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바다 -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1년 12월
평점 :
품절



 

어려서부터 내셔널리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탓도, 월드컵도 잘 보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거의 모든 이들이 봤다는 <명량>도 보지 않았다. 그러다 세밑에 도서관에 갔다가 황현필 작가의 <이순신의 바다>가 보였다. 냉큼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계묘년 첫해의 첫 번째 책으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술술 읽혔고, 그림과 지도들이 많아서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다.

 

영웅을 뛰어 넘어 성웅이라 불리는 역사적 인물이 우리나라에 또 있을까. 세종과 이순신 정도가 아닐까 싶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군주에게 핍팍과 억압을 당하고 결국 7년 전란을 마무리짓는 마지막 전투에서 산화한 신화적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 아니던가. 자그마치 5,000여명이 되는 이들이 이순신 연구를 하고 있다니 그가 얼마나 문제적 인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처음부터 타협적인 태도를 지닌 정치적 인간이었다면 원균의 모함이나 조정이나 선조의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하거나 그런 일은 처음부터 없었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태생부터 그렇게 생겨 먹은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색당파로 분열된 조정에서 한낱 지방관에 불과한 무인을 주무르는 건 일도 아니었으리라. 그나마 그를 발탁한 서애 류성룡을 필두로 한 인물들이 이순신을 비호해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가시화되고 있었지만, 개국 이래 200년간의 태평성대로 조선은 외적의 대대적인 침략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5924월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정예부대가 부산진에 상륙했을 때 육전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게 판판히 박살이 나고 있었다. 결국 임금 선조는 파천하고 의주로 튀어 버렸다. 한국전쟁 때 최고책임자처럼 말이다.

 

조국이 파국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일군의 수군을 이끌고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에 쐐기를 박았다. 가장 먼저 왜군이 상륙한 경상도 바다를 지켜야 했던 원균은 아무런 작전도 하지 않은 채 도주했다. 이런 인간을 선조는 계속해서 중용하다가 결국 칠천량에서 사단을 내고 만다. 그를 비호한 조정 인사였던 윤두수는 원균과 사돈지간이었고, 또 윤두수는 선조와 사돈지간이었다고 한다. 망조 들린 나라 조선 몰락의 이유에는 이렇게 정실인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재정의 1/3을 책임지는 호남을 왜군에게 넘겨준다면, 전쟁 수행을 위해 보급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조선 원정군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다.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이순신은 자신 휘하에 배속된 수군은 물론이고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병사들과 주력함선인 판옥선을 모으는데 집중했다. 일대일 대결에서는 일본 소년 무사 하나를 당해낼 수가 없었기에 원거리 아웃복싱을 주력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수군의 장기인 등선육박전을 피하고, 대신 원거리 함포사격으로 왜군 격파를 시도했다.

 

한편,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지원과 보급을 기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판옥선의 건조는 물론이고, 군량미와 화약 등 전쟁 필수물자들을 자급자족해야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가 도입했다는 둔전제 실시에도 적극적이었다. 전쟁이 소강기를 맞이했을 때는, 이순신이 직접 농기구를 들고 밭을 갈기도 했다고 한다. 뛰어난 지방관으로서의 모습도 보인다.

 

전략가로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적에게 아군의 의도를 숨긴 채 기동하는 기도비닉은 기본이었다. 사전에 실전에 가까운 빡센 모의훈련으로 얼마 안되는 조선 수군을 정예병사로 키워내는데 성공했다. 지속된 정찰로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적을 섬멸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옥포해전을 필두로 해서, 마지막 노량해전을 제외하고 스무 차례에 달하는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가 말도 안되는 가성비를 자랑했다.

 

물론 가장 많은 적은 쳐부순 한산도대첩도 중요했지만, 이순신 자신은 당포해전을 중요시했다는 점도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견내량과 한산도를 장악한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서진을 철저하게 막았다. 오죽했으면, 타이코 히데요시가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과 맞붙지 말라는 명을 내렸을까.

 

고려 천자라 불리던 만력제의 결단으로 선조가 그렇게 고대하던 명군이 마침내 참전하면서 내내 밀리던 육전에서도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한 명군이 조선군처럼 열심히 싸우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명군과 왜군과의 정전협상이 개시되면서 1597년까지 4년간의 냉전이 시작됐다. 명에서 파견된 협상가 심유경의 주작질로 협상이 질질 끄는 동안, 일본은 자그마치 9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서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대학살을 자행한다. 그동안 이순신은 조정을 명을 받고 일본군을 요격하고자 부산진까지 출진했지만, 협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명나라의 제지를 받고 군사를 돌리게 된다.

