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59. 아무 준비 없이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향했다. 일찍이 유홍준 선생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렇게 목놓아 외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빈을 찾았다.

 

그리고 15년이 지나, 유시민 작가의 책을 읽으며 후회를 한다.

왜 내가 거기에 가보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마리아 슈트라스가세? 너무 오래 전이라 거리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은 마셨어야 했는데 말이지.

 

여하튼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라도, 유시민 작가 덕분에 빈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련다.

 

지난주에 최경영 아자씨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유시민 작가가 출연하셔서 신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바로 보헤미아의 얀 후스였다. 한 며칠 푸욱 쉬면서 책이나 실컷 읽었으면 좋겠다. 뭐 그렇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반동(反動)의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좌절감이 옅어지고,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대중의 이성이 눈 뜨고,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가 번지면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물결이 밀려와 진보의 모든 배를 한꺼번에 띄워 올린다. 그런 때가 오기까지 작고 확실한 즐거움에 몸을 맡기고 삶을 이어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비더마이어 시대 전시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퇴행과 압제의 어둠 속에도 빛이 완전히 꺼지는 법은 없다. 그렇게 믿으며 삶을 이어가면 새로운 시대를 볼 수 있다. 내가 거기서 본 것은 좌절과 도피가 아니었다. 질긴 희망과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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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7-19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죠. 저도 10년도 훌쩍 전 독일에 갔었는데 공부한다고 하고 갔지만 놓친 것이 참 많더군요ㅠㅠ 지금은 그렇게 길게 여행가기도 어려운데 말입니다ㅋㅋㅋ 빈은 못가봤는데 간다면 가기 전 도움받고 가야겠군요.
이번 여름 휴가 때는 정말 책에 푹 묻혀서 살까 합니다^^*

레삭매냐 2022-07-19 17:53   좋아요 0 | URL
한 곳에서 오래 지내는 이들보다
어쩌면 단기 여행자들이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되지 않나 싶더라구요.

일상이 되면 단기 여행자들에게는
낯선 풍경들도 그냥 시큰둥해지지
않나 뭐 그렇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빈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 보게 되네요.

무더운 여름에는 책이 쵝오지요.

바람돌이 2022-07-19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직전에 다음 여행은 동유럽이다 하면서 준비 시작하다가 좌절! 지금은 또 언제갈지 아직도 기약이 없는 곳이라 지금 이 책 읽으려고 줄세워놨어요. 유시민 작가의 유럽도시기행 1권은 사실 저는 좀 감흥이 없었던.... 제가 최근에 갔다온곳이라 그런지 특별한 임팩트를 잘 못느끼겠더라고요. 이번 책은 못가본 곳이니까 뭔가 좀 더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

레삭매냐 2022-07-19 17:58   좋아요 1 | URL
전 1권은 아직 만나 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1권도 호기심이 생기네요 ^^

어려서는 하나라도 더 보자라는 무모
한 발상으로 정말 발바닥에 땀이 나
게 뛰다니시피 다녔었는데 지금은 그
저 휴양을 하고 싶습니다.

지도를 보니 드레스덴하고 프라하가
정말 가깝더라구요. 베를린 올라가는
길에 드레스덴에 ICE가 잠시 섰었는데
그 때 무작정 기차에서 뛰어 내렸어야
했나 봅니다 :>

단발머리 2022-07-19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방송 봤는데 그래서 얼른 읽어보고 싶고요. 유럽 여행을 갈 수 있는 날이 오겠나, 싶었는데 오긴 오네요.
근데 저는 못 가는 ㅋㅋㅋㅋㅋㅋ 일단 읽어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7-19 20:06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못 갔었구요... 지금은 시간과
돈 둘 다 없어서 못간다는 -

책은 재미집니다.

그레이스 2022-07-19 1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럽여행 가고 싶어요.
피렌체, 베네치아, 바르셀로나, 북유럽....!

레삭매냐 2022-07-19 20:08   좋아요 2 | URL
악! 로마에서 표만 사놓고 결국
가지 못한 피렌체 생각이 납니다 !

부끄유럽과 바르셀로나에도 가보
고 싶구요.

가지 못하니 더 애절하네요.

