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있는 동행


벌써 오년 전인가...뉴욕 맨하튼에서 며칠 머무면서 높이 솟은 빌딩들 틈 사이로 칼바람이 날카롭던 초겨울, 마찬가지로 거대하던 센트럴 파크와 5번가의 쉬크한 매력에 짓눌려 타임스퀘어 광장에 빈번하던 우리나라 기업의 로고가 가슴 벅차게 반가웠던 기억.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세계최고라는 자부심만은 사라지지 않을 듯 보였고 세계 수많은 도시 가운데 뉴욕에서 살고 그곳에 일자리가 있다는 것은 거리의 청소부라도 성공한 것으로 생각될 만큼 도시의 도시다움이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네이선이 바로 뉴욕의 유명한 변호사로 등장하며 그의 아내는 보스턴의 보수적 백인가문의 딸로 등장한다. 물론, 네이선이 처음부터 뉴욕에 살면서 부모와 가정환경 모두 너그럽지는 않았다. 마치 우리의 7,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미니시리즈 극본의 전형을 보는 것처럼 그의 어머니는 미래 그의 아내가 될 말로리의 집에 가정부로 일자리를 얻게 된 이탈리아계 빈민층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야망은 남달랐을 것이며 오로지 투쟁적인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자신을 연마해온 꽤 똑똑한 매력남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공식과도 같을지 모른다.

여기에 변호사로서의 성공과 장인으로부터의 인정이 자신이 말로리의 '한 남자'라는 가장 큰 필수적 정당요인이라 생각한 그는 일을 우선시한 우연의 실수로 몇 개월 되지 않은 아들을 잃게 되고 그 댓가로 인해 말로리와 이혼까지 하게 되며 이것은 네이선 인생의 위기의 출발점이 된다. 여기까지는 허리우드 식 로맨틱 코미디에 자주 등장하는 뉴욕에서 성공한 남자들의 외면적인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언제나 진정한 사랑을 되찾아야 할 것이고 그로인해 삶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윰 뮈소는 이야기의 방향을 결코 진부하게 전개시킬 작가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은 사실 이야기의 초반부도 차지 하지 않을 만큼의 상황적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여덟살 때 이미 물에 빠져 익사한 자신을 치료한 적이 있는 굿리치 박사와의 만남과 그로부터 전해들은 사람들의 죽음과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눈앞에서 목도해야 하는 장면들까지도 우리는 자극적인 상황에 이끌려 이야기의 방향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자꾸 잃어버리기 일쑤고 나만 따라오면 된다고 하여 따라가 보면 여지없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장소에 도착하고 마는 길잃은 어른처럼 어리둥절해지기만 한다.

작품 중반이후 네이선이 딸과 휴가를 보내기 위해, 아내와 대화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성찰과 실천의 시간을 가지는 것에서 진정한 행복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는 기회를 선사하기도 하고 장인과 서로간의 과거 인간적인 비밀이 밝혀지고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소설 읽는 재미를 느끼기도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은 후반부로 가면서 속도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엄청난 가속력의 호흡과 반전을 위해 그동안 달려온 만큼의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것, 막연히 예상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와서 통렬한 깨달음으로 배신을 뛰어넘는 '믿음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고 그것을 알려주는 역할의 메신져는 어떻게든 죽음을 막아야 하는 운명이 아닌, 살아 있는 순간이라면 죽음의 문턱까지 기꺼이 동행해 주는 삶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알고 그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따라서 죽는 일보다 더 힘겨울지 모른다. 이 작품은 사후세계나 임사체험, 혹은 죽음의 의미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행'에 관한 이야기 인 것이다.

즉,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 입장에서의 고뇌나 깨우침을 중심에 놓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알고 바라보는 상대(가족이나 연인, 친구)의 입장에서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현명하게 상대를 죽음의 길까지 인도할 것이며, 상대가 떠난 후엔 그렇다면 어떻게 生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관해 아주 영리하게 반대상황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입장이 어느 순간 바뀌게 될 때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알고 있는 절망에서 '내가 죽는 걸 바라볼 수도 있다' 는 모르고 있던 절망에 맞닥뜨리면서 '죽지 않는다는 희망'보다 '바라보아야 하는 절망'이 더 클 수 있는 이율배반적이고도 이타적인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나중에 다 가게 되는 곳'이라 함은 누가 먼저가 되었건 한번은 죽음의 당사자로서 또 한번은 죽음의 목격자로서 두 가지 역할을 모두 겪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제공하며 작가가 제시한 반전에 더 열렬한 타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덮고는 배경이 어디가 되었건 인간이 벌이는 일들과 그 유형이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익숙한 장치들은 '죽음의 메신져'라는 지극히 소설적인 장치를 무리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냉장고 속에 늘 있을법한 각종 야채들과도 같았고, 무당이나 예언자 같은 신과 접신한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던 메신져라는 존재를 설득력있게 만들어준 조연이었다. 대중성과 통속성이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로 통속적인 서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그 대중성을 이미 뛰어넘어 터무니 없는 소재들도 지극히 일상적인 것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超대중적인 일상적 환타지가 비로소 현실과 동일시 되는 작가만의 독창적인 일체화(Identification)로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이었다. 원제가 되었던 <완전한 죽음>이란 그렇게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같이 동행해주는 '바라보는 자' 와 죽음을 '맞이한 자'서로간의 합체된 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