 

이 와중에 사사건건 이순신의 전쟁을 방해하던 원균이 올린 장계를 철썩 같이 믿은 멍청이 임금 선조를 결국 이순신의 파직시키고 조정으로 압송을 명령한다. 도대체 이순신이 무슨 역적질을 했단 말인가? 나라를 잃고 파천한 임금이 자신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조커 같은 카드를 이렇게 대하다니 그저 할 말이 없을 뿐이었다. 인조와 더불어 조선 역사에서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암군 선조가 그렇게 믿고 의지한 원균이 이순신이 수년간 애를 써가면서 키운 조선 수군을 칠천량 전투에서 한 방에 들어먹었다. 이순신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얼씬도 못하던 남해 바다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일본이 재침공한 정유재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무리 멍청한 임금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카드가 달랑 하나 남아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선조는 백의종군한 영웅을 다시 복직시킨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웅은 남아 있는 한 줌의 패잔 부대를 끌어 모아 기세등등한 일본 수군에 맞선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이었다. 아무래도 영화를 봐야 하나 싶다.

 

그간 황현필 작가의 임진왜란 역사 콘텐츠를 많이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백미는 역시나 임진-정유재란을 마무리짓는 노량해전이 아닌가 싶다. 조국의 강토를 짓밟은 왜군이 다시는 조선 땅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사기가 떨어진 채 철군하는 왜군을 섬멸하는 것이 이순신의 최우선 목표였다.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조선 수군의 작전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타겟이 될 수가 없었다. 대신 순천왜성에 주둔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그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다는 게 이순신의 판단이었다. 해상으로 철군하지 않으면 고사당할 위기에 처한 일본군의 발악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그만큼 조선군의 피해도 막심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실제 역사지만, 이렇게 완벽한 서사가 또 있을 수가 있을까 싶다. 무과에 급제해서 변방에서 실력을 기른 장수가 국난의 위기에 분연히 일어나 연전연승하며 조국을 구했다. 국가 지도자는 이런 영웅에게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은 채, 터무니없는 명령만 주문한다. 라이벌의 모함을 받아 들여 그를 파직시키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다.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막내 아들과 어머니를 전란 중에 잃었다. 자신도 사천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1년 간 고생했다. 역병에 걸려 운신이 어려운 와중에도 뜨거운 조국애와 애민정신으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어느 누구도 생전에 영웅의 노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결국 자신은 해도 그만인 망궐례를 임금에게 하지 않고, 항명을 빌미로 파직과 탄핵을 당할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쟁의 대단원을 알리는 마지막 전투에서 영웅의 죽음은 이 위대한 서사의 화룡점정이었다. 다양한 변주를 통해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밖에 없는 완벽한 서사라는 점을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다.

 

왜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가. 정의조차 취사선택되는 수상한 시절 탓을 해야 하는 걸까. 내우외환, 고물가 그리고 경제 위기에 대한 경고가 끊이지 않는다. 모든 지표가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시기에 지도자의 자질과 품격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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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3-01-01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려천자 ㅎㅎㅎ 딱 맞는 말같아요. 칠전량전투 너무 열받더라고요. 마지막 문단 와닿습니다 매냐님 ~ 편한 저녁 보내세요 *^^*

레삭매냐 2023-01-02 10:01   좋아요 1 | URL
어제 결국 영화 <명량>을 봤는데
진차 국뽕 원탑이었습니다.

칠천량 전투는 정말 -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3-01-01 2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제 역사지만 너무 드라마틱해서 더 감동적인것 같아요~!! 사실 그대로의 국뽕은 너무 좋은거 같아요~!!

레삭매냐 2023-01-02 10:02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실제 역사가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 있
다니...

명량-한산 그리고 마지막
노량이라고 하는데, 마지
막 작품은 눙물바다가 될
것 같습니다.

bookholic 2023-01-01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황현필 유튜브도 좋더라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레삭매냐 2023-01-02 10:03   좋아요 1 | URL
네 황작가님 너튜브
즐겨 보고 있답니다.

좋은 콘텐츠에 박수
를 보내는 바입니다.
쨕쨕쨕.

감사합니다, 북홀릭님
도 새해 복 많이 받으
셔요.

coolcat329 2023-01-02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뽕할 만 해요. 정말 영웅의 서사입니다.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레삭매냐 2023-01-02 10:06   좋아요 1 | URL
저의 디폴트는 국뽕 결사
반대지만, 이 정도면 예외
를 두어도 되지 싶습니다.

<명량>에서 적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대장선이 울돌목으로 빨
려 들어갈 때, 갑자기 등
장한 백성들의 포작선(?)
이 침몰 위기를 구해내는
장면은 진차 압권이었습니다.

책은 쉬워서 슬슬 읽힙니다.
감히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이제 진짜 올해도 내일 하루만 남았구나.

오늘도 어김없이 책쟁이는 책을 사들였다.

 

우리 회사는 지난 수요일, 종무식을 하고 공식적 휴가에 돌입했다.



회식날 실컷 먹은 문어 숙회다.



타이틀은 잘 모르겠지만, 새우 튀김과 오징어 감튀 한 컷.


어제 오늘 나름 집안정리를 한다고 하는데, 도통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필요 없는 것들은 죄다 내다 버려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그중에 가장 큰 적이 바로 책이다. 할 말이 없다.



나의 퍼스트픽은 가나계 캐나다인 에시 에디잔의 <워싱턴 블랙>이었다.

