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7, 8일 설악산 토왕성빙폭에서 열린 빙벽등반대회에 참가한 정운화(鄭雲花·39·남양주 체육문화센터 인공암벽 관리요원)씨의 각오는 남달랐다.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가 존경해온 외설악적십자구조대 대원들 앞에서 멋지게 해내고 싶었다.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인 그녀는 젊은 후배들을 물리치고 올해 열린 두 차례의 코리안컵 시리즈 빙벽대회에서 연거푸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1월 10, 11일 판대 아이스파크에서 열린 제5회 노스페이스컵 아이스클라이밍페스티벌에서 우승하고, 설 연휴 다음주에 열린 코오롱스포츠배 청송 주왕산 아이스클라이밍 선수권대회에서는 시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래서 세 번째 코리안컵 시리즈이자 올 시즌 마지막 대회인 제13회 설악산 토왕성폭포 아이스클라이밍 대회마저 우승해 3개 대회를 석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코리안컵 시리즈 종합우승으로 월드컵 참가 꿈 이뤄


20명 안팎이었던 예년과 달리 올해는 무려 41명이나 되는 여성 클라이머가 출전했다. 결선은 그 중 예선을 통과한 12명의 선수가 실력을 겨루는 자리였다. 예선을 2분49초의 기록으로 완등한 정운화씨는 자신이 넘쳤다.


그러나 막상 빙벽에 접어들자 예상과 달랐다. 12개의 블록으로 이루어진 경기 루트는 블록 하나하나가 좁아 그 안에서 바일과 아이젠으로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피크를 박기에 확실한 자리는 블록 테두리를 벗어나 있었고, 발을 조금만 뻗으면 밖으로 나갔다. 잔뜩 움츠린 채 다음 번 블록으로 이동하려면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타격이 필요했다.


세 번째 박스에 진입하는 순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두 번째 박스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끈 탓에 제한시간 5분에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바닥에서 출발한 이후 우측으로 트래버스한 다음 수직 구간을 끝내고 좌측 트래버스 구간에 접어드는 순간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방송소리가 들려왔다.


“등반 마치고 내려서니까 김낙수 심판이 소원 성취했네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서야 우승한 걸 알았어요. 두 번째 박스에서 정말 애먹었어요. 자세가 나오지 않아 긴장도 많이 했고요. 그래서 경기를 마치고 내려와 세터(경기 루트를 내는 사람)들에게 무슨 루트를 이렇게 어렵게 냈냐 한마디 하면서도 고맙다고 했어요. 루트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솔직히 우승할 줄 몰랐어요. 완등한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행복해요. 시어른들 앞에서 목표도 달성했고, 외설악구조대 대원이 되면서 제 입으로 말한 약속도 지켰으니까요.”





▲ 남양주 체육문화센터 인공암벽에서 드라이툴링 등반 중인 정운화씨.<사진=허재성 기자>



정운화씨는 내심 지난해 빙벽대회 코리안컵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해 올 초 월드컵대회에 참가하고 싶었다. 지난해 1월 초와 중순에 열린 용대리 매바위 빙벽대회와 판대 아이스파크에서 연이어 우승하면서 당연히 그 꿈이 이뤄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라이벌인 신윤선씨(노스페이스)가 세 번째 열린 청송대회와 마지막 대회인 토왕폭대회를 휩쓸면서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청송대회에서 9위, 토왕대회에서 5위로 밀려났어요. 앞서 열린 두 대회에서 우승을 하자 자만했던 거예요. 윤선이가 청송대회와 토왕폭대회를 우승하고 나더니 저한테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자만했던 사실을 언니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면서요. 저 역시 그 과정을 그대로 반복했던 거죠. 그래서 올해는 자만심을 갖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월드컵대회에 참가하느라 윤선이가 올 대회에 출전하지 않은 것도 큰 몫을 했고요. 윤선이가 저보다 조금 실력이 낫거든요.(웃음)”


그녀는 도보 산행에 앞서 바위부터 손을 댔다. 1991년 친구 오빠가 회원으로 있는 벽암산악회 야영산행에 참가했다. 등산학교 출신들이 모인 벽암산악회 회원들은 아침에 일어나자 자연스레 어디론가 향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다. 숲을 빠져나가자 어마어마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인수봉이었다. 맨 아래쪽 슬랩을 몇 차례 오르는 것으로 끝났다.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땅을 밟는 순간 재미있다 싶었다. 다음주 또다시 인수봉을 찾았다. 이번에는 기존 B코스였다.


