고 관능적인 과일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주인공 다비도와 마리는 토마토가 가득 버무려진 가마솥에서 사랑을 나누고 그것으로 자신들만의 사랑스런 소스를 만들지 않았던가. 이보다 더 로맨틱하고 에로틱한 소스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글쓰는 작업만큼이나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을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생이란 달콤한 토마토에 절인 올리브처럼 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라 말한 것을 보면 단맛도 신맛도 쓴맛도 골고루 실패해보고 또 거짓말처럼 성공도 해보았으리라. 그러고 보니 울다가 웃은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그날 주방장이 도망간 날 우린 가게문을 닫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내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도망을 갔다는 괘씸함보다 레시피를 하나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 원망스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지만 왜 그런지 그날 따라 손님이 끊이질 않아(토요일이었다)실은 울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열시쯤 되었을까. 주말인데도 식사를 못할 사정이 있었던지 초로의 신사 한분이 스파게티를 한 그릇 주문했고 나는 야박하게 거절할 수 없어 다 정리하고 들여놓은 소스통을 다시 꺼내고 면을 그제서야 삶아 거의 엉망으로 스파게티를 내놓았다. 너무 급한 나머지 불조절에 실패해 위에 기름이 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신사는 너무나 맛있다며 자기가 먹은 스파게티중 가장 최고였다고 거짓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배를 채웠으니 또 한끼 때웠다고 늦게 와서 식사를 주문하는 실례를 범해서 자기가 미안하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집에가서 맥주와 먹게 피자를 한판 구워달라고 추가주문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자신이 부인과 이혼한 날이라 집에가도 혼자라는 것이다. 또 마음이 약해진 나는 급히 주방에 들어가 피자도우를 꺼냈는데 거짓말처럼 주방장이 피자를 만들던 모습이 하나씩 기억이 나면서 나도 모르게 피자토핑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파게티 신사의 처량한 말한마디에 콧날이 시큰해졌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토핑인 방울 토마토를 올려놓고 보니 꼭 도망간 주방장 얼굴로 보이는 것이다. 너무 웃겼다.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키득키득 소리가 새어나왔다. 웃음으로 피자를 겨우 포장하고 손님은 퇴장했다. 그런데 그릇을 치우다가 바깥에 손님이 서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전화기 폴더를 열었다가 다시 닫는 순간이었다. 손님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나는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손님이 집에 가면 너무 외롭지 싶어 눈물이 났다. 그 순간 왜 내 설움이 같이 터진 것일까... 

웃어 넘겨야 할 슬픔이라고 했다. 울 일을 감수하는 것이 인생이라 했다. 그러다 보면 웃을 일도 생기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실컷 울고 나면 그게 그렇게 웃길 수도 있는 것이지. 말 못해서 울고 말하다가 웃고 남이 우니까 울고 남이 웃으니 웃는다. 두려워서도 울고 두렵지 말라고도 웃는다. 어쩌면 인간이 태어나 가장 잘하는 일은 날 때부터 울었던 일과 잘때도 웃었던 일일 지 모른다. 어짜피 울을 거 어짜피 웃을 거 사는 동안 실컷 울고 실컷 웃어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모진 세상 한 번도 울지 않고. 어떻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좋은 세상 한 번도 웃지 않고. 울지 않으면 웃지 않으면 우린 살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웃으니 나도 따라 웃어 볼테다. 내가 운다면 당신도 날 안아달라. 혹시 내가 울 때 당신 웃거나 내가 웃을 때 당신 울더라도 역시 웃거나 울어 넘겨 보겠다. 그렇게 더 할 수 없이 웃고 여한이 없을 만큼 울었을 때 우리 그때도 또 한번 웃자. 누군가는 그런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 있다고 믿자. 달콤해도 쌉싸름한 당신과 나, 그 맛은 우리 다같은 인간의 맛, 공평한 비극의 희극맛, 산다면 꼭 보아야 할 우리 자신맛, 소설보다 맛있는 리얼 성찬맛, 그것은 인생, 인생이라는 최고의 만찬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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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12-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많이 읽고 싶었는데, 보관함에만 넣어두고 못 읽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님 리뷰 읽으니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스파게티를 좋아해 이탈리아를 좋아하는데...
그리고 기억 하겠습니다. 산지오베제!ㅋㅋ
 
