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팔이 파이터’ 무에타이 복서 김선기
“신체장애가 별 건가요? 도전정신만이 살 길이에요”


무에타이 복서 김선기는 오른팔이 없다. 그러나 실력은 정상급이다.
1993년 데뷔해 도중에 팔이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지만 ‘도전정신 하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링 위에 올랐다. “팔이 없지만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보다 행복하다”는 외팔이 파이터의 강인하고 억척스런 라이프 스토리.





두주먹으로 싸워도 힘들 판에 왼쪽 주먹 하나로 거친 챔피언의 세계를 열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일반 복싱이 아니라 주먹, 팔꿈치, 무릎, 발 등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에타이(일명 킥복싱) 선수로 뛰고 있다. 세계 챔프를 꿈꾸며 강훈련을 하는 동시에 후학을 양성하는 사람, 그는 경기도 이천시에서 설봉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는 김선기씨다.
올해 나이 만 29세. 외모만 보면 고교생이나 새내기 대학생 티를 못 벗은 미소년 같은 그가 왜 외팔이 되었을까. ‘외팔이 복싱선수가 세계 어느 하늘 아래 또 있을까’ 되새기면서 그를 만나러 갔다.
설봉 무에타이 체육관은 이천시 버스터미널 근처 한 골목에 있었다. 체육관으로 들어서니 비릿한 땀 냄새가 풍긴다. 어디선가 TV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다가가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낡은 침대에 앉아 있던 반팔 차림의 외팔이 청년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김선기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어서니 김씨의 뭉툭 잘려나간 오른쪽 팔이 덩달아 움직였다. 쓸모 없는 환영의 손짓으로 보였다. 팔이 잘려나간 끄트머리 부분을 지져 살점을 감아놓았는데, 상당히 그로테스크해 바라보기 민망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움직이며 “왜 일찍 왔느냐”고 퉁명스런 반응이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방문한 것에 다소 마땅치 않다는 표정. 그런 그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게 날카로웠다.
-눈매가 상당히 날카롭군요.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쉽게 동의한다. 콧등이 튀어나와 상당히 고집스럽게도 보이지만 미남형의 얼굴. 피부도 깨끗하다. 얼굴 전면에 불구자라는 그늘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오만해 보일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그래서 마음 한켠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신체 불구자 특유의 애처로움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프레스기에 가루가 되어버린 팔
-오른팔이 없다면 왼팔을 잃은 것보다 더 불편할 텐데 어떻습니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왼팔로 힘이 모아지고 있으니까요. 육체란 참 신묘해요.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에서 커버해주고, 한쪽이 부족하면 다른 쪽에서 힘을 더 불어넣어줘요. 제 전적은 30전 23승7패인데, KO승이 19개나 됩니다. 그중 왼쪽 주먹으로 상대방을 녹다운시킨 것이 절반 이상이에요.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이 그 힘을 대신해줍니다.”
자연스럽게 오른쪽 팔이 없어진 연유로 화제가 옮겨졌다.
“1996년 4월 경기도 안산의 베어링 공장에서 프레스기(압축기)가 오작동되면서 제 팔 위로 떨어졌어요.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가만히 앉아서 당했죠.”
-정신을 잃었습니까.
“아니요. 어디를 맞았다는 느낌만 들지 정신은 멀쩡하더라고요. 그보다는 순간적으로 제 팔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주위를 두리번거렸어요. 그런데 그 무거운 압축기에 눌려 살점 하나 없이 가루가 되어버렸더군요. 동료들이 더 놀라 부랴부랴 저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저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너무 큰 사고여서 작은 병원에선 감당하지 못한다는 거였죠. 광명시 성애병원까지 가서야 겨우 수술을 받았습니다.”
-출혈이 심했겠는데요.
“아니요. 프레스기가 떨어지면서 전기를 일으켜 제 팔을 지져버렸대요. 그래서 출혈은 심하지 않았죠. 만약 출혈이 심했다면 병원을 찾아다닐 때 죽었을 거예요. 그나마 프레스기에 감사해야 했죠.”
-어떻게 정신을 잃지 않았을까요.
“정신력 때문이었을 거예요. 저는 운동선수잖아요.”