“등반 내내 겁에 질려 있다가 정상에 올라선 다음 하강용 로프를 걸자마자 내가 먼저 내려가겠다고 우겼어요. 저렇게 가느다란 로프를 여러 명이 타고 내려가다 보면 자일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죠. 웃겼어요 정말. 자일 하강 경험도 없으면서도 말이에요. 그렇게 겁이 많이 났는데 막상 땅에 내려서니까 또 올라가고 싶었으니 말이에요.”


산과 사람 좋아 선운산에서 7년 가까이 생활


이렇게 겁 많던 소녀가 이후 바위에 흠뻑 빠져들었고, 1994년부터 2000년 가을까지 무려 7년 가까이 선운산에서 ‘입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교 졸업 후 시작한 서울 생활을 1993년 말로 정리한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갔다. 몇 주는 바닷바람도 맞으면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지만 매주 해오던 암벽 등반을 하지 않으니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러다 찾아간 바위가 선운산 암장이었다.


“하도 산으로 나다니니까 ‘다 큰 처녀가 이 시골에서 어쩌자고 커다란 배낭 메고 쏘다니냐’ ‘시집가려면 선을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부모님께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매주 갔어요. 바위도 바위지만 전주, 군산, 목포 등지에서 오는 산꾼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가 좋았거든요. 그러다 아예 선운산에 뿌리를 내렸어요. 1995년 봄 산으로 들어서다 화사하게 핀 산벚꽃에 홀린 거예요. 이런 꽃밭을 내 정원으로 두고 지내야겠다 마음먹은 거죠. 처녀 때 저 참 엉뚱했죠?”





▲ 제5회 노스페이스컵 아이스클라이밍 페스티벌 결선 경기 모습.



6개월쯤 예상했다. 5.12b급 수준에 올라서면 산에서 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더욱 좋아졌다. 바위는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녀를 빨아들였다. 주말이고 주중이고 가릴 것 없이 찾아오는 클라이머들과 산 얘기를 나누노라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셋집에 이어 빈 농가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모아놓았던 돈이 바닥이 나자 동백호텔에서 일하기도 하고 동백호텔에 찻집을 차려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자전거 대여도 했어요. 운동 삼아 자전거 타고 선운산에서 19km 떨어진 고창 읍내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동네 어른들을 마주치면 힘들게 자전거 타지 말고 내 차 타라며 자전거까지 실어주시는 거예요. 운동하는 건데 말이에요. 말이 찻집이었죠. 새벽에 참당암에 올라 108배에서 500배까지 하고 나면 온몸이 땀에 푹 젖어요. 그러면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아침밥 먹곤 다시 산에 올라가요. 속살바위 같은 곳에서 힘이 싹 빠져나갈 때까지 바위를 타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오후 서너 시쯤 내려와 문을 열었어요. 그것도 모자라 호텔 지하에 실내 암장까지 차려놨었으니, 참. 내가 생각해도 미쳐 있었어요.”


선운산은 지리적 특성상 겨울에도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는 산이지만 새로운 암벽에 대한 욕구는 그녀를 외국의 유명 암장으로 이끌기도 했다.


