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암사자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쿠르트 발란데르 경위. 그는 1948년에 태어난 스웨덴 남부 스코네 지역 이스타드(위스타드?) 경찰서 소속 경찰이다. 발란데르는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작가 헨닝 만켈(2015년 작고)가 창조해낸 캐릭터다. 저자는 스톡홀름 출신이라고 하던데, 발란데르는 어디 출신이었더라. 말뫼였던가. 이번에 피니스아프리카에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 전에 사둔(무려 8년 전에!!!) 발란데르 시리즈 3<하얀 암사자>를 책장 구석탱이에서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책무덤에 갇혀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나 할까.

 

제법 두툼한 녀석이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주말끼고 단박에 읽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다 읽는데 무려 8년이나 걸렸구나. 돈주고 산 책은 언제고 읽는다라는 독서의 모토가 다시 한 번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시작은 남아프리카 형제단 소속 세 명의 보어인들의 비밀결사로 시작되었던가.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젖어 사는 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이데올로기가 근 수세기 동안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음 무대는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역으로 이동한다. 어느 날 부동산업자 루이제 아줌마가 실종되고, 우리의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가 투입된다. 투입되는 순간부터 경찰의 직감으로 발란데르는 그녀가 살아 있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다만 유족들을 위해 자신의 직감을 외부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 다음에는 동네 주택에서 폭발사고가 나서 집이 전소하고, 그 부근에서 흑인의 손가락 하나가 발견된다. 아니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려고 이렇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서사가 전개되는 걸까. 한 마디로 소설 <하얀 암사자>는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인종차별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남아프리카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던 1992년의 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세계 역사에 문외한이다 보니 영국의 식민지로 알고 있던 남아프리카에서 극단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주도한 게 영국계 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들보다 앞서 남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린 보어인, 아프리칸스들이야말로 평화롭게 살던 다수 남아프리카 흑인들을 굴종과 치욕 속으로 몰아넣은 주범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일 지도 모르겠다. 역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자신들의 흑인들에 대한 지배를 영속시키기 위한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 대표로 얀 클라인과 프란츠라는 인물을 헨닝 만켈은 배치한다. 그들은 대통령 프레데리크 빌럼 더 클레르크의 영도 아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드는 남아프리카(소설에서 암사자는 남아프리카를 상징한다고 밝힌다)의 미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그들의 망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해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고 유혈을 통한 내전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암살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정보부 출신의 빌런 얀 클라인은 암살 대상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남아프리카 최고의 킬러 빅토르 마바사를 고용한다.

 

그리고 그를 멀리 스웨덴의 오지에 보내 전직 KGB 장교 아나톨리에게 장거리에서 타겟을 처리하는 암살교육을 맡긴다. 그 와중에 그들이 지내던 외딴 집을 찾아온 루이제 아줌마를 냉혹한 빌런 아나톨리가 살해하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보다 만켈이 인종차별이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장소, 스웨덴과 남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그것이 마치 하나의 나비효과처럼,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남아프리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하나의 권력투쟁 혹은 반동에 대한 역작용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만켈의 치밀한 구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0년 전, 세계화 초기 시절에 새로운 사고가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바꾸게 강요할 거라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발란데르 경위의 경우에는 스웨덴 경찰 세계에 국한되어 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지닌 난민들이 지속적으로 그네들의 사회 속에 유입되면서 발생될 미증유의 사태에 대한 저자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러한 갈등들이 소설 속에서 발란데르와 아나톨리가 격렬하게 투쟁하는 장면처럼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될 수도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구소련제국 출신 KGB 아나톨리가 피지컬 영역을 맡았다면, 두뇌 플레이를 맡은 배후의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던 얀 클라인이 지닌 치명적 약점의 의도적 배치는 탁월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일까. 얀의 미란다에 대한 일방적 사랑이 궁극적 파멸의 원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 조금 평면적이지 않나 싶다.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 줄루족 전사 빅토르의 퇴장도 아쉬웠다.

 

전작들과 다른 스케일의 서사를 구사한다고 하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얼굴 없는 살인자><리가의 개들>을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사러 가야 하나.



[뱀다리] <하얀 암사자>를 다 읽고 나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영국 BBC에서 2008년부터 계속해서 헨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게 아닌가. 한 시리즈 당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란데르 소설을 극화한 모양이다.


