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버리기 연습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집나간 당신을 찾습니다

어떤 쪽인가 하면 나는 당연 생각이 넘쳐나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쪽이었다.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생각이 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추 삼십년 전쯤으로 올라간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 내게 어른들은 대체로 '성숙한 아이'라 칭하곤 했다. 실제로 신체발육 또한 초등학교에 거의 완성된 거나 다름없는 키였는데 형제가 없어 주로 어른들 틈에서 자란 나는 자연스레 어렸을 적부터 어른들과 인생의 대화(?)를 터 온 구력도 상당하다. 그 후 전공이나 사회생활에서도 주로 생각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임무를 오래 하다보니 나는 그야말로 평생 생각에 쌓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나는 심각한 '생각병' 환자인 것을 자각하는 쪽이었달까. 적어도 미처 생각을 못하였네, 개념이 없네 등의 '생각없다'는 쪽의 말은 내 인생 최대의 욕으로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나를 위한 책이겠거니 하고 이 책을 읽어야지 다짐만 하고 있다 그만 쌓아놓고 어영부영 놓치게 된 사연일랑은 이제와 돌이켜보니 어이없게도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내가 친 덫에 잡힌 꼴이었다. 작년 말에 나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반백이 다 될 정도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고 그토록 무거웠던 짐이었던 만큼 당시 상황에서 '생각 버리기'는 말처럼 쉬울 것 같지가 않아 다음으로 무기한 연기, 지레 포기했던 터 였다. 뭔가 생각을 더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여, 이상하게도 내게 이 책은 어떤 결심이 필요했고 마치 그동안 다락방 한 켠에 쌓아둔 오래된 책들을 죄다 짊어지고 내다 버리는 심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어내는 일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어찌 보면 안쓰러웠다고까지 느껴진다. 생각을 버린다는 건 결국 그토록 생각을 쌓아온 나를 버리는 것이었고 그전에 이미 그리된 나를 깨닫고 인정해야 하는 일이기에 나는 그 고통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버리기 아깝고, 애석한 나를 끝까지 잡고도 싶었던 것일까. 여지껏 생각해온 시간만을 생각하더라도 솔직히, 그렇다. 그 놈의 습관이자 그 간의 패턴이자 그 사이 내 삶이 되어버린 생각이라는 '불치병'이 말이다.

이 책이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바로 그 불치병에 대한 처방전이라는 기대에 앞서 낱낱이도 내 병리현상을 나열해 주었다는 데 있을 듯하다. 참 정확하고도 간결했고 여타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을 만큼 적나라했다. 평소에 나는 왜 이럴까 하며 막연하게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속시원하게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차근차근 따져가며 병의 원인을 설명해주고 약을 지어 주는 방식은 쉽고도 단순한 형식이었지만, 우린 알고 있다. 쉽게 설명하고 환자에게 편하게 이해시킨 후 신뢰로 약을 복용하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평소 불교의 무념무상(無念無想)이 생각道의 해탈의 경지라 여겨온 나는 늘 이런 종류의 책에 솔깃한 처지였지만 막상 기대만큼 알맹이가 탄탄한 경우는 별로 기억나지 않았다. 이 책 역시 베스트 셀러라고 해도 뜬구름 잡는 처방이 주가되는 건 아닐까 반신반의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난 지금 한결 머릿속이 맑아졌다는 느낌은 뭐랄까, 어디로 튈지 몰라 허공을 떠돌던 잡다한 생각들이 가지런히 서랍정리라도 된 느낌이랄까. 나는 책을 덮고 난 최초의 느낌만은 잃어버리지 않고 가급적 그 기억을 잘 표현해 내고 싶은 쪽인데 가장 비슷한 심정으로 맹자의 '구방심'(求放心, 흩어져 달아나는 마음을 잡는 일)공부라도 호되게 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끝도 없이 떠오르는 상념과 불안으로 무언가 생각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패배감이 신년을 가득채운 채 달력만 바라보고 있던 차였다. 맹자는 바로 이러한 흩어지는 마음(放心)을 끌어 모아 단속하는 것이 학문에 정진하는 자세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던 개가 도망가면 찾으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이 도망가면 찾으려 하질 않는다고 말이다. 맹자의 '구방심'(求放心)은 이러한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일, 집나간 마음을 잘 간수하는 일이 방황하지 않는 도리라 하였기에 나는 이 책이 흡사 '구방심'(求放心)의 구체적 비법을 알려준 듯 느껴졌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그만 무지(無知)에 이른 생각병 환자야 말로 여기저기 떠다니는 생각을 그러모아 잘 붙들어야 할 가장 핵심대상일 것이기에. 지금 붙들지 않으면 언젠가는 미쳐 날뛰다가 결국 나를 잡아 버릴지도 모를 것이기에. 하여, 이 책은 대체로 '집나간 마음 다시 잡기'의 신년 독서편으로 유용했다.


