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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암사자 ㅣ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919/pimg_7234051033562749.jpg)
쿠르트 발란데르 경위. 그는 1948년에 태어난 스웨덴 남부 스코네 지역 이스타드(위스타드?) 경찰서 소속 경찰이다. 발란데르는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작가 헨닝 만켈(2015년 작고)가 창조해낸 캐릭터다. 저자는 스톡홀름 출신이라고 하던데, 발란데르는 어디 출신이었더라. 말뫼였던가. 이번에 피니스아프리카에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 전에 사둔(무려 8년 전에!!!) 발란데르 시리즈 3탄 <하얀 암사자>를 책장 구석탱이에서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책무덤에 갇혀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나 할까.
제법 두툼한 녀석이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주말끼고 단박에 읽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다 읽는데 무려 8년이나 걸렸구나. 돈주고 산 책은 언제고 읽는다라는 독서의 모토가 다시 한 번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시작은 남아프리카 형제단 소속 세 명의 보어인들의 비밀결사로 시작되었던가.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젖어 사는 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이데올로기가 근 수세기 동안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음 무대는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역으로 이동한다. 어느 날 부동산업자 루이제 아줌마가 실종되고, 우리의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가 투입된다. 투입되는 순간부터 경찰의 직감으로 발란데르는 그녀가 살아 있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다만 유족들을 위해 자신의 직감을 외부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 다음에는 동네 주택에서 폭발사고가 나서 집이 전소하고, 그 부근에서 흑인의 손가락 하나가 발견된다. 아니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려고 이렇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서사가 전개되는 걸까. 한 마디로 소설 <하얀 암사자>는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인종차별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남아프리카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던 1992년의 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세계 역사에 문외한이다 보니 영국의 식민지로 알고 있던 남아프리카에서 극단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주도한 게 영국계 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들보다 앞서 남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린 보어인, 아프리칸스들이야말로 평화롭게 살던 다수 남아프리카 흑인들을 굴종과 치욕 속으로 몰아넣은 주범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일 지도 모르겠다. 역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자신들의 흑인들에 대한 지배를 영속시키기 위한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 대표로 얀 클라인과 프란츠라는 인물을 헨닝 만켈은 배치한다. 그들은 대통령 프레데리크 빌럼 더 클레르크의 영도 아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드는 남아프리카(소설에서 암사자는 남아프리카를 상징한다고 밝힌다)의 미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그들의 망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해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고 유혈을 통한 내전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암살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정보부 출신의 빌런 얀 클라인은 암살 대상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남아프리카 최고의 킬러 빅토르 마바사를 고용한다.
그리고 그를 멀리 스웨덴의 오지에 보내 전직 KGB 장교 아나톨리에게 장거리에서 타겟을 처리하는 암살교육을 맡긴다. 그 와중에 그들이 지내던 외딴 집을 찾아온 루이제 아줌마를 냉혹한 빌런 아나톨리가 살해하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보다 만켈이 인종차별이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장소, 스웨덴과 남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그것이 마치 하나의 나비효과처럼, 스웨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남아프리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하나의 권력투쟁 혹은 반동에 대한 역작용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만켈의 치밀한 구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0년 전, 세계화 초기 시절에 ‘새로운 사고’가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바꾸게 강요할 거라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발란데르 경위의 경우에는 스웨덴 경찰 세계에 국한되어 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지닌 난민들이 지속적으로 그네들의 사회 속에 유입되면서 발생될 미증유의 사태에 대한 저자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러한 갈등들이 소설 속에서 발란데르와 아나톨리가 격렬하게 투쟁하는 장면처럼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될 수도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구소련제국 출신 KGB 아나톨리가 피지컬 영역을 맡았다면, 두뇌 플레이를 맡은 배후의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던 얀 클라인이 지닌 치명적 약점의 의도적 배치는 탁월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일까. 얀의 미란다에 대한 일방적 사랑이 궁극적 파멸의 원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 조금 평면적이지 않나 싶다.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 줄루족 전사 빅토르의 퇴장도 아쉬웠다.
전작들과 다른 스케일의 서사를 구사한다고 하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얼굴 없는 살인자>와 <리가의 개들>을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사러 가야 하나.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919/pimg_7234051033562786.jpg)
[뱀다리] <하얀 암사자>를 다 읽고 나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영국 BBC에서 2008년부터 계속해서 헨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게 아닌가. 한 시리즈 당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란데르 소설을 극화한 모양이다.
어제 책으로 국내에 소개된 헨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를 검색해 보았는데 <사이드트랙>, <리가의 개들> 등등이 모두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 같다. 아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