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버리기 연습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집나간 당신을 찾습니다

어떤 쪽인가 하면 나는 당연 생각이 넘쳐나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쪽이었다.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생각이 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추 삼십년 전쯤으로 올라간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 내게 어른들은 대체로 '성숙한 아이'라 칭하곤 했다. 실제로 신체발육 또한 초등학교에 거의 완성된 거나 다름없는 키였는데 형제가 없어 주로 어른들 틈에서 자란 나는 자연스레 어렸을 적부터 어른들과 인생의 대화(?)를 터 온 구력도 상당하다. 그 후 전공이나 사회생활에서도 주로 생각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임무를 오래 하다보니 나는 그야말로 평생 생각에 쌓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나는 심각한 '생각병' 환자인 것을 자각하는 쪽이었달까. 적어도 미처 생각을 못하였네, 개념이 없네 등의 '생각없다'는 쪽의 말은 내 인생 최대의 욕으로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나를 위한 책이겠거니 하고 이 책을 읽어야지 다짐만 하고 있다 그만 쌓아놓고 어영부영 놓치게 된 사연일랑은 이제와 돌이켜보니 어이없게도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내가 친 덫에 잡힌 꼴이었다. 작년 말에 나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반백이 다 될 정도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고 그토록 무거웠던 짐이었던 만큼 당시 상황에서 '생각 버리기'는 말처럼 쉬울 것 같지가 않아 다음으로 무기한 연기, 지레 포기했던 터 였다. 뭔가 생각을 더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여, 이상하게도 내게 이 책은 어떤 결심이 필요했고 마치 그동안 다락방 한 켠에 쌓아둔 오래된 책들을 죄다 짊어지고 내다 버리는 심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어내는 일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어찌 보면 안쓰러웠다고까지 느껴진다. 생각을 버린다는 건 결국 그토록 생각을 쌓아온 나를 버리는 것이었고 그전에 이미 그리된 나를 깨닫고 인정해야 하는 일이기에 나는 그 고통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버리기 아깝고, 애석한 나를 끝까지 잡고도 싶었던 것일까. 여지껏 생각해온 시간만을 생각하더라도 솔직히, 그렇다. 그 놈의 습관이자 그 간의 패턴이자 그 사이 내 삶이 되어버린 생각이라는 '불치병'이 말이다.

이 책이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바로 그 불치병에 대한 처방전이라는 기대에 앞서 낱낱이도 내 병리현상을 나열해 주었다는 데 있을 듯하다. 참 정확하고도 간결했고 여타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을 만큼 적나라했다. 평소에 나는 왜 이럴까 하며 막연하게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속시원하게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차근차근 따져가며 병의 원인을 설명해주고 약을 지어 주는 방식은 쉽고도 단순한 형식이었지만, 우린 알고 있다. 쉽게 설명하고 환자에게 편하게 이해시킨 후 신뢰로 약을 복용하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평소 불교의 무념무상(無念無想)이 생각道의 해탈의 경지라 여겨온 나는 늘 이런 종류의 책에 솔깃한 처지였지만 막상 기대만큼 알맹이가 탄탄한 경우는 별로 기억나지 않았다. 이 책 역시 베스트 셀러라고 해도 뜬구름 잡는 처방이 주가되는 건 아닐까 반신반의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난 지금 한결 머릿속이 맑아졌다는 느낌은 뭐랄까, 어디로 튈지 몰라 허공을 떠돌던 잡다한 생각들이 가지런히 서랍정리라도 된 느낌이랄까. 나는 책을 덮고 난 최초의 느낌만은 잃어버리지 않고 가급적 그 기억을 잘 표현해 내고 싶은 쪽인데 가장 비슷한 심정으로 맹자의 '구방심'(求放心, 흩어져 달아나는 마음을 잡는 일)공부라도 호되게 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끝도 없이 떠오르는 상념과 불안으로 무언가 생각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패배감이 신년을 가득채운 채 달력만 바라보고 있던 차였다. 맹자는 바로 이러한 흩어지는 마음(放心)을 끌어 모아 단속하는 것이 학문에 정진하는 자세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던 개가 도망가면 찾으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이 도망가면 찾으려 하질 않는다고 말이다. 맹자의 '구방심'(求放心)은 이러한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일, 집나간 마음을 잘 간수하는 일이 방황하지 않는 도리라 하였기에 나는 이 책이 흡사 '구방심'(求放心)의 구체적 비법을 알려준 듯 느껴졌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그만 무지(無知)에 이른 생각병 환자야 말로 여기저기 떠다니는 생각을 그러모아 잘 붙들어야 할 가장 핵심대상일 것이기에. 지금 붙들지 않으면 언젠가는 미쳐 날뛰다가 결국 나를 잡아 버릴지도 모를 것이기에. 하여, 이 책은 대체로 '집나간 마음 다시 잡기'의 신년 독서편으로 유용했다.


人有鷄犬放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인유계견방즉지구지 유방심이부지구)
學問之道 無也 求其放心而已矣 (학문지도 무야 구기방심이이의)
-孟子, 告子章句上 十一

사람들은 제 집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그 즉시 알아채고 찾으러 다니면서도 정작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는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다. 학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도망가는 당신이여

이 책은 '생각 좀 줄여보자'는 데는 늘 분석만 장대하고 뚜렷한 결론이 없던 내게 보란 듯이 실천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방법은 공감과 설득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바로 뇌의 정보처리과정을 잘 이해한 후 오감을 활용해 뇌를 자극하라는 내용이었고 과학자가 아닌 스님이 제시한 것이기에 그 명상법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늘 접해온 스님의 수행과는 상이했다는 점이 아마도 이 책이 속세의 중생들을 위한 실용서로서 고유한 가치를 지니도록 했다는 생각이다.

나는 평소에 어떠한 고민이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대비해 실로 다각도의 종합적인 생각을 해왔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막상 그 다음날 내리는 결론을 볼 것 같으면 전날 밤 그렇게 밤을 지새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결정을 내리곤 했다. 즉, 생각을 안하느니만 못한 결정을 보고 내 스스로 고민에의 타당성에 의문을 가진 적이 많았다. 예를 들면 어짜피 떠나지 않을 여행이면서 여행계획을 자세하게 고민한다던지, 이직에는 마음이 없었으면서 스카우트된 상황과 구체적 일감을 미리 예상해본다던지 하는 소위 시간벌기용 고민의 습관을 떨치지 못한 경우였다. 마음속엔 이미 기울어진 답이 있으면서도 고민의 시간을 가진 후 결정된 것으로 하고 싶은 비겁함도 있었고 혹시 결정을 번복할 상황에 부딪힐지 모르니 미리 생각해 두자는 쓸데없는 치밀함도 있었다. 정작 다음날 그 결정에 소모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내 스스로도 어이없을 때가 많았다. 고민하는 밤이 되면 어짜피 내일이면 이 생각이 쓸모없을 줄 알면서도 이 생각 저 생각만은 중단하기 어려웠던 내 습관을 얼마나 고치고 싶었던가. 드디어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은 정보처리의 잘못된 관행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어쩌면 그 습관이 좋아 결정과는 상관없이 생각의 시간을 즐기고 즐긴 덕에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아예 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만큼은 다른 감각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절대쾌락으로 받아들였던 건 아닐까. 나의 경운, 너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사례로서 충분했다.

생각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나는 생각의 종류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다. 한자어로 생각을 찾아보면 그 쓰이는 말에 따라 생각의 배치는 더욱 다양하다. 같은 생각인데 고집스러워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념(念)이라 했다. 잡다한 생각을 잡념(雜念)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 책에서는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 힘을 '염력(念力)'이라 하며 알아차리는 능력으로서의 '의식의 센서'라 칭하고 있다. 흔히들 정신을 집중해 물체에 손을 대지 않고서도 위치를 옮기는 초능력을 염력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그만큼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다는 것이 힘들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둥둥 떠오르는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생각은 상(想)이라 했다.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은 머리에서 생각을 그리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일 게다. 이것저것 따져보는 생각은 우리가 잘 아는 사(思)라고 하며 개념이나 추리가 뛰어난 사람에게 사유(思惟)의 힘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려(慮)는 두루 생각하는 생각이나 묵직하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 우려(憂慮)가 된다고 할 때 해당되는 생각이다. 내가 생각할 때, 어떠한 생각이든 공통되는 것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 않고 그 운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느껴진다. 생각하는 사람은 정지해있는 것 같아도 사람으로부터의 생각은 결코 정지된 현상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으니 더더욱 이토록 가만있지 아니하는 '생각 버리기'는 곧 생각을 제 위치에 잘 간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방향으로 뻗어간 생각, 나도 모르게 귀결된 생각, 내 의도와 상관없이 솟아나온 생각, 쓸데없이 많아진 생각들이 각자의 생명성에 들떠 멀리 가출하도록 놔두지 않고 다시 잡아와 오순도순 살림을 잘 꾸리도록 관리하는 일, 그것은 생각관리자의 최종적 목표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생각이라는 것이 주차장처럼 장롱처럼 원래 보관소가 있었다는 말일까.

이 책의 저자 스님은 이러한 생각관리의 능력이야 말로 생각을 잘하는 사람이 갖춘 자신만의 경쟁력이라 말하는 듯하다. 스님은 생각이 도망치는 것을 뇌 속의 연인에게 달려가는 일이라 달콤하게 표현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 들수록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고 말이다. 나이를 먹으면 고집이 세어진다는 말과도 비슷하게도 들렸다. 이는 결국 반복된 생각의 프로세스를 바꾸지 않아 굳어진 탓이기 때문일 터이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원인도 과거로부터 엄청나게 축적되어온 생각이라는 잡음이 오감을 통해 느끼는 정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라는 말은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뼈아프면서도 짜릿한 깨우침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연륜만큼 생각이 깊어지고 그만큼 지혜로운 판단을 할 것 같아도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만 놀라울 뿐 기존의 생각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님은 그 원인이 그동안의 굳어진 데이터처리 방식 때문이며 지금 오감으로 느껴야 할 자극이 그로인해 뇌에서 차단되고 있는 것이라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오감을 통한 자극을 연습하는 일이 곧 생각병에서 탈출하는 길이라는 발상은 생각으로만 생각을 통제해보려던 기존 악습에 반전이자 서광에 다름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다른 대상이나 무엇에 도움을 받지 않고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꼭 구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악습을 고치기 위해 더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오랜 기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필수적 부담도 없었다.


...오감의 연인에게 돌아와주

앞서 말했지만 이 책은 불교적 깨우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외려 과학적 정보를 논리적으로 전달하려는 느낌을 받는다. 불교에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의 '생각 버리기'는 기독교에서의 '묵상과 명상(meditation)'과도 일맥상통한다. 대체로 이들은 떠오르는 생각을 잠재우고 침묵하자는 훈련의 하나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상 역시 머리로 애써 생각하려는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또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정작 오감으로 인식되는 정보들에는 무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님이 역설하는 건 바로 이 오감에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에 보다 예민하고도 능동적인 대처를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논리가 거듭 신선했다. 이 책은 추상의 개념서가 아닌 구체의 트레이닝 교본이었다.