젤소민아 2022-07-21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스페인을 다녀왔는데 같은 곳을 가도 생각의 끈이 짧으니 ‘보기‘가 달라지네요. ‘보기‘가 다르니 ‘사유‘도 다르고요. 저는 그만, 짧기만 합니다 그려 ㅎㅎ

레삭매냐 2022-07-21 09:37   좋아요 0 | URL
우와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스페인!
마냥 부럽습니다.

저도 수년 전에 스페인 가보려다가
비행기값이 너무 비싸서 패스했던
기억이 - 아마 그 때 무리를 해서라
도 갔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럽도시기행 빈 편을 보면서 난
도대체 빈에 가서 뭘 했지 싶더라구요.
 
미즈키 시게루의 라바울 전기 -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미즈키 시게루의 귀중한 라바울 전투 체험담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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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자 야마오카 소하치 씨가 쓴 <태평양전쟁>이라는 그야말로 희한한 책을(그것도 5권이나!)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저자는 종군기자였던 것 같은데, 남양군도에 전개해서 미군과 싸우다가 개죽음을 당한 일본군을 황군이라 부르며 그야말로 찬양으로 가득한 그런 내용이었다. 야마오카 씨는 그가 그토록 찬양하던 황군이 남양군도의 각처에서 저지른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 시간이 흐른 뒤, 몇 년 전에 그가 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으면서도 그런 이유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극우작가 야마오카 씨가 맨 오른쪽에 가 있다면, 진짜 전장에서 자신의 한쪽팔을 잃고서도 저명한 만화가로 활약한 미즈키 시게루는 자신이 직접 전장에서 체험한 사건들을 일체의 미화 없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돗토리 부대의 일원으로 이미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일본군의 거대 기지가 있었던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에 미즈키 씨는 파병됐다. 구타가 일상화되었던 구식 일본 군대에서 몽상가로 보이는 미즈키 씨는 그야말로 구타의 아주 적절한 타겟이 아니었을까. 농땡이를 피운다운 이유로 게다짝을 맞질 않나, 20-30분의 연속 따귀 세례는 아예 기본이었다. 오죽 했으면 스스로를 따귀의 왕자라고 했을까. 더 웃기는 건 그렇게 자신을 두들겨 팬 선임병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했다고 한다. 이런 똥군기와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건 비단 구식 일본군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 것이다.

 

그들이 상대하는 미군들은 잘 보급된 식사와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최신 무기와 무진장한 탄약으로 무장했기에 일본군들이 비아냥거리던 개판 같은 군기에도 자신들을 압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미즈키 씨는 그야말로 뱃속에 거지가 들어 앉았는지 오로지 라바울 현지에서 먹거리에만 관심을 가졌다.

 

솔저 보이(토인)들과 안면을 트고 마을을 다니면서 자신이 가진 담배와 현지의 싱싱한 과일과 야채들을 원없이 먹었다고 했던가. 그에 비하면 정규 일본군이 보급하는 부식과 먹을 것들은 너무나 부실했다. 심지어 그가 우연히 만난 해군들의 보급 상태는 육군의 그것에 비해 월등했다. 하긴 일본 육군과 해군의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이었던가. 조슈파와 사쓰마파로 나뉘어진 구 일본 군대 내의 첨예한 다툼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왔다. 아울러 군대 전체의 기율에 반하는 하극상도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미즈키 씨가 전하는 라바울의 실상 가운데 충격적이었던 점 중의 하나는 현지에서 보급투쟁에 나섰다가 밀림에 사는 악어밥이 된 병사들도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악어는 일단 먹이를 잡아 부패시킨 뒤 먹는 습성이 있다고 했던가. 그래서 악어에게 반쯤 뜯어 먹힌 시신이 떠내려 오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이 남양군도에 수행한 전쟁 자체가 넌센스였지만, 현지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는 사실이 참 그랬다.

 

일본군의 상식에 반하는 작전은 적전 상륙이라는 이름 아래, 치러지기도 했다. 사실 라바울에 주둔한 10만에 가까운 일본군을 소탕하는 문제는 당신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미국과 호주에도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고립된 라바울이 전략적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한 연합군 전쟁 지휘부에서는 라바울을 건너뛰고, 다른 지역을 공략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아마 그래서 과달카날이나 팔라우 혹은 필리핀 전역에 비해 라바울에서 생환한 병사들이 많았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의 미즈키 씨는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결국 왼쪽 팔을 잃게 되었다. 상이용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에 대한 구타나 노역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전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구사일생으로 어느 순간 적으로 돌변한 솔저 보이들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난 미즈키 씨는 라바울에서 종전을 맞이하고, 토마로 가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본국으로 귀환했다.