A
하성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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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My Accident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일은 '오대양 사건' 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알고 싶다'였었다. 90년대 초반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새로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그 프로그램은 SBS 개국 직후 야심차게 방영된 인기 프로였다. 그런데 그날 밤은 우연히도 부모님이 안 계신 날이었고 TV에선 신도들이 무더기 변사체로 발견된 현장을 뿌옇게 처리한 사진을 보여주며 '집단자살' 혹은 '광신도', '사이비 교주'같은 무시무시한 분석들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그 한 장의 사진을 아무런 자료 도움없이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해 낼 수 있는데 희미한 영상처리 뒤에는 쓰레기가 널려있는 땅바닥에 사람들의 무리로 보이는 사체 덩어리들이 80년대 컬러사진의 색조를 연상시키는 붉은 톤을 띠며 가지런히 배치된 장면이었다. 그 충격적인 이미지의 잔상효과는 결론으로서의 진실이나 사연을 뛰어넘는 공포이상의 효력이 있었다. 당시 대학교 졸업반으로서 오로지 취직만을 궁리하고 있던 나에게 그날의 사진 한 장은 어떤 급브레이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 이 세 가지가 결국 한가지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본 그날, 돌이켜보니 그때 나는 갓 스물이 넘은 청춘이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오대양 사건'은 실제 1987년에 일어났고 마침 그때 작가의 나이도 내가 그 사건을 처음 접하게 된 나이와 거의 같았다. 나는 87년 당시엔 여고생이었고 기사로선 어떤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가 만약 87년에 '오대양 사건'을 접했더라면 분명 청춘을 고민하는데 있어 작가라는 꿈을 내딛는데 있어 크나큰 반향을 불러왔을 지 모르겠다. 2010년 이렇게 우리들에게 그때의 질문을 모티브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는 것은 당시 느꼈던 의문들이 단순한 사건의 진위여부가 중요한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스무살 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고민해왔던 나름의 의문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의문들이 이번 작품을 통해 작가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상위지침의 역할을 했다면 아마도 작가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로서 사회적 관심사(숨겨진 진실)가 개인적 관심사(내재된 욕망)와 하나가 되어 작품으로 빛을 발한다면 문학적 평가와는 별도로 얼마나 자기성취감이 크겠는가. 작품의 제목이 의문의 부호를 암시하듯 A로 드러났지만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던 소재와 자신이 천착해온 주제를 잘 결합시켰으니 작가 스스로 자신의 결과치에 A학점을 매기고 싶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독자인 우리에겐 약간의 서운함으로 남는 아이러니가 아니었을까.

하성란 작가의 글은 각 문장마다의 완성도가 높다. 한 문장안에서 높은 밀도로 선택되는 텍스트의 실세가 크다보니 읽어가는 독자로선 즐거운 작업은 아닐 수 있다. 거기다가 이번 작품은 특히 작가가 이루려는 소설적 성취와 독자가 기대하는 독서적 성취간의 간극이 크게 느껴진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독자가 듣고 싶은 것이 살짝 일치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A라는 작품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아쉽게 느껴지는 독자로서의 이기심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는 서사에 집중하기 보다는 작가가 고민해온 것, 그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온 마음으로 수신하려 애를 썼다. 언뜻 보기엔 쉽게(직선적으로) 풀어도 될 이야기였을 텐데 방법적인 면에서(나선형으로) 작가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 역시 하나의 문제를 어렵게 풀어가는 성향이 다분한 입장으로서 '오대양 사건'에 대한 나름 기억의 트라우마가 있는 터라 책을 덮고는 다시 스무살 된 심정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A를 받을 만한 답인지 집요하게 그 의문을 되짚어 해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못 잘 따라왔다는 보람이 차오른다.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 묻고(Ask) 스스로 답한(Answer) A학점 리포트이다.(그러니까 우리도 스스로 묻고 답해보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독자들의 평가같은 건 두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쩌면 그녀 스스로 A 점수를 준 요소들을 내 답으로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이십년이 다 되어 가는 그 시절 스쳐 지나간 의문을 그녀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지 않는가. 그 떨리는 마음이 쉽지는 않았다.