人有鷄犬放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인유계견방즉지구지 유방심이부지구)
學問之道 無也 求其放心而已矣 (학문지도 무야 구기방심이이의)
-孟子, 告子章句上 十一

사람들은 제 집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그 즉시 알아채고 찾으러 다니면서도 정작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는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다. 학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도망가는 당신이여

이 책은 '생각 좀 줄여보자'는 데는 늘 분석만 장대하고 뚜렷한 결론이 없던 내게 보란 듯이 실천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방법은 공감과 설득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바로 뇌의 정보처리과정을 잘 이해한 후 오감을 활용해 뇌를 자극하라는 내용이었고 과학자가 아닌 스님이 제시한 것이기에 그 명상법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늘 접해온 스님의 수행과는 상이했다는 점이 아마도 이 책이 속세의 중생들을 위한 실용서로서 고유한 가치를 지니도록 했다는 생각이다.

나는 평소에 어떠한 고민이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대비해 실로 다각도의 종합적인 생각을 해왔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막상 그 다음날 내리는 결론을 볼 것 같으면 전날 밤 그렇게 밤을 지새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결정을 내리곤 했다. 즉, 생각을 안하느니만 못한 결정을 보고 내 스스로 고민에의 타당성에 의문을 가진 적이 많았다. 예를 들면 어짜피 떠나지 않을 여행이면서 여행계획을 자세하게 고민한다던지, 이직에는 마음이 없었으면서 스카우트된 상황과 구체적 일감을 미리 예상해본다던지 하는 소위 시간벌기용 고민의 습관을 떨치지 못한 경우였다. 마음속엔 이미 기울어진 답이 있으면서도 고민의 시간을 가진 후 결정된 것으로 하고 싶은 비겁함도 있었고 혹시 결정을 번복할 상황에 부딪힐지 모르니 미리 생각해 두자는 쓸데없는 치밀함도 있었다. 정작 다음날 그 결정에 소모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내 스스로도 어이없을 때가 많았다. 고민하는 밤이 되면 어짜피 내일이면 이 생각이 쓸모없을 줄 알면서도 이 생각 저 생각만은 중단하기 어려웠던 내 습관을 얼마나 고치고 싶었던가. 드디어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은 정보처리의 잘못된 관행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어쩌면 그 습관이 좋아 결정과는 상관없이 생각의 시간을 즐기고 즐긴 덕에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아예 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만큼은 다른 감각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절대쾌락으로 받아들였던 건 아닐까. 나의 경운, 너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사례로서 충분했다.

생각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나는 생각의 종류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다. 한자어로 생각을 찾아보면 그 쓰이는 말에 따라 생각의 배치는 더욱 다양하다. 같은 생각인데 고집스러워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념(念)이라 했다. 잡다한 생각을 잡념(雜念)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 책에서는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 힘을 '염력(念力)'이라 하며 알아차리는 능력으로서의 '의식의 센서'라 칭하고 있다. 흔히들 정신을 집중해 물체에 손을 대지 않고서도 위치를 옮기는 초능력을 염력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그만큼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다는 것이 힘들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둥둥 떠오르는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생각은 상(想)이라 했다.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은 머리에서 생각을 그리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일 게다. 이것저것 따져보는 생각은 우리가 잘 아는 사(思)라고 하며 개념이나 추리가 뛰어난 사람에게 사유(思惟)의 힘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려(慮)는 두루 생각하는 생각이나 묵직하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 우려(憂慮)가 된다고 할 때 해당되는 생각이다. 내가 생각할 때, 어떠한 생각이든 공통되는 것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 않고 그 운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느껴진다. 생각하는 사람은 정지해있는 것 같아도 사람으로부터의 생각은 결코 정지된 현상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으니 더더욱 이토록 가만있지 아니하는 '생각 버리기'는 곧 생각을 제 위치에 잘 간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방향으로 뻗어간 생각, 나도 모르게 귀결된 생각, 내 의도와 상관없이 솟아나온 생각, 쓸데없이 많아진 생각들이 각자의 생명성에 들떠 멀리 가출하도록 놔두지 않고 다시 잡아와 오순도순 살림을 잘 꾸리도록 관리하는 일, 그것은 생각관리자의 최종적 목표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생각이라는 것이 주차장처럼 장롱처럼 원래 보관소가 있었다는 말일까.