“좋기만 했던 건 아니에요. 계속 떨어지기만 했을 때는 바위를 쳐다보기도 싫었어요. 그러다가 생각한 대로 등반이 되면 정말 하늘을 날 듯 기뻤고요.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지냈던 거예요. 겨울에는 태국 크라비 해벽에도 가고, 대만 양명산 볼더와 기륭시 해벽에도 갔어요. 크라비는 선운산 떠나기 전까지 세 번 갔나 봐요. 지금 생각해보면 코 찔찔이 선배들이었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어요. 다 저녁 때 자기네들은 멋진 노상 카페에서 편안히 맥주 마시면서 저한테는 백사장에서 달리기 하라고 하기도 했어요. 청악산우회 부근호 형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그땐 왜 그렇게 무섭던지, 눈을 부라리면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좋았으니…….아무래도  전생에 산사람들과 깊은 인연이 있었나 봐요.”


선운산 생활 7년 동안 5.12d급까지 수준을 끌어올리고 속살바위에 ‘솔로에서 듀엣으로’(5.9)를 개척하기도 한 그녀의 선운산 생활은 2002년 가을 한반도를 쑥밭으로 만든 태풍 루사가 앗아갔다.


“황당하더군요. 서울 나들이 갔다 돌아와 보니까 선운산 절길 곳곳엔 거목이 쓰러져 있고, 제가 살던 집은 앞뒤가 뻥 뚫린 거예요. 바람이 치고 지나가면서 벽이 무너져 버렸던 거죠. 다시 집을 수리해 살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선운산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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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 제석봉, 촛대봉, 영신봉, 명선봉, 반야봉까지의 풍광을 앵글에 담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앞으로 성삼재, 만복대, 정령치, 바래봉까지의 모습을 5년에 걸쳐 담을 계획입니다. 지리산에 파묻혀 살면서 지리산과 절친해져 그 완전한 모습을 담아낼 것입니다.”

지리산에 미쳐 직장도 사직하고 서울 짐을 몽땅 싸들고 내려가 지리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지리산 사진작가 강병규(姜炳圭·45)씨. 지리산 모습을 앵글에 담기에 여념 없다. 강씨가 지리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 지난 2005년 겨울. 현대해상에서 IT 전문가로 일하다 사표를 내고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자락으로 아예 주소를 옮겼다. 지리산 도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퇴직금과 그 동안 모아둔 돈 1억 원을 들여 토지 1만5000여 평을 샀다. 중고 트랙터를 구입해 땅도 직접 개간했다.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장소에 지리산 모습을 담을 멋진 전시관과 집을 지었다. 그림에나 나올 법한 아담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꼬박 4년 걸려 사람 사는 집으로 모습을 갖췄다.

그 전시관에 자신의 지리산 사진을 표구해서 전시했다. 입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한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이름도 지었다. 길의 가장자리란 뜻을 지닌 ‘길섶’으로. 들어가서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IT 전문가가 지리산 사진작가로 변신한 계기나 과정이 궁금했다.

“대학 졸업 후 사업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나친 경쟁에 지쳤습니다. IT분야는 특히 심하지 않습니까. 성과도 많이 올렸지만 항상 공허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어요. 직장 다닐 때도 매 주말 가방 싸들고 지리산에 드나들었습니다. 지리산 왔다가면 감정 정리가 됐어요. 어느 날 아예 ‘지리산에 내려가 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점차 그 생각이 강해져 결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 그가 직접 지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사진전시관 ‘길섶’


강씨는 대학 졸업 후 시청각 기자재 지역총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2년 만에 깡그리 말아먹었다. 1994년 벤처회사인 대진정보통신에 IT 전문가로 취직했다. 맘껏 능력을 발휘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1997년엔 다우기술로, 2001년엔 현대해상으로 스카우트되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어디든 정이 들지 않았다. 지나친 경쟁으로 몸이 지쳐갔다. 그의 안식처는 결국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이 도피처는 아닙니다. 내 영혼의 정착지이고, 내 일터이고, 작업장입니다. 이젠 정을 붙이고 제대로 일할 겁니다. 꿈도 있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를 담아 사람들을 즐겁게 할 계획입니다. 사람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그런 장으로 길섶을 가꾸고 싶습니다. 강과 산은 우리 생명의 근원입니다. 강산을 담아 지역민들이 즐기는 문화의 장으로 함께 나눌 것입니다.”