나 역시 평소 누구보다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한 가지 일에 빠지면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내 집중력을 부러워 할수록 나는 어떤 블랙홀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내 안에선 집중에 빠져들지 않는 일은 제대로 일을 수행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져 어떤 일을 하건 간에 그 일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모든 정보와 감각을 차단하고 한 가지 생각에만 매달리는 패턴을 낳게 한 것이다. 이러한 습관은 남편과 대화할 때도 일방적으로 내 주장만 전달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게 되거나 밥을 먹고 TV를 볼 때에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듯 일상을 보내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 하나의 일이 해결되면 다시 다른 고민거리를 찾아 무아지경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몸과 마음을 부추겨 움직여 왔다. 무언가 빠져 있을 때라야만 나는 안정을 느끼고 제대로 일이 돌아간다고 느끼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스님은 이 과정이 뇌가 원하는 자극을 자신도 모르게 추적해 가는 일이라 한다. 그것이 고통이 될 지언정 사람은 그 자극을 쾌락으로 인지해 한번 이루어진 프로세스를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도박이나 마약과 다를 게 무엇인가. 괴로움에 중독된 무지몽매한 인간의 다같은 증상이었다. 즉, 다음에 비슷한 경우가 생기면 뇌는 익숙한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해 뇌 속의 연인을 찾아간다고 말이다. 나는 생각병의 후유증이 실로 생각보다 심한 케이스였다.

이 책에서 생각병에 시달린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처방으로 제시한 '말하고 듣고, 보고, 쓰고, 읽고, 먹고, 버리고, 접촉하고, 기른다'는 지침은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행동과 지금 느끼고 있는 감각에 집중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뇌 속의 연인만을 찾아가던 동선을 버리고 이제는 몸 바깥의 연인에게도 눈을 돌리라는 뜻이 아닐까. 가만보면 오감이라는 것은 나의 눈과 코, 입, 귀, 손으로 감지해야 하는 신체외부기관의 역할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눈과 코, 입과 귀, 손으로도 생각을 해야한다는 육체의 자연스런 반항기제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생각에 방해가 되나니 음악도 끄고 식사도 권하지 말고 나를 좀 내버려 두라는 말을 밥먹듯이 해왔는데 그건 정말 생각안에 빠져서 다른 신체를 쓸모없게 만들면서 조용히 죽어가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시각과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제대로 반응하는 일이 생각을 버리는 연습과정이라는 것이 이토록 당연하면서도 처음엔 참 아이러니 했다. 모든 오감에 집중하여 일일이 반응하게 되면 오히려 생각이 분수를 모르고 넘쳐나 피곤해질 것 같았기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버려야 할 생각이라 함은 뇌 속의 과다한 에너지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지금 보고있는 것을 세심하게 제대로 관찰하고, 지금 먹고 있는 것을 혀로 제대로 음미한다면 그 순간 과다한 욕구로부터의 쓸데없는 생각을 차단하는 긍정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다고. 뇌 속의 연인으로 달려가는 생각병의 바이러스를 잡을 수 있다고. 그런데 그것은 결국 어느 한곳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적인 생활감각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감을 사용치 않고 뇌 속에서만 맴도는 방식으로 자라난 생각은 기형적인 장애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순간을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인생을 살아 나간다는 적극적인 生의 전략으로도 들렸다. 상대에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상대의 표정변화를 놓치지 않고 무엇을 만지고 있다는 촉감에도 세심하다면 그것은 생각을 버리기 이전에 많은 좌절의 기억, 패배의 두려움, 외면의 상처를 딛고 씩씩하게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와 다를 게 무엇인가. 결국 자신의 온 감각에 충실하면 상대의 감각에도 성실히 반응하게 되어 원활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사회적으로 완성도 높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니 '생각을 버리는 것'은 곧 '불행을 버리는 것'의 다른 이름표가 아닐까.


...프라이드에 중독되지 말아요

그런데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절실히 와 닿았던 번뇌의 스위치 중 하나는 만(慢)이라는 마음이었다. 퍼뜩 자만심(自慢心)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나는 이 단어가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하고 반갑지 않았다. 스님은 이 번뇌가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걱정하고 조바심 내며 프라이드에 집착하는 탐욕'이라 하였다.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 책에서 만(慢)이라는 번뇌모드가 활성화되었을 때를 자주 언급하며 그 순간 끼어드는 생각의 잡음이 우리를 삐뚤어지게 한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흡사 허를 찔린듯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상대가 나를 과소평가 할까봐 나는 이쯤 되는 사람이라는 자기 자랑을 대화에 포진시키는 행위, 혹은 썩 칭찬할 내용도 아닌데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과다하게 상대를 추켜 세우는 행위, 진정으로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의례적으로 형식을 갖추는 행위, 내가 상대에게 이쯤했으니 상대도 당연히 나에게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보상심리, 사람들에게 욕을 들을까봐 미리 알리바이를 공표하고 자신을 변호하는 행위, 골고루 인정받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초조와 불안을 반복하는 심리, 다른 사람의 실패를 보고 슬며시 우월감에 빠지는 행위, 상대를 비난하고 얕봄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심리 등등...모두 다는 아니라 해도 당신과 나는 분명 이 모두에 속해 있다. 이러한 번뇌에 자유로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많건 적건 우린 상대와 자신을 반반씩 섞어가며 세상을 속여 온 경력들이 있다. 모든 만(慢)의 번뇌에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과시욕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과시욕의 밑바탕엔 '그렇지만 나는 못난 사람이다'라는 열등감도 뿌리를 내리고 있지 말이다. 만(慢)이라는 번뇌에 쫓겨 행동할 때에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드레날린이 활성화되어 흥분 상태이지만 이러한 고통은 뇌에 자극을 주게 되고 자극은 쾌락이라는 정보로 왜곡되며 뇌는 이 구조를 프로그램화하여 셋팅해주므로 우리는 이 시스템을 무한반복하면서 살아간다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이야기였다.

서평을 쓰게 되면서 많이 느꼈지만 정식작가가 아닌 아마추어들의 서평에 객관적인 평가가 가해질 때 우리들의 이러한 만(慢)의 번뇌는 극에 달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도 리뷰대회 참가글이니 정확하게 만(慢)의 번뇌의 영역안에 위치한다 할 것이다. 나 역시도 기대이상의 평가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며칠 우월감을 가졌다가 실망스런 평가를 받으면 혹시하고 타자의 성적에 의심을 품은 적이 있다.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말해놓고 어쩌면 좋은 평가일 때만 해당되는 계율을 적용했던 것은 아닐까. 작년 한해 일회성의 성취에 들떠 자신의 성공에 축하해 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솔직함이 은근히 부럽기도 했고 자신의 실패에 필요이상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을 보면 꼭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딱하기도 했다. 가끔 실망하는 사람에게 선택되어진 것이 곧 절대승리나 절대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위로도 해보았지만 이 책에선 그런 반응조차 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기분좋고 맛있는 먹이처럼 느껴지는 '하이에나의 습성'이라 말하고 있었다. 기존에 그렇게 함으로써 슬몃 기분이 좋아진 정보왜곡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생각의 잡음이 스며들었을 뿐 상대를 위한다는 생각과는 별개의 이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위로랍시고 몇 마디 남겨놓은 그 모든 순간들이 부끄러웠다. 결국 나는 내가 좋아 위로도 한 것이고 나 좋자고 칭찬도 비난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자기 평가에 집착하게 되면서 시작된 만(慢)의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자 다양한 분노 에너지의 결실이 아닐까 싶어 그만 마음이 울적해진다.

이 책에선 그러한 분노 에너지를 극대화시키지 않기 위해 인터넷에서의 커뮤니티에서 일체의 방문회수나 댓글에 마음을 닫을 것이며 주고받는 메일에서도 서로 자아를 자극하는 정보를 전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바로 번뇌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보이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마음을 속이는 행위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참(無慙)에 해당된다고 말이다. 또한 글로써 자신의 의견을 전할 때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내용으로 상대를 책망하거나 분노를 은연중에 전달하는 일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순간의 기록이기 때문에 영원히 분노의 증표가 된다는 것이다. 문자메시지나 여타 다른 글로 전달되는 정보에 감정이 아닌 사실적 정보들만을 전달하려 한다면 마치 고통이 줄어들어 쾌락을 느끼는 것 같은 착각에 중독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은 가장 얼굴이 달아오르는 충언이기도 했다. 우린 그동안 얼마나 짧은 글로써도 충분히 상대의 자아를 자극하고 그 순간 나의 존재를 분명히 하고자 무참(無慙)한 행위를 서슴치 않고 자행해 왔던가. 스님의 조언은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절대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성화하기 이전에 자신의 생각부터 정돈 하는 것이 더욱 생각있는 네티즌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 깨우쳐 주는 적절한 가르침임에 틀림없었다.


...있는 그대로 지켜가요

세상엔 방대한 정보들이 넘쳐나므로 더 자극적이고 더 충격적인 기사를 좇아 우린 오늘도 몇 개의 기사를 습관적으로 클릭하고 낚이고 걸려든 심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때론 무언의 대기에, 때론 공허의 바다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소셜 네트워크가 점점 인터넷에서 인간관계의 경쟁력으로 가시화되면서 우린 기계적이고도 가식적인 안부 인사나 의무성 일환의 감사의 댓글, 내용과 상관없는 품앗이 추천에 너무나 익숙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들에게 나를 알리려 글을 올리고 사진을 게시하고 음악을 걸어 놓고 누가 이런 일로 울었다 하면 하나같이 동감해주고 이런 일로 화가 났다 하면 약속이나 한듯이 같이 열을 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해주니 당신도 그러해야하는 것이 이 세계의 불문율이 되어버렸기에 만약 나와 같지 않으면 서운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스님의 글을 보니 그동안 나는 누군가 내 글에 동의해주면 그 순간 만(慢)의 욕망이 꿈틀거려 자극이 충족되고 그 짜릿한 경험은 대수롭지 않게 반복되었던 그야말로 '생각없음'의 체계속에 한껏 빠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좀 해보자고 모인 사람들이 실은 상대의 생각을 읽어 온 것이 아니라 각자의 뇌 속에 빠져 자신의 생각만 열심히 키우고 있는 꼴이었다. 우린, 애석하게도 광대한 무지의 연대를 이룬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은 무지의 연대속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며 탈출하였다고 해서 세상과 멀어지는 것은 아니라 역설한다. 스님의 충고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새삼 이것이 잘못되었으니 '나는 그만하겠소' 하는 단절의 태도로 자칫 속세를 떠나겠다거나 '나는 당신과 다르오' 하는 초월적 거리감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생각병을 물리쳐야 할 분명한 목적에 기인했을 것이다. 생각도 욕망도 모두 버리고 수도승처럼 혼자서 고독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잡음을 없애는 노력을 통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마음의 패턴을 찾아내 그것을 교정함으로써 빠르게 변화하는 복잡한 사회에서 현명하게 살아남으라는 현실적인 결론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무지(無知)에서 벗어난 자들이 이루는 무아(無我)의 연대가 아닐까.