이 책의 저자 스님은 이러한 생각관리의 능력이야 말로 생각을 잘하는 사람이 갖춘 자신만의 경쟁력이라 말하는 듯하다. 스님은 생각이 도망치는 것을 뇌 속의 연인에게 달려가는 일이라 달콤하게 표현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 들수록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고 말이다. 나이를 먹으면 고집이 세어진다는 말과도 비슷하게도 들렸다. 이는 결국 반복된 생각의 프로세스를 바꾸지 않아 굳어진 탓이기 때문일 터이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원인도 과거로부터 엄청나게 축적되어온 생각이라는 잡음이 오감을 통해 느끼는 정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라는 말은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뼈아프면서도 짜릿한 깨우침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연륜만큼 생각이 깊어지고 그만큼 지혜로운 판단을 할 것 같아도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만 놀라울 뿐 기존의 생각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님은 그 원인이 그동안의 굳어진 데이터처리 방식 때문이며 지금 오감으로 느껴야 할 자극이 그로인해 뇌에서 차단되고 있는 것이라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오감을 통한 자극을 연습하는 일이 곧 생각병에서 탈출하는 길이라는 발상은 생각으로만 생각을 통제해보려던 기존 악습에 반전이자 서광에 다름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다른 대상이나 무엇에 도움을 받지 않고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꼭 구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악습을 고치기 위해 더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오랜 기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필수적 부담도 없었다.


...오감의 연인에게 돌아와주

앞서 말했지만 이 책은 불교적 깨우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외려 과학적 정보를 논리적으로 전달하려는 느낌을 받는다. 불교에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의 '생각 버리기'는 기독교에서의 '묵상과 명상(meditation)'과도 일맥상통한다. 대체로 이들은 떠오르는 생각을 잠재우고 침묵하자는 훈련의 하나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상 역시 머리로 애써 생각하려는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또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정작 오감으로 인식되는 정보들에는 무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님이 역설하는 건 바로 이 오감에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에 보다 예민하고도 능동적인 대처를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논리가 거듭 신선했다. 이 책은 추상의 개념서가 아닌 구체의 트레이닝 교본이었다.

나 역시 평소 누구보다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한 가지 일에 빠지면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내 집중력을 부러워 할수록 나는 어떤 블랙홀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내 안에선 집중에 빠져들지 않는 일은 제대로 일을 수행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져 어떤 일을 하건 간에 그 일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모든 정보와 감각을 차단하고 한 가지 생각에만 매달리는 패턴을 낳게 한 것이다. 이러한 습관은 남편과 대화할 때도 일방적으로 내 주장만 전달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게 되거나 밥을 먹고 TV를 볼 때에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듯 일상을 보내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 하나의 일이 해결되면 다시 다른 고민거리를 찾아 무아지경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몸과 마음을 부추겨 움직여 왔다. 무언가 빠져 있을 때라야만 나는 안정을 느끼고 제대로 일이 돌아간다고 느끼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스님은 이 과정이 뇌가 원하는 자극을 자신도 모르게 추적해 가는 일이라 한다. 그것이 고통이 될 지언정 사람은 그 자극을 쾌락으로 인지해 한번 이루어진 프로세스를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도박이나 마약과 다를 게 무엇인가. 괴로움에 중독된 무지몽매한 인간의 다같은 증상이었다. 즉, 다음에 비슷한 경우가 생기면 뇌는 익숙한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해 뇌 속의 연인을 찾아간다고 말이다. 나는 생각병의 후유증이 실로 생각보다 심한 케이스였다.