강씨의 당찬 포부다. 그는 아직 노총각이다. 언제든 결혼할 준비가 돼 있는 노총각이다. 지리산 자락 그림 같은 집에서 같이 살 처자는 언제든 연락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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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리산 생활을 한마디로 “행복하다”고 했다. 모악산에 비하면 彎瘠� 지옥 차이다. 사람 하나 찾아오는 이 없는 외롭고 춥고 습한 집에서 꼬박 13년을 살다 지리산에 와선 산을 알고, 사람을 알고, 시를 알고, 문화를 더욱 더 알게 됐다고 말한다.

지리산에 와서 ‘섬진강과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섬진강 청소도 하고, ‘동네친구들’이란 밴드도 만들어 악양 지역민들을 위해 한 번씩 공연도 한다.

자신만의 삶을 추구한 외골수로 지내다 이젠 지역민과 함께 나누는 삶을 하고 싶어 자발적으로 단체를 만들어 봉사하고 있다. 물론 지리산학교에도 참여하고 있다.

시인 이원규도 도시 생활이 싫어 지리산에 입산한 전형이다. 중앙지 기자 생활을 하다 1998년 과감히 사표를 내고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내려왔다. 처음 내려와 3년 동안 아무 하는 일 없이 산짐승 같은 생활을 했다. 배고프면 먹고, 잠오면 자고, 그러다 심심하면 지리산 이곳 저곳을 누비며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지리산 박사가 됐다.

기자생활을 할 땐 특종상도 몇 차례 받고, 시인으로 일찌감치 등단도 했지만 그에겐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3년을 무위도식하며 보낸 뒤 ‘인간으로서 도리를 해야겠다’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 활동을 시작했다. 지리산 지킴이 역할도 하고, 좌우 이념 대립 해소를 위해 ‘지리산 위령제’를 기획, 진행했다. 낙동강 1,300리 길 도보순례,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 생명평화 탁발순례 1만 리, 4대 강 3000리 도보순례 등 주로 걸으며 세상의 소리를 경청하고 있다. 그는 아이디어맨이다. 이것저것 궁리하며 아이디어를 낸다. 지리산학교도 그가 지리산을 위해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한다.






▲ 1 도예가 류대원의 도자기. 2 도예가 안상흡의 생활도자기 3 이원규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과 이창수의 사진. 4 박남준의 시 ‘봄날은 갔네’와 이창수의 사진.



영농법·국악반 등도 9월 개강 예정

숲길걷기반을 맡은 남난희씨는 198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여성 산악인이다. 백두대간이란 이름이 생소했던 1984년 새해 첫날부터 76일 동안 태백산맥 단독 종주를 감행해 성공한 인물이다. 1986년엔 여성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 등정에 성공했다. 30세 전후까지 그녀에게 산은 오직 오르기 위해 존재했다. 그 산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잠적하다시피 결혼과 함께 산악계를 떠났다. 지리산에서 녹찻집도 운영했고, 정선에서 자연학교 교장도 해봤다. 다시 지리산으로 입산한 지 만 13년.

욕망과 도전의 산에서 내려와 안정과 평온의 낮은 산에서 산과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 이혼의 아픔도 겪고 아들이라는 희망도 얻었다. 매일 아침 된장과 녹차 농사로 정신없이 바쁘지만 쌍계사 불일폭포가 있는 불일암에서 108배 하고 내려와 일과를 시작한다.

“나에겐 산이라는 큰 신(神)이 있어요. 불교 신도는 아니지만 108배는 사색을 하기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불일암까지 왕복 2시간30분 가량 갔다 오면 몸과 마음이 가뿐해져 일과가 수월하게 시작되죠.”

