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의 산문을 읽는 일은 언제나 숙연하다. 그것은 아마도 글이 곧 작가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제와 같은 하늘이고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고 똑같이 생긴 달이지만 그것을 보고 말하는 모습은 사뭇 우리와는 한참이나 떨어져있다. 이 괴리감을 좁혀주는 것이 작가의 산문이라 여긴다. 나는, 가까와 지고 싶은 작가와 조금이라도 거리감을 좁히고 싶어 소설 아닌 산문을 열어 젖힌다. 

   그러나 지난 연말과 연초에 미셀 트루니에를 읽는 일은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다. 독서가 즐겁지 않았던 이유는 생각보다 훨씬 더한 사색을 요구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들떠 있는 내 심리상태를 차분히 눌러줄 것을 기대했지만 되려 그렇지 못한 내 자신에게 스트레스만 감지하는 꼴이었달까. 잡념은 잡념대로 책은 책대로 마치 물과 기름처럼 독서는 내 자신과 잘 섞이지 못한 시간이었다. 과욕이 부른 참사였다. 몇 권을 가지고 이 작가를 알아보자며 덤벼드는 행위가 의욕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깨달음이라는 것은 깨닫고자 달려들면 결코 깨달아질 수가 없는 산물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나마 최근에 출간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은 그런대로 편안했는데 <외면일기>와 <예찬>은 며칠 만에 깨우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특히 <예찬>은 거의 고전, 철학서를 읽는 기분이었고 반 이상 알아듣지 못하고 가슴으로만 이해하는 단락이 많았다. (어려워서 라기 보다는 뭐랄까 생각하는 방법, 표현하는 방식이 낯설었다. 그리고 끝까지 친해지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이 분이 (송구스럽지만)살아있다는 생각이 안 들고 자꾸만 사르트르나 들뢰즈처럼 이미 시대의 역사가 된 분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요즘 이렇게 깊이 있는 산문을 읽어 본적이 없어서 그럴까도 싶다. 하지만 같은 작가의 글을 동시에 몇 권 번갈아 가며 읽는 것은 힘들긴 해도 확실히 좋은 방법인 것 같긴 하다. 뭐랄까, 이 사람이 오랜동안 생각하는 과정과 생각이 이동하는 자연스런 흐름이 눈과 귀에 점차 반갑게 들려왔달까...저 멀리, 저어 멀리서 무지개 타고 오네~ 이런 노래가사가 떠오르는데, 이 방법이 앞으로의 독서에 좋은 습관이 되었으면 한다.



#1. 묵은 포도주처럼 서서히 취하는

 


 

 

   먼저 내가 집어든 책은 <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 > 이다. 가만히 앉아서 자기 내면을 투시하여 그것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여행 중에 혹은 일상 중에 겪은 에피소드, 계절과 풍경에 대한 소회를 적어 놓은 것이라 ‘외면일기’라고 말한다. 단락구분이 월별로 되어 있어 나무와 바람, 꽃, 시간의 변화를 느끼며 의미를 부여하는 글들이 가장 많은 편인데 어차피 자기시선으로 해독한 문장들이므로 읽는 내 입장에선 그의 내면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 많았다. (작가에겐 외면이겠지만 독자에겐 내면이었다) 이 정도가 외면이면 내면일기는 얼마나 깊을 것이란 말인가. 이 수준이 메모라면 작정한 수준은 도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작가들 때문에 이제 ‘잡문’이나 ‘일기’라는 제목도 붙이기가 부끄럽다) 본인은 가벼운 마음으로 끄적이듯 아무런 원칙없이 편안하게 서술하였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거의 도를 닦은 수준의 성찰적 경지가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그저 내 수준에서만 보자면 문장상으로는 이문열이 가장 많이 생각났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시간의 파괴력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시간의 파괴력에 저항할 수 없을뿐더러, 어쩌다 벌어지는 부질없는 저항은 오히려 웃음거리나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체념한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운명을 허무라 이름 하여 슬퍼하고 한탄해왔다. 세상에 흘러넘치는 염세와 비관의 노래는 대개가 그런 시간의 파괴력에 대한 속절없는 표현이다."   