이 책에서 생각병에 시달린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처방으로 제시한 '말하고 듣고, 보고, 쓰고, 읽고, 먹고, 버리고, 접촉하고, 기른다'는 지침은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행동과 지금 느끼고 있는 감각에 집중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뇌 속의 연인만을 찾아가던 동선을 버리고 이제는 몸 바깥의 연인에게도 눈을 돌리라는 뜻이 아닐까. 가만보면 오감이라는 것은 나의 눈과 코, 입, 귀, 손으로 감지해야 하는 신체외부기관의 역할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눈과 코, 입과 귀, 손으로도 생각을 해야한다는 육체의 자연스런 반항기제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생각에 방해가 되나니 음악도 끄고 식사도 권하지 말고 나를 좀 내버려 두라는 말을 밥먹듯이 해왔는데 그건 정말 생각안에 빠져서 다른 신체를 쓸모없게 만들면서 조용히 죽어가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시각과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제대로 반응하는 일이 생각을 버리는 연습과정이라는 것이 이토록 당연하면서도 처음엔 참 아이러니 했다. 모든 오감에 집중하여 일일이 반응하게 되면 오히려 생각이 분수를 모르고 넘쳐나 피곤해질 것 같았기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버려야 할 생각이라 함은 뇌 속의 과다한 에너지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지금 보고있는 것을 세심하게 제대로 관찰하고, 지금 먹고 있는 것을 혀로 제대로 음미한다면 그 순간 과다한 욕구로부터의 쓸데없는 생각을 차단하는 긍정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다고. 뇌 속의 연인으로 달려가는 생각병의 바이러스를 잡을 수 있다고. 그런데 그것은 결국 어느 한곳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적인 생활감각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감을 사용치 않고 뇌 속에서만 맴도는 방식으로 자라난 생각은 기형적인 장애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순간을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인생을 살아 나간다는 적극적인 生의 전략으로도 들렸다. 상대에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상대의 표정변화를 놓치지 않고 무엇을 만지고 있다는 촉감에도 세심하다면 그것은 생각을 버리기 이전에 많은 좌절의 기억, 패배의 두려움, 외면의 상처를 딛고 씩씩하게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와 다를 게 무엇인가. 결국 자신의 온 감각에 충실하면 상대의 감각에도 성실히 반응하게 되어 원활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사회적으로 완성도 높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니 '생각을 버리는 것'은 곧 '불행을 버리는 것'의 다른 이름표가 아닐까.


...프라이드에 중독되지 말아요

그런데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절실히 와 닿았던 번뇌의 스위치 중 하나는 만(慢)이라는 마음이었다. 퍼뜩 자만심(自慢心)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나는 이 단어가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하고 반갑지 않았다. 스님은 이 번뇌가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걱정하고 조바심 내며 프라이드에 집착하는 탐욕'이라 하였다.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 책에서 만(慢)이라는 번뇌모드가 활성화되었을 때를 자주 언급하며 그 순간 끼어드는 생각의 잡음이 우리를 삐뚤어지게 한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흡사 허를 찔린듯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상대가 나를 과소평가 할까봐 나는 이쯤 되는 사람이라는 자기 자랑을 대화에 포진시키는 행위, 혹은 썩 칭찬할 내용도 아닌데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과다하게 상대를 추켜 세우는 행위, 진정으로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의례적으로 형식을 갖추는 행위, 내가 상대에게 이쯤했으니 상대도 당연히 나에게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보상심리, 사람들에게 욕을 들을까봐 미리 알리바이를 공표하고 자신을 변호하는 행위, 골고루 인정받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초조와 불안을 반복하는 심리, 다른 사람의 실패를 보고 슬며시 우월감에 빠지는 행위, 상대를 비난하고 얕봄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심리 등등...모두 다는 아니라 해도 당신과 나는 분명 이 모두에 속해 있다. 이러한 번뇌에 자유로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많건 적건 우린 상대와 자신을 반반씩 섞어가며 세상을 속여 온 경력들이 있다. 모든 만(慢)의 번뇌에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과시욕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과시욕의 밑바탕엔 '그렇지만 나는 못난 사람이다'라는 열등감도 뿌리를 내리고 있지 말이다. 만(慢)이라는 번뇌에 쫓겨 행동할 때에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드레날린이 활성화되어 흥분 상태이지만 이러한 고통은 뇌에 자극을 주게 되고 자극은 쾌락이라는 정보로 왜곡되며 뇌는 이 구조를 프로그램화하여 셋팅해주므로 우리는 이 시스템을 무한반복하면서 살아간다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이야기였다.