악양 화개골 야트막한 산에 숲길 8개 코스를 개발해 ‘지리산학교’수강생들과 같이 다닐 계획이다. 무조건 오르려던 불씨를 지녔던 20대에서 그 불씨가 따뜻한 장작 숯불로 변한 50대엔 아담한 산에서 사람과 함께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화가 오치근은 남원 운봉이 고향이다. 그런데 왜 악양에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판소리 선생님이 악양에 계셨습니다. 남원에 있으면서 판소리 배우러 악양에 한 번씩 오갔습니다. 당시 받았던 인상이 너무 좋았습니다. 악양엔 들과 강과 산이 있고, 조금만 나가면 바다가 보입니다. 모든 자연을 다 만끽할 수 있는 거죠. 고향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으려니 눈치도 보이고 해서 1999년부터 악양 빈 집에서 개인 작업을 시작하면서 아예 눌러앉았습니다. 이제 내가 디자인하고 지은 집에서 애들 둘을 낳고 키우니 집과도 정이 들었어요.”

오치근은 지리산에 살지만 세상과 다양하게 소통하고 있다. 책 속의 일러스트를 계속 그리고 있다. 서울에서 그려 달라는 청탁이 연이어 온다. 그가 일러스트한 책도 벌써 몇 권 나왔다. 또 일주일에 한 번 동네 유치원생과 초등생, 학부모를 모아 그림 강습을 한다. 섬진강에 나가서 모래 조각을 쌓기도 하고, 계곡에서 돌을 관찰하고, 나무와 숲길 관찰도 한다. 일종의 자연 체험 그림 그리기다. 

가르치는 걸 통해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동시에 배우고 있다. 주민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이창수씨로부터 지리산학교 강사를 맡아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다양한 활동을 기다리던 차에 선뜻 승낙했다.

“여태까지는 백석 시인의 글에 내 그림을 그려 책으로 냈으나 앞으로는 나만의 악양 이야기, 귀농 이야기, 시골 이야기를 감동적인 글로 담아 내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을 할 겁니다”

시골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며, 그 꿈을 하나 하나씩 현실화해가고 있는 그다.

목다구(木茶具) 공예가 김용회는 이제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지리산 입산 햇수로 따지면 가장 고참이다. 1989년 가을에 입산했으니 정확히 만 20년 됐다. 그는 원래 화가였다. 1989년 배낭에 화구만 넣고 지리산 여기저기를 방황하고 있었다. 등산이라기보다 그림 그리기 위한 포인트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5월 초 벌써 48명 수강등록 마쳐

화개 방향으로 내려오다 느낌이 너무 좋아 ‘한 계절만 이곳에서 보내야겠다’고 눌러앉았다.

그런데 먹고살거리가 없었다. 화개에서 차도구 작업하는 선배를 만나 일주일에 세 번 나가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림 그리러 지리산에 왔다 목공예로 전업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시작된 목공예로 인해 1996년엔 완전히 그림을 접었다.

그러나 그림과 접목된 목공예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림은 구상이고 디자인이다. 이미 훈련은 돼 있는 상태였다. 아름다운 한국의 선을 살려 목다구를 만들었다. 주변에선 “야, 너 참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목다구를 만들 수 있냐”는 칭찬도 들렸다. 일본, 중국에서까지 반응이 왔다. 그는 각오를 새로 다졌다. “우리나라만의 차 도구를 만들어보겠다“고. 그래서 나온 게 코고무신, 베틀북, 한복치마 등의 모습을 담은 차 도구였다. 이젠 그의 차 도구는 기십만 원 하는 정도의 ‘작품’이 됐다. 옛날에 비하면 정말 괄목상대다. 집도 사고, 그럴 듯한 작업장도 지었다. 그만의 공간이다. 지리산에 입산한 지 20년 만에 마련한 것이다. 원래 도시생활을 부러워하지 않았지만 명실상부 남부럽지 않은 수준이 됐다.

그새 결혼도 했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팬이라는 여성과 그녀의 친구가 지리산에 왔다. 이원규 시인은 후배 김용회를 바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그녀의 친구와 그 둘은 바로 ‘필’이 꽂혔다. 주변의 반대와 곡절을 극복하고 끝내 결혼했다. 반대했던 처가 식구들도 지금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도 아쉬운 점이 있다. 너무 일찍 지리산에 입문하는 바람에 이론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무의 결이 어떤지, 그 결을 살리는 방법이 없는지 등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부족해 아직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이번 지리산학교에서 수강생들에게 목다구를 가르치면서 자신에겐 이론을 닦을 기회를 마련하자고 만반의 각오를 다지고 있다.