 

토마에서 포로 생활 시절, 미즈키 씨는 현지 제대할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그는 확실히 현지인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다른 일본군과는 다른 성향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자신을 돌보아 준 군의관의 설득으로 귀환선에 올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토마에서 어렵게 구한 종이와 연필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그림들을 그렸다. 그리고 나중에 일본에 돌아와서도 당장 먹고 살기에도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라바울 시절을 회상하며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들이 모여서 <라바울 전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미즈키 씨는 태생적으로 특유의 낙천가였는지 <라바울 전기>를 통해서는 비관적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림 그리는 만화가로 한쪽 팔이 없다는 건 작화에 치명적인 결함일 텐데, 후회나 통한 같은 부분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긴 만성적 말라리아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남양군도에서 생환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 않았을까.

 

미즈키 시게루 씨가 <라바울 전기>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도 모른 채, 타지에서 어이 없이 죽어간 그리고 학대 받은 병사들에 위해서라도 전쟁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 지금도 지구촌의 어딘가에서 대화나 타협 대신 폭력적 방식에 호소하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부디 무의미한 갈등이 종식되고, 평화의 시간들이 도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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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19 1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군대문화도 일제시대때 굳어진거라 읽었어요. 군장교들도 대부분이 일본군대에서 교육받은 자들에 ㅠㅠ전원 옥쇄하라 예전 해적판으로 봤어요. 책소개 너무 좋네요 *^^*

레삭매냐 2022-07-19 14:59   좋아요 2 | URL
구 일본 군대가 프로이센 군제를
받아 들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서양의 합리적 방식들은 거부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적해 주신 대로, 해방 이후 군
지휘관들의 대부분이 구 일본군
출신이다 보니 구태와 악습의 고
리를 끊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합
니다.

그리고 못된 하극상만 배워서
결국 군사 쿠데타라는 최악의 결
과가 도출되었지요.

<전원 옥쇄하라>와 이어지는
부분들이 있어서 더 이해가 쉬
었습니다.

그레이스 2022-07-19 17:52   좋아요 3 | URL
공립학교도 프로이센에서 받아들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군인을 만들기위한 교육, 황국신민교육이죠.
당시 교복도 군복에서 온 디자인이라고 알고 있어요.

바람돌이 2022-07-19 18: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주 4.3에 대한 가혹한 진압을 주도한 것도 모두 일본 관동군 출신 장교들이 중심이었지요. 일본 군대에서 배운 것들을 그대로 적용한 놈들이 해방 후 한국 군대를 주도했다는게 우리의 비극이기도 하구요. 이 책도 봐야겟네요. 레삭매냐님 덕분에 놓칠뻔한 책을 챙기게 되는 일이 많네요. 늘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2-07-19 20:15   좋아요 2 | URL
제가 남태평양 전역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라바울 전선에서 실
제 참전했던 미즈키 씨의 기록이 더
와 닿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적해 주신 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후과가 참 아쉬울 따름입니다.

coolcat329 2022-07-19 19: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
저 이 책 살까말까 고민했거든요.
꼭 읽어야겠습니다.
사실 책 표지랑 제목이 좀 구려서 ㅎㅎ

레삭매냐 2022-07-19 20:16   좋아요 2 | URL
라바울의 일본어 표기가
라바우루더라구요.

그냥 제목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저도 이 책은 사지 않고 도서
관 희망도서로 땡겨서 읽었답
니다.

겨울호랑이 2022-07-19 2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야마오카 소하치는 2차 대전 당시 종군기자로 참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 미즈키 시게루는 직접 총을 들고 적과 싸워야 했던 입장 차이가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자가 들고 있는 사진기와 총 모두 ‘shoot‘을 하지만, 동일한 언어가 담지 못한 서로 다른 이들의 처지가 관점과 작품의 차이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레삭매냐 2022-07-20 09:56   좋아요 2 | URL
겨호님의 말씀이 정확하십니다.
문인과 전투병의 시선을 다를 수 밖
에 없을 것 같습니다.

둘 다 ‘shoot‘을 해야 하는 동병상련
의 처지였네요.