살면서 교훈적이고 감동적인 책을 만나기는 쉽다. 그런데 이렇게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면서 실생활에서 유용하기까지 한 책은 아주 드물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도 눈높이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보편적이면서 특수하기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잡념(雜念)은 지우고 싶고 사려(思慮)는 깊어지고 싶다. 우려(憂慮)는 지나치지 않으며 상념(想念)또한 정도껏이고 싶다. 사고(思考)의 폭은 넓되 사념(邪念)은 버리고 싶다. 한층 깊어진 사유(思惟)의 힘으로 언젠가 나만의 사상(思想)이 만들어 질 기적같은 날도 멀지 않았으면 한다. 옛 중국문헌엔 떠다니는 생각을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잘 붙들어두는 것을 일러 존상(存想)이라 칭했다 한다.(진성서陳星瑞, 집고우록集古偶錄) 이는 어쩐지 스님이 말하는 '생각 버리기'와 맹자의 '구방심'(求放心)과도 닮았다는 생각이다. 나를 버려야 내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버려야 생각이 존재하는 이치에 적절한 결론이 아닐까. 이는 나의 오감이 나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일깨우는 역할을 할 때 얻을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存想)이면서, 스스로도 자존감을 드높이는 존상(尊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생각을 관리하는 것이 인생을 관리하는 길이었다. 신년에 많은 계획으로 복잡하던 머리가 한결 개운해진 느낌으로 책을 꽂아본다. 생각을 깊이 많이 하는 방식만 반복해온 터라 하루아침에 내 몸의 오감을 이용해 세상을 생생히 느끼는 것이 말처럼 쉬울 것 같지는 않다. 나에게 생각을 버리라는 일은 완벽을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생각만 가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닌 모든 감각을 가동시키라는 것이므로 어찌보면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 더 인간답고 완벽한 삶을 살아가라는 뜻과도 같지 않은가. 생각을 버리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또한 완벽주의 종결자를 향하여 맘편히 생각을 버려도 될 듯하다. 나로선 이 다행인 결론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결국 오감을 통해 생생히 체험하는 감성이야말로 우리 사는 완벽한 인생의 재료이자 완성된 문학의 질료라는 뜻이기도 하기에. 이는 생각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기왕에 하고 있던 생각 또한 더욱 확장되는 발전의 기회일 것이다. 더 버리고 더 잊어야 더 커지고 더 넓어지는 생각의 신비. 이 생체 시스템안에서 나는 인생의 열쇠를 맡겨보고 싶다. 오늘 잠시나마 오감으로 나눈 서로 인간됨의 매력일랑 고이 보관해 두고 싶다. 내일 누구보다 풍성할 우리 행복의 미래를 열기위해 그 행복을 완성할 완벽주의자가 되기 위해 비밀의 열쇠를 쥐어 본다. 손에 잡힌 그것이 참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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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오늘은 봄이 오시려는지 날씨가 친절하다. 그날도 그랬다. 완연한 봄은 아직이었지만 겨울외투를 입고도 봄이라 우기고 싶을 날씨였다. 봄을 유난히도 못 견디던 두 여자, 어머니와 이모는 예전처럼 여행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세상엔 교통사고로 가족이 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된다고 편을 가르기 시작했다. 의외로 내 편은 별로 없었다. 뉴스엔 하루가 멀다 하고 교통사고 희생자가 발생하건만 그 희생자의 가족들은 나처럼 사고 후 숨어버리기라도 하는 걸까. 그날을 생각하자니 봄날 아침 그 몽글한 안개가 떠오르고 전화너머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목소리도 들려온다. 참, 꿈만 같다. 잔인한 현실은 때때로 한낮의 낮잠과도 같지 않을까. 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나절 아련한 꿈을 꾼듯 나는 자꾸만 애꿎은 시계를 보게 된다. 얼마나 흘렀을까. 책을 읽고 처음으로, 이 소설도 꿈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나는 이미 그렇게 믿어 버렸는지 모른다.

나는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고 꽤 방황한 사람이었기에 이 책을 쉽게 손에 들진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에 끌렸다. 이젠 좀 이런 이야기에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울지 않고도 그리워만 할 수 있다면 좀 덜 힘들 것 같았기에. 억지로 거리를 두고 소설을 읽어내자니 마음을 많이 쓰게 되었다. 거리감을 둔다는 것이 소설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사랑에 빠질려면 ‘완전히’ 라야 아름다운 것이지 ‘적당히’는 사랑도 뭣도 아닌 게다. 이러다 어쩌면 리뷰를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 작품에서 소설적 구성과 독특한 서사, 인물의 배치등에 전혀 분석, 혹은 비평을 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날 이후 내가 지내온 시간들에 묵묵히 격려를 보낼 수 밖에 없었고 그날 이전에 엄마가 살아오신 시간들에 묵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소설을 따라가는 일은 그날 깊게 패여진 내 가슴구덕을 더듬어 당시 맞은 총탄의 경위와 탄흔을 추적해 나가는 일이었다. 사람에게 어떤 기억은 이 소설의 시간단위처럼 단락별로 자세하고 오래도록 분명하다. 그나마 다행인건 소설의 주인공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건 불행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그날 딱 하루 불행했다고 그 사람의 인생이 불행한 삶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보다 눈부시던 주인공의 행복이 죽었기 때문에 비극이요, 소용없는 것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해서, 나는 이 소설을 굳이 ‘행복한 삶을 살다간 사람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관한 이야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 길이 그들 인생의 마지막 가는 길이 된 사람들의 가족은 대체로 그들이 죽었다고 여기질 못한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떠나는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미 떠날 줄 알았고 떠나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그들이 꼭 죽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어머니와 이모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바로 장기 미국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이 아주 오랜기간 미국으로 동반여행을 간 것이라 여기고 살고 있다. 헌데 아무래도 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많은 가보다. 이 책에서도 주인공의 가족과 주변 지인들은 하나같이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으며 미아의 엄마는 여행사 직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느 눈이 많이 오는 날 아침 눈길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학교와 회사일정을 포기하고 일상의 일탈이라는 가족여행을 떠난 것이지만 그것은 그들 인생의 이탈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미아가 죽은 것만 아니라면, 이야기는 마치 유학이나 졸업, 아니면 이사를 앞두고 그곳에서 지난 소녀시절을 회상해보는 자기추억의 여행과도 같았다. 죽은 것만 아니라면.

이 작품을 덮으면서 소설은 아무리 길고 아무리 짧아도 결국 어느 시점에서 어느 시점 까지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이번 이야기는 주인공이 사고를 당하게 되는 날 아침에서 부터 사고 후 사경을 헤매다가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의 시간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만 하루라는 주어진 시간을 시간단위, 분단위로 쪼개어 참 알차게 이용, 배분하셨다. 소설은 7:09 a.m.에서 시작해 7:16 a.m에 막을 내린다. 날짜도 연도도 없고 오로지 오전인지 오후인지만 표시된 채 거의 한 시간 단위로 시간은 흘러갔다. 그런데, 과연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하게도 숫자가 변했다고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긴 어려웠고 오히려 시간은 정지한 듯 느껴졌다. 내게는 단락이 구분되던 이 숫자가 생명이 위중해 촌각을 다투는 시각(時刻)의 의미라기 보다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신(sene)번호의 시각(視角)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도 작가는 생각이 전개되는 곳이 미아가 입원한 병원의 중환자실임을 인식시키려 의도적인 시각(視角)장치로서 시계를 상징하는 시각(時刻)을 사용한 듯하다. 그곳, 중환자실은 정말 숫자만 바뀌어질 뿐 시간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없지 않은가. 미아의 시간표는 내게 있어 일시정지의 계획표에 다름아니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거리를 두고 싶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미아가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은 눈길 운행시 마주 오는 트럭과의 충돌로 인한 교통사고였지만 대부분의 시간, 미아는 중환자실에서 혼자만이 시간을 의식하며 자신의 의식을 유지하려 한다. 그 곳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꼼짝을 않고 흐르지 않는 것 같으면서 또 신기하게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마법의 장소이다. 같은 숫자인데 오전인지 오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가족만 하루에 두 번(내 기억으로 오후 2시와 8시) 면회가 되는 그곳에서 나 역시 삼일 동안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아이를 낳으면서 분만 유도 촉진제를 세통이나 맞았는데 그 과정에서 폐에 물이 찬 채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 직후 깨어난 나는 ‘숨이 안쉬어 진다’는 말을 하고 다시 의식을 잃었고, 죽지 않고 살아난 걸 깨달았을 땐 중환자실이었다. 병원은 의료사고를 무마하려 오히려 자신들이 나를 살려내었다고 생색을 내었다. 나는 당시 아이를 낳은 여자이기도 했는데 폐에 남아있는 물을 빼내는 것이 더 시급했기에 아이를 일주일 후에나 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내가 중환자실에서 보고 들은 것은 대부분이 간호사의 발걸음과 기도에 삽관된 장치에 석션(suction)을 시도하는 기계소리, 그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들의 신음소리, 각종 의료기기들의 규칙적인 전자음이 다였다. 그때 난 삽관된 입에 석션장치를 넣으면 배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 가래를 자력으로 뱉어내라는 간호사가 죽도록 미웠는데 그녀는 내가 방금 배를 째고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 한 환자인지는 알 바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가끔 의식이 돌아올 때 내 귀에 간호사들끼리의 의학용어가 섞인 몇 마디를 스쳐들었고 면회하러 들어온 가족들의 목소리와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숨소리로부터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언제쯤 중환자실을 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죽지는 않겠다는 걸,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수술 직후 깨어나 숨이 안 쉬어진다 말하고 다시 의식을 잃던 그 순간, 짧지만 ‘내가 이대로 다시 안깨어나면 그게 죽는 것 이겠구나’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설마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것은 아닐거라고 그 찰나의 순간에도 나는 그렇게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서 한참 후 나는 죽는 다면 그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내가 죽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책을 읽고 그만 마음이 바뀌려한다.

만약, 내가 의식을 잃고 하루 혹은 몇 시간이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다 끝내 생을 마친 것이라면 나는 미아처럼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아니 미아처럼 아름다운 기억들을 다시 찾아가 아름답게 인사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죽을지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죽어야 했다면 꼭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이제 죽는 다면 미아처럼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삼일 동안의 중환자실에서도 의식이 있건 없건 무조건 그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하루 반이 지났을 때라야 나는 사람을 알아보았는데 병석에 계신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오진 못하고 대기실에 계신다고 간호사들이 알려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실질적인 육체적 아픔이 찾아왔다. 정신이 든 것이다. 아버지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린 시절 해수욕장에서 같이 물놀이를 하던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얕은 물이었는데 발이 닿지 않아 놀란 나는 순간 겁을 먹고 물에 빠지게 되었고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던 기억, 왜 하필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우리식군 그 이후로 물놀이를 가지 않았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라 모든 건 어렴풋했지만 어쩐지 밖에 아버지가 든든하게 앉아 계신다는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볼펜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점에 삽관한 장치 때문에 목이 너무 아파 제발 기계를 제거해 달라 애원했다. 같은 날 아버진 그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병원측에 거세게 항의하여 드디어 삽관장치를 떼어내게 하셨고 일반병실로 가도록 압력을 넣으셨다. 아버진 그 병원의 오래된 투석환자셨다. 책을 읽으며 내내 미아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미아에겐 그런 부모님이 곁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진 내가 일반 병실로 옮겨졌을 땐 정작 나타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난 그때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느꼈는지 말로 다 할 수는 없다. 중환자실에선 들어와 나를 보고 있는 그들을 통해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로부터 나를 보게 된다. 아마도 미아를 보게 된 많은 사람들은 미아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였을 터이다. 그건 미아가 삶을 죽음으로 택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시점부터 간호사들은 미아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누워있는 환자가 생명을 다투는 상황이 아니라면 '꼭 살아야 한다', '죽으면 안된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그말은 어쩌면 내가 곧 죽게 될 거라는 말과도 같다. 가만 미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넌 살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격려때문에 '난 살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 경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죽다가 살아온 내 이야기기도 했다. 그녀가 죽지만 않았다면.

