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암사자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쿠르트 발란데르 경위. 그는 1948년에 태어난 스웨덴 남부 스코네 지역 이스타드(위스타드?) 경찰서 소속 경찰이다. 발란데르는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작가 헨닝 만켈(2015년 작고)가 창조해낸 캐릭터다. 저자는 스톡홀름 출신이라고 하던데, 발란데르는 어디 출신이었더라. 말뫼였던가. 이번에 피니스아프리카에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 전에 사둔(무려 8년 전에!!!) 발란데르 시리즈 3<하얀 암사자>를 책장 구석탱이에서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책무덤에 갇혀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나 할까.

 

제법 두툼한 녀석이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주말끼고 단박에 읽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다 읽는데 무려 8년이나 걸렸구나. 돈주고 산 책은 언제고 읽는다라는 독서의 모토가 다시 한 번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시작은 남아프리카 형제단 소속 세 명의 보어인들의 비밀결사로 시작되었던가.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젖어 사는 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이데올로기가 근 수세기 동안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음 무대는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역으로 이동한다. 어느 날 부동산업자 루이제 아줌마가 실종되고, 우리의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가 투입된다. 투입되는 순간부터 경찰의 직감으로 발란데르는 그녀가 살아 있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다만 유족들을 위해 자신의 직감을 외부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 다음에는 동네 주택에서 폭발사고가 나서 집이 전소하고, 그 부근에서 흑인의 손가락 하나가 발견된다. 아니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려고 이렇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서사가 전개되는 걸까. 한 마디로 소설 <하얀 암사자>는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인종차별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남아프리카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던 1992년의 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세계 역사에 문외한이다 보니 영국의 식민지로 알고 있던 남아프리카에서 극단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주도한 게 영국계 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들보다 앞서 남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린 보어인, 아프리칸스들이야말로 평화롭게 살던 다수 남아프리카 흑인들을 굴종과 치욕 속으로 몰아넣은 주범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일 지도 모르겠다. 역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자신들의 흑인들에 대한 지배를 영속시키기 위한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 대표로 얀 클라인과 프란츠라는 인물을 헨닝 만켈은 배치한다. 그들은 대통령 프레데리크 빌럼 더 클레르크의 영도 아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드는 남아프리카(소설에서 암사자는 남아프리카를 상징한다고 밝힌다)의 미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그들의 망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해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고 유혈을 통한 내전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암살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정보부 출신의 빌런 얀 클라인은 암살 대상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남아프리카 최고의 킬러 빅토르 마바사를 고용한다.

 

그리고 그를 멀리 스웨덴의 오지에 보내 전직 KGB 장교 아나톨리에게 장거리에서 타겟을 처리하는 암살교육을 맡긴다. 그 와중에 그들이 지내던 외딴 집을 찾아온 루이제 아줌마를 냉혹한 빌런 아나톨리가 살해하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보다 만켈이 인종차별이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장소, 스웨덴과 남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그것이 마치 하나의 나비효과처럼,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남아프리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하나의 권력투쟁 혹은 반동에 대한 역작용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만켈의 치밀한 구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0년 전, 세계화 초기 시절에 새로운 사고가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바꾸게 강요할 거라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발란데르 경위의 경우에는 스웨덴 경찰 세계에 국한되어 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지닌 난민들이 지속적으로 그네들의 사회 속에 유입되면서 발생될 미증유의 사태에 대한 저자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러한 갈등들이 소설 속에서 발란데르와 아나톨리가 격렬하게 투쟁하는 장면처럼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될 수도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구소련제국 출신 KGB 아나톨리가 피지컬 영역을 맡았다면, 두뇌 플레이를 맡은 배후의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던 얀 클라인이 지닌 치명적 약점의 의도적 배치는 탁월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일까. 얀의 미란다에 대한 일방적 사랑이 궁극적 파멸의 원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 조금 평면적이지 않나 싶다.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 줄루족 전사 빅토르의 퇴장도 아쉬웠다.

 

전작들과 다른 스케일의 서사를 구사한다고 하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얼굴 없는 살인자><리가의 개들>을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사러 가야 하나.



[뱀다리] <하얀 암사자>를 다 읽고 나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영국 BBC에서 2008년부터 계속해서 헨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게 아닌가. 한 시리즈 당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란데르 소설을 극화한 모양이다.