어제 책으로 국내에 소개된 헨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를 검색해 보았는데 <사이드트랙>, <리가의 개들> 등등이 모두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 같다. 아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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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19 17: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전 판형 번역자가 독일 유학중에 번역해서(만켈 작품 독일 최고베스트셀러기록)
새번역본 추천합니다 ☺

레삭매냐 2022-09-19 18:42   좋아요 3 | URL
오오 그랬군요 :>

역시 스케일이 커서 그런지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마 <리가의 개들> 후속편
으로 나오나 보네요 :>
기대해 보겠습니다.

mini74 2022-09-19 1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 읽는데 8년. ㅎㅎ제게도 해넘긴 묵은지 같은 녀석들도 수두룩합니다. 이럴거면 책들을 항아리에 담아둘걸 그랬어요. 발효라도 잘 되라고 ㅎㅎㅎ 하얀 암사자 기억하겠습니다 *^^*

레삭매냐 2022-09-19 18:54   좋아요 2 | URL
그나마 산 걸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

묵은지 항아리를 저도 한 댓개
준비해야지 싶습니다.
일케라도 읽는 맛에 일단 질러!
를 외쳐 봅니다.

누군가 그랬다매요, 책을 사서
닐는 게 아니라 집에 쟁여둔
책을 닐는거다라고요 ㅋㅋㅋ

독서괭 2022-09-19 19: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은 사두면 언젠가 읽게 된다 ㅎㅎ 묵은지 항아리! ㅋㅋㅋ 저도 묵은지 꽤나 있는데 언젠가 읽으리라 믿어봅니다^^;
매냐님이 너무 재밌었다 하시니 기억해두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9-19 19:54   좋아요 2 | URL
절판된 책인데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아서 걱정
했는데 제 책더미에 떠억하
니 버티고 있을 줄이야 :>

피니스아프리카에 버전 기
대해 봅니다.

책은 묵은지 항아리다라는
타이틀로 뻬빠 하나 써봐
야겠습니다.

coolcat329 2022-09-19 19: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저 이 책으로 발란데르 시리즈 입문했습니다. 발란데르 말뫼 출신 맞습니다. 일하는 경찰서는 스코네 지역 Ystad 인데 발음이 제 귀엔 이스타드에 더 가깝게 들립니다.
피니스아프리카에에서 또 나온다면 이번에 하얀 암사자 차례인데 나오면 꼭 다시 읽어보려구요.

레삭매냐 2022-09-19 20:02   좋아요 3 | URL
오호 저도 그럼 쿨캇트
선밴님의 길을 따르는 거임?
ㅋㅋㅋ

피니스아프리카에 버전에서
는 지도에 위스타드로 표기
되어 있더라구요. 오늘부터
1권 읽기 바로 돌입합니다.

하얀 암사자, BBC에서 케네스
브래너 기용해서 맹근 도라마
시리즈가 있네요. <리가의 개들>
도 시리즈에 들어가 있네요...
아 급 보고 싶어졌습니다.

coolcat329 2022-09-19 20:06   좋아요 3 | URL
아마도 레삭매냐님이 저보다 앞서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없거든요ㅠㅠ

네~드라마 있습니다. 케네스 브래너 주연인데 거기는 배경이 영국이라 이름도 커트 월랜드입니다. 스웨덴 분위기가 아니라 저는 안봤습니다.

리가의 개들 도서관 신청도서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도 기대됩니다!

바람돌이 2022-09-19 2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추리소설 시리즈들은 왜 이렇게 많은걸까요? 다 보고싶어요. ^^
산 책은 언젠가는 읽는다굽쇼. 집에 있는 책들을 보면서 음 용기를 내봅니다. ^^

레삭매냐 2022-09-20 09:59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아마 매력적인 캐릭
이라 작가들이 최대한 뽑아 먹으
려... 그랬다고 합니다.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도 자그
마치 14권이나 되는 것 같더라
구요. 스핀오프도 있는 것 같고 -

산 책 다 읽는다에는 다소 뻥이
섞여 있지 않나 ㅋㅋ
여튼 읽고자 노력 중입니다.

라로 2022-09-21 1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발렌데르 시리즈 남편이랑 다 봤지요!!
넘 재밌었어요!!!

레삭매냐 2022-09-21 14:07   좋아요 1 | URL
저도 찾긴 했는데 돈 주고
사서 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
중이랍니다.

어떤 분들은 스웨덴 이야기
인데 영국에서 맹근 거라고
패스했더라는 야그가... 아
넘나 강렬한 유혹입니다.
 
센고쿠 시대 무장의 명암 -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신과 음모
혼고 가즈토 지음, 이민연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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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일본 센고쿠-모모야마 시대 마니아가 아닌가라는 착각에 빠져 본다. 어쨌든 해당 분야의 책들이 나온다면 읽을 의양이 차고 넘친다. 이번에 혼고 가즈토의 <센고쿠 시대 무장의 명암>이라는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냉큼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무려 주중에 가서 빌려다 모두 읽었다. 감상에 앞서 다수의 오탈자와 등장인물들에 대한 일본어/한자어 이름의 혼란스러운 병기가 너무 신경이 쓰였다. 꼭 출판사에 출간 전, 세밀한 감수를 부탁하고 싶다. 이건 좀 너무 하지 않나.