들은 것이 본 것으로

그렇다. 그녀가 묻고 답한 것은 신기하게도 스무살 시절의 충격과 사십이 넘은 끄덕임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문단에 데뷔하기 전인 87년 당시 지워지지 않을 의문으로 남은 기억을 등단 후 지금까지 되새김질하여 완성한 중견작가로서의 답안지라 할 수도 있다. 작가로서 당연히 고통스러웠을 이 행보는 작품속의 화자의 행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화자는 스물 셋에 사건에 대한 후유증으로 장님이 되며 마흔 여섯에 시력을 회복하게 되는데 이는 죽음과도 같았던 시간들이 다시 재생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죽음에 대한 의문이 삶에 대한 해답으로 결론지어지는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소설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는 화자가 식물과 동물이 썩어가는 냄새를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해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는 장면으로 끝이 났음을 알 수 있다. 화자에게 있어 냄새는 '죽음'에 대한 기억이며 코스모스는 '삶'에 대한 희망이 아니겠는가. 죽음을 맡고 들은 것에서 삶을 들이 마시고 본 것, 이 결정적이고도 감각적인 대립의 장치는 사실상 이 소설의 모든 것을 암시한다고 느껴졌다. 작가는 자신이 스무살 시절 이끌렸던 막연한 절망의 기운을 마흔이 넘어 희망의 온기로 부활시키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서도 그 장면은 어떤 논리나 증거로도 이해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였기에 빛바랜 사진이 통과의례적 추억으로 승격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그 시절 나와 비슷한 기억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문학은 이렇게 같은 시기 같은 사건 같은 충격의 공유만으로도 지극히 사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공감하는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다.

책에서는 끝까지 주인공인 화자의 이름이 불리워 지지 않는 채로 수많은 관계속에서만 화자인 그녀를 인식해야하는 고통이 따른다. '거짓말쟁이', 혹은 '할멈'등으로 불릴뿐 그녀의 이름을 호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화자는 사건당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던 죽은 엄마의 딸이며 신신양회 회장 '어머니'가 살려준 유일한 청소년이며 비교적 분명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는 언니들의 동생이지만 어쩐지 시종일관 실제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 유령같은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는 모든 상황을 전지적 작가입장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느끼게 되는 화자의 예민한 감각을 한층 높여주는 치밀한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화자의 이름이 무엇이었건 화자가 누구이었건 그녀는 사건현장에서는 물론 어린시절 내내 존재감없는 존재이었기에 이야기속에서도 줄곧 상황속에 있는 것인지 바깥에 있는 것인지 그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의 존재'로 여겨진다. 그로써 화자가 감지한 고향과도 같은 공장지대의 냄새, 식당에서 흘러나오던 음식냄새, 이모들간의 대화와 웃음소리, 짜진 시금치 된장국과 피자두의 신맛, 살인범으로 느껴진 축축한 손의 감촉까지 모든 오감을 자극하는 감각의 정서들은 '정밀묘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의 세밀하고도 완성도 높은 묘사에 의해 화자가 전혀 장님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서사를 제공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화자는 장님이었지만 작가의 투철하고 예리한 시선이 투사된 장님아닌 장님이었기에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화자의 시점이 슬며시 작가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장님이라는 장애를 십분 활용한 작가의 노련한 시점혼용 작법이 독자로 하여금 더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렇듯 죽음을 삶으로 감지하기 까지 어쩌면 작가의 전 생애, 온 감각이 쓰여진 것은 아닐까. 우리들 역시도 코스모스를 살아있는 아름다움으로 인식하기 까지 그토록 고약한 악취와 온갖 쓴 맛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화자가 스물 셋에 눈을 잃어 마흔 여섯에 다시 눈을 찾기까지 딱 살아온 시간만큼의 세월이 걸린 이 깨달음의 기간이 곧 작가가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 셋에 화자의 엄마는 화자를 낳았고 화자는 스물 셋에 이야기를 낳았고 작가는 꼭 스물 세 해가 지나서야 의문의 여정이 끝난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이어지는 여정은 끊임없이 나를 자극하고 잠잠하던 저온의 감각을 두드렸다. 궁금하긴 했었지만 그만 놓쳐버린 그래서 내가 의문을 가졌던 것 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그 날 그 곳에 남겨진 질문과 나는 우연히도 재회한 것이다. 


