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조 밴드 ‘위대한 탄생’을 꾸려나가는데 연간 3억원이 든다면서요.
“‘위대한 탄생’은 제 음악적 동지예요. 같이 음악 하는 거죠. 아주 옛날부터 사람만 바뀌고 이름은 그대로 가고 있죠. 우리나라 최고 뮤지션들이 와서 나와 같이 하는 팀이죠.”
-오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을 길게 못해 미안합니다.”
-묻지 않아서 못한 이야기는 없습니까.
“2시간 가까이 했기 때문에 다 한 것 같은데요.”
필자가 “반포동 집을 구경할 기회를 달라”고 청을 넣자 “그러죠. 누추합니다. 혼자 사는데…”라고 대답했다.
10대 청소년들을 열광시키던 우상의 얼굴에서도 쉰여섯 살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세월 따라 흘러가버리지 않고 10대에서 60대까지 팬을 거느린 가수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윤호진씨는 “그처럼 히트곡이 많은 가수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속기사가 ‘조용필 The History’ 책자에 사인을 받았다. 그녀가 여고생일 때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가 나와 10대 소녀들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동행(同行)한 인터뷰 중 가장 즐거운 모습이었다. 조용필은 인터뷰를 끝내고 계단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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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를 가져볼 생각은 없습니까.
“아니요. 저는 없는 게 제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자식에 절대 미련 안 갖습니다. 편하게 살고 싶어요.”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싫어하는 줄 알지만 이 인터뷰의 특성상 안 물어볼 수도 없으니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인터뷰하다 마음에 안 들면 하다 말고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생활 진짜…. 어떻게 보면 나한테 상처 주는 걸 자꾸…. 그러니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걸 자꾸 나한테서 끌어내려고 하면 나는 못해요. 사생활 같은 거, 그러니까 와이프 얘기나 이런 얘기 하면 굉장히 싫습니다. 왜냐하면 상처 입은 사람한테 더 상처를 주거든요. 묻는 사람이 아주 미워져요. 그러니까 상처가 지금까지 안 아물었죠. 그리고 재혼하겠느냐는 질문도 실수한 거죠. 왜냐하면 이제 (상처한 지) 2년 반밖에 안 된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묻는다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상대방을 생각해줘야죠. 건설적인 얘기를 합시다.”
-인간 조용필에 관한 이야기를 팬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사생활을 건드리게 됐는데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특히 저는 나이 먹어서 그렇게 사별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아내를 믿고 의지했거든요.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얘기는 되도록 피하셨으면 도움이 된다는 취지입니다.
오늘 비가 올 거 같아 아까 산소 좀 갔다 오려고 했어요. 평양가기 전에 갔다 오고 못 갔어요. 오늘 가려고 했는데 이 인터뷰를 깜박했어요. 오늘 인터뷰 있는 날이라는 연락을 받고 깜짝 놀라서 왔죠.”
애창곡은 가곡 ‘떠나가는 배’
-영화를 좋아하나요.
“영화는 집에서 TV나 DVD로 봐요. 극장과 효과는 똑같지 않겠지만.”
조용필은 1980년 복귀 첫 해에 이형표 감독의 ‘그 사랑 한이 되어’에 여배우 유지인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은 많지 않겠군요.
“책을 보다 도중하차한 적이 많죠. 영화를 보더라도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영화음악 때문에 봐요. 음악과 영화에 집어넣은 효과음향을 주의 깊게 듣죠. 집에 있는 DVD에서 완전히 음악만 뽑아내 컴퓨터에 넣어 이펙트용으로 소장하죠. 내가 내년에 꼭 성사시키고 싶은 게 있어요. 내 꿈이 무대연구소 만드는 거예요. 이런 종합예술연구소를 한번 만들 계획입니다. 음악, 소리, 영상, 무대까지 전부 해보고 싶습니다.”