 

타이틀은 비록 <센고쿠 시대>라고 했지만, 군웅할거의 시대가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두고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에 즈음한 이야기다. 이 전투를 효시로 에도 막부가 시작되었으니 굳이 분류하자면 센고쿠 시대의 마지막 전투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긴 하다. 역시 역사 해석의 차이니까.

 

도요토미 사후 전권을 장악하고 무소불유의 권력을 행사하던 미카와의 너구리 혹은 악질 아저씨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상경을 거부한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고,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시다 이쓰나리가 거병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막이 오르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원래 서군으로 참전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문치파의 영수 미쓰나리를 배신하면서 세키가하라 전역은 동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이르는 과정들은 이미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읽어서 수월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다만 여전히 이름이 낯선 숱한 무장들의 이름과 관계도 그리고 옛 지명들이 귀에 들어와 박히지는 않는다. 하긴 뭐 내가 전문 역사가도 아니고, 어떤 부분들은 대충 넘어가도 되겠지 싶다.

 

혼고 가즈토에 따르면 일본 천하쟁패의 결정적 순간이었던 세키가하라 전투는 치밀하게 의도된 전투가 아닌 우연히 이루어진 그런 전투라는 게 분석이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들어 보면, 우선 도쿠가와 정예군을 이끌던 후계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주력부대가 사나다 마사유키에 막혀 가장 중요한 전역인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지 못했다. 서군에서도 최강 부대라고 할 수 있는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부대가 작은 성에 막혀 본진에 합류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전이 이루어졌다. 문치파 미쓰나리와 달리 숱한 전장을 실제 경험한 미카와의 너구리 영감은 주력부대 없이 서군을 이길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전투를 개시했다. 그리고 그의 도박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역시 전장에서의 승리를 빠른 판단과 신속한 실행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이 만약에 서군에게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도쿠가와 주력군이 후방에서 온전하게 전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에도 250만석을 바탕으로 천하쟁패에 재도전할 수 있다는 속셈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맨 끝에 배치된 도리 모토타다의 후시미성 분전에 대한 막부의 보상도 대단하지 싶었다. 두 번이나 가계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지만, 어린 시절 마쓰다이라 다케치요가 이마가와-오다 가의 인질로 잡혀 있을 때부터 시종한 친구이자 오랜 전우를 서군의 거병이 명확해 보이는 상황에서 총알받이로 남겨 두고 가는 미카와 너구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싶다. 후다이 가신단인 도리 가문과 달리 도자마 가신으로 합류한 이이 나오마사가 전장에서 공을 다툰 상황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너구리 영감은 오랜 가신단에 대해 논공행상이 무척이나 짰던 모양이다. 그런데 도자마 다이묘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후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즈카타케 칠본창의 일원이나 히데요시 가문의 오랜 가신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를 사위로 삼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기요마사(우리에게는 철천지 원수인 그 가등청정이 맞다)의 석고를 두 배로 튀겨 주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실질적인 이유보다는 이것 봐라, 내가 히데요시의 가신도 이렇게 등용하고 후하게 보답하지 않는가라는 점을 천하에 널리 선전하고 싶은 속셈이 배후에 숨이 있지 않나. 미카와 너구리 영감은 뛰어난 정치가답게 무엇 하나 순수하게 하는 게 없었다. 모든 게 치밀한 정치적 노림수였다고나 할까.

 

저자는 질 걸 뻔히 알면서도 동군 대신 서군에 가담한 오타니 요시쓰구나 우에스기 가문의 참모 나오에 가네츠구를 높이 평가하지 않나 싶다. 승자보다 패자에 대한 연민과 로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초한쟁패에서도 한고조 유방에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면서도 결국 패배하고 허무하게 죽은 초패왕 항우를 사모하는 팬들이 지난 2천년 동안 생기지 않았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흥미롭게 느낌 점 중의 하나는 미카와의 너구리 영감이 천하통일을 꿈꾸었다면, 다른 센고쿠의 무장들은 여전히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를 꿈꾸었다는 점이다. 전자는 염리예토, 흔구정토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이제 더 이상의 전란 대신 평화를 갈구한다는 정치적 구호를 전면에 내세웠다. 물론 도쿠가와 집안이 대대로 해먹는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하지만 사나다 가문이나 시마즈 혹은 구로다 조스이 같은 센고쿠 시대의 전통적 사고에 젖은 무장들은 예전의 입장을 고수했다. 무장들에게 평화는

 