어짜피 죽게 될 거 그럼 현장에서 바로 즉사할 것이지 왜 죽지 않고 살아나 다시 죽은 것인지 처음엔 작가를 원망하였다. 겨우 하루 더 살려고 그렇게 사투를 벌인 것인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책을 모두 읽어낸 후 나는 바로 그 시간을 가지려고 미아는 마지막을 견뎌낸 것이고 그것을 시시각각 기록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존재이유이자 내가 이 책을 읽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는 사실, 참 다행이었다. 미아에겐, 우리에겐, 그리고 미아의 남은 가족, 친구들에게 그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사실, 소설 때문에 나는 목숨이 연장된 시간이 미아에게 불운이 아닌 행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머리를 다친 것이기 때문에 살아나는 것이 더 불행이라고. 반신불수나 의식불명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느니 깨끗하게 가시는 게 가족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 하신 거라고. 그때 난 그말을 흘려들었고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동의를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하루만이라도 아니 몇 시간만이라도 살아서 나와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면 나는 지금보다는 덜 억울하게 엄마를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엄마도 미아처럼 자신의 인생과 잘 이별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나는 대부분 엄마를 편안하게 가시도록 어른스럽게 굴지 못하였겠지만 엄마와 나에게 그 시간은 우리가 같이 한 평생 중 가장 소중하고 따스한 추억이 될 수 있었을 것이기에.

그랬다. 미아는 자신의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며 그 소중한 사진들을 앨범에 담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 작품은 이제 미아가 다시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기 보다 그동안 해왔던 일을 말하는 책이었다. 이제 친구들과 가족을 다시 못보고, 꿈에 그리던 줄리아드에 입학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근사한 미래를 약속하지 못한다고 절망에 빠져 슬픈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족들에게 사랑받았고 친구와 우정을 쌓았고 남자친구를 사귀기까지, 첼로가 자신의 꿈이 되기까지 자신이 지녔던 모든 사랑과 희망을 떠올려보는 거꾸로 쓰는 일기장이었던 것이다.

첼로를 시작하고 첫 연주회 때 못하겠다고 울먹이는 미아에게 아빠는 자신도 드럼칠 때 똑같았다며 '이겨내기 어려우면 그냥 떨면서 버티라' 말한다. 세상에...나는 미아 아빠의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너는 잘 할 수 있다. 용기를 내라’같이 은근 부담을 주는 진부한 말이 아니고 누구나 그러하니 떨리면 떨리는 대로 그 순간을 견뎌내면 된다는 참신하고 솔직한 대답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 나는 꼭 그 말을 내 아이에게 해주고 싶어졌다. 평소에 늘 가족과 닮은 점이 없다고 의기소침해 있던 미아에게 엄마는 할로윈 날 빨갛게 화장을 해주었다. 그날 미아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벗고 나시옷에 금발의 가발을 쓰고 가장무도회에 나타났다. 미아는 거울을 보고 처음으로 가족과 닮은 자신의 얼굴을 느껴본다. 줄리아드 입학과 애덤과의 사랑으로 열일곱의 고민에 힘겨워 할 때 엄마는 ‘어떤 선택을 해도 이기는 거고 어떤 선택을 해도 지는 것’이라고 어느 쪽이든 미아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조언을 한다. 부모란 자신의 답을 말하지 않고 세상의 답을 말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을 보며 나는 과연 내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어 미아의 엄마가 얼마나 멋져보이던지.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테디는 미아가 첼로로 자장가를 연주하면 울음을 그치던 동생이었다. 미아는 엄마가 테디를 출산할 때에도 곁을 지켰는데 마침 테디가 제일먼저 본 얼굴은 미아였고 미아는 테디의 탯줄을 잘랐다. 아빠는 이런 가족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그냥 취미로 남겨두고 교사가 되는 길을 택하였고 음악을 버린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미아에게 ‘살다보면 때로는 내가 선택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 선택이 나를 만들기도’ 한다며 그 선택으로 얻은 가족의 안녕에 누구보다 행복함을 강조했다. 어떻게 이보다 더 단란한 가족이 있을 수 있을까. 미아의 회상이 가족에 머무를 때면 난 그날 아침 그들이 같이 탄 자동차와 음악을 들으며 눈길을 달리던 여행길이 꼭 중간에 한사람이라도 이탈하면 안되는 길이었다고 여겨진다. 설사 죽음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할 여행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 어머닌 어떤 형제들보다 같이 떠난 이모와 제일 친하셨고 실제로 농담으로 우리 실컷 달리다가 차 사고로 죽는게 어떨까 하며, 피곤하게 병으로 죽지 말고 깨끗하게 죽자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 시점을 모르므로 자신이 제일 자주하던, 제일 잘하던 일을 할 때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걸 이 책을 보며 다시 상기하게 된다. 내 어머니나 미아네 가족이나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하던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서로간의 이별이 아닌 것이 아닐까. 미아는 음악으로 연결된 부모와 生 에 특별한 추억을 나눈 동생과 죽음으로 영영 헤어진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가슴속에 그것을 간직한 채로 죽음마저도 추억의 마침표로 찍은 것은 아닐까.

미아에겐 가족뿐 아니라 친구와 음악도 있었다. 착한 소녀의 가면을 벗고 둘도 없는 단짝이 된 킴은 끝까지 애덤을 도와 중환자실의 미아를 만나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미아는 자신의 일부와도 같았던 첼로를 통해서도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나는 이 과정이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음악의 꿈을 가진 열일곱 소녀가 다시는 첼로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첼로를 통해 첼로 때문에 자신을, 세상을 알게 된 것에 이 작품은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미아는 음악캠프에서 독주가 아닌 오케스트라에 참여하여 처음으로 그룹의 일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음악이 고독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에 감사를 느낀다. 바비큐 파티에서 아빠와 애덤은 노래하고 테디는 춤추고 자신은 연주하며 보내었던 오후 한때, 그 눈부신 시간이야 말로 행복이었다고 회상한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경험, 애덤과 헨리 아저씨의 기타와 함께 첼로를 연주하며 세상은 어울려야 어울림을 느낄 수 있음도 알아간다. 펑크록의 세계에서 첼로의 자리는 없다고 믿은 미아였지만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텅 빈 남의 자리가 아니라 결국 자신의 열린 마음이었음을. 미아에게 첼로를 연주한다는 것은 사람을 알아가고 세상을 배우는 生의 全 연습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미아는 실전을 펼치지 못했을 뿐인 것이었다. 아니, 실전은 그곳, 가족들과 함께인 거기에서 가능할 터였다.

그래도 역시 가장 슬펐던 건 애덤의 마지막 인사였다. 대학밴드의 슈퍼스타인 남자친구 애덤은 ‘너처럼 음악에 몰입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고 미아의 음악에 대한 집중력, 열정과 태도에 반했다. 이주일 동안 피자배달을 해서 요요마 음악회에 데려간 애덤은 미아의 마지막 순간에 요요마의 피아노 연주곡을 들려주며 기어이 이별을 실감나도록 하였다. 나는 임종을 맞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닫히는 감각이 청각이라 들었다. '좋은 곳에 가시라'는 귓속말을 끝까지 챙겨 듣는 것이 이승에서 행하는 마지막 감각이며 남겨진 사람들과의 약속이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고. 미아는 애덤과 사랑을 이어준 요요마의 음악을 들으며 마지막 순간 남은 힘을 다해 그의 손을 쥔 채로 ‘너무도 푸근하고 따스하고 곤한 끝없는 낮잠’속으로 빠져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네가 남아준다면, 널 보내’ 줄 거라는 애덤의 간절한 부탁을 뒤로 끝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네가 살아 돌아온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는 말, 네 대신 죽기라도 하겠다는 그말 때문에 우린 편히 눈감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이만큼 사랑받았으면 된 거라고, 내가 떠나더라도 우리 사랑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 사랑만 간직한 채라면 그곳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모두가 기다리는 거기도 다음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애덤이 ‘미아’를 부르며 막을 내리고, 나는 그만 그 호명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꼭 내가 미아가 되어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그것은 또다른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그렇게 낮잠에 빠진 나를 다시 현실로 소환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혹시 미아는 그 호명을 듣고 나처럼 다시 깨어나진 않을까, 나는 그렇게 기대를 하는 것이다. 내 눈앞에서 죽음을 확인하고 내 손으로 뼈를 묻었다 해도 사람의 죽음을 믿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제와 믿는다 해도 그것이 결코 존재의 부재에 털끝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상대를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대답을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 믿기 때문이다. 죽음을 인식한다고 해서 바로 부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죽음을 수용한다고 해서 부재를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건 자신이 자각하는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상실감의 원인이 죽음이라면 부재의 고통과 마주하는 것, 그것은 부재한 사람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하지 않을까. 사실, 존재의 ‘상실’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사랑이나 희망의 부재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행히도 사랑과 희망의 부재는 이미 죽은 자의 책임이 아니고 살아있는 나의 문제, 나의 의지인 것이다. 상실을 견뎌내는 사랑의 의지는 기꺼이 존재의 부재를 다시 희망의 존재로 전복시키는 生의 지혜였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읽었다 말하며 얻어버린 가장 큰 교훈이었다.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과 나누었던 사랑과 삶을 외면하는 일인 것이다.

리뷰를 쓰기를 잘했다. 나는 이 책을 제대로 몰입하지 못해 더 슬펐고, 슬픔을 좀 줄여보려고 하다가 계획에 실패 한 것이었다. 좀 덤덤해지자고 했지만 실은 애초에 덤덤치 못할 책을 집어든 것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슬픔은 상실의 고통에 대한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반응이다. 이제서야 오늘 슬퍼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치유할 수 있고 내일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또 기억해 낸다. 몇 년 전 <인생수업>으로 유명해진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상실수업>이라는 후속책에서 ‘상실’은 모두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는 삶’의 증거라 하였다. 모두 끝이면 잃을 것도 없고 아플 것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가 가시고 얼마되지 않아 서점에서 이 책을 무의식 중에 집어들고 집에 들어왔었다. 책을 넘기다 보니 유일하게 줄이 쳐진 문장이 있었는데 그 문장은 오늘 내가 떠올린 느낌의 문장과 거의 흡사했다. ‘지금의 고통은 그 당시의 행복의 일부이다. 결국 거래인 셈이다.’ ‘나니아 연대기’로 잘 알려진 영국의 작가 C.S. 루이스가 이렇게 멋진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으로 꽤 고통스런 나만의 ‘상실수업’을 비로소 치루어 낸 듯하다. 이 책과 거래한 내가 온당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나는 아직 지독한 상실로 가슴팍에 가슴만한 구멍이 생긴 채로 그안에서 길을 헤매는 '미아(迷兒)'이면서 아직도 엄마를 찾아 生을 떠나고 싶은 '미아(未兒)'이지만 오늘 치루어 낸 상실의 고통은 결국 내 자신을 '미아(美我)'가 되게 할 보약이리라. 언젠가 지금의 고통이 반드시 나중의 행복의 일부가 되는 날이 나는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때쯤이면 아마도 오늘의 ‘상실수업’을 알차게 받게 해준 ‘네가 있어 준다면’, 이 책의 미아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내 고통은 지금도 행복의 한 조각으로 여길 수 있을 듯 하다. 미움의 한 조각이 있어도 여전히 전부는 사랑인 것처럼. 나는 고통 한 조각에도 여전히 전부는 행복한 사람, 그 행복의 조각 전부가 고통이어도 결국은 다시 행복해 질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그때도 마찬가지이길 바라본다. 그건 아마도 먼저 가신 내 어머니가 미처 못다한 말씀이며, 어쩌면 내가 먼저 꼭 해야했을 약속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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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3-03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충격이 크셨겠습니다.
이 책 참 많은 사람이 읽던데 한사람님에겐 또 나름 큰 의미로 와닿았겠네요.
이 책이나 언급하신 책들이 참 많은 힘과 위로가 되죠?
C.S루이스가 참 근사한 말을 했군요.
정말 리뷰 쓰시길 잘하셨어요. 축하드려요.ㅎ
이책 저도 언젠가 꼭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사람 2011-03-03 14:36   좋아요 0 | URL