죽음의 비밀이 삶의 진실로

화자는 극중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하고 자신 스스로도 이야기를 꾸며내는 스토리텔러로서 그 입장과 역할, 자신의 각오를 우리에게 반복하여 전달한다. 마치 소설가가 자신은 왜 작가가 되었으며 무슨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쓰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 작가는 화자가 뇌종양의 후유증인 코르사코프 증후군 증상의 하나로 '작화作話'라는 병적인 징후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스토리텔러로서의 화자의 타고난 배경을 배수진으로 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화자의 머릿속 종양은 시신경을 눌러 시력을 잃게 하였지만 그 압박으로 기억은 얼마든지 확대, 재구성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언뜻 보기에 치명적 장애일 수 있는 화자의 두 가지 약점은 그녀가 엄마와 이모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내고 자신과 언니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독창적인 감각으로 더 멋진 이야기를 꾸며 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복선이기도 하지만 그러하기에 이야기가 가지는 허구적 낭만 혹은 비약을 미리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어적 장치도 되는 것이다. 이는 소설가라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타고난 운명에 온몸으로 대처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결국 운명이기도 한 것과 같이 화자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형벌과도 같은 것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화자라는 분신을 이야기속에 출전시킨 것이다.

화자는 그 운명에 슬퍼하지 않으며 엄마와 이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화자의 이야기를 듣고 내린 작가의 판단은 아마도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감지되던 특별한 공동체 의식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공동체 의식은 원래 사건의 기사대로 신흥여성 교주가 여성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력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목소리와 사랑, 출산과 육아를 보호해주고 아버지 없이도 활기를 잃지 않는 평화지향적 태도이었음을 소설에서 천명한다. 그들의 죽음이 사건과 허구 모두에서 자살적 타살이었음에는 변함없지만 죽기이전의 그들의 삶은 여성공동체라는 낭만적 삶의 방식을 추구함으로써 실은 그들이 죽은 이유(사건의 진실)보다는 그들이 살은 이유(삶의 진실)를 더 진심으로 알아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이유는 얼마든지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 어쩌면 그들의 죽음에서 비밀을 찾기 보다는 그들의 삶 속에서 진실을 찾아 우리가 살아가야 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들의 죽음도 그녀의 작업도 모두 헛된 일은 아니라는 것. 이렇듯 작가는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허구로 복원해 내어 화자라는 제 3자를 통해 우리에게 나지막히 알려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문학안에서 겨우 이정도 밖에 진실을 발견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아무도 생각치 못했을 그 어둠속에서 찬찬히 진실을 찾아가는 그 과정만큼은 박수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진실도 좌표가 있다면 나는 수직적(x축) 진실과 수평적(y축) 진실을 그래프로 그려보고 싶다. 화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대체로 여성의 비극이 (수직적으로)대물림되는 사회현상을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화자의 엄마인 서정화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을 강간하려던 이웃남자를 이미 정당방위한 상태에서 보다 잔인하게 확인사살한 후 딸을 도주시켜 십오년의 형집행을 받고 나온 살인범이었다. 그녀는 시골 시장골목에서 촌부들 틈에 끼어 피자두를 파는 것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처지였으며 그녀의 딸인 서정화는 열여섯에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온 후 최영주의 아버지(건설부 고위관료)에게 여성을 잃고 딸 서정인을 임신하게 된다. 화자의 엄마 서정화는 서정인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유산으로 전해주고 서정인은 또다시 아버지 김준 없이 준하를 낳아 기르게 된다. 빈곤과 비천이 대물림 되는 것은 화자의 엄마뿐이 아니라 기태영의 엄마인 기영이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시달리던 어머니 밑에서 기태영의 엄마는 아버지의 학대로 괴롭힘을 당하다 견디다 못해 무작정 도주한다. 정신과 육체가 피폐된 이들을 구원의 손길로 받아 들인 것은 수직적 대물림을 단절시킬 수 있었던 신신양회의 어머니였기에 이들에게 '어머니'는 신적인 절대자로 새겨졌을 것이다.