-뮤지컬을 해보고 싶은 구상이 있다니까 묻는 건데요. 가수들 중에는 대중음악을 하다 클래식 쪽으로 들어가보는 사람도 있고, 클래식 가수가 대중음악으로 외도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대중가수가 클래식으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고요. 클래식은 창법이 전혀 달라요. 소프라노 음을 내려면 배우고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요는 보통 부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창법이 클래식 쪽에서 대중 쪽으로 오는 건 가능해요. 대중가수도 뮤지컬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중가수가 오페라를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정치엔 관심 없나요.
“정치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저는 그런 게 복잡해서 싫습니다. 시간 나면 그냥 작품이나 감상하고 그래요. 뉴스는 가끔 보죠. 안 볼 수는 없는 거니까.”
조용필은 가끔 노래방에 갈 때도 있다. 애창곡은 가곡 ‘떠나가는 배’.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도 제게 노래할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아요. 서로들 하려고 해서. 나는 노래를 거의 잘 안 해요. 오히려 제 노래를 자기들끼리 부르죠. 제 음악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데 사실 다른 사람 노래 부르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리 잘 불러도 원래 부른 가수보다 더 낫지 않거든요. 잘 해봐야 본전이죠.”
“말을 길게 못해 미안합니다”
조용필은 노래 다음으로 골프를 좋아한다. 안양베네스트 골프장을 즐겨 찾는다. 드라이버 비거리는 200m 정도지만 롱 아이언 기술이 절묘하다. 어프로치 샷과 숏 게임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다. 반포동 집에는 프로골퍼 프레디 커플스와 라운드를 함께하며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러나 그는 골프 애호 취미가 알려지는 것을 싫어한다고 YPC 직원이 귀띔해주었다. 사진기자가 촬영을 할 때 필자가 “골프를 좋아하냐”고 묻자 “골프 하는 사람한테 골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곤란하죠”라며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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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연습은 그냥 취미 삼아 하는 것이었죠. 어린 마음에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부모님이 싫어하는데도 왜 자꾸 그걸 했느냐 하면 반항심이었죠. 기타를 그냥 하게 내버려두면 제가 지쳐서 안 할 수도 있었죠. 남들은 하는데 자꾸 못하게 하니까 반항심이 생겼어요. 집을 나온 것도 반항심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 얘기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조용필은 경기도 파주시 장파리 미군부대 앞 ‘DMZ’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수습 밴드로 일을 하다가 용주골로 옮겨 미군 클럽 ‘첵돌스’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다. 6개월이 지난 후 첵돌스는 용주골 최고의 밴드로 성장했다.
가출 2년 만인 1970년 여름 신문에 난 나이트클럽 광고를 보고 둘째형 영일이 찾아왔다. 형의 설득으로 집으로 돌아와 대학입시 준비를 하다 한 달 만에 음악의 인력(引力)에 끌려 다시 집을 나왔다.
부친 조경구씨는 1986년, 어머니 김남숙씨는 1991년에 세상을 떠났다. 3남4녀 중 여섯째로 막내아들인 조용필은 가수로 성공한 뒤 서울 논현동 아파트에서 부모를 모셨다.
-아버님이 그렇게 반대하던 가수가 된 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그런 말씀 안 하셨죠. 과묵하신 분이죠. 말씀 안 하셔도 서로 알죠. 막내아들이 그렇게 성공할지는 모르셨죠. 그냥 미군 부대 근처에서 딴따라 하는 걸로 아시다가 제가 가수로 성공하자 무척 흐뭇해하셨죠.”
조용필의 첫 결혼은 4년 만에 끝났다. 첫 아내는 국회의원의 딸이었다. 팬과 가수의 관계에서 결혼으로 발전했다. 그를 잘 아는 기자가 “인터뷰 도중 첫 부인에 관한 질문을 하면 인터뷰는 그것으로 중단될 것”이라고 조언해줬다.
1988년 결혼한 재미교포 사업가 안진현씨와는 2003년 1월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깊은 사랑 속에서 살았다. 아내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가 1990년대에도 멈추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내조의 힘이 컸다. 미국 전 하원의원 김창준씨가 그의 동서다.