 

“모든 변화는 그때껏 진행된 파괴과정의 한 단락이다.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보는 일이 언제나 우리에게 쓸쓸함을 자아내는 것은 그때까지의 변화 속에 스며있는 사멸과 종말의 예감이다. 오랜 세월 뒤에, 한때 머물렀던 땅 또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찾는 일은 시간의 파괴력을 확인하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 ‘살이’의 부질없음이나 허망함을 다시 한 번 곱씹는 일이기도 하다.” 

-111p, <리투아니아 여인>, 이문열

 

   이것은 이문열의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속 한 단락이다. 소설 같지 않은, 서사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산문 투의 글을 빌어 왔다. 감히, 비교해본다. (이런 단순 무식한 비교를 서슴치 않고 하는 이유는 그저 내가 이 두 책을 읽었기 때문임을 용서하시라. 어차피 독서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행위라 내가 읽은 작품이 내가 아는 모든 책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러나 시간은 또한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 우리를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또 고동, 심지어 죽음까지도 파괴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시간은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喪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19p, <외면일기>, 미셸 트루니에

 

   (변역이지만)정확하게 이문열과 첫 문장이 일치하는 이 문단은 미셀 투르니에의 생각이다. 두 사람 다 시간의 장점, 단점을 언급하며 그 특성을 자기 문장 안에서 끌어안고 있다. 이문열이 결론내린 시간의 파괴는 연민에 가깝고 투르니에는 고통의 소멸, 즉 새로운 희망에 가깝다. 나이 상으로 보았을 때 이 작가는 분명 죽음을 차분히 준비하고 있다는 주제넘은 예상을 해본다. 시간이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喪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 한 걸 보면 파괴하는 속성자체보다는 파괴대상이 무엇이냐에 중점을 둔 결론이다. 그러므로 파괴는 파괴만이 아니고 파괴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1924년 당시 8개월의 태아였던 자신을 임신한 어머니가 프랑스 소설가 아나톨의 국장에 참여해 조사와 조가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작가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 (내 어머니도 70년에 죽은 아무개 작가를 애도하는 태교시간을 가지셨다면 나도 작가는 되었을 텐데 ㅠ) 그가 말하는 시간과 과거를 찬찬히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오래된 글로 이루어진 어느 심연의 숲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이 든다. 피톤치드가 뿜어 내는 숲 고유의 향기에 취해 마치 나 자신조차도 나무가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그의 글을 유려한 은유로 표현했지만 그 중에 일개 독자인 나와 가장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은 평론가 남진우였다. (그렇다고 그가 내 수준이라는 건 절대 아니고 ㅋ) 그는 ‘투르니에의 산문은 묵은 포도주처럼 읽는 사람의 내면으로 조용히 스며들어와 서서히 취기를 불러일으키는 글’이라 한 바 있다.(『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남진우, 2010. 문학동네) ‘고독한 은둔자의 사색’을 목격하며 이렇게 아름답게 늙을 수만 있다면 나이 드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트루니에는 이 책에서, 당신의 나이가 되면 ‘과거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심연인데 그 속으로 흐물흐물 미끄러져 들어가는 기분이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 마흔 줄이면서도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나보다 먼저 근사하게 ‘묵은 포도주’라고 말해 준 남진우 평론가의 표현에 심히 동의하면서 더불어 바디감 굵직한 맛은 아니고 은은한 피노누와쯤이 맞을 거라고 사족처럼 덧붙여 볼까 한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멀지 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1월 달에 쓴 일기이다. 여기저기 오가며 쓴 글 중에 이 두 줄의 문장이 가장 뇌리에 남았던 건 아마도 내가 그 주도권을 친구들에게 완전히 일임했기 때문인 듯하다. 책을 넘기는 중간에도 자주 ‘주도권’이라는 죽비같은 책임을 깨우치게 했다. 무심코 따라가다 큰 코 다치는 기분으로 이 책을 덮었다.

 

 

 

#2. 우리가 잊고 사는 생의 신비란

 

 

 

   우연인지 그 역시 < 예찬 -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0 >의 마지막에 친구를 언급한다. 미셀 푸코, 질 들뢰즈, 칼 프렝커 같이 먼저 떠난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곧 갈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자기 하나만 빼놓고 강 건너편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선해 너무나 그립다 고백한다. 이상하게 ‘강 건너편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부분에서 목이 메었다. 이런 구절은 문장을 위한 수식이 아니라 평소 떠올리던 장면임이 분명하다. 아직 나는 친구들 중에 부음소식을 접한 사람이 없다. 같이 일하던 동료 중에서도 없다.