이후 그는 6개월 동안 병상생활을 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비로소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프레스기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머리통이 으깨지는 상상을 하다 악몽을 꾸기도 했다. ‘이대로 인생이 망가지는가’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그는 이천실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수도 배관 견습공으로 일을 배운 후 안산 베어링 공장에서 방위산업체 근무를 하다 이렇게 변을 당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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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만화 안 한대요”

서재에서 필자와 함께.

-30년 만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절은 언제였습니까.
“1970년대 아내와 데이트할 때는 수입이 좋아서 저를 재벌집 아들로 오해할 정도였죠. 친구들은 찻값도 없어 ‘재건 데이트’라고 해서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났죠. 나는 다방에서 만나고 밥 사먹고 만날 영화구경 가고 택시 타고 돌아다녔죠. 하지만 1980년 전후 3∼4년 동안 만화시장이 너무 죽어버려 직업을 바꿀 생각도 많이 했어요. 소재에 대한 제약이 심했죠. 제 책이 히트 작가만큼 팔렸는데 원고료가 안 올라요. 안 올려줘도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까 계속 붙들고 있어야 했죠. 만화가 비전이 전혀 없어 보여 과연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 옮겨가야 하는 건가 고민했어요. 그때 만화가들이 애니메이션 쪽으로 많이 옮겨갔어요. 저도 그때 만화영화를 1년 해봤지만 적성에 안 맞아 그만뒀죠.”
허씨는 부친이 일제 강점기에 순사(경찰)를 했다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아버지에게 왜 하필 일제 경찰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놈아, 세상에 먹고 살 게 없어서 취직하려고 순사 시험을 봤더니 합격했다”고 대답하더란다. 인근 해역 섬사람들이 아버지 송덕비를 세워놓은 것을 보면 악질 순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허 화백이 태어난 다음해인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이 터졌다. 아버지는 여수 순천을 장악한 반란군을 진압하러 가고 가족은 광양 외가로 피신했다. 군인 경찰관 가족과 우익 인사는 남로당 반란군의 타깃이었다. 허 화백의 아버지는 전투를 치르다 반란군 감옥에 갇혔다. 백두산 호랑이(김종원)가 여수 쪽에 상륙해 반란군이 도망가면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그러나 허 화백의 아버지는 밖에서 총을 난사할 때 감방 벽에 바짝 붙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후배들 작품 중에 재밌게 읽는 만화는 어떤 겁니까.
“윤태호 만화를 재미있게 봅니다. 윤태호는 우리 화실에 있다가 독립했죠. 그리고 양영순 만화도 좋아합니다. 한겨레신문에 실리는 장봉군 만평도 재밌어요. 나는 장봉군 팬입니다. 그림도 좋고.”
하얀색 맹도견 라브라도 리트리버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무척 순했다. 낯선 사람에게도 앞발을 들고 안겼다. 영국산이어서 이름을 ‘윈스턴 처칠’이라고 지었단다. 간단한 명령어는 알아듣는다. 처칠 이야기를 하다가 보신탕으로 화제가 옮아갔다.
“보신탕은 중요한 음식이고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식객’에 보신탕 이야기를 그리고 싶은데 찬반양론이 극명하게 엇갈려 고민하고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 편에서 보신탕집 부자(父子)의 갈등을 다루었는데 하필 보신탕집이냐고 항의가 만만찮았다고 한다. 그는 처칠에게 “개고기 이야기하는데 너는 왜 꼬리를 흔드냐” 하고 핀잔을 준다.
얼마 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필립 보링이라는 칼럼니스트가 아시아인의 음식에 관한 글을 실었다. 삽화가 눈길을 끌어 읽었다. 중국 가정에서 개와 노는 어린이에게 엄마가 “너 왜 음식 갖고 장난치니?” 하고 꾸짖는 그림이었다.
이 칼럼에서 보링은 인간의 충성스러운 친구인 개를 먹는 것은 문화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상한’ 동물인 사슴과 말, 그리고 쟁기를 끄는 소에게 하지 않는 특별한 보호조치를 개에게만 하는 것을 합리화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 남부에서 살아 있는 원숭이의 골을 먹는 식문화에 대해 서구인들은 ‘인도적인 죽이기’를 요구하지만 과연 새장이나 우리에 갇힌 동물은 인도적으로 살고 있느냐고 반문한다. 모든 나라의 음식에는 문화적·종교적인 습관과 편견이 존재한다.