출간 예정이라던 출판사의 인스타픽은 순 뻥이었다. 해를 넘기고서야 책이 나왔다.

그리고 나도 잊어 버렸던 모양이다. 어느새 중고로 풀렸고, 냉큼 업어왔다.

 

참 요 며칠 램프의 요정에서는 중고매장 할인을 시작했다. 책을 많이 사면 책값을 깎아 준다니, 외면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지 않은가. 어제 가려고 종이쪽지에 살 책들을 적어 두었는데 오늘 급하게 점심 먹으러 나가는 바람에 집에 두고갔다. 내가 하는 일들이 그렇지 뭐. 그래도 기억을 살려서 구매에 대성공했다. 네 권 가운데 한 권은 공짜로 산 셈이다. 하긴 적립금으로 모두 결제해서 내 돈은 한 푼도 안들긴 했지만. 이렇게 위로를 하며 책을 또 나는 사들인다.


어제 자기 전에 조금 읽어 보았는데...

세상에나 바베이도스의 페이스 농장에서 벌어지는 노예들에 대한 잔혹한 학대에 대한 묘사는 지금까지 만나 보지 못한 그런 것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 정도의 잔학한 행위를 했다고. 충격으로 읽기를 잠시 중단할 정도였다.

소설의 내용이 밤에 꿈에 나올까 무서울 정도였다고. -



공사 현장에서 아이폰으로 쓴 40여편의 짧은 소설이라는 강렬한 선전에 넘어가서 산 책이다. 아마 도서관에 이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면 사지 않았을 지도. 비슷한 궤적의 작가 김동식의 짧은 소설들이 연상됐다.

 

문득 궁금해져서 40편의 소설 가운데 표제작 포함 네 편을 읽어봤다. 매의 눈으로 잡아낸 오탈자 하나에 빈정이 상했다. 나란 인간이란 참. 그전에 표지에 적힌 누구라도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선언이 마음에 쏙 들었는데 말이지. 한국의 독자들을 새로운 친구 여러분이라고, 우리 덕분에 자신이 조다리 부근에 살던 자신이 캘리에서 휴가를 즐기게 되었다는 말도 좋았는데. 짧은 글에 대한 소감은 사람 참 싱겁네. 그런데 싱겁고 슴슴한 맛이 자꾸 떠오르게 생겼네. , ‘더블 버드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숨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스페인 내전과 칠레의 선거 혁명 주제를 다룬 책은 사야지. 이사벨 아옌데의 <바다의 긴 꽃잎>은 그전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빌렸다가 초반에 조금 깔짝대다가 반납했던 기억이다.

 

책을 휘리릭 넘겨 보는데 전혀 누구의 손을 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새책으로 헌책 시장에 나오다니... 새책을 좋은 가격에 데려와서 기분이 좋긴 한데, 또 한편으로는 그렇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로 <폴과 베르지니>를 알게 되었는데, 정작 책은 다른 출판사 책으로 읽었다. 그 좋은 추억으로 최근 아를트의 책을 읽었는데, 좀 아니었다. 책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내다 팔아야겠다. 신속하게 말이지.

 

미국에서 아마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소개가 있던데... 격이 가물가물하다. 아니면 말구. 찾아 보기도 귀찮구나 그래.



자목련님이 나의 책덜어내기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 주셨는데...

그동안 한 세 번하고 나서 버벅대다가... 항상 출발은 좋았다.

오늘 네 권을 덜어냈다.



집 근처에 있는 휴게공간 겸 서가에 가서 책 네 권을 살포시 꽂아 두고 나왔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아예 운영을 하지 않다가 다시 개시를 했는데... 뭔 요상한 비즈니스 공간과 겹쳐 있어서 출입하기가 좀 그렇더라. 예전이 더 좋더라는 말이다.



지난달에 인천집에서 데려온 앤소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을 가져가서 읽기 시작했다.

1982년에 나온 책을 그동안 밝혀진 자료들을 얹어서 새롭게 펴낸 책이라고 한다.

750쪽으로 가히 벽돌책이라 부를 만하다. 언제 샀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교보문고 바로드림이 찍혀 있는 것으로 교보에서 산 건 알겠다. 교보는 알라딘과 달리 기존 구매 내역을 화끈하게 공개하지 않아서 좀 아쉽다. 언제 산 건지 모르니 말이지.

동시다발적으로 이렇게 막 시작해도 되는지... 결국 내년에 읽어야 할 책들이다 모두



지난 화요일날 북플 매니아 선정으로 받은 스누피 책상달력이다.

다이어리는 감자탕하는 친구 녀석에게 택배로 바로 보냈다. 회사에 남는 다이어리가 있으면 보내 달라고 징징 거리는데, 사실 회사에 남는 다이어리는 없다. 그러고 보니 그전에는 머그도 하나씩 담아 보내주었던 것 같은데... 갈수록 뭔가 하나씩 빠지니 좀 아쉽긴 하다. 달격/다이어리 대신 만이천원 상당의 책 한 권 픽이 낫지 않을까. 아마 그놈의 도서정가제 때문에 안되겠지. 아니 뭐라도 이렇게 보내 주셔서 고저 감사합니다.