가볍게 읽을수 있는 책인데
저는 괜스레 가볍게 읽으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도 했던거 같아요^^
그리고, 리뷰는 더할수 없이 무겁게 표현된 거 같아
쓰고나서도 창피하다는 생각은 했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인다는 생각만 버리면
스스로 시원해지는 아이러니 ㅋ

언젠가 언제라도 꼭 읽어보세요^^

저는 좋았거든요~
 
블랙 스완 - Black Sw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제83회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2011)-나탈리 포트만>


드디어 받을 사람이 받았다. 베니스와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까지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니 그랜드슬럼을 이루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지라 그녀의 수상소식이 놀랍진 않았다. 막 어제까지 이런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 생각하여 나라도 어떻게든 리뷰를 써볼까 하던 차였다. 아직도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다만 언제쯤 끄적여 볼까 살짝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날아든 수상소식이 조금은 일찍 내 발목을 잡아 당겼달까. 이 영화는 말로 다하기 아까운 아름다움이다. 순간 느꼈던 모든 것을 고이 빚어 나만의 소중한 케이스에 영구 밀봉하고 싶은, 가지고도 기리고 싶은 아름다움이었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도 나는 한참을 넋을 놓아 버렸다.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生의 비밀 답안지라도 몰래 훔쳐본 기분, 그것이 혹 예술이라는 장르에 해당된다면 그것의 속성에 관통상이라도 입은 기분, 어떻게 더 이상 완벽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완벽이라는 마취에 압도당한 나는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이 영화의 마지막은 예리하게도 아려왔고 차마 리뷰는 그 자상을 확인하는 절차가 될듯하다.

영화는 ‘백조의 호수’의 프리 마돈나를 연기하게 된 한 발레리나의 ‘예술적 성공’과 그와 동시에 이루어진 ‘자기파멸’의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발레라는 전문적 분야를 완벽하게 수행해낸 나탈리 포트만은 실제 열 세 살의 나이에 발레의 꿈을 접기도 한 인물이었기에 이토록 훌륭할 수 있었던 것일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 때문에 만나게 된 발레리노(뉴욕 발레단 수석안무가)와 약혼, 현재 임신의 몸으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는 것. 어찌 보면 그녀를 좌절케 했을 발레가 그녀의 꿈과 사랑을 다시 실현시켜준 결과가 되었으니 그녀에게 있어 발레는 영화(映畫)이상의 영화(榮華)가 된 셈이다. 그녀가 ‘레옹’의 마틸다로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1994), 그때 난 불같은 청춘이었는데 어른들 흔히 하시는 말씀처럼 ‘애가 애를 낳게 된’ 주인공이 바로 그녀이니 그간의 흐른 세월일랑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 지난주 <언노운>에 출연한 다이앤 크루거에 반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엔 나탈리 포트만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몇 년 전에 ‘브이 포 밴데타(V For Vendetta, 2005)’라는 영화에서 삭발한 그녀의 완벽한 두상을 보고 인상깊었던 기억(영화는 별로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훌륭)도 떠올랐고 ‘천일의 스캔들(2008)’에서 스칼렛 요한슨(동생분)을 질투하며 동생을 밀어내던 초록색 드레스의 카리스마도 다시금 겹쳐졌다. 그녀는 대체로 연기 앞에선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 소위말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미지로 뇌리에 각인된 배우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번 영화에서도 강인한 캐릭터를 기대하며 그녀의 성공을 바랐던 것 같다.




< 레옹, 1994 >



<브이 포 밴테타, 2005>
 


< 천일의 스캔들, 2008 >


다행히도, 그녀는 성공했고 불행히도 그녀는 실패했다. 완벽한 성공이었지만 그럼으로써 완벽하게 파멸했다. 성공했기 때문에 파멸한 것일까 파멸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일까. 성공과 파멸이 인과관계로 형성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아무래도 이번 영화를 보고나서 ‘천재는 자기를 파괴하면서 예술을 창조한다’는 논리에 가장 아름답게 설득당해 버린 것이 아닐까.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끊임없는 열정은 바로 완전하게 자아를 상실해야만 비로소 환희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비극적 진실을 이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누구보다 완벽함을 소원해 온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난 정말 완벽했다’고 ‘나는 그것을 느꼈다’고 말하며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완벽하고 싶었으면 자신과도 바꾸면서 기어이 얻어야 했던 것일까. 가끔, 자신을 소진시키는 궁극의 가치, 자신의 죽음이라는 막다른 결과에 이르면서 자기창작의 완성을 이루어낸 예술가를 접할 때면 예술은 결코 ‘생산’과 ‘건축’의 장르가 아니고 ‘소모’와 ‘파괴’의 장르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나 이번 영화처럼 ‘블랙스완’이라는 어둠과 악의 힘, 그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가 예술로서 대중에게 감동을 전달해야 할 땐 그 매개체가 되는 배우는 ‘흑’과 ‘악’의 광기에 반드시 치명적 관통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에서 ‘블랙스완’을 연기하던 니나는 마침내 등에서 깃털이 생겨나 ‘검은 날개’가 완성되는 합체의 장면에서 가장 큰 감동을 전달한다. 관객은 소름끼치듯 그녀의 연기에 넋을 잃게 되지만 그녀는 그토록 신비한 ‘검은 날개’를 제 몸에서 잉태해내기 위해 무엇을 버린 것일까. 아니 무엇을 만든 것일까. 혹시 그녀 자신이 창조해낸 ‘검은 날개’는 또 다른 니나의 자아로서 현실에 드러나 생명력을 갖게 되면 정작 니나의 생명이 위태로와지는 죽음의 날개는 아니었을까. 니나의 삶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검은 날개’는 과연 니나 자신이 원한 것이었을까. 설사 니나가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예술은 왜 그녀가 ‘검은 날개’를 달아주길 바란 것일까. 혹시 누구보다 ‘블랙 스완’을 고대하고 찬양하는 그들(관객),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메이커들(감독) 자신은 스스로 ‘검은 날개’를 달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은 명백히도 두 사람이었다. 모두 인상깊었던 조연들이었다. 한 명은 니나의 어머니(전직 발레리나), 또 한 명은 니나의 스승(현직 발레 감독)이었다. 어머니는 순수하고 순종적인 ‘백조’로서의 니나를 강요해왔고 감독은 니나의 내부 깊숙이 잠재해 있는 관능적이고 공격적인 ‘흑조’를 찾아내고자 했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 니나를 컨트롤하고 억압하는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도 확연히 다른 컬러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발레연습장으로 대변되던 감독의 주변엔 철저하게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콘트라스트로 니나가 시종일관 긴장하도록 만들었고 엄마와 단둘이 사는 니나의 소형아파트에서는 핑크빛과 인형으로 연출된 공주님의 방을 연출하여 과보호된 니나의 가정환경을 더욱 대비시켰다. 니나는 주로 이 두 공간만을 지하철로 이동하고 연습실의 복도를 통과하며 하루를 보내는 인물이었다. 여기서 니나가 자신을 인지하는 방식은 어디서건 존재하는 ‘거울’과 ‘창문’을 통해서 였는데 영화를 통털어 나는 니나가 거울을 볼 때 가장 무서웠고 가장 슬펐다. 니나는 거울속에서 완전한 분열증세를 보였고 거울이 많아질수록 증세는 심각해져 갔다. 어머니의 억압, 감독의 질책, 동료와의 경쟁, 왕년의 스타에 대한 죄책감등이 거울엔 고스란히 투사되어 복합적인 양상으로 드러났다. 이 작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만들고 확인하고 끝내 깨부수는 영화였다.


 

나탈리 포트만이 그다지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역할이 아닌 발레리나 역을 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이 ‘거울’을 보고 ‘자신’을 깨닫고 알아가는 내면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발레리나 연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배경음악과 기술적인 효과들이 함께 이루어낸 종합연출의 결과였다고 본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거울을 보며 심리변화를 표현해야 하는 거울신은 어찌 보면 약속처럼 빈번하고도 계획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 반복의 공포는 관객에게 점진적인 두려움을 제공해야 했고 비극의 결말을 예상케 할 수도 있었다. 하여 그녀는 과도하게 미쳐서는 안되었고 연기하듯 두려워해서는 서로가 부담스러워질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많이 인내하고 절제했다. 시종일관 기쁜 웃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녀가 단 한번 마지막에 울면서 희미하게 미소짓는 슬픈 환희는 그래서 더 극적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강인하게 뇌리에 남아 예술이 가진 고통의 미학을 끈질기게 기억하라고 부탁한다. 그녀의 발레복에 퍼지던 빨간 핏빛이 그대로 붉은 꽃으로 피어나길 기원하라고 그녀의 마지막 눈은 오랫동안 응시한다. 사라진 건 그녀일까 그녀의 예술일까 아니면 우리의 댄서일까. 둘 중 하나가 소멸되어야 한다면 우린 그 순간을 외면하고 싶다. 영화는 그래서 막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 수상소식에 힘입어 이 영화가 탄력을 받게 되리라 믿는다. 이미 상을 받았으니 알려진대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에 찬사도 쏟아 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는 이번 그녀의 연기에서는 완벽함도 만족했지만 배우로서 어떤 행복감을 엿보았다고 느껴진다. 그건 그렇게 발레리나로서 완벽한 연기를 해낸 후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예술가의 극적인 운명처럼 그녀 자신도 그와 같이 살다가 죽는다면 더 좋을 건 없겠다는, 자신이 자신을 최대한 부러워하는 마지막 얼굴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슬픈 얼굴이었다. 배우라는 직업, 광대의 숙명, 예술가의 욕망, 인간의 탐욕, 이 모든 것들이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조명되며 한 마리의 백조와 또 한 마리의 흑조가 비로소 한 몸이 되는, 그래서 엄숙하고도 치명적인 生의 한 순간 그것은 죽음이어야 가능한 절대공연이었다. 끝내 니나의 ‘검은 날개’는 ‘하얀 바닥’으로 추락하며 분열된 정신이 하나가 된다. 완벽한 아름다움은 이렇게 더 완벽한 슬픔으로 파도치게 된다. ‘백조’는 떠나갔고 이제 ‘호수’마저 잔잔해진 지금, 그녀가 지나간 당신의 가슴엔 어떠한 파문이 얼마나한 무늬가 그려졌는가. 당신도 나처럼 손톱이 할퀴고 간 마냥 선연한 아픔으로 아름다운 물결을 새기었는가.