허 화백은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항의 때문에 본격 보신탕 편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도 문화적 편견의 소산일 수 있다. 산 개와 죽은 개를 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호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보신탕 이야기 그리고파
사진을 찍느라 휴일에 나와 수고한 정경택 차장이 허 화백 만화의 질감과 음영이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허 화백은 실제로 수많은 음식과 요리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그 사진을 보고 만화를 그린다.
“사후(死後)에 어떤 작품이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냐”고 묻자 ‘각시탈’ ‘망치’ ‘오 한강’ ‘사랑해’ ‘식객’을 꼽았다.
화실 벽에는 ‘固定觀念脫出!’(고정관념탈출)이라는 자필 한자 글씨가 걸려 있었다.
“제가 본래 고리타분한 까닭에 만화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그리고 싶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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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절대 쫓아간다고 모이는 게 아니에요. 돈은 기다려야 합니다. 돈 쫓아다니는 사람은 밥은 먹고 살겠지만 큰 부자는 못 돼요. 하우스에서 밤새 도박하면 하우스 주인만 돈 벌지요. 쫓아다니면서 증권 팔았다 샀다 하는 사람들은 증권회사 수수료 수입만 불려주는 거죠. 이번에도 주식 투자자 시합에서 50대, 60대가 제일 수익률이 높았다고 합니다. 안 팔고 기다리니까요.
돈 쫓아다닐 시간에 일을 열심히 하면 그게 곧 돈 버는 일인 거 같아요. 사람 덜 추잡해지고.”
에베레스트 정복 나설 예정
허 화백은 산악인 박영석씨와 6대륙의 최고봉을 거의 다 가봤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963m), 인도네시아 칼스텐츠(4884m), 러시아 옐부르즈(5633m), 히말라야 산맥의 K2(8611m)에 가봤다. 내년에도 박영석 원정대를 따라 두 달 동안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정복에 나설 예정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에는 전문 산악인들만 가고 허 화백은 베이스캠프에 있다가 오는 거겠죠?
“이번에는 저도 본격적으로 올라가 보려고 합니다. 각자 마음속에 정상이 있는 거죠. 에베레스트 정상은 8848m이지만 내 정상은 7000m가 될 수도 있고, 6000m가 될 수도 있죠. 가다가 힘에 부쳐서 내려오면 그게 곧 내 정상 아니겠습니까. 제 체력으로 6000m까지는 견딜 만 해요.
K2 베이스캠프에서 술 마시고 혼난 경험이 있죠. 일단 해발 2500m가 넘는 곳에선 술 마시지 말아야 해요. 박영석 대장이 자기 계산으로 ‘괜찮다’고 해서 마셨다가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비상 헬리콥터를 한번 부르는데 850만원 들어요. 죽게 생겨 헬리콥터를 불렀는데 날씨가 나빠 헬리콥터가 못 오고. 5일 동안 걸어서 내려갔죠. 나중에는 말 타고 내려왔어요.”
-등산 만화도 그려볼 건가요.
“‘뻥’을 많이 쳐야 하는데 알수록 못 치겠어요. 영화 ‘버티컬 리미트’에서는 달려서 절벽 사이를 날아가 반대쪽 절벽 위로 팍 뛰어서 올라가거든. 실제로 8000m 넘어가면 베테랑 산악인도 가쁜 숨을 내쉬며 한 걸음씩 겨우 내디뎌요. 열 발짝 떼고 쉬지요.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뛰어다녀요? K2 베이스캠프에서 ‘버티컬 리미트’를 봤거든요. 모두 SF라고 했어요. 뻥튀기가 심해서.”
그의 책상 옆에는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부쳐온 책 네 상자가 아직 뜯지 않은 채로 놓여 있었다. 한 상자에 20권 가량이 들어 있으니 한꺼번에 80권을 주문한 것이다. 상자를 열어보니 음식, 여행, 풍속, 그림에 관한 책이 많았다. 그는 신문 기사나 광고를 보고 사고 싶은 책 기사를 오려두었다가 한꺼번에 주문한다.