그 결과 우에스기 가게카츠는 세키가하라에서 동군과 서군이 맞붙었을 때, 전력을 다해서 도쿠가와의 후방을 치지 않고 전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고만 있었다. 아니, 그들이 진정으로 군웅할거의 시대를 원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유력 다이묘들은 서군이나 동군의 일방적 승리 대신 적당한 균형을 유도해야 했다. 한신에게 천하삼분계를 고언한 괴철 같은 인물이 우에스기 가문에는 없었던 걸까. 그리고 간신히미카와 너구리 영감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던 히데요시의 전우이자 충직한 가신이었던 가가의 마에다 도시이에가 좀 더 살아 남았다면, 세키가하라의 향방은 또 다르게 전개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여러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일되지 않은 주요 인물들의 이름에 대한 한자/일본어 병기 문제는 심각하다. 나는 우시 히데요시라고 해서, 히데요시의 다른 이름인 줄 알았는데 하시바의 한자 표기였다. 아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우시라고 통일하던지 또 어디서는 하시바로 등장한다. 보다 정확한 감수가 많이 아쉬웠다. 좋은 콘텐츠인데 이런 이유로 책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전승, 민담 등 지금으로부터 무려 422년 전에 벌어진 일대 사건에 대한 고찰은 여전히 흥미로웠다. 명확한 기록의 부재는 그 여백을 채우기 위해, 오히려 독자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던가. 저자의 말대로 진실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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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17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구리 ㅎㅎㅎ 매냐님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도 이 시대 좋아해요. 어릴적 아부지가 대망이며 이런 쪽 소설 좋아하셔서 이런저런 이야기 해주셔서인지 ㅎㅎㅎ 근데 얘네들 이름 너무 헷갈려요 성도 자주 바뀌고 ㅠㅠ 하시바가 한자로 우시군요. 매냐님 👍

레삭매냐 2022-09-17 22:12   좋아요 1 | URL
20년 전, 타루미의 어느 숙소
에서 일본 교수님과 어줍잖게
보신전쟁과 세이난전쟁에 대
해 이야기하던 생각이 나네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하더라
도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로
출발해서 모토노부, 모토야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까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죠.

그쪽 역사에 문외한이다 보니
너무 헷갈리더라구요.


얄라알라 2022-09-17 15: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항아리면....그래도 많이 이름 들어본 출판사인데 한자/일본어 병기 그렇게 심한가요?^^;; 근데 그만큼 레삭매냐님께서 박학하시고 애정 많으셔서 보이실터이고, 저같은 독자는 모르고 읽을 것 같아요. 엣이야기는 항상 강렬해요. 불과 1,2세대 이전분들 이야기도 재밌는데 400여년 전 일이면 몇세대일까...

레삭매냐 2022-09-17 22:13   좋아요 2 | URL
박식은 아니고 무식으로 ^^
슬쩍 평을 보니 저보다 고수
분들이 너무 평이하다는 평
을 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출판사에서 너무 감수나 교
정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금방 휘리릭 읽고 내일 반납
하는 것으로 :>

coolcat329 2022-09-17 15: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이름 읽다가 자꾸 막혀서 내용 연결이 힘드네요.😟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싸우고 엎치락뒤치락 했으니 오죽 사람이 많았을까 싶어요.
저도 좋아하는 시대 있어서 공부하고 싶어집니다. ㅋㅋ

레삭매냐 2022-09-17 22:15   좋아요 2 | URL
관계도를 그리려면 아마 하루
종일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계속해서 작중에 등장하
는 인물들의 이름을 찾았답니
다.

일본에서는 센고쿠 시대와 막말
격변의 시기가 문학이나 드라마
로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하네요.
 

나는 왕송호수 근처에 산다.

주말에 갈 생각은 아예 안하고, 낮에도 잘 가지 않는다.

야행성인지 주로 밤에 움직인다. 저녁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갠춘한 브런치 카페가 있다 해서 출동해 봤다.

일단 주차장이 만석이었다. 차를 가지고 이동하다 보면 항상 주차장 걱정이 앞선다. 아니 주차장이 없다고 하면 아예 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 아니 그럼 버스나 걸어서 가야 하나 어쩌나.



(음식 제목을 좀 더 시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새우가 빠다 로제 파스타에 풍덩 빠진 날' 어떠함.)


일단 주문한 빠다 새우 로제 파스타가 먼저 나왔나 보다. 난 아메리칸 스탈의 푸짐한 셋트 메뉴를 시켰다. 오래 전에 내가 즐겨 먹던 녀석들이 푸짐하게 나와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경우엔, 마! 이기 어메리칸 스타일이다, 니 다 묵을 수 있나?)


팬케익은 진짜 오랜 만이었다. 오래 전에 아이홉에서 시도 때도 없이 먹던 생각이 솔솔났다. 커피 무한 리필에 24시간이어서 언제고 부담 없이 갈 수 있었다지. 아이홉 팬케익은 좀 밀가리 맛이 많이 났었는데 <37.5>에서 먹은 팬케익은 아주 야들야들했다.