이 사람이 떠나고 또 저 사람이 떠나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사라지면서 우리들의 젊은 시절의 영상은 와르르 와르르 무너진다...그들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친구들이여, 잠깐만 기다려라, 곧 간다. 곧 간다니까 ! 

- 427p , <예찬>, 미셸 트루니에


   ‘젊은 시절의 영상’이라 하여 비교적 젊은 시절의 작가 모습을 찾아 보았다.(왼편 사진)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흡사 외모가 여느 프랑스 배우와도 같은 이미지에 흠칫 했다. (독신인 이유가 정말 궁금했다 ㅋ) 더불어 나이든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항상 털모자를 쓰고 계신데 최근의 사진은 그만 돌아가신지 이십년도 더 된 내 외할머니와도 비슷해 마음이 따스해진다.

 


 

 

예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떤 아름다운 음악가. 한 마리 우아한 말, 어떤 장엄한 풍경, 심지어 지옥처럼 웅장한 공포 앞에서 완전히 손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다. 그와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정은 함께 예찬하는 가운데에서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한계, 모자람, 왜소함은 눈앞으로 밀어닥치는 숭고함 속에서 치유될 수 있다. - 서문 中 , <예찬>, 미셸 트루니에

 

   사실 나는 굉장히 칭찬에 인색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완벽주의 어머니와 무뚝뚝한 아버지는 다른 조카들에겐 그토록 칭찬을 남발하셨으면서도 유독 내 앞에선 성에 찰만큼 칭찬해주시지 않았다. 들리는 이야기론 뒤에선 친구, 친척들에게 내 칭찬뿐이라 하셨지만 내가 느끼는 칭찬의 체감온도는 늘 영하의 한 겨울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가 내 칭찬을 하는 것도 썩 우쭐하지 않았고 또 나 역시도 남에게 쉽게 칭찬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칭찬과 예찬은 물론 다른 개념이지만 나는 두 가지 모두 감사라는 근본적 마음이 없으면 행해지지 않는 행위라 여긴다.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칭찬을 받고 그런 만큼 상대를 칭찬해온 사람은 비교적 어떤 현상이나 본질에의 예찬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이 책에서 그가 언급하는 것들이 꼭 우리가 생각하는 예찬의 범주에 들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또한 그가 사물과 현상을 예찬하는 과정에서 기록된 과정이라고도 생각지는 않는다. 그는 사물과 현상을 그리고 사람을 예찬하기보다 어떤 경우 더 비판하고 관찰한 결과를 정리하려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 새로운 논리를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예찬‘해온 것’ 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예찬‘해야 할 것’들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예찬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정보가 아니라 생각해보았더니 비로소 예찬할 만하지 않은가에 대한 설득이자 질문인 것이다. 글쎄, 작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어줍짢게 작가의 소명 같은 걸 느껴버렸다.

   예를 들어 내가 감탄하고 소름이 끼치는 부분은 이런 것이다. 그는 작가라는 직업이 출근도 없고 퇴근도 없고 휴가도 없으므로 일 년 내내 바캉스나 마찬가지겠다는 동네 정육점 주인의 질문을 시작으로 ‘바캉스’에 대한 단상을 정리해간다. 그가 사색하는 과정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가 예찬해야 할 것이 발견되는데 그것에 동의할지 말지는 당연히 우리의 몫이다. 동의 하는 독자들은 대개 그가 예찬하는 그것이 아니라 예찬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그를 예찬하고 싶어진다. 그 놀라울만한 사고의 깊이와 지적임, 사유의 폭과 박식함, 그리고 번득이는 지혜, 눈부심, 이런 것들을 그저 예찬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내 조악한 표현력, 이런 순간에 절망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는 내 아이러니라도 끄적여 놓고 싶다는 욕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옛날 수공업자들, 농사꾼들은 계절과 동시에 자기 능력에 맞추어 나름의 리듬대로 노동을 했기 때문에 ‘바캉스’는 필요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업화, 도시화속에서 노동자들은 자기 리듬대로가 아닌 생산성에 맞춘 리듬으로 인해 노동에 구속 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다 보니 ‘바캉스’가 마치 이상적인 해결책인 것처럼 부각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의심없이 떠남과 도피가 휴식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그는 ‘바캉스’야 말로 모든 습관들의 갑작스러운 단절이며 정상적인 환경을 파괴하는 낯설음이라 말한다. ‘바캉스’를 즐기는 것이 ‘해독’이라고 하지만 해독 앞에 우선 무엇에 ‘중독’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다음 문장을 정독해보자.