숲노래 2022-09-06 0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만화왕국이 되도록 밑바탕을 다진
테즈카 오사무, 미즈키 시게루, 후지코 후지오
이 세 사람이 걸어온 길과
만화로 담은 삶을 보면
그분들이 태어난 일본이란 나라가 저지른
바보스럽지만 무시무시한 전쟁범죄를 온몸으로 겪고 나서
이를 그 나라(일본) 어린이한테
제대로 보여주되, 만화답게 새로 풀어내어 보여주어야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느낍니다.
<게게게의 기타로>를 보면 슬쩍슬쩍
일본정부와 일본정치를 엄청나게 꾸짖는 대목을
일부러 집어넣기도 합니다.

미즈키 시게루 님은 일본 요괴 이야기를 그리면서
이웃나라(한국) 요괴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웃나라로 찾아와서 한국 요괴 이야기를 듣고서
이를 <게게게의 기타로>에 담기도 했습니다
 

슈테판 광장은 원래 놀이터였다. 중세에는 거기서 부활절 행사를 비롯한 갖가지 축제를 열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우리는 놀이를 즐기는 종이다. 뭘 가지고 어떻게 노는지만 달라질 뿐,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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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다비드 디옵 지음, 목수정 옮김 / 희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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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부커 인터내셔널 작품으로 선정되었다는 다비드 디옵의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의 번역을 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달에 드디어 번역이 돼서 만날 수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독일군과 싸우기 위해 투입된 프랑스 식민지 세네갈 출신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일까. 소설의 2/3 지점까지는 괜찮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세네갈 간디올 출신의 사자를 토템으로 하는 니아이 가문의 막내 아들 알파다. 시작부터 비극적이게도 같은 마을 출신으로 거의 형제나 다름없었던 마뎀바 디옵이 거의 죽다시피 한 적군에 총검에 내장이 갈려 죽어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알파 니아이에 비해 약골이었던 마뎀바는 알파에게 세 번이나 죽여 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알파는 끝내 거부한다. 그리고 결국 마뎀바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그렇게 죽었다.

 

절친 마뎀바의 비참하 죽음으로 그렇지 않아도 간디올 마을 시절부터 뛰어난 용사로 소문났던 알파 니아이는 흑화되어 기관총탄과 대포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야말로 전설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데 투밥(백인 병사들)들은 왜 세네갈 생루이 근처에서 평화롭게 살던 초코렛 병사들을 유럽의 전장으로 불러냈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초코렛 병사들이 상징하는 야만성으로 푸른눈의 독일 병사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려고 기획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수많은 알파와 마뎀바들은 그저 투밥들에게 적에게 공포를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투밥들의 의도는 적중했다. 알파 니아이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에 침투해서 종횡무진 활약을 벌인다. 적군의 배를 가르고, 소총과 소총을 들고 있던 그들의 손모가지를 차례로 잘라가지고 본대로 복귀한다. 세 번째까지는 알파 니아이의 용맹에 초코렛 병사들과 투밥들이 전설이라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네 번째부터 그들은 자신의 동료를 마법사라 부르며 슬슬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전장에서 유행하던 광기가 이성의 통제 밖으로 분출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알파 니아이의 눈부신 하지만 끔찍한 활약을 견딜 수가 없었던 투밥들은 결국 그를 전선에서 빼내 후방의 병원으로 보내게 된다. 알파 니아이는 자신의 트로피이자 소중한 컬렉션이 된 7개의 손모가지들이 자신을 옥죄는 수단이 되리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공 십자 훈장까지 받게 된 이 전쟁 영웅 초코렛 병사는 투밥들에게 계륵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나 할까.

 

알파 니아이가 후방으로 이송되기 전, 7명의 반란자들에게 혹독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투밥들은 자신의 남은 가족들에게 연금지급이 되도록 사신 앞에 자신을 제물로 내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네갈 출신 초코렛 병사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들과 1도 상관없는 전쟁에 뛰어든 걸까.