아내는 심장병을 앓다 사망했다. 조용필은 부인이 남긴 유산 24억원을 아내와 같은 고통을 겪는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는 아내의 무덤을 화성 선산 부모 묘소 발치에 만들었다. 화성 선산에 갔다 밤을 새우고 오는 일도 많다.
-넓은 집(100평)에서 혼자 살려면 쓸쓸하지 않습니까.
“나는 일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 없어요.”
-주위에 재혼을 권유하는 사람은 없나요.
“재혼은 생각조차 않습니다. 이대로가 좋아요.”
2세 없는 게 내 운명
답변이 너무 짤막짤막해 80개 이상 준비해간 질문이 거의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잡지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봐도 조용필은 질문에 비해 늘 짧은 답변을 했다. 필자는 “답변을 좀 길게 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저는 그래도 평소보다 굉장히 많이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말수가 적다는 얘기를 들어요.”
조용필은 1982년 일본에 진출한 한류(韓流)의 원조다.
“아시아 뮤직포럼이라는 데서 초청해 처음 공연을 했어요. 아시아의 각 나라의 가수들이 와서 페스티벌을 했는데 한국에서는 저를 선택한 거죠.”
그는 이후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 팬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일본에서만 골드 디스크 3장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600여 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
-공연이 대형화하면서 시각효과가 풍부해진 데 따른 장점도 있지만 작은 장소에서 인간적인 호흡이 오가는 야외공연 또는 소극장 공연도 했으면 좋겠다는 팬이 있더라고요.
“소극장 공연을 하면 장기 공연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가 돼요. 공연이 어차피 커질 수밖에 없었어요. 올해는 횟수를 줄이되 큰 데서 하자는 생각이었죠. 평양 초청을 받고 ‘제주에서 평양까지’라는 타이틀로 ‘필 앤드 피스’ 투어 공연을 기획했죠. 시장조사를 해보니까 지방에서 월드컵 경기장 공연을 하더라도 객석을 채울 수 있겠더라고요. 전반기엔 다 성공했어요. 네 군데에 12만명이 들어왔죠. 9월10일 대전 공연도 표가 거의 매진됐어요. 5만8000명가량 수용하는 경기장인데 유료관객을 5만명 정도로 잡고 있어요.”
-술을 잘한다던데요.
“옛날에 젊을 때는 많이 마셨죠.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못 마셔요.”
-두 차례의 결혼에서 자녀는 없지 않습니까.
“없죠.”
앤서니 퀸은 81세 때 증손녀뻘 딸을 얻어 팬들을 놀라게 했다.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60대 후반에 자신 나이의 꼭 절반인 연인과의 사이에 손녀뻘 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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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반포동 빌라촌에 있는 조씨의 집 근처에는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아줌마 팬들이 종종 나타난다. 조용필은 해마다 12월이면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한다. 올해로 일곱 번째다. 매년 12회 공연 2만7600여 장 전석(全席)이 보름 전에 매진된다. 앞줄에는 일본에서 온 여성 팬들도 앉아 있다. 무대감독 윤호진씨의 목격담.
“어떤 아줌마가 공연장 뒤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춤을 췄어요. 보기엔 잘사는 아줌마 같지도 않고, 아마 돈을 모아서 티켓을 샀겠지요.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믿음이 깊은 신도가 예배당에 온 것처럼 진지하더군요.”
-팬레터가 지금도 옵니까.
“오죠. 특별히 사연이 있어서 오는 건 아니고요. 그냥 뭐 늘 우리 곁에 있어서 고맙다, 늘 함께해달라는 이야기 같은 것이지요.”
-집 앞에서 기다리는 아줌마 팬들은 어떻습니까.
“귀찮아요. 애들이 아니니까.”
-올 12월 예술의 전당 공연은 어떤 컨셉트로 할 계획입니까.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닙니다. 어제도 회의를 했는데 지금 시놉시스(줄거리) 작업을 하고 있어요.”
“가수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하냐”고 생뚱맞은 질문을 던져봤다.