한켠에는 메이플 시럽이 아기자기하게 담긴 작은 단지도 있었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쳐 발라서 먹다시피 했었는데, 요즘에 들어서 단 건 아예 땡기지도 않는다. 확실히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음료에 커피 등등 잔뜩 시켜 먹었지만, 다음 코스로 갈 곳이 있어서는 시아시된 레몬수만 마시고 버팀.



다음 코스는 <초평가배>.

최근에 생긴 카페인데, 기존의 카페와는 달리 한옥 스타일의 카페다. 제목부터 일단 가배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차의 공포 때문에 공간이 보여서 대고 갔는데, 카페 뒤편으로 넓은 주자창이 있더라. 괜한 걱정이었다. 장사가 잘되는 곳은 이유가 있는 법. 테이블 자리가 없어서 주문하기 전에 일단 자리부터 잡았다.


 

커피는 허구헌날 마시니, 난 뭔가 색다른 것으로 고고씽.

메론소다 에이드가 땡겼으나 나의 픽은 달콤새콤 오미자 에이드였다.

픽은 대성공이었다. 메론소다는 메로나를 녹인 게 아니냐는 말에 전의를 급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아 다시 생각해도 츄릅츄릅~~~



그놈의 아메리칸 푸짐 브런치를 잔뜩 먹는 바람에 이 맛난 에이드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니. 고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내 사랑 해바라기 녀석들도 몇몇 보았으나 작년처럼 많이 피지는 않아 아쉬웠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해바라기 사진도 좀 찍어야 하는데 말이지. 집에 심은 해바라기들은 나름 무럭무럭 자라고 있더라.

 

이만 나의 왕송호수 나들이 끝.



[뱀다리] 초평가배에서는 서양식 주전부리 말고 한식 스타일의

주전부리들을 팔더라.

그 중에 내가 어려서부터 좋아라하는 양갱이가 있어서 얼매나 반가웠던지.

어른들이 요깡이라고 해서 무언가 했더니, 진짜 니혼고로 양갱이가 요깡이었다.

 

가래떡구이가 5,500원이라고 하던데 좀 비싸 보이더라.

가래떡은 고저 꼬챙이에 꿰어서 연탄불에 구버 먹으면 쫀득쫀득한 맛 생각에 침이 절로 솟구쳤다는 건 안 비밀.




[뱀다리2] 우리 책쟁이 뻬빠에 책 이바구가 또 빠지면 섭섭하니 추가추가.

지금 막 동료분이 전달해 주신 크리스티앙 보뱅 샘의 <작은 파티 드레스>를 까보았다.

책은 읽지도 못하면서 계속해서 사들이는 건 무엇.

알라딘에서 자꾸만 무언가 적립금이네 퀴즈 정답 포상금이네 하며 책사기를 독려하니 안 사고 배길 수가 없다. 분명 저들도 남는 게 있으니, 독자들에게 이렇게 뿌릴 터인데 아마 남는 게 훨씬 많지 않을까 추정해 본다.

 

어제는 보뱅 샘의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만났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문장들이 나오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너는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 저자가 시인이라고 했던가. 책을 읽기 전에 너튜브로 아시시 출신 청빈의 구도자, 가난과 결혼한 프란체스코의 일대기를 찾아보면서 한바탕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졌다. 백년마다 프란체스코 같은 분이 나온다면 이 세상은 구원받을 거라는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와 닿던지. 세상의 법도 지키지 않으면서 나대는 알박기 먹사가 횡행하는 세상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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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9-15 15: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짜 괜찮아보여요!!! 좋은 곳에 사시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2-09-15 16:10   좋아요 2 | URL
무신 말쌈을 그리! 저는
시골에 산답니다.

초평가배 옆에는 논이 있고,
벼가 자라고 있구요 ㅋㅋ

연휴 끝날에 친구덜 만나러
서울 가서 ‘시골쥐 서울왔다‘
라며 신나게 떠들고 놀았답
니다.

얄라알라 2022-09-15 16: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왕송호수라...귀에 익은 듯 하여 검색해보니 의왕이네요. 아름다운 호수와 한옥 까페, 넘 잘 어울립니다!

레삭매냐 2022-09-15 16:49   좋아요 2 | URL
호수 컷도 하나 넣었어야 했는데
입에 먹을 것을 욱여 넣느라 정신
이 팔려서리 그만...

맨 끄트머리에 해바라기 사진을
하나 넣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아숩네요.

다락방 2022-09-15 16: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팬케익 사진보니 너무 먹어보고 싶어서 왕송호수 검색했더니 제가 사는 집에서는 두시간 이상 걸리네요 ㅠㅠ

레삭매냐 2022-09-15 16:50   좋아요 2 | URL
호곡, 그리 멀리 사시나요.