이 영화를 보고 사람 속엔 누구나 ‘백조’ 한 마리와 ‘흑조’ 한 마리가 나란히 등을 대고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흑조를 숨기고 백조의 모습대로, 누군가는 백조를 잊고 흑조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결국 두 가지 다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예술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착각마저 든다. 니나와 그의 숨겨진 본능을 도출해 내려는 속세의 감독을 보면서 나는 한명의 유명가수를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 전교회장으로서 엄친딸이었던 보아, 그녀도 지금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백조’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지금의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이 어쩐지 훈련된 ‘흑조’의 모습은 아닐까 염려가 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내가 너무 멀리간 것인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니 우리 연예 산업의 거대 상업적 메카니즘하에서 지독히도 훈련된 아이돌 가수들의 이미지가 불현듯 중첩된다. 한류가수를 내세우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사업계엔 니나의 발레감독처럼 그들에게서 ‘흑조’라는 상업적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원래 ‘백조’를 잊어버리도록 유도하는 지도자들이 많은 건 아닌지. 우린 어쩌면 깨끗한 ‘백조’가 없다고 그들을 비난하면서 속으론 내심 ‘흑조’가 제공하는 쾌락만을 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대중은 재능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 많은 것이기에.

예술가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오래 살길 바란다. 물론, 이것도 예술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을 향유할 우리를 위해서라는 걸 고백한다. 또 물론, 예술가라고 그들 모두가 완벽에 집착한다고 믿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건네 본다. 나 역시 완벽에 집착하는 성향을 오래도록 가져본 사람이지만 그 완성도의 종착지가 죽음인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축복받은 예술가임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다. 축복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 완벽에 집착하여 정신질환으로 발전하는 것은 삶의 불공평한 코미디요 비극적 멜로일뿐인 것이다. 예술가라고 다 완벽하란 법 없고 그랬다고 다 죽어서도 안된다. 그들은 어쩌면 예외의 인생을 살다갔을 뿐, 예술에 대한 미화나 찬양이 곧 모방이나 롤모델로 동격화 되어선 안될 것이다. 비예술가인 난 그래서 이렇게 마음대로 말할 수 있고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부럽고 신기한 건 그들의 슬픈 운명이 아니라 그 운명으로 남겨진 그들의 창작물이요, 그로인해 맛본 진하고 오래된 감동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그들이 만들어 준 그것을 낼름 받아 먹으면 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예술가가 아닌 것이 미안하다.

어제, 봄비가 내렸다. 비는 꼭 을씨년스러워 가을비같았지만 봄이 오는 길목에 내렸으니 너를 ‘봄비’라 불러본다. 이름을 부르고 나니 봄을 손짓하는 모든 생명짓이 그리워진다. 바람이 아직 차다. 그래도 온다하면 조금은 설레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 그만 이 변덕이 부끄럽다. 그러고보니 예술하지 않아도 예술가가 아니어도 이 영화, 다시 시작하기 두려운 춘삼월에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우린 예술을 못해도 그것으로 울고 웃을 수 있으니, 봄이 되지 않아도 꽃피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 아니던가. 그래, 얼마든지 영화로 거울을 깨고 내안에 본성을 확인해도 좋을 영화이다. 그렇게 깨부수고 발견한 나만의 그것, 당신도 나도 그건 꼭꼭 숨었던 ‘흑조’가 아니라 한 송이 ‘흑초’ 이었음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비록 애타는 가슴으로 까맣게 타버린 꽃이라도 그을린 재를 모아 다시 부활하는 만개의 봄날이면 어떨까 싶다. 완전히 연소해진 잿더미 속에서도 꿋꿋이 불사하여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새. 어느 바람부는 봄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그런 날 우린 ‘백조’도 아닌 ‘흑조’도 아닌 한 마리의 ‘불사조’로 다시 피는 꽃이 되자. 비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더라도. 예술가는 적고 대중은 많더라도. 봄은 느끼고 시작하는 대중들의 것이므로. 우리는 그렇게 인생이라는 예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므로.



완벽이란 건 통제를 통해 이루어 지는 게 아니야.
해방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지.
스스로 놀래킴으로써 관객을 놀래키는 거야.
탁월함, 그건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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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1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보들의 결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은 어떻게 살아도 평생 바보는 아닐 줄 알았던 자신이 결국 바보일 수 밖에 없었던 당시 현실을 실컷 욕설하는 글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욕보이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이다. 존 케네디 툴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 작가는 아무래도 ‘문학’으로 자신을 조롱하며 ‘글재주’로 현실을 견뎌낸 것 같다. 뭐 대부분의 문인들이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겐 문학이 왜 희망이 되지 못했을까. 아니 왜 끝까지 희망으로 문학을 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다른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니 할 줄 아는 게 오로지 문학만 있었다면 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소설은 많이 아는 자가 많이 아는 것을 토로하는 거대, 거사의 현장이었다. 대체로 어떤 아비규환의 참사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나는 그의 지속적인 토악질이 고통스러웠다. 책을 덮고도 사건현장인 그곳, 그가 달아난 연민의 구덩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그건 페이지를 넘길수록 두터워진 슬픔의 더께때문 이었을까. 이 작품은 주인공이 웃길수록, 상황이 기가 찰수록 더더욱 쓸쓸해지는 구석이 있다. 불행히도 나는 오백 오십 페이지나 이 서러움을 견디고 참아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묵직한 알 수 없음의 실체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건 애환이 아니라 애증이었다. 전대미문의 애증후박(愛憎厚薄) 코미디, 미국은 이런 이야기가 대단히 잘 먹히는 나라였다.

허나, 여긴 미국이 아니고 나는 미국인이 아닌지라 이 작품이 전혀 웃겨주는 코미디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식으로 연출해보라 한다면 가족간 약간의 신파가 섞인 新조폭계(?) 블랙 컬트무비쯤 될까. 우리네 조폭코미디는 ‘컬트’라기 보다는 ‘컬투’에 가까운데 분위기는 오히려 시니컬한 비극쪽으로 이해되었다. 너무 웃기면 끝에 가서 눈물도 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여러 번 당하고 나니 결국 눈물도 슬픔이 되는 것이었다. 그건 이 작품을 집필한 작가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더더욱 막지 못하는 어떤 목메이는 숙연함이라 고백하고 싶을 정도로.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美德)은 작가와 어머니의 실제 관계가 본 서사에 투사되었다는 그림자효과일 것이지만 그러한 작가는 정작 이 작품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자살하였다는 것 또한 충격적인 악덕(惡德)일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끈질긴 투항으로 작가 사후에 출간된 이 작품이 퓰리쳐 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다시 봐도 대견한 공덕(功德)의 드라마였다. 그렇기에 우린 이 작품에 후덕(厚德)한 인심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이 책은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바보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니 정작 바보를 명백히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책에서 ‘바보’는 등장하지 않는다. 혹시 그들이 ‘바보’로 보였다면 그 바보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결탁’하지 않는다. 그 어떤 무엇을 결탁하여도 어짜피 바보 짓일텐데 그건 바보를 두 번 죽이는 일 아닌가. 그들은 그럴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차라리 온전한 바보였다면 조금 덜 슬펐을까. 그들은 딱 바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영리했다. 다만, 그들이 한데 모인 모양새를 보니 마치 대단한 인권신장을 위해 집회를 결성한 듯 보여지기는 했다. 이들의 탄탄한 결속력이야 어짜피 소설가의 몫일 뿐이었다. 다행히 검둥이, 뜨내기, 부랑자, 이방인, 퇴역 빈민등으로 구성된 뉴올리언스 프렌치 쿼터 구역의 주민들은 단지 모여들었을 뿐인데 ‘버번거리 광란의 사고’라는 기사로 대서특필된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흥행에 성공한 것이요, 스타로 탄생된 인물도 있었으니 ‘바보들의 결탁’은 이들 바보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젠 체하는 다수 ‘바보’들의 시각일 뿐이었다. ‘바보’는 부끄러운 오해였고 ‘결탁’은 치졸한 오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똑똑했으며 그 모임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모아놓고 보니 그들은 모두 인생의 패배자요, 하층민인 것은 더욱 분명해 보였다. 다만, 그들은 바보로 보였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결탁도 의미성을 부여받지 못할 것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성되었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그 모임이 어떤 중요한 결정의 순간임을 암시하는 生의 갈림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보도 모이고 보면 문학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 바보도 그려놓고 보니 이토록 생생한 주연으로 탄생하였다는 것, 모임아닌 모임, 이 한 번의 결탁은 허구이상의 현실감을 제공하며 철저한 비현실속으로 독자를 몰입하게 하였다. 그것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갈 땐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덮고 난 후 서서히 밀려드는 웅장함이었달까. 바보에 압도된 중력의 힘은 마치 거구의 육체로 등장한 주인공의 쇼크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남들은 죽는다고 웃어 대지만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얼마나 죽도록 슬프단 말인가. 이 책은 바로 실컷 웃다가 천천히 울게 되는, 울다가 다시 살이 돋아나는 그런 책이다. 이 책에서 다양한 종류의 바보들이 결탁하여 앞으로 무언가를 펼칠 것으로 기대되는 최초 발기대회쯤으로 보이는 그들의 마지막 아우성은 애처롭게도 어리숙한 사복경찰의 검거로 중단된다. 잡으려고만 작정하면 모두 하나같이 잡혀들어 갈 이유가 있었기에 그들은 우발적으로 모인 것이 필연적으로 흩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그네이셔스는 백화점 앞에서 그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불량한 행색 때문에 경찰의 불시 검문을 받지 않았던가. That's all right !, 그러므로 ‘바보들의 결탁’은 결과적으로 바보짓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단 한명 우리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는 가장 극적인 탈출을 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 같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한다. 허나 그가 그곳을 탈출하였다고 과연 바보의 삶을 버리고 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짜피 또 다른 형식의 바보로 살아가기 위한 변장이나 회피의 연장은 아니었을까.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과거나 미래를 말하지 않는 작품이었다. 이그네이셔스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바보가 되었으며, 과연 앞으로도 계속 바보로 살아갈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만큼이나 기구한 작가의 운명때문이기도 했을까. 바보는 탈출하는 순간 그러한 마음을 먹는 순간 더 이상 바보로 행복하기는 힘들다. 물론, 서사의 중간에 여자친구와의 튀는 학창시절이, 마찬가지로 여자친구와의 불안한 미래가 언급되긴 했지만 그건 통털어 지금의 이그네이셔스를 더 부각하는 참고사항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그는 아무리 돌아가고 아무리 나아가도 지금 제자리, 그 육중한 거구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를 것으로 보였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시점에만, 오늘의 시간에만 매달려 하루하루 살아가는 허무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내일 희망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와 노동여건때문 만은 아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가는 마치 자신을 변호하듯이 이그네이셔스가 이렇게 된 이유를 꽤 사회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염된 미시시피강을 아버지를 대체하는 상징적 존재로 미화시키기 위한 미국의 노력을 현실과의 소통 실패문제로 진단하며 전 예술분야에 걸친 미국의 이러한 위선때문에 자신은 소통이 부재된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설파하고 있었다. 자연의 진실마저 왜곡하고 변형하는 그들과 소통하고 싶지 않다는 신념은 옳고도 아름다웠다. 자연과 사회와 인간과의 소통에 실패한 이그네이셔스는 누가 뭐래도 초록색 사냥모자와 장밋빛 앵무새를 개성있게 코디하며 보란듯이 자신을 과장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사회에 어울리는 유사색이 아니라 정반대의 보색으로 자아를 배색한 그는 결코 크리에이티브한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그의 주변엔 하나같이 튀는 선글라스와 우스꽝스런 악세사리, 싸구려 텍스쳐의 옷감등으로 억압된 자아를 분출하는 지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마치 가장무도회를 참가하듯 각자 개성이 넘치다 못해 시각적 요소만으로도 공공질서에 피해를 주는 것으로까지 묘사된다. 동등하게 수상해 보이는 이들은 미국식 ‘버티기 정신’과 ‘요령’을 타고난 자들이기에 오가는 말 또한 자기중심적이며, 행동거지 또한 감정적이다. 속사포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는 이들 간의 대화는 1960년대 미국 뉴올리언스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진지하게 상기시키며 그들만의 독특한 지방색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대가 다르며 나라가 달랐던 내가 모두 공감할 순 없었지만 뭐랄까, 무엇보다 ‘바보’된 그들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보는 아니었지만 바보로 보여져 바보같아진 그 ‘마음’ 만큼은.