 

우리는 꿈을 꾸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니 꿈을 꿔보아야 한다. 어쩌면 바캉스는 우리들의 풍속 진화의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단계 -필요하고 유익한- 를 우리는 언젠가 넘어서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심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항상 심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몸의 근육들은 휴식하기 위하여 하루 평균 여덟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 단 한 가지 근육만이 불연속의 법칙에서 제외되는데 그것이 바로 심장근이다. 이 근육은 일생 동안 쉬지 않고 박동한다. 그렇다면 이 근육이 절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근육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휴식할 것이다. 심장의 비밀은 그것이 두 번의 박동 사이의 아주 짧은 한 순간 동안 휴식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서 심장의 휴식, 잠, 바캉스는 분산되어 가지고 그것의 노동과 긴밀하게 뒤섞여 있는 것이다.

 

 

심장처럼 노동하라. 너무나도 재미있고 창조적이며 다양한. 그리고 특히 일상생활에 너무나도 잘 편입되어 있고, 노력과 성숙의 국면들이 너무나도 리드미컬하게 교차하는 지라 그 자체 속에 휴식과 바캉스를 내포하는 그런 노동을 하라.

-p299, 300 <예찬>, 미셸 투르니에

 

   미칠 것 같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다. 보통 바캉스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글은 어디서도 접할 수 있는 시작이지만 대개 끝은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식의 틀에 박힌 결론을 자신의 문장력으로 수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은 심장을 말한다. 별도의 물리적인 바캉스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심장이 노동하는 과정에 다 포함 된 것이므로 심장이 휴식하는 것 처럼 노동하다보면 그게 바캉스고 또 그렇기에 바캉스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심장이 노동하는 것처럼 자신은 글을 쓴다는 말이 아니고 도대체 어떤 자랑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캉스가 아닌 이미 바캉스인 심장과 그 심장을 가진 자신과 그 심장과 가장 유사한 직업인 작가를 예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3. 쌍으로 생각하는 것의 즐거움

 

 

 

  이와 같은 심장에 관한 주장은 <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 >에도 재차 등장한다. 물론 심장의 놀라운 본질을 예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프로펠러와 지느러미’를 비교하면서 언급되는 실마리로 작동한다. 가만 보면 <외면일기>에서 관찰한 나무와 숲의 속성이 <예찬>에서 밝혀지는 숲의 비밀이기도 하고 <예찬>에서 발견된 생의 아름다움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에 다시 재구성되어 펼쳐지는 식이다. 그래서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권 동시에 읽는 효과는 예상외로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뭔 말씀인지 어떤 게 중요한지, 그 막연했던 느낌이 구체적으로 달려오는 것 같다고 할까.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 그동안 그 눈송이가 녹는 것만 목격하다가 어느 날 집 앞 나무 밑에 얼어붙어 있길래 만져 보았더니 그만 눈의 결정체가 한눈에 보이는 순간과도 같은 감격. 눈인지는 알았지만 내 눈으로 눈 속을 바라보고 눈을 눈만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던 그 순간이 우리 모두에겐 있었다.

 