저희 나와바리라 선선해지면
가서 바람도 쐬고 좋습니다.

팬케익은 정말, 다시 생각해
도 쵝오였습니다. 또 먹고잡
네요.

mini74 2022-09-15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황금벼 옆에서 밀을 흡입하신겁니까 ㅎㅎ 넘 부럽습니다. 오미자는 다행히 보유하고 있습니다. ㅎㅎ배고파요!!

레삭매냐 2022-09-15 17:08   좋아요 2 | URL
미니님의 글을 보고 나설라무네...

혹시 내가 낮에 먹은 밀들이 흑해
바다를 건너 온 유크레인의 밀가리
가 아닌가 하는 엄한 생각을, 쿵야.

푸지게 먹었는데 또 배가 고픕니다.
허기와 꽉채움의 무간반복인가요 우리.

페크pek0501 2022-09-15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보니깐 냠냠 먹고 싶잖아요. 특히 두 번째 사진에 나온 거, 무자게 당깁니다.^^

레삭매냐 2022-09-15 17:57   좋아요 2 | URL
여러 메뉴가 있었으나 역시나
저의 픽이 탁월했더라는 ㅋㅋ

청아 2022-09-15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레삭매냐어가 풍년이군요ㅎㅎ
올려주신 모든 사진이 다 예쁘고
먹음직스러워요.*^^*

한옥카페 전망도 그럴싸한데요? 저도 기회되면 가보고 싶어요.

레삭매냐 2022-09-15 19:0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오늘 여정을 되짚어
보니 역시나 대박이었지 싶네요 :>

파스타와 어메리칸 브런치
오미자 에이드까지 하나 빠지는
게 없다는.

카메라를 들고 갔다면 좀 더 갠
춘한 사진들을 담았을 텐데,
핸드폰 카메라로 찍다 보니 제
대로 구현을 못하지 않았나 합
니다.

기대 이상이라 더 마음에 들었습
니다. 닝겡이들이 많다는 게 좀
흠이랄까요.

blanca 2022-09-15 18: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한옥 까페 완전 취향저격이네요. 보뱅은 정말 놀랍죠! 그냥 책 전체가 거대한 산문시 수준인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2-09-15 19:04   좋아요 2 | URL
새로 생겼다는 걸 알고는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
타이밍이 되어 들렀는데
마음에 들더라구요 :>

그런 데서 책이나 실컷 읽
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뱅의 글들은 예술입니다.

프레이야 2022-09-15 19: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해바라기를 사랑하신단 말씀이죠^^
왕송호수, 초평가배 찜!
왕송호수 주변 부런치 부러 먹으러…
경기도 가게 되면 꼭 가보는 걸로요.
언제가 될지 기회를 만들어야겠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2-09-16 10:18   좋아요 1 | URL
주말에 오심 아마 차가
많아서 고생하시지 싶어요.

가능하시다면 평일 낮을
추천해 드립니다 :>

초평가배 짱! 부런치 굿 !!!

서니데이 2022-09-16 2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 속의 음식들이 요리책에서 바로 나온 것처럼 근사해보여요.
떡구이는 좋아하지 않는데도 맛있을 것 같을 정도예요.
적립금이랑 상품권은 구매의 마중물 같은 건가봅니다.
저도 어제 적립금 남은 날짜가 적어서 책과 굿즈를 샀어요.
레삭매냐님, 사진 잘 봤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09-17 09:59   좋아요 1 | URL
알라딘이 주는 적립금/상품권
의 지옥은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천원 쓰려고 만원을 소비하게
만드니깐요 참으로 대단합니다.

새삼 음식 플레이팅의 중요성
을 깨닫게 되더라구요 :>

즐거운 주말 되세요.
 
눈먼 자들의 도시 (100쇄 기념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수년간 나의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마침내 읽었다. 결국 언제고 읽을 책은 읽게 된다. , 그전에 이미 영화화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봤다. 확실히 영화로 담아낼 수 있는 서사의 밀도와 깊이는 원작의 아우라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우리는 눈으로 모든 정보를 뇌에 전달하고, 뇌에 내린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데 만약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백색 질병이 퍼진 사회의 몰락을 그린다.