“전혀 모르죠.”
‘국민 배우’ 안성기와 중학교 단짝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쌍정리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화성 송산중학교에 다니다 2학년 때 서울 경동중으로 전학을 왔다. 아역배우로 일찍이 이름을 얻은 안성기가 같은 반 29번이었고 조용필이 30번. 한 책상을 쓰는 짝이었다. 안성기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먼저 학원에서 기타를 배워 조용필 앞에서 자주 연주해 조용필의 음악 혼에 불을 지펴줬다”고 주장했다.
“나는 집에 기타가 있었어요. 형이 치던 통기타였죠. 형이 캠핑 가면 밖으로 들고 나가 치기도 했죠. 집에서 좀 유난스럽게 쿵쾅쿵쾅 치다가 부모님한테 야단도 맞았죠. 정릉도서관에서 통기타 치는 애들을 만나 어울려 다니며 기타를 쳤죠.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 기타가 크게 유행했어요.”
-그러니까 안성기씨 혼자서 음악 혼에 불을 지펴준 건 아니군요.
“기타학원에 다니던 성기는 저에게 일부분 영향을 줬죠.”
중학교 같은 반 동창인 ‘국민 배우’와 ‘국민 가수’는 가끔 골프도 같이 친다. 핸디캡이 10개로 같다.
조용필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 공부를 하지 않고 집안 몰래 세광음악학원에 다니며 기타를 배웠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집안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때만 해도 대중문화라는 것이 그렇게 대중화돼 있지 않았죠. 소위 옛날 사람들이 얘기하는 딴따라였죠. 지금은 달라졌지만. 자기 자식이 머리 기르고, 복장도 아주 불량스러워 보이고, 음악을 한다는 것이 노인네한테는 정서적으로 안 맞았죠. 평범한 가정이나 좀 의식 있는 집안의 자녀는 기타 치는 짓거리 안 한다는 인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버님이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할 리 없죠. 늘 ‘너 이 다음에 뭐가 돼라, 훌륭한 사람 돼라’는 말씀이셨거든요. ‘너 딴따라 돼라’ 하는 부모는 없을 때니까요. 그 시절의 시대상이에요.”
-자살 소동을 벌였다면서요.
“음악을 못하게 하니까요. 그때야 어렸을 때니까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 아닙니까.”
-누구한테 발견됐습니까.
“부모 모르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아셨죠.”
-약을 드셨습니까.
“약 먹었죠.”
-병원에서 깨어난 건가요.
“네. 정릉에 살 때였어요. 시골 화성에도 집이 있었죠. 아버님은 속이 상해 화성으로 내려가셨죠.”
기타 마니아가 돼버린 조용필은 드디어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한양대 공대 기계과에 다니던 형의 제도기를 몰래 들고 나와 청계천에서 처분했다. 그 돈으로 음악을 위한 가출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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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kg만 더 늘었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더 안 올라가네요. 58kg 정도만 됐으면 좋겠어요.”
-루치아노 파바로티 같은 클래식 가수들을 보면 배도 나오고 거구(巨軀)지요. 몸에 살이 좀 있어야 울림통이 커져 노래를 잘한다는 속설도 있던데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죠. 노래는 힘만 가지고 하는 건 아니에요.”
-발표한 210곡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무엇인가요.
“대답하기 힘들어요. 시대에 따라 이런저런 곡들이 나오죠. 그중에서 한 곡 짚으라면 힘들죠.”
‘조용필학(學)’의 등장
-노래 하나하나에 사연이 깃들어 있나요.
“그럼요.”
-‘조용필학(學)’을 정립하고 있는 전북대 김익두 교수(국문학)가 최근 18집 앨범의 노래는 좀 어려워졌다고 하더군요. 세미클래식 같은 분위기가 있다는 거죠.
“앞으로 뮤지컬을 만들어볼 생각이거든요. 그런 곡이 많이 나올 거예요. 꿈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못 만들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뮤지컬에 대한 음악적 대비를 하고 있지요.”