신신양회의 마스코트격인 중창단이라 불린 그녀들은 이처럼 자신들이 상처입은 부계사회가 가지는 남성적 폭력과 성의 억제, 자유억압, 권위주의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중심으로 건강한 사랑, 평화스러운 생활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 사회공동체가 바로 '여인왕국'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극중에서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폭력적이고 불안하거나 사회비리에 무감하고 이기적이며 소심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특이하게 여성적 느낌의 이름을 가진 '최영주'라는 인물만 정의나 진실을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 정도로 묘사될 뿐 남성은 저벅저벅 군홧발소리, 흔들리는 눈빛, 중년의 목소리, 축축한 손등의 실체없는 감각으로 이들 공동체와 대치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 이 수평적 공동체의 종말을 예고하는 단서는 아마도 서정인이 낳은 준하와 김준희가 낳은 재원이라는 아들(수직적 대물림의 씨앗)들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그리고 보다 확실한 건 서정인의 이복형제인 최영주가 기자된 사회적 시선을 잃지 않고 그녀들을 불행으로 몰고 간 과거세력에 일침을 가한 정의로운 행위와 편견으로부터 그녀들에 조력한 양심, 즉 수평적 감각에 있지 않았을까. 최영주의 개입은 그동안 단순히 쌀가마니나 들어주는 정도의 인력으로서의 남성만이 그들 조직내에 필요했던 여성공동체에 힘이나 성적인 역할과는 상관없이 이성적인 멘토로서 보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향한 열린 의지를 느끼게 하는데 기여했다. 이로써 여자들이 대를 물리는 이야기를 여성이 작화하는 이야기는 그 이전의 (수평적)대물림이 끊어지면서 새로운(수평수직이 조화된) 대물림을 예고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삶의 방식이 사람의 진실을 이길 수 있을까.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은 실은 남성의 조력으로 더욱 아름다워 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아우라가 결코 여성우월적인 서사로 비난 받지는 않아야 할 세심함이다. 화자는 어머니가 자신을 살려준 것은 살아남아 부디 자신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메시지로도 이해한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삶의 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 화자가 지어내어야 하는 이야기의 향방은 작가가 끌어나가야 할 화자의 인생의 방향과 일치했을 것이기에 어둠속 한줄기 빛, 그것은 결국 죽음의 진실이 아닌 삶의 진실이었던 것이리라. 그것은 죽음의 기억을 단순히 증언하고 전달하는 스토리텔러에서 발전해 자신의 삶과 진심을 이야기하는 작가로서의 길이기도 할 것이리. 그것은 이야기꾼으로서의 '거짓말 쟁이'나 '늙은 할멈'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찾는 일이기도 했으리.


연합에서 독립으로

한편 소설속 현재의 오늘에 돌아와 신신양회 어머니들의 죽음 이후 그 아이들이 재회해 뭉쳐서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쩐지 이미 헤어짐이 예견된 룸메이트와의 동거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어머니들이 저항의 흔적없이 교주인 '어머니'와 같이 죽음을 받아 들였다는 사실은 각기 자신들의 삶에서 온전히 독립하지 못한 채로 종속적인 삶을 마감하였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이들이 종교적 이유에서 죽음을 택했건 그녀들이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의 몰락에 절망적인 심정으로 죽음에 동참하였건 모두 숙연하게 '따라 죽었'다는 것에 생각이 기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다고 들었다. 임금이나 주인 혹은 남편을 따라 죽는 제도적 풍습은 고대시대부터 군주라는 '남성'을 따라 바쳐지는 인간예물과도 다름없었다. 어머니들이 일상에서는 남성에 억압당하지 않는 태도를 지향했지만 죽음을 택하는 방식에서는 가장 남성중심의 극단적인 가부장제 풍습을 택함으로써 결국 어머니들이 의지한 것은 여성을 뛰어넘어 지배하는 남성성을 가진 군주로서의 '어머니'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 아닐까. 이는 신신양회의 어머니가 최초 설립한 회사가 건설의 밑거름이 되는 시멘트를 생산하는 본거지 였다는 사실에서도 공장에 우뚝선 사일로가 그들 지역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도 '어머니'는 다분히 권위주의적 수직체계와 남성적 폭력양식을 두루 내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이중적인 태도는 그녀가 신신양회를 하나로 응집시키기 위해 사용한 종교적 가르침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애초부터 생물학적인 '아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르치고 외우게 하여 남성우월주의적인 가치관에 의지하도록 한 것이다. 작은 키에 홍수로 폐허가 된 마을에 아이하나를 데리고 시발택시를 타고 도착한 그녀, '어머니'는 여성성을 잃어버린 남성으로서 존재하면서 모성의 권리를 추구한 중성적 존재로 여겨진다. 혹시 '어머니'가 아무것도 안보이기에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한 화자를 살려 준 의미는 네 안의 여성성을 버리지 말고 한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라는 충고가 아니었을까.