몇 가지 의미심장했던 장치들을 떠올려 본다. 표면적으로 그의 첫인상이 되 버린 ‘초록색 사냥모자’의 초록색, 그것은 왜 초록의 계절과 초록의 내일이 되지 못했을까. 이 책에서 이그네이셔스의 첫 번째 직장 ‘리바이 팬츠’사(혹시, 리바이스 청바지의 회사인가 싶었던)의 여든이 넘은 경리보조 미스 트릭시도 하필 초록색 셀룰로이드 챙모자를 쓰고 출퇴근을 한다. 그 외에도 작가는 서사에서 초록이나 파랑을 그다지 싱그럽게 묘사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 답은 바로 리바이 팬츠사의 안주인 리바이 부인에게 있었다. 도저히 60년대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그녀의 대저택엔 딱 하나 색상보정이 되지 않은 불량한 TV가 있었는데 그 화면에 등장한 배우의 얼굴은 온통 초록색이었던 것. 총천연색이 되지 못한 배우의 초록 얼굴은 흡사 시체를 연상시키며 공포스럽고 혐오스런 인간군상을 표상한 것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이그네이셔스의 모자나 곧 죽음을 앞둔 트릭시 부인의 모자나 미국의 보수기득권 층에서 보기엔 매한가지 초록의 흉물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이 작품에서 가장 촌철같은 철학적 메시지로 자주 언급되는 철학서는 어떤 의미에서 이그네이셔스의 좌우명이자 우리네 삶의 아포리즘이 아니었을까. 중세사상의 기반을 닦은 철학서 <철학의 위안>에서 핵심개념으로 등장하는 로타 포르투나이rota Fortunae, 즉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 책을 덮고 나자 문득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바로 ‘우리의 운명은 행운과 불운이 주기적으로 번갈아 찾아온다’는 이그네이셔스의 말을 빌어 그의 탈출에 행운을 기원함과 동시에 내게도 운발의 전이를 소원하는 일말의 기대때문이었다. 여지껏 내 삶이 불운이었다면 앞으로는 행운일 수 있다는 희망, 오늘 잠시 행운이었다면 다음에 찾아 올 불운을 잊지 않으며 지금 오만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그것은 내가 오백페이지 넘는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따스한 잠언이었다. 이 책은 ‘바보’의 유머라기 보다 ‘현자’의 충고에 가까웠다.

겉으로 바보로 보였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지적이고 철학적이었다는 것을 일일이 증명이라도 하듯 작가는 이그네이셔스의 언어, 문학적 능력을 열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작중에서 그는 ‘구어체’와 ‘문어체’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인물로 표현되었는데 그는 주로 ‘대화’할 때 세계 언어를 쓰는 사람이었고, ‘저술’할 때 세계 철학을 반영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말빨과 글빨이 되는 문학적 소양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일상의 대화에서 ‘벨탄샤웅(독일어, 세계관’), ‘세구로(스페인어, 물론입니다’), ‘레자프리캥(불어, 아프리카인들)’등의 외국어를 관용적으로 사용하며 언어의 유희를 일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의 친구가 된 이탈리아계 아주머니가 사용하는 이탈리아 방언에서부터 라틴어, 이디시어까지 때와 곳을 불문하고 자유자재로 튀어나오는 그의 언어구사력은 말들의 잔치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작가가 부여한 주인공의 능력은 혹시 작가 자신의 무기이자 매력은 아니었을지. 이러한 유희적 말장난과는 사뭇 다르게 그가 작정하고 연작한 근로청년의 ‘일기’나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글은 그의 사고가 마냥 엉뚱하고 터무니 없는 무지에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일기는 무겁도록 철학적이었고 편지는 차갑도록 논리적이었다. 어떤 반전과도 같이 글로써는 누구보다 지적인 면모를 보여준 이그네이셔스의 ‘저술작업’을 읽는 일은 이 작품을 넘기면서 가장 흥분되고도 놀라운 참 기쁜 순간이었다.

특히, 이그네이셔스가 리바이 팬츠사에 취직해 사장의 서명으로 거래처에 보낸 짧은 서한은 그의 세계관과 논리체계를 한눈에 증명하는 짧은 뉴스였으며 이 책에서 가장 짜릿한 시놉시스였다. 그건 거의 작품의 주제였고 작가가 에둘러 하고 싶었던 속마음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고발장으로 눙쳐진 그의 농담에 허가 찔리기라도 한듯 나는 착잡해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자사 제품의 바지기장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포목점 사장에게 그는 상대의 황폐한 세계관과 상업적 발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뒤떨어진 마인드를 신랄하게 지적한다. 한낱 뭣도 모르는 치기로 비롯된 억지라 하기엔 진실로 아까운 문장들이었다. 그저 전통적인 방식의 바지 기장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을 벗어난 칠부 바지를 남성패션의 대명사로 만들지 못하는 기업은 광고, 판촉의 전략에 전혀 창의적 마인드가 없다는 것과, 디자인과 재봉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리바이 팬츠’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유통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판매업자의 자질이라 꼬집은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처음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는 여타의 글에서도 대체로 투쟁적, 호전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사상으로서는 누구보다 혁명적인 환타지를 논리화하곤 했다. 이것은 대부분 현실에 무능력한 자들이 글로써 세상에 항거하는 전형적인 무혈문학의 한 장르일 것이다. 그런데 반복되는 이 글들의 기저에 흐르는 하나된 공통점이 있었다. 책을 덮고 서서히 떠오른 단어, 그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바보에겐 주어지지 않는 상대적 ‘박탈’이었다. 그는 혹시 새로운 발상, 새로운 형식을 수용하지 못하는 기득권 세력을 향해 혼자서 바위에 계란 던지듯 미친 척하고 그까짓 종이 한 장을 휙, 날려 보낸 건 아닐까. 실패한 사람들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고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겐 무조건 편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자기식으로 울분의 펜을 휘갈긴 것은 아닐까. 그것은 혹시나 완성도가 높지 않았을지 모를(그러나 누구보다 새롭다고 생각했을) 자신의 원고를 문전박대한 세상에 대한 분노의 항거는 아니었을까. 그의 방바닥에 온갖 잡지사에 보내려던 그 많던 원고들은 쓰디쓴 시위의 각혈이 아니었을까. 그 서한이 오십만 달러의 소송에 휘말리게 될 운명이었던 것은 역으로 자신의 글이 오십만 달러의 값어치가 있다는 타당한 계산에서 비롯된 반증은 아니었을까.

비록 소설이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그네이셔스가 어머니와의 갈등을 풀지 못하고 끝내 헤어지는 것으로(마지막 여자친구의 구원등판은 너무 허리우드적이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끝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파멸의 주체이자 평화의 적군이었다. 그의 집 현관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이라는 문구가, 집 정면 벽에는 ‘선의의 인간들에게 평화를’이라고 써 있었다고 하던가. 악의가 아닌 선의를 가진 이그네이셔스가 평화를 얻기 위해 치룬 댓가는 어머니와의 이별이었다는 것이 나는 가장 가슴아팠다. 그건 문학으로 부자관계를 이별시킨 마지막 자기예언으로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성공을 기대한 독선적인 어머니와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결국 갈등의 정점에서 그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자살로 生을 마감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의 입신을 위해 마치 잘 짜여진 각본의 개성있는 조연으로 인상깊은 연기를 펼치신 한명의 배우와도 같았다. 그렇다. 소설가는 그 둘 중 하나로 충분할 것이다. 나는 이번 비운의 소설가 한 사람과 뛰어난 배우 한 사람으로 인해 그들의 기이한 예술적 정신에 크게 감명받았다. 사악한 문명속에서 추락을 막아주는 안전장치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유문이 막힌다’는 그의 재치는 평소 ‘횡경막이 껄끄럽다’와 ‘십이지장에서 멈추었다’는 나만의 문장노트에 추가하고 싶은 애교였다. 그가 제시한 두 가지 트라우마, 배턴루지의 강사직 면접 탈락과 동거동락하던 개의 죽음은 한 인간의 내적, 외적 동기를 희석시키는 적절한 사건으로 구성상 치밀했다고 느껴진다. 그 외 검거실적이 없어 화장실에 감금되던 순찰경관 민큐소, 오프닝 나이트때 새와 함께 대박을 친 바텐더 달린, 포르노 유포검거에 큰 공로를 끼친 꼬마건달 조지, 부랑자와 검둥이, 청소부 사이에서 번민하던 뒷골목 자아 존스, 그들의 약점만을 공략하던 ‘기쁨의 밤’의 영업주 레이나, 이그네이셔스로 회사생활의 참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관리자 곤잘레스,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치매이었던 귀여운 바보 미스 트릭시, 아이들을 통해 남편을 조종하려던 리바이 부인, 또 그것을 적당히 속아 넘어가준 현명한 바보 리바이 사장, 철도회사에서 사십오년 근무한 퇴직연금으로 데이트하던 엄마의 남자친구 클로드, 그리고 그의 둘도 없는 천생연분 여자친구 머나, 이들 모두에게 나는 ‘미국에선 유죄로 밝혀질 때까지는 누구든 무죄’라는 이그네이셔스의 충고를 빌어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다시 바보가 그립다. 이제 바보도 전략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라는 바보 프로젝트가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합류한지 오래이다. 바보를 생각하자니 퍼뜩 자신을 ‘바보’로 낮추어 부른 김수환 추기경이 그리워진다. 이 책에서의 바보는 그러한 따스한 바보가 아니고 성공하지 못한 부류, 돈없고 빽없는 그러나 자존심만 있는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보여진다. 스스로 자각하는 바보가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바보인 것이다. 모두 다 진정한 진짜배기 바보는 아닌 것 아닐까. 정말 바보들은 자신들의 자화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실제 바보가 아니면서 바보가 편할 때, 바보가 유리할 때, 바보가 좋아보일 때의 그 바보의 개념만 원했던 것은 아닐까. 오늘 내가 슬퍼지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스스로 생각하는 바보도 남들이 바라보는 바보도 아닌 나는 어떤 종류의 바보일까,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모든 욕심 버리고 바보같이 살고 싶다가도 한편 세상모르는 바보로 비쳐지는 것이 두려운 이 얄팍한 갈등 때문이다. 산다는 게 바보여야 할 때도 있겠지만 누구보다 현자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 합리화하며, 늘상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속세에 연연하는 이 미련을 그들을 통해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동감을 말하고 싶지 않은, 적당히 눈감아 주고 또 적당히 웃어주며 사는 것이 편하다는 충고를 해주고 싶은 비겁함 때문이다.