서평을 쓰게 되면서 많이 느꼈지만 정식작가가 아닌 아마추어들의 서평에 객관적인 평가가 가해질 때 우리들의 이러한 만(慢)의 번뇌는 극에 달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도 리뷰대회 참가글이니 정확하게 만(慢)의 번뇌의 영역안에 위치한다 할 것이다. 나 역시도 기대이상의 평가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며칠 우월감을 가졌다가 실망스런 평가를 받으면 혹시하고 타자의 성적에 의심을 품은 적이 있다.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말해놓고 어쩌면 좋은 평가일 때만 해당되는 계율을 적용했던 것은 아닐까. 작년 한해 일회성의 성취에 들떠 자신의 성공에 축하해 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솔직함이 은근히 부럽기도 했고 자신의 실패에 필요이상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을 보면 꼭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딱하기도 했다. 가끔 실망하는 사람에게 선택되어진 것이 곧 절대승리나 절대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위로도 해보았지만 이 책에선 그런 반응조차 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기분좋고 맛있는 먹이처럼 느껴지는 '하이에나의 습성'이라 말하고 있었다. 기존에 그렇게 함으로써 슬몃 기분이 좋아진 정보왜곡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생각의 잡음이 스며들었을 뿐 상대를 위한다는 생각과는 별개의 이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위로랍시고 몇 마디 남겨놓은 그 모든 순간들이 부끄러웠다. 결국 나는 내가 좋아 위로도 한 것이고 나 좋자고 칭찬도 비난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자기 평가에 집착하게 되면서 시작된 만(慢)의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자 다양한 분노 에너지의 결실이 아닐까 싶어 그만 마음이 울적해진다.

이 책에선 그러한 분노 에너지를 극대화시키지 않기 위해 인터넷에서의 커뮤니티에서 일체의 방문회수나 댓글에 마음을 닫을 것이며 주고받는 메일에서도 서로 자아를 자극하는 정보를 전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바로 번뇌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보이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마음을 속이는 행위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참(無慙)에 해당된다고 말이다. 또한 글로써 자신의 의견을 전할 때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내용으로 상대를 책망하거나 분노를 은연중에 전달하는 일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순간의 기록이기 때문에 영원히 분노의 증표가 된다는 것이다. 문자메시지나 여타 다른 글로 전달되는 정보에 감정이 아닌 사실적 정보들만을 전달하려 한다면 마치 고통이 줄어들어 쾌락을 느끼는 것 같은 착각에 중독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은 가장 얼굴이 달아오르는 충언이기도 했다. 우린 그동안 얼마나 짧은 글로써도 충분히 상대의 자아를 자극하고 그 순간 나의 존재를 분명히 하고자 무참(無慙)한 행위를 서슴치 않고 자행해 왔던가. 스님의 조언은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절대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성화하기 이전에 자신의 생각부터 정돈 하는 것이 더욱 생각있는 네티즌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 깨우쳐 주는 적절한 가르침임에 틀림없었다.