이렇듯 아이들은 어머니들의 감추어진 종속적 마인드를 유전자로 태어났기에 홀로 떨어져서는 삶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들의 연합공동체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해보지 못한 이들이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시행착오로도 느껴졌다. 화자와 서정인, 안은영, 김준희가 중심이 되어 구축한 공동체에선 어머니들과의 추억을 공유하면서 어머니들의 사랑, 출산, 육아방식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여성공동체를 지향했지만 어머니들이 신신양회의 정신적 교주격이었던 '어머니'를 중심으로 현실에 만족하면서 생활했다면 아이들은 카리스마있는 절대자가 따로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어머니들이 교단의 규율과 일정한 노동및 역할에 얽매여 있었던 것과는 진일보된 방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집단에서 허용된 자유에는 늘 예측못한 상황이 생기듯 서정인과 기태영이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교제를 하며 은밀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기도 했고 준희처럼 아이아빠와 가정을 이루려는 이탈자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무엇보다 창의적이었던 사건은 바로 화자의 아이디어로 추진된 발신인 A의 '편지보내기' 프로젝트 였다. 이들은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이름난 젊은 남성에게 메시지로서만 자신들을 알리며 의문의 부호로 프로포즈한다. 이들이 보낸 메시지는 '나와 사랑할 수 있느냐'는 수동적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서 발전해 '나와 사랑을 만들어 볼래'하는 능동적 추진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선택은 우리가 했으니 내키면 손을 잡으라는 메시지는 주체적이면서 다분히 남성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연합공동체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던 종속적 태도가 자신들의 삶은 자신들이 결정한다는 개인적 욕구가 스며든 행위로 보여지며 세상으로부터 편견과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촉발된 대안적인 탈출구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화자의 역할이기도 했으며 그 이야기를 전개시켜야 할 언니들의 몫이기도 했다. 결국 작가도 소설이라는 편지를 자신의 부호로 독자들에게 보내는 것이라 보았을 때 화자의 편지는 지극히 문학적인 해결방식으로 보였다.

이 연합공동체는 기태영과 최영주라는 다소 뜻밖의 인물로 인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비밀이 벗겨지면서 차츰 균열이 생긴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화자와 같이 기거하는 언니들과 기태영, 최영주의 출생의 사연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가 어머니들의 죽음에 다가간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역동성을 지닌 채 자꾸 미래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아이들 모두는 어머니들처럼 죽음을 택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고 모두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이유만 있었다. 이들이 같이 있으면서 서로 느낀 것은 같이 죽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더라도 혼자 잘 사는 것이었다. 연합(Association)의 붕괴가 곧 모두의 절망이 아니라 혼자(Alone)서 일어서야 할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하는 순간으로 인식하게 되기까지 이들은 서로의 모순과 각자의 욕심을 깨닫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 했던 것이다. 그 추억의 시간들은 최영주가 입수한 사진속의 어머니들이 곧 자신들이 밟아야 할 전철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의 필연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About All's A