도예가 류대원은 지리산에 입산한 지 만 10년이 됐다. 경남 양산의 매형 밑에서 도자기를 배웠다. 지리산에 납품하러 다니다 ‘불편하게 오가느니 아예 여기서 살자’고 한 게 지금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됐다.

“불편한 점 전혀 없고 경치도 좋고 사람도 좋고 너무 만족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고 즐거워했다. 지리산에서 결혼도 했지만 그의 부인은 양산 통도사 부근에서 그의 도자기숍을 운영하고 있다. 일종의 주말부부다. 지리산에서 만든 그의 도자기를 일주일에 한 번 그가 직접 양산까지 배달한다. 돈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른다.

“집사람이 돈 얘기를 하지 않는 것 보니 먹고살 만한가 보죠. 모든 관리는 집사람이 하기 때문에 저는 잘 모릅니다.”

그도 지리산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 지리산을 위해서 뭔가 할 일이 없나 찾고 있던 차에 지리산학교에 합류하게 됐다. 섬진강 청소와 악양 동네밴드에 이미 가입, 주민을 위해 봉사해오던 터였다. 악양의 문화 자급자족을 위해 매진할 자세는 벌써 갖춘 상태다.

소질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이렇게 다재다능한 사람들이 모여 지리산학교를 개강한다는 소문이 벌써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전해졌다. 개강도 하기 전 여기저기에서 문의가 들어오더니 5월 초 8개 강좌에 48명이 등록을 마쳤다. 옻칠반과 천연염색반은 9월부터 하기로 했다. 또 영농반과 국악반이 추가될지  모른다. 점점 더 규모가 커질 판이다.

강의실은 따로 없다. 강사 작업실이 강의실이고, 지리산이 강의실이다. 초대 교장을 맡은 이창수씨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단 한 명이라도 수강 신청하면 개강한다”며 “지역 주민과 귀농인이 합심해 지리산 문화가 확실히 뿌리를 내릴 때까지, 그리고 꽃 피울 때까지 기여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밀려서 온 사람들이 아닌, 지리산을 선택해서 온 사람들이 지리산 문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뭉쳤다. 어떤 문화의 모습을 보여줄지 사뭇 기대된다. 토착민들과의 보이지 않는 간극을 여하히 조정하고 좁혀나가는 것도 그들의 과제다.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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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으러, 땅의 의미를 찾으러, 땅의 의미를 알러 농사 지으러 내려온 사람이 이렇게 바쁘게 살 줄은 자신도 몰랐다고 한다.

“사진은 이제 안 찍어요? 언제 찍나요?”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찍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시간을 내서 지난해 생애 두 번째 사진전을 서울 학고재에서 열었다. 올해 10월 8일 세 번째 사진전이 성곡미술관에서 예정돼 있다. 대도시의 기계음과 정신없이 얽매인 일정이 싫어 지리산에 입산한 사람이 지리산에 사는 건지, 서울에 사는 건지 모를 정도로 빡빡하게 산다. 그래도 기계음 듣지 않는 시골이 너무 좋다며 대만족하고 있다.

지리산학교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시인 박남준과 이원규, 이창수 3명이 저녁을 하면서  “이대로 있지 말고 지리산을 위해 뭔가 일을 도모하자”고 한 게 발단이 됐다. 이 중 제일 연장자인 박남준씨가 맡아 추진하라고 했으나 세월아 네월아 하고 일이 되지 않았다. 이창수씨가 바로 나섰다. 그래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 1 천연염색가 신미원씨의 작품. 2 목공예가 김용회씨의 목다구. 3 화가 오치근의 작품.