심장은 두 번의 박동 사이에 잠깐 동안 쉰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심장의 휴식, 심장의 잠, 심장의 휴가는 잘게 나뉘어져 있고, 자신의 활동에 내밀하게 뒤섞여 있다. 이 매우 특별한 심장의 휴식은 어떤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어 있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이다. 일상생활에 매우 잘 통합되어 있고, 일상적 노력과 성숙의 여러 과정들 안에서 매우 부드럽게 리듬을 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 안에서 휴식과 휴가를 포함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가나 또는 적어도 장인 같은 일의 귀족이 누리는 특권이다. 심장이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융합을 통하여 이루어 낸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 P62,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미셸 트루니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은 절판된 책 <생각의 거울, Le Miroir Des Idees, 2003>의 개정판 인 듯하다. 원제를 상상력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의식하지 않을 수 가 없는데 이 책은 상상력을 자극 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생각을 거울에 비쳐 보는 사색의 훈련에 가깝다. 무엇보다 작가가 이 책을 쓴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이기도 한 바슐라르의 대칭감각에 영향을 받았기도 하지만 이 책은 대칭, 대립의 쌍을 이루는 사고체계를 그 형식으로 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에서부터 ‘존재와 무’에 이르기까지 읽다보면 상상력이 자극되기는 하겠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된 책은 아니다. 밑줄에의 유혹을 차마 떨치기 어려운데 그러다 보면 아마 밑줄을 긋지 않는 구절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도 같다. <상상력 사전>이 소장용의 성격이 강하다면 이 책은 실용서에도 가깝다. 비슷한 톤으로 이어령 전 장관의 서적들이 눈에 밟히는데 전직 컨셉트 플래너로서 광고나 영화 , 디자인등 개념 작업하는 분들에게 아주 유용하다 추천하고 싶다.(그러니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꼭 틀리다고는 할 수가 없구나 !!!)

 

 

 

 

"선생님은 늘 쌍으로 된 대칭, 대립관계의 틀로 세계와 현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시는 것 같아요. 물과 불, 동물과 식물... 하는 대칭된 개념을 마주 놓고 사고하고 설명하시잖아요. 특히 선생님의 에세이 <사상의 거울>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봐요. 제목의 ‘거울’이 이미 그 대립이나 쌍을 이루는 인식의 틀을 가리켜 보이고 있잖아요. 생각이 거울 속에 비추어져서 두 가지의 쌍을 이루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어요. 나는 쌍으로 놓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 발상은 많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해줘요. 우리가 두발로 걷듯이 나는 두 가지 쌍으로 놓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번역판을 낼 때 <사상의 거울>대신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101가지>라든가, 뭐 그런 제목을 붙였더군요.”

 

“이해 못할 번역은 세상에 많으니까요.”

 

 

- 미셀 투르니에, 김화영 인터뷰 中 / 2002. 3.28. 슈와젤의 사제관에서

 

 

   미셀 트루니에는 파리 교외의 슈와젤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3층짜리 사제관에서 사십년 째 살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남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화적인 이해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도시적인 삶과 얼마나 격리되어 살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의 행간에선 금욕주의적이거나 종교적 관념, 혹은 시골에의 향수, 성에 대한 편견, 문명에 대한 냉소 같은 은둔자적인 뉘앙스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만 오르고 수상하지 못한 것이 너무 오래되어 스웨덴 한림원에선 이미 상을 줬다고 착각한다는 농담이 떠돈다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미셸 트루니에를 만나며 새롭게 궁금해진 한 분은 그의 글을 번역한 김화영 선생이다.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 번역가인 김화영 선생은 국내에서 카뮈연구로도 잘 알려진 분인데 산문도 기가 막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대부분의 한국 소설은 다 읽어 보았다는 선생이 11년 만에 낸 평론집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 2009 >라는 책에서 지적한 저질 소설에 대해 옮겨 놓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할까 한다. 다시금 기본적 역량, 기본적 역량, 기본적, 기본, 기본을 되뇌이며 도서관에나 가야 쓰겠다. 심장처럼 독서하고 심장처럼 글을 쓰기 위해 오늘도 심장을 움직인다. 미셸 트루니에는 적어도 우리가 심장을 작동하는 방법 하나는 알려준 셈이다.

 


'서둘러 쓴 문장과 거침없는 줄 바꾸기,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모든 잡념을 여과 없이 속기한 컴퓨터 시대의 안이한 수다. 태를 부린 깨달음의 제스처, 요란하게 물들인 감정의 전시. 소설가로서의 기본적 역량 부족을 '실험정신'으로 포장해 놓은 난해한 산문.'

p173~174,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 김화영, 2009 / 문학동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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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1-04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셸 투르니에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사람님의 글이 반갑기만 합니다 ^__^
<외면일기>와 <예찬>은 지금도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는 책이에요.
처음 읽었을 때, 꽤 많은 시간이 흘렀군요, 막연하기만 했던 어떤 문장들이, 어떤 시간과 사건을 겪고 다시 읽으면
선명해질 때가 있어요. 가끔은 이렇게 곁에 오래 머물고 천천히 빛을 드러내는 책과 작가가 고맙기만 하더라구요.