그런데 내가 주목한 것은 A라는 의문의 부호로 편지를 보낸 사람이 화자를 비롯한 여성들 말고도 또 한사람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화자가 속한 연합공동체와 최영주가 발신인으로서, 연예인 김준과 이성복이 수신인으로서 A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A를 오해했건 이해했건 이들 젊은이 모두가 A라는 의문의 부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각자 서로 다른 의문이 A로 대표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인 것은 아닐까. 이는 과거 똑같은 분장으로 서로를 구분짓기 어려웠던 공동체속에서의 조직원이 아니라 조직이 붕괴된 후에도 홀로 남겨진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개성을 갖게된 인격체를 암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여기서 고교시절부터 연예인 김준과 친구였으며 서정인의 이복형제이기도 한 최영주의 A는 화자가 창안안 편지 A에 대한 일종의 회신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 대상과 의미는 보다 사회적이고 교훈적이라는 점에서 퍽이나 의미심장했던 장치였다. 어느정도 비밀을 간파한 최영주가 관련자들에게 보낸 A의 편지는 당신은 적어도 이 A를 알고 있는 사람일것이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최영주의 아버지는 건설부 고위관료이면서 화자의 언니 서정인의 친부이기도 했다. 신신양회 어머니가 지칭한 '그분'에 해당되는 윗분들 중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최영주는 어머니들과 연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분들에게 의문의 A를 던짐으로써 당신이 (비밀에 대한)답신을 하지 않아도 우리(사회)는 알고 있음을 정중히 알려준 것이다. 마치 서로가 알고는 있지만 공개해선 안될 A급 비밀 문서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때 알았다. 작가는 화자가 자신들 연합체에 건강한 남성이 필요하여 그것을 제안하기 위해 편지이름이 A가 된 것이 아니고 실은 그때 그 사건의 비밀을 알고 있을 그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A라는 발신인이 필요했다는 것을.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당신들의 A는 무엇인지’ 묻고 있는 작가의 질문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것은 작품속 인물들의 A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오대양 사건’은 정국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되며 시원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의문만 남겨졌지만 상당부분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았다는 정황적 증거들이 잔여물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다니며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군가는 입을 닫았다는 사실만은 아무도 모르지 않는 다는 것. 그렇게 본다면 최영주의 A는 권력의 그분을 상징하는 Authority 가 아니었을까. 최영주는 서정인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인후가 약해 편도선염을 달고 사는 도시인으로 기자이면서도 사회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심한 지식인을 표상한다. 최영주가 기자된 양심으로 선택한 최선은 그분은 누구인지 혹시 당신은 아닌지에 대한 양심의 부호로서 A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그림자 같은 기태영에게 A는 신신양회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은 놀라운 추진력에서 알 수 있듯이 야망이나 야심을 상징하는 Ambition으로서의 A였을 것이다. 아버지를 찾지 않았던 다른 여자아이들에 비해 유독 아버지와의 만남에 집착한 어린시절 행보도 그의 A를 설명해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기태영은 자신의 A를 반사회적, 반도덕적, 반환경적으로 추구한 덕에 신신양회의 두 번째 몰락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기업인이 지양해야할 자세이겠지만 그들이 주홍글씨 처럼 지니고 가는 비밀의 낙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배우겸 가수이면서 최영주와 고교동창생이기도 했던 김준은 그의 불안을 감지한 서정인과 안은영의 덫에 걸려 그녀들의 타겟이 되고도 훗날 그 결과로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언제 추락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전형적인 자기중심적 인물이었기에 그의 가슴에 자리잡은 불안Anxiety은 김준의 트레이드 마크로서의 A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때 인기가수 김준의 코디네이터이기도 했던 의상학과 출신의 안은영은 지인들에게 성기가 없는 허수아비나 인형으로 인식되며 여성성을 감지하기 힘든 중성적 존재로 표현된다. 김준이 허물없이 인간적인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던 그녀. 타자의 단점을 외적, 내적으로 보완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실현했던 그녀에게 A는 섹스와는 무관한 Asexsual이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남성, 여성과 상관없이 외적인 아름다움을 공정하게 추구한 정직한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약한 인후와 후천적으로 형성된 양미간의 세로주름이 인상깊었던 서정인에게 A는 여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매혹의 Attraction이 아니었을까. 화자의 엄마이기도 한 서정화의 눈에 띄는 미모와 외향적이고 낙천적인 성격, 아버지의 출세욕을 물려받아 어딜가도 주목받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대 최고의 가수 김준을 노란색 컨버터블로 유혹해 준하를 낳기까지한 그녀의 도전정신이 왜 그런지 연합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와 조금은 어긋나보였던 것도 그녀만의 치명적 매력때문이 아니었을지.

 
어린 시절부터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김준희는 아기아빠의 헌신과 구애를 뿌리치지 못하고 공동체를 벗어나 단란한 가정을 선택하게 된다. 그녀의 내재된 욕망한켠엔 삶의 동반자와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소원으로 자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진다. 현모양처는 가족구성원에 대한 희생을 밑바탕으로 하기에 그 대상이 곁에 실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준희의 A는 동행으로서의 Accompany였던 것일까.