마지막 컷은 지난주에 정리한 베란다에 자리잡은 나의 소박한 화분들이다.

추위에 비실거리던 내 사랑 해바라기들은 장렬하게 얼어 죽고 말았다. 과감하게 덜어내고 채로 흙을 쳐서 토실토실한 화분들을 다시 만들고 해바라기 씨를 심었다. 지금 심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올해에는 해바라기 씨를 받지 못해 좀 아쉽다. 새해에는 받도록 노력해야지.

 

한 화분 안에서 아우성치던 스투키를 나누었더니만 다섯 개가 되는 마법이 발생했다.

꼬맹이가 심은 모기 쫓는 풀이라는 녀석은 2년째 건재하다. 놀랍다.

지난 10월에 여주 친구네 집에 갔다가 들판에서 받아와 심은 채송화는 잘 자라고 있다.

튤립 구근을 지금 심어야 봄에 꽃을 피운다고 하던데, 구근을 사야 하나 어쩌나 고민이다.

 

올 한 해도 북플에서 잘 놀았다. 함께 해준 램프의 요정 동지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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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2-31 0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회사 회식 맛집이네요 ㅎㅎㅎ 전 오랜만에 집에서 맥주 한 잔 하고 볼 빨갛게 하고 있습니다 제 양얖으론 강아지님이랑 남편이랑 코 골며 졸고 있어요. 우남편좌개님… 제 사랑은 좌파로 편향된 ㅎㅎㅎ 편안한 밤 보내세요 매냐님. 그나저나 스페인내전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2-12-31 08:58   좋아요 1 | URL
전 그날 오랜간만에 너무 달려서
다음날 아주 고생을 했답니다.
이래서 작작 마셔야...

우넘의편좌개님의 레프트바이어스 -
미니님은 진정 센스쟁이이십니다.

새해에도 이어질 미니님의 촌철살인
유머발랄 기대해 보겠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서사는 고저 묵직합
니다. 무게도 그리고 내용에서도요.

망고 2022-12-31 00: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튤립구근은 주로 가을에 심어요 10월이나 늦어도 11월까지^^ 지금 심어도 잘 나는지 모르겠는데...실내에서는 지금 심어도 되려나요🤔

레삭매냐 2022-12-31 09:00   좋아요 2 | URL
앗 그런가요?

790원 한 구근 사가라는
광고 문구에서는 겨울에
심어야 봄에 핀다고 하던
데 힝 - 역시 이래서 광고
는 믿으면 안되나 봅니다.

지난 봄에 꽃이 올라오는
구근 사다가 심어서 피는
걸 보긴 했는데 금방 죽
어서요.

올해는 미리 도전해 보고
자 합니다. 한 뿌리에 790원
이면...

망고 2022-12-31 09:25   좋아요 2 | URL
튤립 추식구근이라 주로 가을에 심는데 화분에는 겨울에도 심나보네요 튤립 도전 응원합니다 봄에 피면 참 예쁘죠 구근관리 잘 하셔서 매년 예쁜꽃 보시길요😄

bookholic 2022-12-31 01: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2023년도 사재기는 계속 되길 바랍니다~^^

레삭매냐 2022-12-31 09:00   좋아요 1 | URL
끊을 수 없는 사재기의 유혹구 !

암요, 그러믄요.
계묘년 토꽹이의 해에도 계속
살랍니다.

새파랑 2022-12-31 08: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화분도 키우시는군요. 너무 다재다능 하십니다~!! 알라딘 사은품 너무 좋긴 한데 제가 쓰기에는 너무 화려(?)해서 저도 지인에게 줬네요 ㅋ 역시 책쟁이의 책구매는 날을 가리지 않는거 같아요~!!

레삭매냐 2022-12-31 10:29   좋아요 2 | URL
무슨 말씀을요... 저도는
그린썸이 아니라 똥손입
니다. 다 말려 죽이고 -

그저 집안에 너무 삭막해
서 풀이라도 조금 심어
보려고 한답니다.

새파랑님도 지인에게 선물
하셨군요 ^^ 책쟁이들은
고저 책 사들이는 낙에 살
지 않나 싶습니다.

페넬로페 2022-12-31 1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성에서, 금성에서~~
언제 적 책인지 갑자기 지난 시간이 그리워집니다.
엄마가 맛깔스럽게 데쳐주시던 문어숙회도 생각나고요.
레삭매냐님께서는 다양한 분야의 달인이신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레삭매냐 2023-01-01 19:47   좋아요 2 | URL
화성 금성, 진짜 옛날 책이지요.

지난 시간들은 모름지기 추억으
로 그리워지나 봅니다.