한사람님이 글을 준비하시는 것 같아 <외면일기> 100쪽에 있는 문장을 여기에 옮겨요. 제 나름 응원입니다!!!

"어서 작품을 한 편 써라. 우리는 갈리옹 광장에 있는 식당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아카데미 콩쿠르 회원 열 명이 돌아가며 서명을 했다.

한사람 2012-01-05 09:21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덕에 미셸 투르니에를 알게되어서 뭐라 인사를 ㅋㅋㅋ 해야할지^^
말씀하신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아도 좋고 또 시간이 흐른 다음에 보아도 더 좋은 책인 듯 합니다.

저도 외면일기 100쪽을 흠칫 하면서 넘겼어요.
'나는 장차 작가가 되어 공쿠르상 심사위원이 되겠다'..작가가 되는 것도 힘든데
미셸 투르니에처럼 심사위원이 되겠다고 한 꿈이 어이없기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해보였어요, 하하.

처음에 미셸 투르니에 같은 글을 쓸 것 같다고 하셔서
어떤 칭찬일까..가 궁금해서 보았지만
제 나름대로 턱없이 부족한 사색의 깊이를 말하는 걸까..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앞이 막막하더라구요 ㅋ

좋은 교훈을 얻었고, 또 응원에 힘입어 오늘도 심장을 달리러 가겠습니다^^

숲노래 2012-01-04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도 심장을 따뜻하게 잘 움직여 주셔요~

한사람 2012-01-05 09:23   좋아요 0 | URL

오늘은 된장찌개를 해먹을까 생각합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네요~

stella.K 2012-01-0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평가단에서 미셀 투르니에를 선정했는데 기대를 하고 있어요.
예전에 그의 단편동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후 이분을 좋하게 됐죠.
그런데 사실은 그때 이후 이분에 대한 책을 읽어 본적이 없어요.
만일 이번에 어려워서 재대로된 독서를 못하면 어쩌죠?ㅋ
그래도 변함없이 좋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사람 2012-01-05 09:25   좋아요 0 | URL

에세이 평가단 좋겠다!!!
아주 잘 갈아타신거 같아요~
책이 어렵진 않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넘기기 좋더라구요.
(저는 위의 세권 중에 상상력...을 마지막에 읽었는데
두권을 요약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스텔라님 리뷰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정말로요, 다 작성하시면 득달같이 달려가 읽을께요^^)

gimssim 2012-01-0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장처럼 노동하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미셀 트루니에의 <예찬>을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즈음에 다시 읽는다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메모를 합니다.
새해, 좋은 출발 되십시오.

한사람 2012-01-05 09:28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심장처럼 노동하라', 이 구절에서 멈칫 제 심장이 주춤하더라구요.
처음엔, 죽을 때까지 쉬지않고 일하란 뜻인줄 알았죠, 하하.

저는 말로만 듣고 이번에 처음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는데
말씀하신대로 세월이 좀 흐른후에 읽어도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 책을 써야 할텐데 말이죠 ㅠ



반딧불이 2012-01-05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열과 투르니에의 시간에 관한 견해는 <시간의 이빨>이라는 책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태양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구절도 생각나구요.
저는 김정란의 번역보다 김화영의 번역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최고의 궁합이죠. 한사람님께서는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제가 읽을 땐 <생각의 거울>도 이름을 바꾸어서 출간된 것이었는데 또다른 이름으로 출간되었나보네요. 투르니에 산문의 결정판 같은 글과 늘 정성이 느껴지는 페이퍼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2-01-05 21:5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딧불이님 !
나는 왜 쓰는가 이후 일년 만인가요? ㅋ
<시간의 이빨>은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ㅠ

일차적인 느낌은 김정란은 더 다듬었고 김화영은 더 가깝게 전달하려 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읽는 입장에선 김정란의 번역이 더 이해가 쉽지만,
아무래도 감정적인 뉘앙스와 작가의 의도는 김화영 쪽이 아닐까...나름 비교 해봅니다
(아마 제가 김정란 번역을 나중에 읽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철학이 문학화되고 문학이 철학화되는 과정을 조금이라도 엿본 것 같아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반딧불이님 새해이므로 ㅋ 복 마니 행운가득~ 하하 건강한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두사람 2012-04-29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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