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만화 안 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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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필자와 함께.
-30년 만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절은 언제였습니까.
“1970년대 아내와 데이트할 때는 수입이 좋아서 저를 재벌집 아들로 오해할 정도였죠. 친구들은 찻값도 없어 ‘재건 데이트’라고 해서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났죠. 나는 다방에서 만나고 밥 사먹고 만날 영화구경 가고 택시 타고 돌아다녔죠. 하지만 1980년 전후 3∼4년 동안 만화시장이 너무 죽어버려 직업을 바꿀 생각도 많이 했어요. 소재에 대한 제약이 심했죠. 제 책이 히트 작가만큼 팔렸는데 원고료가 안 올라요. 안 올려줘도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까 계속 붙들고 있어야 했죠. 만화가 비전이 전혀 없어 보여 과연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 옮겨가야 하는 건가 고민했어요. 그때 만화가들이 애니메이션 쪽으로 많이 옮겨갔어요. 저도 그때 만화영화를 1년 해봤지만 적성에 안 맞아 그만뒀죠.”
허씨는 부친이 일제 강점기에 순사(경찰)를 했다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아버지에게 왜 하필 일제 경찰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놈아, 세상에 먹고 살 게 없어서 취직하려고 순사 시험을 봤더니 합격했다”고 대답하더란다. 인근 해역 섬사람들이 아버지 송덕비를 세워놓은 것을 보면 악질 순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허 화백이 태어난 다음해인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이 터졌다. 아버지는 여수 순천을 장악한 반란군을 진압하러 가고 가족은 광양 외가로 피신했다. 군인 경찰관 가족과 우익 인사는 남로당 반란군의 타깃이었다. 허 화백의 아버지는 전투를 치르다 반란군 감옥에 갇혔다. 백두산 호랑이(김종원)가 여수 쪽에 상륙해 반란군이 도망가면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그러나 허 화백의 아버지는 밖에서 총을 난사할 때 감방 벽에 바짝 붙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후배들 작품 중에 재밌게 읽는 만화는 어떤 겁니까.
“윤태호 만화를 재미있게 봅니다. 윤태호는 우리 화실에 있다가 독립했죠. 그리고 양영순 만화도 좋아합니다. 한겨레신문에 실리는 장봉군 만평도 재밌어요. 나는 장봉군 팬입니다. 그림도 좋고.”
하얀색 맹도견 라브라도 리트리버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무척 순했다. 낯선 사람에게도 앞발을 들고 안겼다. 영국산이어서 이름을 ‘윈스턴 처칠’이라고 지었단다. 간단한 명령어는 알아듣는다. 처칠 이야기를 하다가 보신탕으로 화제가 옮아갔다.
“보신탕은 중요한 음식이고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식객’에 보신탕 이야기를 그리고 싶은데 찬반양론이 극명하게 엇갈려 고민하고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 편에서 보신탕집 부자(父子)의 갈등을 다루었는데 하필 보신탕집이냐고 항의가 만만찮았다고 한다. 그는 처칠에게 “개고기 이야기하는데 너는 왜 꼬리를 흔드냐” 하고 핀잔을 준다.
얼마 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필립 보링이라는 칼럼니스트가 아시아인의 음식에 관한 글을 실었다. 삽화가 눈길을 끌어 읽었다. 중국 가정에서 개와 노는 어린이에게 엄마가 “너 왜 음식 갖고 장난치니?” 하고 꾸짖는 그림이었다.
이 칼럼에서 보링은 인간의 충성스러운 친구인 개를 먹는 것은 문화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상한’ 동물인 사슴과 말, 그리고 쟁기를 끄는 소에게 하지 않는 특별한 보호조치를 개에게만 하는 것을 합리화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 남부에서 살아 있는 원숭이의 골을 먹는 식문화에 대해 서구인들은 ‘인도적인 죽이기’를 요구하지만 과연 새장이나 우리에 갇힌 동물은 인도적으로 살고 있느냐고 반문한다. 모든 나라의 음식에는 문화적·종교적인 습관과 편견이 존재한다.
허 화백은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항의 때문에 본격 보신탕 편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도 문화적 편견의 소산일 수 있다. 산 개와 죽은 개를 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호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보신탕 이야기 그리고파
사진을 찍느라 휴일에 나와 수고한 정경택 차장이 허 화백 만화의 질감과 음영이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허 화백은 실제로 수많은 음식과 요리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그 사진을 보고 만화를 그린다.
“사후(死後)에 어떤 작품이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냐”고 묻자 ‘각시탈’ ‘망치’ ‘오 한강’ ‘사랑해’ ‘식객’을 꼽았다.
화실 벽에는 ‘固定觀念脫出!’(고정관념탈출)이라는 자필 한자 글씨가 걸려 있었다.
“제가 본래 고리타분한 까닭에 만화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그리고 싶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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