애초 일을 맡았으나 만만디였던 박남준 시인은 원래 성격 자체가 느긋하다. 원체 구도자적 삶을 추구하는 성격인지라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박남준 시인은 지리산에 입산한 지 만 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주 인근 모악산에서 이미 혼자만의 신선 생활, 아니 산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모악산과의 인연은 1984년, 그가 시인으로 등단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가을 모악산 등산을 갔을 때 길을 잘못 들어 날이 저물도록 헤맸다. 랜턴도 없이 어둑한 길을 저 멀리 보이는 불빛만 보고 걸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당도해서 얼핏 엿보니 산속 무속인의 집이었다. 문득 ‘이런 집에 한두 달 살며 무속인의 삶에 대한 시를 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도 하다 삭막한 도시생활에 스스로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던 차 마침 전주에서 문화센터 관장직을 제의받아 바로 낙향했다. ‘산중에서 산책하듯 삶을 객관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산속에 집을 얻어 출퇴근했다. 꼬박 1년을 산속에서 생활했다. 산중 생활이 그와 둘이 아니고, 유리되지 않았다는 감정이 슬며시 들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면 돈을 쓸 일도 없고, 돈을 쓰지 않으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되지 않나’하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바로 사표를 냈다.

그러던 중에 아는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산속 집 지킬 사람을 찾고 있으니 아는 친구 있으면 소개하라고. 마침 사표 낼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선배랑 같이 그 산속 집을 찾아갔다. “혹시 이 집에 무속인이 살지 않았냐”고 물었다. 10여 년 전 모악산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그 산속 집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 선배는 “맞다”며 “어떻게 알았느냐”고 되물었다. 참 기막힌 인연이었다. 산과의 인연인지, 무속인과의 인연인지, 자신과의 무언의 인연인지.
“내가 이 집에 살겠다”며 눌러앉았다. 그렇게 13년의 세월을 습하고, 춥고, 외진 산중에서 보냈다. 보통 사람이면 견디기 힘든 고독과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벌써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어느 정도 추위냐면, 한겨울 방안에서 양철 지붕 밑으로 물이 슬슬 내려와 언 고드름과 같이 지낼 정도였다. 집 옆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바람이 불면 양철 지붕으로 떨어져 지붕이 내려앉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벽에 바짝 붙어 잠을 청하곤 했다.

겨울엔 그렇다 치고 여름엔 웬 습기가 그렇게 많은지. 장마가 한번 오면 바로 그 다음날은 온 방이 습기로 가득 찼다. 밖에서 말린 빨래를 방에 들여놓으면 다시 습기로 축축해져 냄새까지 쿰쿰하게 났다. “겨울엔 추워서 죽겠고, 여름엔 습해서 죽겠더라”며 그는 그때를 돌이켰다.

한 번은 지인이 그 산속 외딴집으로 찾아왔다. 쌀도 떨어지고 없었다. “잠시 기다려라”해놓고선 ‘쑥국이나 끓여 먹여야겠다’며 부근에 널린 쑥을 캐고 있었다. 갑자기 이름 모를 새가 날아와 울었다. 새의 울음소리가 왜 그리도 처량하게 들리는지. “어~허허허허~~~”라고 울며 ‘쌀도 떨어지고 쑥이나 캐는 처량한 인생’이라며 마치 선명하게 비웃는 듯했다. 갑자기 얼마나 서럽던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내 삶이 얼마나 비참했으면 새까지 나를 비웃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어 여기저기 강연에 나가서 “그 새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고 물었다. 어떤 산중 수행자는 “홀딱 벗고, 홀딱 벗고”로 들린다고 했다. 마치 각자의 현재 삶의 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 새 이름은 검은등뻐꾸기라고 했다.

지인들이 ‘도저히 모악산 생활이 안 되겠다’ 싶어 지리산 자락 악양의 아담한 집을 사서 박남준 이름으로 등기를 했다. 법률사무소에서 박남준을 찾아 전화를 했다.

“여기는 법률사무소인데, 박남준씨 맞죠?”

“맞는데, 내가 뭘 잘못했죠?”