 

보통 사람들은 정상의 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상에 아무런 불편이 없이 생활한다. 하지만 당장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책을 읽다 말고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암흑이 내리고 답답해서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도시에 이런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색 질병이 속수무책으로 퍼지면서 공포가,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야말로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첫 번째 환자를 필두로 해서 정부는 초기 발병환자들을 격리 수용에 나선다. 낡은 정신병원에 그들을 가두어 버렸다. 주제 사라마구 작가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캐릭터를 하나 배치한다. 안과 의사의 아내가 요주의 인물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다. 백색 질병의 원인을 알 수가 없듯이, 유일하게 그녀가 눈이 멀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격리 수용된 병동은 조금씩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당장의 먹을 것이 없어 그들은 굶주리게 된다. 그들은 포위하고 있는 군인들은 그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지만 그들 역시 곧 눈이 머는 건 시간문제였다. 눈이 먼 사람들은 격리된 공간에서 생존하기 위해 조직과 협력이 필요하지만, 그 대신 다른 선택을 하면서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대신 짐승이 되는 길을 택한다. 소설의 엔딩을 장식하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안과 의사의 아내는 인도주의 정신으로 최대한 타자를 도우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사회적 노력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말을 주제 사라마구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도대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먹을 것에 대한 집착과 자연스러운 생리현상 때문에 발생한 악취와 비위생적 상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들이, 비상상황에서는 얼마나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게 되는지 작가는 절절하게 표현한다.

 

그나마 격리된 수용소에 사람들이 적었을 적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눈이 멀고 총까지 지닌 악질 깡패들이 등장하면서 수용소는 지옥으로 한걸음씩 다가선다. 자신도 눈이 멀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린 군인들은 선을 넘어서려는 재소자들에게 총격을 가한다. 자신들이 무력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빚어낸 우발적 사고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군인들이 지급하는 식량을 독점한 좌병동의 깡패들은 다른 이들에게 귀중품과 돈을 식대로 요구하고, 다음에는 더한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한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기에 대항할 수도 없었던 다른 병동의 사람들은 무력하게 좌병동 깡패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에 사람들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얼마나 인간이 바닥까지 추락할 수 있단 말인가. 더 이상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던 의사의 아내는 가위를 들고, 깡패들을 응징하러 나선다. 그리고 곧 전쟁이 벌어지고 깡패들이 바리케이드처럼 설치한 매트리스에 용감한 한 여성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서 전체 건물에 불이 붙어 버렸다.

 

불에 타죽지 않기 위해 군인들이 총격을 할 지도 모른 상태에서 탈출을 감행하지만, 군인들 역시 모두 눈이 멀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찾아온 실명만큼 재소자들의 자유 역시 그렇게 찾아왔다. 다음 단계는 의사의 아내를 필두로 해서 생존과 자구에 나서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 버린 도시 역시 생존에 적합하지 않았다. 도시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과 전기가 공급이 되지 않는 소비처인 도시에서 먹을 게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슈퍼마켓은 이미 약탈된 지 오래다. 거리에는 죽은 사람들이 즐비하고 야생화된 고양이와 개들이 그곳을 누비고 있다.

 

그리고 안과 의사의 집에 안식처를 마련한 7명의 일행들에게 결국 광명의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주제 사라마구 작가는 눈이 멀어버린 도시에서 철저한 익명성을 바탕으로 아포칼립스적인 서사를 이어간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름이라는 개인의 고유성마저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는 설정이었을까. 그런 익명성 뒤에는 위선과 허위가 비집고 들어선다. 공교롭게도 우병동 1호실에는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부터 시작해서 안과 의사와 접촉한 이들이 모이게 된다. 검은색 안경을 쓴 여자는 자신의 정체가 들어날 위기에 처하자 슬그머니 검은색 안경을 벗는다.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자신을 보호하고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행동이었을까.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타인을 위한 이타주의가 구원의 길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다가, 또 반대편에서는 약한 사람들이 죽든 말든 자기들의 욕망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극한의 이기주의가 발현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익명성은 최악의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잘 아는 이들에게 그런 악행을 저지를 수는 없었으리라. 나와 나의 동지들이 아닌 철저하게 타자화된 이들을 착취하는 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라는 변명으로 자신의 양심을 가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영화에서 아주 잘 묘사되었는데, 텅 비어 버린 도시에서 안과 의사의 아내가 먹을 것을 구하다가 잠시 안식을 위해 들른 성당에서 성상들이 모두 눈을 가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는 시퀀스는 과연 압권이었다. 신마저 보는 것을 거부했다는 표현일까. 과연 다시 볼 수 있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마저 사라졌다는 걸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장치는 아니었을까. 공존이 아닌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로 뒤뜰의 토끼와 닭을 잡아먹으며 생존하는데 성공했던 어느 노파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의사의 아내는 좌절한다.

 

모든 희망과 구원에 대한 기대를 접으려던 그 순간에 사람들은 시력을 되찾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이던가.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후속작으로 <눈뜬 자들의 도시>가 있는 모양이다.