새해에도 책쟁이로 열심히 책사
고 읽고 쓰고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22-12-31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 책이 늘어나는 만큼, 이전 책들을 조금 더 줄여야 하는데, 그거 어려워요.^^;

레삭매냐님, ,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예요.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레삭매냐 2023-01-01 19:47   좋아요 2 | URL
올해에는 진차 진차
책 줄이기에 노력해
보겠다는 고진말로
시작해 보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거리의화가 2022-12-31 2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회식 메뉴가 고급집니다~ㅎㅎ 저는 이번에 치킨집에서 맥주 마셨거든요. 제가 좋아하지도 않는 술인데다가 죄다 튀김. 배만 부르고 넘 힘들었습니다.
암튼 각설하고 이사벨 아옌데 책은 저도 읽어보고 싶던 책이었는데 도전을 못했네요. 스페인 내전 찜해보렵니다.
베란다 화분들 정갈하고 이쁘네요. 저는 하나 있는 식물 화분도 죽여놔서 이후는 생각조차 하질 않고 있어요. 멋지십니다. 초록색 식물을 보니 어서 따뜻한 계절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 드네요ㅠㅠ
한해동안 감사했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리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레삭매냐 2023-01-01 19:49   좋아요 2 | URL
저희 1차에서는 양갈비를 때려
먹었답니다 ^^

2차에서는 갈리는 바람에...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
는 구호대로 나가다가 장렬
하게 전사했다는 후문이 -

저도 계속해서 그린킬러가
되는 바람에 좌절도 하지만
또 새싹을 자라나는 녀석들
덕분에 버프를 받아 ㅋㅋ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oolcat329 2022-12-31 2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어숙회 진짜 매 주말마다 저의 안주였는데요...문어 다큐보고 이젠 못 먹습니다. 그 생명체가 인간과 교감을 하다니...ㅠㅠ
스페인 내전 책 저도 땅깁니다.
레삭매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레삭매냐 2023-01-01 19:50   좋아요 1 | URL
으아~ 문어가 닝겡이들과 교감을!
미처 몰랐네요 ㅠㅠ

저도 문어 먹은 지가 얼마 안되어
서요 켁

감사합니다, 쿨캇트님 새해 복 많
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3-01-02 09: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먹거리와 읽을 거리, 그리고 정리까지 마지막을 잘 보내시고 새해를 맞으셨겠네요. 들어온 책만큼 나가는 책이 있어야 하는데, 올해는 적극적으로 균형을 맞춰야 할 것 같아요. 토끼의 해에도 신나고 즐거운 책읽기 이어가세요!

레삭매냐 2023-01-02 10:07   좋아요 1 | URL
니에 -

드디어 계묘년 첫번째
워킹데이가 시작되었네요.

지난 주에 너무 놀아서
적응이 쉽지 않네요.

자목련님도 새해 즐겁
고 신나는 독서의 시간들
이 되시길...
 
엉덩이에 입맞춤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9
에펠리 하우오파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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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연히 알게 된 들녘 일루저니스트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마누엘 리바스의 <목수의 연필>을 빌리러 갔다. 그러다 문득 14년 전에 읽은 유쾌한 소설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도 그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엉덩이>도 같이 빌렸다. 그리고 이미 한 번 읽은 <엉덩이>를 먼저 읽게 됐다. 요즘 약간 독서 슬럼프라 재밌는 책이 읽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 오일레이 봄보키의 엉덩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좀 더 레알하게 밝히자면 그의 똥구멍에 비상이 걸린 거다. 자고로 먹고 싸는 문제만 해결되면 삶이 순탄할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 소싯적 권투 챔피언으로 지금은 성공한 택시 사업가이자 농장주로 잘 나가던 티포타에 사는 오일레이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게다가 그가 앓고 있는 부위는 누군가에게 밝히기도 꺼릴 만한 그런 곳이 아니던가.

 

설상가상으로 남말하기와 뒤까기에 있어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바로 코로다무 사람들이다. 똥구멍이 아픈 오일레이에 대한 소문이 그야말로 바람을 타고 모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렇다할 오락거리가 없는 그들에게 어쩌면 미래의 상원의원이 될 지도 모를 오일레이의 고통은 누군가에게는 희소식일 수도 있다는 점이 서사를 보다 더 흥미롭게 만든다.

 

게다가 남태평양 섬에 사는 코코넛들은 최신 현대 의술을 1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병원은 시체안치소와 동일한 말이다. 사실 현대 의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비용이 비싸서 그들은 의사들의 진단보다도 동네 주술사들 보다 고상하게 말하면 도토레들을 더 의지하고 따른다. 그렇다고 도토레들의 실력이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오일레이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영역의 문제로 돌려야 할까.

 

에펠리 하우오파 작가의 직설적이고 가감 없는 주인공 오일레이 봄보키에 대한 묘사는 일품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든 소설이 반드시 문학적 성취나 고상해야 한다는 사변적 당위성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엉덩이에 입맞춤을>이 품은 서사가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구사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공존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의사들은 자신들의 영리를 위해 기존의 민간요법이나 일체의 주술을 거부한다. 어떤 기득권층이 자신의 밥그릇 혹은 파이가 줄어드는 걸 원한단 말인가. 하지만 남태평양 현지의 상황을 파악한 의사/닥터들은 아무리 기독교 신앙이 포교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주민들에게 뿌리 깊이 자리한 민간신앙과 민간치료를 발본색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연합 심포지엄인가에서 그들의 존재를 이해하고 자신들은 닥터로 그리고 민간 주술사들은 도토레라고 불리는 공존에 대한 합의를 이루게 된다.

