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kg만 더 늘었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더 안 올라가네요. 58kg 정도만 됐으면 좋겠어요.”
-루치아노 파바로티 같은 클래식 가수들을 보면 배도 나오고 거구(巨軀)지요. 몸에 살이 좀 있어야 울림통이 커져 노래를 잘한다는 속설도 있던데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죠. 노래는 힘만 가지고 하는 건 아니에요.”
-발표한 210곡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무엇인가요.
“대답하기 힘들어요. 시대에 따라 이런저런 곡들이 나오죠. 그중에서 한 곡 짚으라면 힘들죠.”
‘조용필학(學)’의 등장
-노래 하나하나에 사연이 깃들어 있나요.
“그럼요.”
-‘조용필학(學)’을 정립하고 있는 전북대 김익두 교수(국문학)가 최근 18집 앨범의 노래는 좀 어려워졌다고 하더군요. 세미클래식 같은 분위기가 있다는 거죠.
“앞으로 뮤지컬을 만들어볼 생각이거든요. 그런 곡이 많이 나올 거예요. 꿈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못 만들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뮤지컬에 대한 음악적 대비를 하고 있지요.”
김익두 교수는 전통적 대중공연을 연구하다 옛날 대중에게 사랑받았지만 지금은 죽어 있는 문화라는 데 한계를 느꼈다. 현재의 대중에게 사랑받는 문화를 함께 연구하려는 생각에서 대중가요의 거대한 산맥인 조용필 연구에 들어갔다. 내년 발간 예정으로 조용필 관련 저술을 집필 중이다.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 이미자와 조용필입니다. 이미자는 2000곡을 넘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하나같이 트로트예요.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죠. 그 뒤 데뷔한 사람들은 서양물로 흘렀죠. 조용필은 유일하게 일본풍과 서양풍을 극복하면서 한국의 정한(情恨)을 대중가요로 담아낸 사람입니다. 서양에서는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예컨대 비틀즈에 대한 연구도 ‘비톨로지(Beahtology)’라는 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의 ‘조용필로지(Choyongpilogy)’에 기대하는 바 크다.
-뮤지컬을 하려는데 대해 걱정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대중성을 지키면서 자기 세계를 확대 심화해야지, 클래식으로 무리하게 가려다 보면 자기 세계가 약화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악 전체를 그리로 가져가는 건 아니죠. 부분을 그렇게 가는 것이지, 전체를 그렇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도 변화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옛날 노래들이 지금 나왔다면 히트하지 못했을 거라 보거든요. 옛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생각하면 안 되죠. 옛날 건 그대로 놔두고 새로운 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중이 변하는데 음악이 그대로라면 새로운 사람들을 붙잡기가 어렵죠.”
-외국에 나갈 때마다 외국 판을 엄청 많이 사서 듣는다던데, 외국 가수 중 누구를 특히 좋아합니까.
“누구를 특히 좋아한다거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죠. 제가 음반을 구해 듣는 것은 음악의 변화를 보기 위해서지요. 지금 어떤 것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이거를 보고자 듣는 거죠. 생판 모르는 사람 것도 많이 삽니다. 아는 사람들 판만 들으며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내 음악의 변화를 이룰 수 없죠. 내 자신을 한곳에 붙들어놓으면 안 된다고 보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내가 변화하면서 가야 한다고 봐요.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좀 내라고 하는 김익두 교수의 말은 일리가 있지요. 그렇지만 대중은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젊은 세대도 있지 않습니까.”
-미국 뉴욕에서 머무를 때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과 골프를 번갈아 하다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뮤지컬을 10 작품이나 보고 온다면서요.
“새로운 작품을 보는 이유는 무대의 메커니즘 때문입니다. 어떤 무대를 만드느냐, 어떤 색깔을 쓰느냐, 어떤 새로운 디자인을 하느냐, 이런 것을 연구하기 위해 보는 것이지요.”
2002년 제7차 교육과정 음악교과서(교학사)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록됐다. 이에 앞서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친구여’가 한국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교과서(두산교과서 고1 음악)에 올랐다.
“저한테는 영광이죠. 교과서에 오른다는 것이 쉽습니까. 음악 하는 사람한테는 최고의 영광이죠.”
‘오빠 부대’의 원조
조용필은 음악인생 30주년 기념 베스트 음반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작곡에 대한 저작권료를 지구레코드에 지급했다. 그는 저작권 개념이 희박할 때 지구레코드와 1∼8집 수록곡에 대한 저작권 양도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에까지 올라가 다퉜으나 조용필이 패했다.
“가슴아픈 일이죠. 되찾아오기 위해 지금 협의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이 평양에 갔을 때 순안공항에 마중을 나온 이종혁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여기는 ‘오빠 부대’가 없습니다”라고 조크로 맞았다. 사실 조씨는 1980년대부터 오빠 부대를 가장 많이 끌고 다닌 가수다. 1980년 그가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열창할 때 소녀들은 열광했다. 무대로 뛰어오르고, 공연장의 현관 유리창이 박살났다. 공연 때마다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용피리 오빠’를 외치던 소녀 팬들은 지금 40대가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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