...있는 그대로 지켜가요

세상엔 방대한 정보들이 넘쳐나므로 더 자극적이고 더 충격적인 기사를 좇아 우린 오늘도 몇 개의 기사를 습관적으로 클릭하고 낚이고 걸려든 심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때론 무언의 대기에, 때론 공허의 바다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소셜 네트워크가 점점 인터넷에서 인간관계의 경쟁력으로 가시화되면서 우린 기계적이고도 가식적인 안부 인사나 의무성 일환의 감사의 댓글, 내용과 상관없는 품앗이 추천에 너무나 익숙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들에게 나를 알리려 글을 올리고 사진을 게시하고 음악을 걸어 놓고 누가 이런 일로 울었다 하면 하나같이 동감해주고 이런 일로 화가 났다 하면 약속이나 한듯이 같이 열을 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해주니 당신도 그러해야하는 것이 이 세계의 불문율이 되어버렸기에 만약 나와 같지 않으면 서운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스님의 글을 보니 그동안 나는 누군가 내 글에 동의해주면 그 순간 만(慢)의 욕망이 꿈틀거려 자극이 충족되고 그 짜릿한 경험은 대수롭지 않게 반복되었던 그야말로 '생각없음'의 체계속에 한껏 빠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좀 해보자고 모인 사람들이 실은 상대의 생각을 읽어 온 것이 아니라 각자의 뇌 속에 빠져 자신의 생각만 열심히 키우고 있는 꼴이었다. 우린, 애석하게도 광대한 무지의 연대를 이룬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은 무지의 연대속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며 탈출하였다고 해서 세상과 멀어지는 것은 아니라 역설한다. 스님의 충고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새삼 이것이 잘못되었으니 '나는 그만하겠소' 하는 단절의 태도로 자칫 속세를 떠나겠다거나 '나는 당신과 다르오' 하는 초월적 거리감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생각병을 물리쳐야 할 분명한 목적에 기인했을 것이다. 생각도 욕망도 모두 버리고 수도승처럼 혼자서 고독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잡음을 없애는 노력을 통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마음의 패턴을 찾아내 그것을 교정함으로써 빠르게 변화하는 복잡한 사회에서 현명하게 살아남으라는 현실적인 결론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무지(無知)에서 벗어난 자들이 이루는 무아(無我)의 연대가 아닐까.

살면서 교훈적이고 감동적인 책을 만나기는 쉽다. 그런데 이렇게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면서 실생활에서 유용하기까지 한 책은 아주 드물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도 눈높이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보편적이면서 특수하기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잡념(雜念)은 지우고 싶고 사려(思慮)는 깊어지고 싶다. 우려(憂慮)는 지나치지 않으며 상념(想念)또한 정도껏이고 싶다. 사고(思考)의 폭은 넓되 사념(邪念)은 버리고 싶다. 한층 깊어진 사유(思惟)의 힘으로 언젠가 나만의 사상(思想)이 만들어 질 기적같은 날도 멀지 않았으면 한다. 옛 중국문헌엔 떠다니는 생각을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잘 붙들어두는 것을 일러 존상(存想)이라 칭했다 한다.(진성서陳星瑞, 집고우록集古偶錄) 이는 어쩐지 스님이 말하는 '생각 버리기'와 맹자의 '구방심'(求放心)과도 닮았다는 생각이다. 나를 버려야 내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버려야 생각이 존재하는 이치에 적절한 결론이 아닐까. 이는 나의 오감이 나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일깨우는 역할을 할 때 얻을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存想)이면서, 스스로도 자존감을 드높이는 존상(尊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생각을 관리하는 것이 인생을 관리하는 길이었다. 신년에 많은 계획으로 복잡하던 머리가 한결 개운해진 느낌으로 책을 꽂아본다. 생각을 깊이 많이 하는 방식만 반복해온 터라 하루아침에 내 몸의 오감을 이용해 세상을 생생히 느끼는 것이 말처럼 쉬울 것 같지는 않다. 나에게 생각을 버리라는 일은 완벽을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생각만 가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닌 모든 감각을 가동시키라는 것이므로 어찌보면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 더 인간답고 완벽한 삶을 살아가라는 뜻과도 같지 않은가. 생각을 버리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또한 완벽주의 종결자를 향하여 맘편히 생각을 버려도 될 듯하다. 나로선 이 다행인 결론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결국 오감을 통해 생생히 체험하는 감성이야말로 우리 사는 완벽한 인생의 재료이자 완성된 문학의 질료라는 뜻이기도 하기에. 이는 생각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기왕에 하고 있던 생각 또한 더욱 확장되는 발전의 기회일 것이다. 더 버리고 더 잊어야 더 커지고 더 넓어지는 생각의 신비. 이 생체 시스템안에서 나는 인생의 열쇠를 맡겨보고 싶다. 오늘 잠시나마 오감으로 나눈 서로 인간됨의 매력일랑 고이 보관해 두고 싶다. 내일 누구보다 풍성할 우리 행복의 미래를 열기위해 그 행복을 완성할 완벽주의자가 되기 위해 비밀의 열쇠를 쥐어 본다. 손에 잡힌 그것이 참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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