 

한편,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오일레이의 똥구멍 치료를 위해 영험하다는 도토레들은 물론이고 용의 연고, 심리학자 그리고 신앙의 힘까지 총동원된다. 현세의 고통 때문에 유약해진 오일레이의 영혼은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단 사이비에 현혹되기도 한다. 잠시나마 당장의 고통을 잊을 수는 있었지만 문제의 근원 해결에는 역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일레이의 고통은 배가될 뿐이었다.

 

결국에 가서 오일레이는 키위들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다. 그 와중에 등장한 부타코 경관은 뉴질랜드 대사에게 호소해서 오일레이를 돕는다면 명목으로 이민을 추진하기도 한다. 똥구멍 같은 코코넛들의 나라에서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부타코 경관은 불법이민을 추진하다가 발각이 되고, 결국 밀항길에 오른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뉴질랜드에 도착한 오일레이는 기상천외한 방식의 항문이식수술을...

 

아마 백인 작가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서사를 구사했다면, 바로 인종차별이나 코코넛들에 대한 비하로 공격받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엉덩이에서 출발해서 우주의 본성까지 들먹이는 작가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구성은 어디까지나 현지인들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에펠리 하우오파는 기존의 점잔빼는 서구인들의 시선에 이 소설로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너희들에게는 닥터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도토레들이 있단 말이지 하고 말이다. 에펠리 하우오파의 다른 저작들을 만날 수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뱀다리] 처음에 읽었을 적에는 별 다섯 개를 주었는데, 다시 읽다 보니 그 정도는 아닌 듯 싶게 되었다. 시간이 가니, 책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도 달라지는가. 그래도 여전히 빵빵 터지는 코코넛 스타일의 유머는 건재했다. 아마 번역의 힘도 상당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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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12-28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문이식수술@_@; 음음 하며 읽다가 깜놀@_@;;; 제가 이 책을 읽었다면 이건 뭐지 하며 비틀비틀 쓰러졌을텐데 역시 레삭매냐님의 내공에 고개 숙입니다(_ _);;

레삭매냐 2022-12-28 11:30   좋아요 1 | URL
주술적 레알리즘까지 가면
너무 먼 듯하고, 판타지스러운
설정과 코코넛스러운 냉소가
빵빵 터지는 유쾌한 소설이랍
니다.

저의 허접한 내공을 좋게 봐주
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Falstaff 2022-12-28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진즉 읽으시지요! 이 재미난 책을. ㅋㅋㅋ

레삭매냐 2022-12-28 11:4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재밌다는 점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리뷰 서두에 있지만
이미 14년 전에 읽었다는.
 
목수의 연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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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인류 역사에 남긴 두 번의 생채기 중의 하나라는 에스파냐 내전을 다룬 소설이다. 예전에 아주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하는 들녘의 일루저니스트의 팬이었는데 왜 이 소설의 존재는 몰랐을까. 이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같은 시리즈에 속한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도 빌려서 먼저 읽었다. 묵직한 내용 때문인지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한눈을 팔았다는 게 더 솔직한 말이겠지.

 

에스파냐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라는 갈리시아 지방 출신의 마누엘 리바스는 전후 세대로 아마도 구전되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로부터 이 소설의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다.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더라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사고들은 버라이어티하고 예상을 뛰어넘는다.

 

1936717일 국가주의자들이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해 216,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했고, 공화파 정부가 들어섰다. 독재자 프랑코와 군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자들은 같은 파시스트들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의 전폭적인 군사지원 아래 공화파들을 거점을 차례로 공략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차례로 함락당하고 193941일 공화파의 마지막 저항거점이었던 톨레도가 항복하면서 내전은 프랑코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내전의 최전선에서 국가주의자들과 공화파가 매섭게 맞붙었다면, 후방에서도 전방 못지않은 전투가 벌어졌다. 국가주의자들과 팔랑헤 당원으로 구성된 민병대원들은 공화파 인사, 사회주의자와 불온세력을 대거 체포해서 포로로 잡았다. 불법구금과 처형이 만연했다. 중세 종교재판 이래, 다시 한 번 에스파냐에 무법천지가 도래한 것이다.

 

<목수의 연필>에는 모두 세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첫 두 인물들은 바로 다니엘 다 바르카 의사와 그의 연인 마리사 마요다. 그리고 이 둘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라고 내가 생각하는 전직 군인 출신 간수 에르발이다. 다 바르카와 마리사가 지식인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한다면, 에르발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자 국가주의자 진영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농촌 출신 에르발의 계급을 본다면 당연히 반대편에 서야 하겠지만,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는 포로들을 산책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서 산책은 포로들의 신속한 불법 처형을 의미했다. 문명 사회의 기준인 기소나 재판 따위는 절차는 필요 없었다. 프랑코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모두 현실 세계에서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를 그리는 화가가 가장 먼저 처형되었다. 역시 국가주의자들은 선전선동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지한 에르발은 화가가 독재 시스템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그의 상관들의 그것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에르발에 화가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자, 화가의 영혼이 에르발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의 의식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한창 유행한 주술적 리얼리즘의 영향이 보인다.