오, 포르투나, 그대 변덕스러운 여신이여. 이번엔 어느 차례의 수레바퀴이실 런가. 삼신할머니의 랜덤만큼이나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여. 나 오늘만큼은 그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려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복권을 바라는 일확천금의 유혹에서 벗어나 보고자 한다. 그건 행운이냐 불운이냐 눈감고 바퀴를 돌려대는 댁들의 일정일뿐 나의 계획표는 내 손안에 든 나만의 펜으로 작성하려 한다. 문득 이 책에서 한 번도 제대로 공연하지 못한 장밋빛 앵무새가 떠오른다. 장밋빛 꿈을 꾸던 그 새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앵무새를 슬그머니 두줄긋고 그 위에 파란 잉크로 ‘행복의 파랑새’라고 적어본다. 그리곤, 그 옆에 ‘바보’ 이렇게 새겨본다. ‘사랑해’ 말하고 나면 더 사랑하고 싶어지듯 ‘바보’ 하고 나니 바보도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혹시 그대에게도 이 바보짓은 유효할지 모르겠다. 그래 가끔은 바보도 하늘을 보자! 우린 서로를 바보라 불러도 행복해지면 되는 사람들, 저 하늘을 보며 바보처럼 활짝 웃어주면 그만인 사람들, 그렇게 결탁하여 오늘 못다한 혹시 행운일지 모를 내일을 맞이할 사람들, 그리고 남몰래 그들을 기다리는 바보같은 나, 정말 바보도 좋을 사람들이니까. 우리의 결탁은 한낱 바보짓만은 아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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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 Unknow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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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개봉과 동시에 보았기에 지인들의 평을 들을 수 없었다. 결말의 보안 유지를 위해 전세계 동시 개봉을 결정했다는 아주 기초적인 정보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영화관에 가지 않으면서 책으로 선회한 나는 오로지 이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뿐. 그리고 영화를 보고 원작이 몹시 궁금해지긴 처음이라-이런 경우 원작이 영화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를 포함하여-그런데 또 막상 원작을 집어 들려니 이미 알고 있는 반전의 실체를 자꾸 분석하려 들 것이 뻔하므로-이상야릇한 기분으로 극장을 빠져나왔다. 결론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주 들어 <언노운>의 영화관계자들의 비평을 보니 반전에 대한 실망이 많았기로 나는 비관계자 입장에서 좋았던 점을 기억해보고 싶다.

 먼저, 나는 이 작품의 배경인 베를린이 참 좋았다. 독일에 가보지 못했기에 겨울배경의 베를린은 회색 그 이상의 다크그레이였다고 할까. 마틴 해리스역으로 분한 리암니슨도 좋았지만 독일출신 다이앤 크루거(Diane Kruger, 1976 년생)는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찾아보니 약 5년 전에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2005>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미스터리한 인물로 등장했던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사라진 여자친구로 등장하며 시종일관 차갑고도 지적인 매력을 잃지 않았다. 마틴 해리스의 아내로 등장한 미국배우 재뉴어리 존스는 낯은 익었지만 출연작이 생각나지 않았고 이번 영화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아무래도 영국풍보다는 독일풍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자체가 여주인공들의 대결구도나 로맨스를 말하는 장르가 아닌지라 여자 배우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였지만 다이앤 크루거는 분량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듯하다.




 


< 다이앤 크루거 주연,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 2005>


마틴 해리스 박사가 베를린에 도착해 교통사고를 당하는 초반부 장면에서 바로 그가 타고 있던 택시를 운전한 여성이 다이앤 크루거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공항과 호텔앞에 즐비한 모든 택시는 화이트 벤츠였다는 것, 그리고 곧 처참하게 물에 빠져 박살이 났다는 것, 그런데 유리창을 무지막지하게 부수고 탈출하는 주인공도 바로 그녀였다는 것, 미모의 여기사는 설상가상 정신잃은 마틴 박사까지 구출했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의 액션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활약덕에 그녀가 마틴 박사의 사건에 개입이 되었을 것이라는 예상, 그리고 꽤 비중있는 조연이겠구나 하는 것. 후자는 맞았건만, 전자는 보기 좋게 아니었다.



박사는 72시간만에 깨어나 다시 호텔로 간후 아내와 재회하지만 아내는 자신을 몰라보고 누군가 엉뚱한 사람이 자신이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나 혼자 바보 된 상황인 것이다. 처음엔 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생각했지만 점점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 그가 기억을 더듬어 원래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혼자 사건을 추적한다는 설정은 그다지 새로운 발상은 아니었다. 박사가 죽어야 하는 이유 뒤에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경우 대개 아내가 치정에 얽혀있거나 스파이와 관련되어 감쪽같은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오래전부터 실행되어온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정도. 만약 극적으로 자신을 찾게 된다하면 주변인의 배신에 가슴아파 하며 그들에게 복수를 한 후 최초로 자신을 구해준 택시운전사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엔딩처리 될 것이 자명해보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 공식과도 같은 '잃어버린(빼앗긴) 자아찾기'에서 두가지 차별화 전략을 내세웠다. 하나는 배후조직의 음모(테러의 목적)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연출속에서 나름 21세기 적으로 신선했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다시 찾게 된 자아가 원래 자아대로 살지 않고 우리를 배반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우리를 위로한 결과가 된다는 것. 여기서 이 영화가 그토록 차별화를 선언한 ‘반전’의 물음표는 아마도 ‘지금 당신이 찾고 있는 자신이 진짜 자신인가’에 해당하는 질문이 아닐까. 지금 누군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 음모와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전 당신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야 했을 음모도 있었다면, 하고 말이다. 혹시 그 음모의 희생양이 당신이라면 당신이 찾고자 하는 당신의 원래 모습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아니 찾을 수 있기는 한 것일까에 대한 수수께끼 그것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찾고자 하는 당신이 당신이 찾아야 하는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입증 할 것인지, 하는 허를 찔린 듯한 이 질문은 영화 전반 내내 극적인 긴장감을 유도해 내는 데 성공한 듯 하다. 내가 아는 내가 나의 진짜가 아니라는 진실, 그것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웃기지만 아니 웃기지도 않지만 슬픈, 아니 슬프진 않지만 우스운 정말 알 수 없는 비현실. 영화는 그것을 현실화하였다.

사실, 이 궁금증을 해결하는데 다이앤 크루거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바텐더로 일하며 돈을 모아 영주권을 얻고자 하는 불법체류자로서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해나가던 이방인이자 하층계급의 인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힘없고 능력없어 뵈는 젊은 처자가 해리스 박사에겐 유일한 의지가 된다. 그녀는 단순한 거래가 일단락 된 뒤에도 해리스 박사를 위험에서 또 한번 구출해내는 수호천사의 역할을 마다 않는다. 우연히 국제적 사건에 휘말리게 된 처자가 꼭 그러했어야 할 당위성을 나는 쉽게 찾을 수 없었지만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는 감성의 공감대를 두 배우가 잘 이끌어 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영상이 주는 시각적 개연성의 효과이자 영화만이 제공하는 매력일 것이다.

이 작품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파괴적이고 거대하진 않으나 과장없이 관객들에게 생각의 여지를 제공한 점이 장점인 영화였다. 박사가 헤메이는 눈내리는 베를린 거리는 아마 원작과는 상이한 연출인 듯한데(원작의 출장은 파리로 확인) 택시가 사정없이 다리밑으로 추락하는 신, 후진으로 도망치던 거리 추격신, 호텔 폭파신 등은 내 경우 아이와 관람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또 하나, 병원 간호가사 알려주었던 전직 동독 스파이가 동료에게 배신하지 않기 위해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는 설정도 의외로 여운을 던져주며 눈길을 끌었는데 이는 관객을 위한 각색의 묘미로 보여진다.

이번 영화에서 나는 늘 테러의 주체로 등장하는 이슬람계에서 벗어나 테러의 주체는 누가되었건 그 테러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임을 깨우치며 기분좋게 반전을 즐겼다. 반전의 파워가 어찌되었건 그건 보기드문 작품임에는 분명했다. 테러를 계획하는 이유에서도 단순한 보복이나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GMO'(유전자 변형농산물)과 같은 인류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이슈가 등장한 점도 의미있었다. 아마 원작에서였다면 사람의 기억과 자아의 합체,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간의 심도높은 성찰을 엿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로도 짧았지만 내 기억만으로 나를 증명할 수는 없으며, 내가 아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영화가 제공하는 메시지를 무리없이 전달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원작을 먼저보고 영화를 보았다면 나는 어떠하였을까. 그때도 반전이 새롭지 않다는 평가에 반기를 들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할 때 이 영화에서의 반전은 주인공이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군지 알게 되었지만 갑자기 그와 일치되지 않게 정의로와진 위선이 아니었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우리로선 당연한 반가움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로서는 자신이 찾게된 자신을 (원한다 해도)벗어나기 힘든 것이 더 당연한 인지상정 아닐까. 동료의 배신과 생명의 위협이라는 조건부와 상관없이 약간의 갈등도 없었던 주인공의 단호한 태도는 좀 아쉬웠다. 그래도 같이 살던 여자로부터 다른 여자로 턴하는 방향인데 일말의 갸우뚱은 필요치 않냐는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미국영화의 옥에 티같은 한계이기도 한데 보스니아 내전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지나(다이앤 크루거)를 위해(?), 아니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그녀 때문에 마치 은혜를 베풀듯 갑자기 테러를 온몸으로 막아 내고 인류건강에 이바지 할 주인공으로 변모하게 되는 그 영웅심, 미국 영화의 만고불변의 진리, 그것은 어쩌면 가장 큰 이득을 위해 온갖 종류의 테러와 전쟁을 계획해 내는 미국 스스로를 향한 예술적 단죄이자 문화적 보상은 아닐런지. 그런데 더 큰 진실은 늘상 알면서도 그것에 울고 그것에 우는 우리네 정많은 인간됨은 아닐지.

그녀를 생각하며 독일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 유난히도 겨울을 싫어하지만 만약 겨울에 꼭 가야할 여행지가 있다면 나는 그곳이 독일이길 소원할 것이다. 나는 지적인 눈물이 좋다. 리암 니슨은 우리 나이로 환갑일 터인데 다음에도 액션을 하실런지 궁금하다. 다이앤 크루거는 아무래도 미스터리 장르에 어울리는 외모인데 이번 액션도 근사했다. 두사람은 나이차와 상관없이 지적으로 잘 어울렸다. 가는 겨울이, 혹 아쉽다면 이 영화의 흩날리는 눈발에 스산한 마음을 맡겨보면 어떨까. 차도녀는 역시 겨울이 제격 아닌가. 다가오는 봄이 살며시 두려워진 이 변덕의 미련이야 누구를 탓하리오만은 삶은 다행히도, 나를 대신해주는 또 다른 인생이 있더라는 것. 겨울이여, 잠시만 기다려 다오. 아직은 더 쓸쓸해지고 싶었다네, 나 아직은 봄처녀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네.
 


-다이앤 크루거 - 독일, 금발, 선글라스 차도녀 종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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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2-2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배경인 영화가 좋긴하지요.
근데 허리우드풍일 것 같아 일단 좀 꺼려져요.
책이 더 좋다는 말도 있고...
마지막 쓰신 글에서 풉~
저도 얼굴이 참 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문제는 도시적이지는 않다는 게 흠이어요.ㅋㅋ

한사람 2011-02-24 14:33   좋아요 0 | URL

얼굴은 찬데 도시적이지는 않다...음...
상상이 어렵다는^^
슬쩍 책 정보를 보니 영화와는 많이 다르더라구요
완전 출장배경부터가 파리니까요
영화에선 아무래도 삭제된 서사가 많을듯 하구요

책을 먼저 봤어야 하는데....

그럼 반전은 완전 충격이었을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