 

병원 생활을 하게 된 알파 니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 마뎀바 디옵과 어떻게 해서 형제 같은 사이가 되었는지, 어려서 헤어지게 된 유목민 출신 어머니 펜도 바와의 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초중반의 서사는 강렬했지만, 니아이의 회상을 통해 그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부터 서사는 힘을 상실해 버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좀 더 강렬하게 유럽 열강들의 세력 불균형으로 발생한 전쟁에 투입된 세네갈 출신 초코렛 병사들의 가열찬 반전 메시지를 기대했는데, 그런 부분들은 실종되어 버렸다. 어쩌면 이제는 완벽한 프랑스인으로 거듭난 작가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적당한 타협이 소설을 이도저도 아니게 만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 작품을 상징하는 키워드로는 밤, 블러드() 그리고 블랙(어두움)을 꼽고 싶다. 주인공의 피부색처럼 검은 밤은 용사 알파 니아이가 활약하는 시간이다. 동료들에게 악마 병사라 불리게 된 알파는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복수심으로 곳곳에 유혈을 흩뿌린다. 영혼의 포식자는 푸른 눈의 병사들의 손모가지를 트로피처럼 그렇게 모아들인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런다고 죽은 마뎀바 디옵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알파 니아이가 그런 행동을 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방향성이 문제가 되었던 게 아닐까.

 

소설에는 흥미로운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등장한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 알파 니아이가 출정 전날 간디올 마을 최고의 미녀 파리 티암과 보낸 하룻밤 서사는 좀 지루한 클리셰가 아니었나 싶다. 대신, 알파의 아버지 바시루 쿰바 니아이가 파리 티암의 아버지 압투 티암이 간디올 사람들 모두 낙화생(땅콩)을 재배해야 한다는 주장에 분연히 맞서는 장면이 이 소설을 통해 가장 멋진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늙은 현자 바시루 쿰바의 말처럼, 간디올의 모두가 낙화생 재배에 나서게 된다면 당연히 낙화생의 가격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생산하지 못하는 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압두 티암 같은 매판 자본가들에게 굴종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불행한 식민지배의 서사와 악순환에 대한 날선 비판을 다비드 디옵은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점 하나만큼은 최고의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아주 긴 장편소설이 맥을 추지 못하는 건 아마 세계적 추세가 아닌가 싶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공쿠르 상 역시 짧지만 강렬한 소설을 계속 수상작으로 골라내고 있다. 다양한 상징과 우화들이 넘쳐나는 서사는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다비드 디옵이 좀 더 초코렛 병사들이 왜 전쟁에 나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명확하지 않아 보이는 엔딩이 여전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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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7-18 19: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부커상 수상작이지만 레삭매냐님이 별 셋 주셨으면 확실히 별 셋이군요~!! 내용이랑 제목은 아주 인상적인거 같아요. 요새 추세가 단편이군요🤔

레삭매냐 2022-07-19 07:44   좋아요 2 | URL
별 세 개에서 네 개 사이를
고민했습니다.
평점의 스케일링이 참 그렇
더라구요.

관심 가던 책이라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아쉽네요.

국내에서 그렇게 인기를 끌만
한 책은 아닌 듯 합니다.

바람돌이 2022-07-18 2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은 압둘라자크의 책에서도 저는 이 사람이 아프리카인이라기 보다는 이제는 그냥 완벽한 영국인이 돼버린거 아닌가라는 의심을 가지게 되더라구요. 그러니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서도 난민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서도 뭔가 어정쩡한 느낌이랄까?

레삭매냐 2022-07-19 09:02   좋아요 2 | URL
제가 압둘라자크의 <낙원>을 읽고
나서 바로 <바닷가에서>에서 읽었는데...

특히 <바닷가에서>는 바람돌이님이 지적
해 주신 대로 왠지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
라기 보다는 식민 모국 출신의 사람이 되
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이물감이 들었습
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그레이스 2022-07-19 1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심상치가 않은데요?! 중의적 표현!
그들에게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강하지 않는듯요. 그래서 제국주의에 대한 생각도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레삭매냐 2022-07-19 20:10   좋아요 1 | URL
프랑스도 그렇고 영국도 보면
피지배국의 엘리트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키고, 나중에 귀국시켜서
자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맹
그는 그런 시스템을 돌리지 않나
싶습니다.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다비드 디옵 지음, 목수정 옮김 / 희담 / 202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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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기대를 많이 한 작품이었는데, 엔딩이 왠지 용두사미 느낌이 들었다. 세네갈 출신 초콜릿 병사들의 애환을 그렸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지만 결국 엔딩이 문제가 아니어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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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07-18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첨 듣는 작가에 작품인데^^; 작년부터 기대하셨다니 역시 레삭매냐님 @_@;;

레삭매냐 2022-07-19 09:00   좋아요 1 | URL
너무 기대를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
우째 그냥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