 

체포조에 반항하던 다 바르카에게 개머리판으로 한 방 먹인 사람도 바로 에르발이었다. 그는 앞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독재 권력에 충실한 개 역할을 할 인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자신의 상관인 란데사 중사의 마음에 꼭 들었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할 인사였던 다 바르카는 두 번이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는데 성공한다. 에르발은 다 바르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의 애인인 마리사 마요보다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 여기서 또 로맨스가 빠지면 안되지. 절세미녀인 마리사는 자신의 애인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한편, 자기 계급의 적인 다 바르카를 반대하는 그녀의 조부 베니토 마요는 그를 세상에서 소멸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사랑하는 손녀딸에게 말한다. 마리사는 자해까지 감행하면서 다 바르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다 바르카가 긴 투옥 생활을 이겨내는데 사랑의 힘이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해 본다.

 

마누엘 리바스 작가는 에스파냐 내전 당시, 아무런 죄 없이 투옥된 포로/죄수들을 도운 에스파냐 여성들의 지지에 대해서도 소설의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적어도 반동적인 역사의 흐름에 있어 방관자가 아니었다. 다 바르카나 다른 공화파 인사들이 체포조에 의해 끌려갈 때, 그들을 막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빨래를 이용해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의 형제 부모 남편이나 애인들에게 해산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국가주의자들과 프랑코 독재에 맞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싸운 이들에 대한 리바스식 경의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발에게 들러붙은 화가의 그것은 양심의 목소리다. 이러한 설정은 아무리 에르발이 독재자 프랑코에게 부역한 빌런이라고 하더라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을 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누엘 리바스는 다 바르카나 마리사 마요의 입장 그러니까 피해자의 목소리보다 가해자의 목소리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반성과 화해 그리고 역사 청산이라는 에스파냐가 짊어진 궁극적 과제에 대한 문제 제기의 발로다. 언제나 그렇지만, 역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끝없는 투쟁이다. 소설 <목수의 연필>은 역사에 대해 영원한 무관심에 빠진 이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깨어나 행동에 나서라고.

 

[뱀다리]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두 권이 말미에 실려 있어 기록해 본다.

1. <살라미나의 병사들> 하비에르 세르카스 (열린책들)

2. <열세 송이 붉은 장미> 카를로스 폰세카/헤수스 페레로 (국내미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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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2-12-28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분명 이 소설을 읽고 리뷰까지 썼는데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ㅠ
그래서 제가 쓴 리뷰를 찾아 읽고 매냐 님의 글을 다시 읽었어요.

레삭매냐 2022-12-28 09: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한 책들이 부지기수
랍니다.
분명 읽은 것도 리뷰로 기록을
남긴 것도 기억이 나지만, 정
작 내용은 모두...

저도 자목련님의 리뷰 찾아 보
겠습니다 :>

그레이스 2022-12-29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스페인 내전과 관계있을거라고는 생각 못했네요. 저장하고 갑니다.

레삭매냐 2022-12-29 10:52   좋아요 1 | URL
아마 올해 읽은 마지막 책이 될
것 같은데, 한 해를 마무리하기
에 좋은 책이었습니다.

coolcat329 2022-12-31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보는 책, 작가인데 스페인 내전 배경에 세 명의 인물이 주인공이라니 뭔가 흥미진진할 거 같네요.

레삭매냐 2023-01-04 10:58   좋아요 0 | URL
저도 최근에 알게 되었네요.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그리고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이사벨 아옌데의
<바다의 긴 꽃잎>...

책을 읽을수록 가슴이 먹먹해 지네요.

서니데이 2023-01-0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3-01-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제5도살장 (그래픽 노블)
커트 보니것 원작, 라이언 노스 각색, 앨버트 먼티스 그림,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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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그리고 2017년에 커트 보네거트의 <5도살장>을 읽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을 잊어 버렸다. 다시 5년이 지나, 그래픽 노블로 새롭게 <5도살장>을 읽었다. 새로웠고, 또 원전이 읽고 싶어졌다. 보네거트와 세풀베다, 예나 지금이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작가들이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저자가 반전 운동가이자 소설가가 된 계기가 되었던 1945213일 드레스덴 폭격이 그래픽 노블 <5도살장>을 중심을 차지한다. 미영 연합군 수뇌부들은 독일 전쟁기계의 전쟁 의지를 박살내기 위해, 전무후무한 공습을 구상했다. 영국의 중폭격기 772대와 미군기 527대를 동원해서 비무장도시로 알려진 엘베 강변의 드레스덴에 그야말로 3,900톤에 달하는 고성능 폭탄의 비를 퍼부었다. 그 결과, 1939년 기준으로 독일에서 7번째로 큰 도시였던 드레스덴 시의 중심은 잿더미가 되었다. 도심의 90%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22,700명에서 25,000명에 달하는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중에는 다수의 연합군 포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현실 세계에서 보면 또라이처럼 보이는 빌리 필그림이 등장한다. 그는 뉴욕 주에 있다는 가상의 도시 일리엄 출신이란다. 커트 보네거트처럼 독일군의 마지막으로 서부전선에서 매서운 반격을 보여준 벌지전투에서 빌리 필그림은 포로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아도,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었다. 양키 군인을 만난 독일 사람들은 진짜 군인들은 오랜 전쟁으로 모두 죽었다며 그를 무시한다. 그의 동료들조차 그를 무시한다.