 
마지막, 그날의 생존자 화자에게 A는 무엇이었을까.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화자가 그리워한 것은 대추나무가 있던 집에서의 삶이었다. 그녀는 혹시 세숫대야 물속에서 흔들리는 대추나무 이파리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자연의 미세함에 그리움을 느끼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답다. 현장에서 살아 남았지만 오랫동안 죽음의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화자가 다시 찾게 된 그리움은 들판 가득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살아있음’이었다. 코스모스의 생명성을 온몸으로 느낀 화자에게 A는 ’살아남음’이 ’살아있음’ 이 된 Alive가 아니었을까.

A는 이렇게 주인공을 부르는 이름이 되어 자신들의 의문에 스스로 답을 했다. 권위Authority, 야망Ambition, 불안Anxiety, 무성Asexsual, 매력Attraction, 동행Accompany, 생존Alive ...이 모든 A는 실은 우리의 A이기도 했다. A는 이 세상의 사람들 만큼이나 많았다. 작가는 어쩌면 그것을 노린 것이 아닐까. A라는 부호를 소쉬르의 기호체계로 보자면 알파벳 A라는 기표 하나에 얼마나 많은 기의가 가능한가. 어떤 사람은 보자마자 혈액형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고, 어느 걸그룹의 노래제목을 연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독자들 뜻대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의미작용을 원했다는 생각이...이제서야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부호로서 A는? 당장 무엇하나 내세울 게 없는 나...분명 이후가 중요할 것이다. After, After....


After A

이야기가 끝이 났다. 중세 유럽의 고성 내부 나선형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갔더랬다. 작가는 외롭다(Alone)고 말했고 나는 돌아온 가슴속에 무언가가 일어났다.(Arise)  삶과 죽음, 여성과 남성, 신념과 배신, 집단과 개인, 조직과 독립, 사건과 진실, 비밀과 폭로...내 안에서 서로 상반되는 가치들이 저도 모르게 여러 개의 굴뚝을 세워가며 서로 키재기 경쟁을 하고 있다. 그녀들의 어머니들은 공예공장의 관광용품 인형의 눈썹을 붙이며 인공(Artificial)의 굴뚝을 세우고 있었고 어머니의 아이들은 그 굴뚝에 감람나무 이파리를 문 비둘기와 고글을 쓴 파란 꼬마펭귄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그것들도 진짜(Authentic) 가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비가오면 굴뚝이 스러지고 난 들판에 자연의 정화가 시작되듯 이제 우리네 가슴에 맺혀있던 죽음의 정화가 시작될 시간이다. 대립의 분진과 이기의 악취와 위선의 오수가 사라진 그곳에 들판 가득 코스모스가 하늘 거릴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것보다 고마운것. 화자가 생존한 이유가 어머니가 살려준 이유이듯 화자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이후에도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문득 화자가 지니고 다니던 흰 지팡이가 떠오른다. 어떤 삶을 살아도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할 제 3의 눈으로서 작가는 사회적 사건을 복원하였고 화자는 자신의 사건을 복원하였다. 이제 내 사건을 기다릴 차례다. 눈뜨고도 장님이 되는 세상에서 방향성을 잃지 않고 진실만을 짚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몰라도 절대 진정성을 잃지 않는 것, 진정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진짜배기 굴뚝하나를 영원히 마음에 박아 넣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내 가슴에 진실의 지팡이 하나 오롯하게 세워두고 싶다. 이 작품은 진실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고 진실을 느끼고 보는 눈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것은 혹시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할지라도 영원히 잃지 말아야 할 우리 가슴속 소중한 눈인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엔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지팡이에 조금은 덜렁이는 오늘을 걸어본다. 설령 다시는 짚고 싶지 않을 땅이라도 두렵지 않을 나만의 눈을 만져본다. 어제의 흔들림이 못내 기꺼웁다. 내일도 살아있다 하면 진실로 내딛을 수 있기를. 그 걸음 분명 고마웁기를. 그 마음 오래오래 변치 않기를.


<덧붙임>

알파벳 A의 타이포그래피를 Application 하였다.
출처가 분명치 않다.
폰트에 네이밍 해준 값으로 치고 용서를 바란다.
리뷰 쓰면서 글자와 그림짝짓기가 제일 즐거웠다.
Artist와 Author는 Audience의 Apology를 원치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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