김익두 교수는 전통적 대중공연을 연구하다 옛날 대중에게 사랑받았지만 지금은 죽어 있는 문화라는 데 한계를 느꼈다. 현재의 대중에게 사랑받는 문화를 함께 연구하려는 생각에서 대중가요의 거대한 산맥인 조용필 연구에 들어갔다. 내년 발간 예정으로 조용필 관련 저술을 집필 중이다.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 이미자와 조용필입니다. 이미자는 2000곡을 넘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하나같이 트로트예요.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죠. 그 뒤 데뷔한 사람들은 서양물로 흘렀죠. 조용필은 유일하게 일본풍과 서양풍을 극복하면서 한국의 정한(情恨)을 대중가요로 담아낸 사람입니다. 서양에서는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예컨대 비틀즈에 대한 연구도 ‘비톨로지(Beahtology)’라는 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의 ‘조용필로지(Choyongpilogy)’에 기대하는 바 크다.
-뮤지컬을 하려는데 대해 걱정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대중성을 지키면서 자기 세계를 확대 심화해야지, 클래식으로 무리하게 가려다 보면 자기 세계가 약화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악 전체를 그리로 가져가는 건 아니죠. 부분을 그렇게 가는 것이지, 전체를 그렇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도 변화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옛날 노래들이 지금 나왔다면 히트하지 못했을 거라 보거든요. 옛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생각하면 안 되죠. 옛날 건 그대로 놔두고 새로운 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중이 변하는데 음악이 그대로라면 새로운 사람들을 붙잡기가 어렵죠.”
-외국에 나갈 때마다 외국 판을 엄청 많이 사서 듣는다던데, 외국 가수 중 누구를 특히 좋아합니까.
“누구를 특히 좋아한다거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죠. 제가 음반을 구해 듣는 것은 음악의 변화를 보기 위해서지요. 지금 어떤 것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이거를 보고자 듣는 거죠. 생판 모르는 사람 것도 많이 삽니다. 아는 사람들 판만 들으며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내 음악의 변화를 이룰 수 없죠. 내 자신을 한곳에 붙들어놓으면 안 된다고 보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내가 변화하면서 가야 한다고 봐요.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좀 내라고 하는 김익두 교수의 말은 일리가 있지요. 그렇지만 대중은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젊은 세대도 있지 않습니까.”
-미국 뉴욕에서 머무를 때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과 골프를 번갈아 하다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뮤지컬을 10 작품이나 보고 온다면서요.
“새로운 작품을 보는 이유는 무대의 메커니즘 때문입니다. 어떤 무대를 만드느냐, 어떤 색깔을 쓰느냐, 어떤 새로운 디자인을 하느냐, 이런 것을 연구하기 위해 보는 것이지요.”
2002년 제7차 교육과정 음악교과서(교학사)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록됐다. 이에 앞서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친구여’가 한국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교과서(두산교과서 고1 음악)에 올랐다.
“저한테는 영광이죠. 교과서에 오른다는 것이 쉽습니까. 음악 하는 사람한테는 최고의 영광이죠.”
‘오빠 부대’의 원조
조용필은 음악인생 30주년 기념 베스트 음반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작곡에 대한 저작권료를 지구레코드에 지급했다. 그는 저작권 개념이 희박할 때 지구레코드와 1∼8집 수록곡에 대한 저작권 양도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에까지 올라가 다퉜으나 조용필이 패했다.
“가슴아픈 일이죠. 되찾아오기 위해 지금 협의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이 평양에 갔을 때 순안공항에 마중을 나온 이종혁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여기는 ‘오빠 부대’가 없습니다”라고 조크로 맞았다. 사실 조씨는 1980년대부터 오빠 부대를 가장 많이 끌고 다닌 가수다. 1980년 그가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열창할 때 소녀들은 열광했다. 무대로 뛰어오르고, 공연장의 현관 유리창이 박살났다. 공연 때마다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용피리 오빠’를 외치던 소녀 팬들은 지금 40대가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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