 

다른 낙오병들은 전투모에 소총, 그리고 제대로 된 행색을 갖추었지만 빌리 필그림은 무엇 하나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의 전형이자 이른바 소년십자군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소설을 처음에 읽을 적에 원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 있던 “The Children’s crusade” 문구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도 없이 전장으로 내몰린 빌리 필그림 같은 이야말로 소년십자군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런 역사적 사건만 다루었다면, 커트 보네거트의 <5도살장>은 다른 전쟁문학과 다를 게 없는 그저 그런 작품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작가는 시공간의 분할과 개입, 시간여행 그리고 트랄팔마도어 행성이라는 판타지스러운 요소들을 주입하면서 새로운 창조적 도전을 시전한다.

 

우선 시간의 구성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직조된다. 다른 낙오병들이나 동료 포로들과 달리 전쟁에서 빌리 필그림은 살아남았다.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명제가 그에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리고 그 서사는 저자인 커트 보네거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지 싶다.

 

전후에 빌리 필그림은 검안사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항공사고를 당해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다만 전쟁 때 얻은 PTSD로 정신병원을 전전하기도 한다. 하긴 누구라도, 드레스덴 폭격 같은 인류사적 비극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트랄팔마도어 인들에게 납치되어 동물원에 갇히기도 했다. 그리고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을 관찰하기를 즐긴다. 비슷하게 트랄팔마도어 인들에게 납치된 지구인 여성과 짝짓기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게 모두 같은 시간대에 벌어지는 일들이란 말인가?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빌리 필그림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가 아내의 사망 소식에도 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빌리는 이 순간을 살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공간과 시간에 분열하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내가 서술하면서도 과연 그게 맞는 건지 아닌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다른 동료 포로들에게 폐급 병사취급을 당하고, 제리(독일군)들에게 갖은 학대를 당하면서도 우리의 빌리 필그림은 꿋꿋하게 생존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 간수들은 미군 병사들이 영국군들처럼 서로 협력하지 않고 각자도생하는 사실을 비웃는다. 그리고 일단의 소년십자군들은 짐승처럼 가축 화차에 실려 곧 비극의 무대가 되는 드레스덴에 도착한다. 빌리 필그림/커트 보네거트는 운이 좋았다. 시대에 있던 드레스덴 시민들과 미군 포로들은 도심을 휩쓴 불의 폭풍에 휩쓸려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슐라흐토프-퓐프(5도살장)에 머물던 빌리들은 살아남았다. 뭐 그렇게 가는 거다.

 

보통 시간은 서사 구조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5도살장>에서 플래시백으로 치환되는 시간들은 종잡을 수가 없는 그런 요소다. 그렇기 때문에 커트 보네거트를 처음으로 접하는 독자들은 짜증을 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여러 작품들을 통해 구축한 세계관에 발을 딛고 익숙해진다면 그 또한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문제일 것이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나치 프로파간다를 전파하는 미국인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와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도 반가웠다. 혹시 보네거트 작가가 발자크의 등장인물 우려먹기 기법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라도 시간여행이라는 특별한 장치와 트랄팔마도어 행성에서 수시로 인간계에 개입하는 외계인들 이야기를 한 번만 써먹기에는 아깝지 않나 싶으니 말이다.

 

소설로 두 번 그리고 그래픽 노블로 다시 만나도 <슐라흐토프-퓐프>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다시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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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12-27 08: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을 읽고 있는데.. 레삭매냐님 글을 읽으니 막막함이 다시 고개를 드는군요-_ㅠ;;; 자신감 하락ㅠㅠ 저도 용기를 내어 커트 보네거트를 읽을 수 있기를(언젠가;;)

레삭매냐 2022-12-27 09:21   좋아요 1 | URL
오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저도 낭중에 중고로 나오면
광년이 사서 읽어 보려고
대기 중이랍니다.

커트 보네거트, 짱입니다.
참말로. 그의 시커먼 유머
의 매력에 빠지시면 답 없
으시리라고 믿슙니다.

mini74 2022-12-30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그래픽노블로 나왔군요. 저도 이 책 좋아하는데 ~~~ 연애소설 읽는 노인도 참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

레삭매냐 2022-12-30 19:20   좋아요 1 | URL
그래픽 노블로 나왔다는 말
듣고, 도서관에 가서 냅다
빌려다 읽었답니다. 다시 원
전이 만나고 싶어지더라구요.

저도 <연애소설 읽는 노인>
애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