“처음부터 읽다가 재미없으면 던져버리죠. 소설은 요즘 거의 안 읽어요. 나도 얘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지만 답답하더라고요. 수가 보여요. 독자한테 수가 노출되면 재미없지요. 우리 영화를 볼 때도 제일 궁금한 게 결말입니다. 놀랍게 뒤집히는 결말을 보여주는 영화가 ‘살인의 추억’입니다. 조그만 여자애가 며칠 전 살인현장에 왔다간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한방 맞은 것 같았어요. 그렇게 쫓아다니던 범인이 왔다간 거죠.”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무엇입니까.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의 전기입니다. 어떤 책의 부록이었는데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최근에는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인디언 멸망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인디언을 몰살하고 건국한 미국 사람들이 정의의 사도인 양 남의 나라에 펑펑 폭탄 때리는 것을 보면….”
‘식객’을 읽다보면 정호승, 송수권 시인의 시가 자주 등장한다.
“시를 인용하면 시인들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문인협회에서 전화가 왔더군요. 출판물에 시를 전문(全文) 인용하면 로열티를 내야 한다는 거였지요. 김영사에서 ‘식객’에 인용된 시 한 편당 5만원씩 냈습니다. 인터넷에서 내 만화를 마음대로 퍼다 공짜로 쓰는데 이것도 안 돼요. 로열티를 내야지요. 남의 집에 있는 장롱을 들고 가는 거나 같아요. 인터넷에서도 로열티제를 적용해 제동을 걸어야 해요.”
부인 이명자씨는 숙명여대 성악과를 나와 잠깐 중고교 음악교사를 했다. 한 동네에서 살다 우연히 사귀게 돼 7년 동안 연애했다.
“기껏 딸 공부시켜놨더니 이상한 놈이 와서 끌고 간다고 처가의 반대가 심했죠. 특히 장모님이 나를 싫어했어요. 결혼하고 나서는 어쩔 수 없었을 테고. 몇 년 전에 장모님이 ‘결혼 전에 괄시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더군요. 지금 이 양반이 여든넷입니다.”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장남은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IBM에 다닌다. 딸은 서울대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딸이 대학입시 공부할 때 대학교 못 가면 만화 그리라고 말했다가 집사람한테 혼났어요. 큰놈이나 작은놈이나 어릴 때부터 내가 작업하는 것을 봐서 만화를 잘 그려요. 그런데 만화 그리겠다는 얘기는 안 하더라고요. 신세대가 보기에 갑갑하지요. 만날 책상에 앉아서…. 이것도 3D 업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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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화백은 아름다운 재단을 통해 기부 활동을 한다. 부천 만화축제에서 받은 상금 300만원을 노숙자를 위해 내놓았고, 대한민국 만화대상 상금 1000만원은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부했다. 1000만원, 2000만원씩 여러 차례 내놓았다. 그는 기부의 동기를 짧게 설명했다.
“벤츠 타고 골프 치고 다니니까 욕 안 먹으려고 기부하는 거죠.”
-한때는 야구, 권투 만화를 주로 그렸는데 1990년대 이후에는 스포츠 만화를 잘 안 그리더군요.
“그전에는 심의 때문에 스포츠 만화밖에 그릴 게 없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입맛도 달라지고 좋아하는 운동이 바뀌잖아요. 야구장에 발길이 안 가더라고요. 권투 구경을 좋아했는데 요즘엔 별 재미없어요. 한번 지나가니까 다시 돌아가기 어려워요.”
-일본 만화에서 아이디어를 빌리는 만화도 있고 종종 표절 시비도 나오잖아요. 허 화백 만화 중에도 ‘오늘은 마요일’ ‘미스터 Q’ 같은 작품은 일본 만화와 비슷하다는 얘기가 나오던데요.
“일본 만화가 우리 만화에 영향을 크게 줄 수밖에 없었죠.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 만화가 들어오기 시작해 사실 뿌리를 구분하기 힘들죠. 두 나라가 만화 그리는 스타일도 비슷하고요. 외국에는 디테일하게 연출까지 해가면서 그리는 만화가 없어요. 대부분 미국 만화식으로 글이 많은 이야기 만화죠.”