 

가볍게 시작했으나 종말 서사가 인도하는 어둠은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금방 읽은 걸 보면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말이겠지. 역자는 주로 영문학을 번역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버전은 영어판의 번역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주제 사라마구 작가 특유의 문장 끊지 않고 쓰기와 사뭇 다르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아마 영어판 독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건조한 스타일의 번역이 아포칼립스적인 분위기가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아니 보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비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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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13 12: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앗 표지가 바뀌었네요 하고 봤더니 특별판이네요. 전 이 책 아주 예전 추석에 큰아주버님이 기차 타고 오면서 다 읽었다고 남편에게 넘겨서 ~ 무섭고 잔인하고 질서라는게 얼마나 손쉽게 무너지는지 허망했던 기억도 납니다. 저도 영화도 좋았어요 *^^*

레삭매냐 2022-09-13 13:33   좋아요 3 | URL
표지 갈이하고 단가가 거의
두 배가 되었답니다...

인간의 본성을 극단까지 밀어
붙이는 작가의 근성에 그만
질려 버릴 정도였습니다.

질서의 허망함이랄까요...

페크pek0501 2022-09-13 13: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기념 에디션이군요.
어느 팟케스트에서 이 작품을 읽어 줘서 들었어요. 그래서 내용을 알죠.
갑자기 눈이 멀게 되는 장면부터 참신하면서 충격적이라고 느꼈어요.

레삭매냐 2022-09-13 13:35   좋아요 4 | URL
사실 전 구판으로 읽었답니다.
너무 오래 전에 쟁여둔 책이라 -

명절에 집에 갔다가 집어서 읽
기 시작했는데 손에서 뗄 수가
없더라구요.

아이디어 하나는 기발했습니다.

청아 2022-09-13 14: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팟케스트에서 초반 스토리를 듣고 읽기가 두려웠어요. 영화도 그랬지만 모두가 눈이 안보인다는 설정이 그 어떤 설정보다 공포라고 생각했거든요. 의사의 아내는 비참한 상황의 유일한 목격자군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다‘는
말이 날카롭게 느껴집니다.
저도 결국은 읽게될 책인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2-09-13 15:15   좋아요 3 | URL
보이지 않는 백색의 공포 -

우리 인간이 지닌 오감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비주얼이 아
닌가 싶습니다. 그런 시각이
사라진다면... 상상하고 싶지
도 않네요.

시간이 많이 흘러도 언젠가
는 꼭 읽게 되시리라고 믿슙
니다.

바람돌이 2022-09-13 15: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을 때 충격이 잊히지 않아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밑바닥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파고든다는 느낌이었던것 같습니다. 이후로 이 작가의 팬이 되었는데 이후 읽은 책들 중 이 책을 능가하는 책이 없었다는 슬픔이.... ^^

레삭매냐 2022-09-13 17:45   좋아요 2 | URL
전 13년 전에 <수도원의 비망록>
과 <죽음의 중지> 읽고 나서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바람돌이님처럼 아마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네요.

Falstaff 2022-09-13 16: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오, 이 책, 이거 정말... 좀.... 아니, 과하게 적나라하지 않았나요?
어후, 전 이 작품 써 놓고 리스본 아파트 꼭대기에서 낄낄대면서 군중들을 내려다볼 사라마구가 연상되어 소름이 다 끼치던 것을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2-09-13 17:53   좋아요 3 | URL
너무 적나라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리더군요.

세상의 그 누구도 눈먼 자들
의 도시에 가져다 놓으면 그들
처럼 되어 버리지 않을까 싶습
니다.

역시 작가가 고수가 아니었을
까요.

coolcat329 2022-09-14 07: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가끔 운전하다 눈 부시면 이 소설 생각납니다. 눈이 머는 상상하곤 해요.

레삭매냐 2022-09-14 11:45   좋아요 3 | URL
운전하다 눈이 멀게 된다면 정말 -

어떻게 보면 아포칼립스라기 보다
호러에 가까운 소설이 아닌가 싶기
도 하더라구요.

젤소민아 2022-09-14 1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도 영화도 제목이나 발상 등 많은 오마쥬를 낳은 걸작이죠~~저도 다시 읽고프네요~~서브텍스트의 압권이랄까요~~

레삭매냐 2022-09-14 13:34   좋아요 1 | URL
오오 이미 읽으셨군요 ^^

전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내용을 모두 알고 봐도 넘
재밌더라구요. 역시 콘텐츠
의 힘인가 봅니다.

서니데이 2022-09-14 18: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00쇄 기념 에디션도 나온지 몇 년 되었네요.
이 책 영화로도 나오고 많이 소개되긴 했는데, 그래도 100쇄면 읽은 분이 많겠어요.
레삭매냐님, 연휴 잘 보내셨나요.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09-15 08:56   좋아요 2 | URL
우와 100쇄라니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해냄은 이 책으로 노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연휴가 어떻게 갔는지 모
르게 그렇게 지나가 버렸
네요, 감사합니다.
 

사람은 겉모습에 속기 쉽다는 것, 사람의 얼굴이나물렁물렁한 몸으로 마음의 힘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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