어제 책으로 국내에 소개된 헨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를 검색해 보았는데 <사이드트랙>, <리가의 개들> 등등이 모두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 같다. 아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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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19 17: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전 판형 번역자가 독일 유학중에 번역해서(만켈 작품 독일 최고베스트셀러기록)
새번역본 추천합니다 ☺

레삭매냐 2022-09-19 18:42   좋아요 3 | URL
오오 그랬군요 :>

역시 스케일이 커서 그런지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마 <리가의 개들> 후속편
으로 나오나 보네요 :>
기대해 보겠습니다.

mini74 2022-09-19 1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 읽는데 8년. ㅎㅎ제게도 해넘긴 묵은지 같은 녀석들도 수두룩합니다. 이럴거면 책들을 항아리에 담아둘걸 그랬어요. 발효라도 잘 되라고 ㅎㅎㅎ 하얀 암사자 기억하겠습니다 *^^*

레삭매냐 2022-09-19 18:54   좋아요 2 | URL
그나마 산 걸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

묵은지 항아리를 저도 한 댓개
준비해야지 싶습니다.
일케라도 읽는 맛에 일단 질러!
를 외쳐 봅니다.

누군가 그랬다매요, 책을 사서
닐는 게 아니라 집에 쟁여둔
책을 닐는거다라고요 ㅋㅋㅋ

독서괭 2022-09-19 19: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은 사두면 언젠가 읽게 된다 ㅎㅎ 묵은지 항아리! ㅋㅋㅋ 저도 묵은지 꽤나 있는데 언젠가 읽으리라 믿어봅니다^^;
매냐님이 너무 재밌었다 하시니 기억해두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9-19 19:54   좋아요 2 | URL
절판된 책인데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아서 걱정
했는데 제 책더미에 떠억하
니 버티고 있을 줄이야 :>

피니스아프리카에 버전 기
대해 봅니다.

책은 묵은지 항아리다라는
타이틀로 뻬빠 하나 써봐
야겠습니다.

coolcat329 2022-09-19 19: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저 이 책으로 발란데르 시리즈 입문했습니다. 발란데르 말뫼 출신 맞습니다. 일하는 경찰서는 스코네 지역 Ystad 인데 발음이 제 귀엔 이스타드에 더 가깝게 들립니다.
피니스아프리카에에서 또 나온다면 이번에 하얀 암사자 차례인데 나오면 꼭 다시 읽어보려구요.

레삭매냐 2022-09-19 20:02   좋아요 3 | URL
오호 저도 그럼 쿨캇트
선밴님의 길을 따르는 거임?
ㅋㅋㅋ

피니스아프리카에 버전에서
는 지도에 위스타드로 표기
되어 있더라구요. 오늘부터
1권 읽기 바로 돌입합니다.

하얀 암사자, BBC에서 케네스
브래너 기용해서 맹근 도라마
시리즈가 있네요. <리가의 개들>
도 시리즈에 들어가 있네요...
아 급 보고 싶어졌습니다.

coolcat329 2022-09-19 20:06   좋아요 3 | URL
아마도 레삭매냐님이 저보다 앞서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없거든요ㅠㅠ

네~드라마 있습니다. 케네스 브래너 주연인데 거기는 배경이 영국이라 이름도 커트 월랜드입니다. 스웨덴 분위기가 아니라 저는 안봤습니다.

리가의 개들 도서관 신청도서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도 기대됩니다!

바람돌이 2022-09-19 2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추리소설 시리즈들은 왜 이렇게 많은걸까요? 다 보고싶어요. ^^
산 책은 언젠가는 읽는다굽쇼. 집에 있는 책들을 보면서 음 용기를 내봅니다. ^^

레삭매냐 2022-09-20 09:59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아마 매력적인 캐릭
이라 작가들이 최대한 뽑아 먹으
려... 그랬다고 합니다.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도 자그
마치 14권이나 되는 것 같더라
구요. 스핀오프도 있는 것 같고 -

산 책 다 읽는다에는 다소 뻥이
섞여 있지 않나 ㅋㅋ
여튼 읽고자 노력 중입니다.

라로 2022-09-21 1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발렌데르 시리즈 남편이랑 다 봤지요!!
넘 재밌었어요!!!

레삭매냐 2022-09-21 14:07   좋아요 1 | URL
저도 찾긴 했는데 돈 주고
사서 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
중이랍니다.

어떤 분들은 스웨덴 이야기
인데 영국에서 맹근 거라고
패스했더라는 야그가... 아
넘나 강렬한 유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