-일본 만화를 세계적으로 알아준다지요?
“그럼요.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 가서 보니까 이탈리아 만화시장의 50% 이상이 번역한 일본 만화였어요. 미국에도 일본 만화가 많이 들어가 있고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국에도 어마어마하게 유통되고 있어요. 중국에서는 정식으로 로열티 주고 찍어낸 거보다 해적판이 더 많죠. 그게 단속이 안 된대요. 전세계적으로 일본 만화가 퍼져 있다고 봐야죠.”
-우리 만화는 수출이 안 되나요?
“간혹 외국에서 번역 출판해도 몇 천부에 불과해요. ‘식객’도 일본에서 번역판이 나왔는데 잘 안 팔립니다.”
“적게 벌고 적게 쓰라”
허 화백은 ‘부자(富者) 사전’이라는 만화를 펴내 대박을 터뜨렸다. 한상복씨의 베스트셀러 ‘한국의 부자들’이 원작이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부자들의 에피소드와 스스로 돈 번 아이디어를 첨가했다.
“인세가 너무 많이 들어와 돈 세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한상복씨 책이 60만부 팔렸는데 만화로 만들어도 10만부 팔리는 것을 보면 편하게 읽으려는 독자층이 있다는 거죠.”
-부자들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까.
“부자는 절대 허투루 돈을 안 써요. 버는 거보다 적게 쓰면 누구나 부자가 돼요. 우리 집 사람이 백화점에서 50% 세일하니까 가자고 그러면 제가 ‘어이 그거 안 사면 그만큼 더 싸’라고 말하죠.”
-부자는 짜다는 건가요.
“짜다기보다 꼭 쓸 때만 써요. 여유가 있건 없건 무조건 수입액의 반을 저축하는 사람도 있죠. 한달에 300만원 받는 사람이 150만원 저축해보세요. 공과금 떼고 세금 떼면 100만원도 안 남을 거 아니에요. 그거 가지고 사는 거죠. 그렇게 10년을 견디면 5년치 봉급이 그대로 모이죠. 이게 종자돈이 되죠. 10년 동안 다 쓴 사람과 그때부터 차이가 벌어지죠.”
-재산은 얼마나 모았습니까.
“그냥 만화 안 그려도 먹고 살 정도 돼요. 예전에는 돈 버는 일에 관심이 많았는데 요즘은 관광, 등산 다니는 데 돈을 퍽퍽 써요. 어머니께서 저한테 ‘많이 벌려고 하지 말고 적게 쓰라’고 하셨죠. 돈을 물쓰듯하다가 그 돈을 보충하자면 힘이 들고 건강이 축나고 사회생활이 어려워진다는 거죠. 그런데 황 위원은 아까부터 내 돈벌이에 관심이 많군요(웃음).”
-독자는 유명 만화가라면 어느 정도 부자일까 하고 궁금하겠지요.
“영화 한 편 계약하면 수억원 받는 줄 알잖아요. 그런데 원작료로 수억원 받는 건 드물어요. ‘식객’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여 있더라며 큰돈 벌었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죠. 사실 원고료와 인세 받아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어요. 이번 강남 파동에서 입증됐듯이 돈은 부동산으로 벌어야 하는데, 저는 부동산에 투자하는 족족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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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엔 만화계도 유신

허영만 화백은 체력 관리를 위해 양재천에서 규칙적으로 자전거를 탄다.

옛날에는 만화와 만화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다. 만화책은 공부에 방해되거나 청소년 유해(有害) 도서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노트에 만화를 그리면 부모나 교사한테 혼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은 만화 자체로 어엿한 문화이고 뛰어난 교육 수단이다. 교육(Education)과 오락(Entertainment)의 합성어인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의 대표주자가 만화다. 이원복 교수가 그린 ‘먼 나라 이웃나라’는 세계를 이해하는 훌륭한 교과서다. 가나출판사에서 나온 ‘그리스·로마 신화’(만화)도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만화산업은 굴뚝산업보다 돈벌이가 잘되는 성장산업이다. 만화영화 ‘라이언 킹’ 한 편의 수익이 국산 자동차 150만대 판매수익과 같다는 분석도 있지 않은가.
“그전에는 책상 앞에서 머리 짜내 써내는 스토리 위주의 만화였지만 지금은 추세가 달라졌죠. 스토리도 현장에 없는 얘기를 끄집어내서는 안 되는 거죠. 소비자들이 정보가 다양한 만화를 선택하죠. ‘식객’도 에듀테인먼트라고 할 수 있어요. 일본 만화에는 그런 것이 많습니다.”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아 가슴 아픈 때가 있었습니까.
“예비군 훈련장에서 땡볕에 앉아 서로 뭐하냐고 물어보잖아요, 낯선 사람들끼리. 만화 그린다는 얘기를 내 입으로도 하기 어려워 그냥 ‘그림 그려요’ 하고 넘어갔지요. 그런데 다시 ‘무슨 그림요?’ 하고 캐묻는 사람이 있으면 ‘만화 그린다’고 실토했지요. 그러면 제 얼굴을 한 번 더 봐요. 흔한 직업이 아니니까.
해마다 5월 어린이날이면 어린이회관에서 만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량만화 화형식’을 했어요. 우리로서는 김새는 일이었죠. 4∼5월만 되면 심의가 강화됐지요. 그때 ‘각시탈’이라는 제 만화가 히트했어요. 일제 강점기에 탈 쓰고 일본 헌병들하고 싸우는 내용입니다. ‘각시탈’이 히트하니까 너도나도 탈 쓰고 나왔어요. 도서잡지윤리위원회 심의실에서 부르더니 ‘당신 때문에 전부 탈을 쓰고 나오니까 당신부터 그리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더는 탈을 못 그렸어요. 1970년대 말 이야기죠.”
-유신 때였군요.
“만화계도 유신이었죠. 그러다가 제가 한동안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같은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의 패널로 자주 ‘팔려’ 나갔어요. 만화계 선배들이 좋아했어요. 이제 사회에서 우리를 조금 ‘묵어(알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여튼 만화가를 저급 창작가로 취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었어요. 일본에서는 유명 만화가가 죽자 종합일간지 톱기사로 나온 적도 있어요. 그래도 고우영 선생 별세 기사는, 톱으론 안 나왔지만 꽤 크게 실렸더라고요. 방송에도 나오고. 내가 애들과 밥 먹다가 ‘야, 내가 죽어 고우영 선생처럼 다뤄졌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만큼 위상이 달라졌죠.”
“남들이 쉬는 덕분에 中原 차지”
1970년부터 1980년까지는 고우영과 이상무씨의 만화가 인기 절정이었다. 고 화백이 그린 ‘수호지’ ‘금병매’ ‘가루지기’ 같은 만화는 스포츠 신문의 지가를 높였다. 1983년 이현세씨의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가 나왔다. 30권으로 완결될 때까지 100만권이 팔렸다. 영화로 만들어져 40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저는 1등은 못 해봤어요. 다행히 지금은 제 또래 사람들이 다 연재 안 하고 쉬니까 혼자서 중원(中原)을 차지하고 있죠(웃음).”
-고우영씨 만화의 애독자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더군요.
“그 양반은 중학생 때 만화가로 데뷔했어요. 저는 어려서 고 화백이 그린 ‘짱구박사’를 봤죠. 고 선생하고 저하고는 15년 골프 친구예요. 매주 금요일에 만났어요.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프셔서 뜸했죠. 지난 3월, ‘치료 대충 끝나면 골프 한번 치자’고 했는데 그 약속 못 지키고 가셨죠. 요즘 67세면 단명이죠.”
-벤츠 SP 타고 골프 치러 다니면 주위 눈치가 보이지 않습니까.
“눈치 보일 때 있죠. 그러나 집과 화실 다음으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장소가 자동차입니다. 안전 문제도 있고…. 골프는 요즘 다 치는데요. 옛날에는 눈치 보였죠. 우리 집 지으면서 잠깐 아파트에 세들어 있었는데 집 주인이 나가라고 했어요. 남의 집 세들어 사는 사람이 중형차 타고, 골프 치러 다니는 꼴을 못 보겠다는 거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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