법률사무소에서 황당해 하며 “뭘 잘못한 게 아니고, 서류 찾아 가라고 연락했습니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더란다. 그만큼 본능적으로 ‘법’이란 단어만 나오면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정말 자연 속에 파묻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다. 처음엔 ‘나한테 얘기도 않고 누가 이런 일을 벌였나’싶어 자존심이 상한 그는 모악산에서 더 버텼다.

2003년 늦봄 어느 날 며칠간 계속 비가 내렸다. 며칠 전 말려 놓은 옷을 입으려는 순간 곰팡이 냄새가 확 풍겼다. 밤에 자는데, 곰팡이가 몸에 스멀스멀 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 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입산한 게 2003년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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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많은 사람이 산다. ‘어머니의 산’지리산이 안고 있는 사연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지리산에 터전을 잡고 獵�. 원래 지리산에 살던 사람들, 도시에서 생활하다 지리산에 귀의한 사람들, 지리산을 떠났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온 사람들, 지리산 주위를 여기저기 맴도는 사람들 등 이유야 어쨌든 이들 전부 지리산 품안에 안겨 있다. 






▲ (위)지리산학교 강사진과 사무직원들이 지난 5월 1일 하동 야생화 문화축제장에 마련된 전시장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아래) 지난 5월 9일 주민과 수강생이 참석한 가운데 입학식을 열고 강사진을 소개했다.



소설가 박태순씨는 그의 책 <나의 국토, 나의 산하>에서 지리산 입산자들에 따라 세 유형으로 분류했다. 과거시험 또는 자각각타(自覺覺他)를 위해 들어오는 이들에게는 현실출세주의를 위한 수련연마의 지리산, 로빈 후드가 되기 위해 또는 자라투스트라의 각성을 얻기 위해 숨어드는 자에게는 현실변혁운동의 지리산, 아예 들어와 먹고살 작정을 내는 이들에게는 활인지지(活人之地)의 지리산 등이다. 도시인들은 방관자적이고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지리산과 지리산에 사는 사람들을 본다.

지리산에는 백수가 없다. 아무 하는 일 없어도 백수가 아니다. 지리산이 일을 시키고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남의 밥 빌어 먹지 않으니 백수가 아닌 것이다. 지리산에 살면 굶어 죽지 않는다고 다들 말한다. 대도시에 살면서 굶어 죽었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지리산에서 굶어 죽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어봤다. 포용의 산이자, 베풂의 산이고, 어머니의 산이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그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부지런하거나 게으르거나 먹고 사는 동네가 바로 지리산이다.”

대도시에서 살다가 지리산에 입산한 사람들이 있다. 다들 10년이 넘었다. 지리산에 발을 붙인 지 몇 년간은 소설가 박태순씨의 분류대로 활인지지의 지리산을 삼고자 동분서주했다. 이젠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주변을 살펴보니 비슷한 부류, 아니 독특한 개성과 소질을 지닌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사진작가, 시인, 목공예 전문가, 도예가, 화가들이 소리 없이 본업에 충실했다. 일부는 귀촌이었다. 반귀농 반귀촌으로 병행하는 이도 있었다. 귀농은 농촌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는 사람을 말하고, 귀촌은 촌에 돌아가서 농사 짓지 않고 다른 일 하면서 사는 사람을 칭한다.

이들이 지리산 문화를 일구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른바 지리산에 귀의한 지리산 사람들이 지난 5월 9일 ‘지리산학교’를 세워 지역 문화·예술과 귀농 안착을 위한 교육에 나섰다. 사진작가 이창수(49)씨는 사진반, 화가 오치근(39)씨는 그림반, 도예가 류대원(40)씨는 도자기반, 목공예가 김용회(43)씨는 목공예반,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산악인 남난희(52)씨는 숲길걷기반, 시인 박남준(52)씨와 이원규(47)씨는 시문학반, 퀼트 안경림(51)씨는 바느질반, 서재골 사람 신미원씨는 천연염색반, 옻칠공예가 성광명씨는 옻칠반, 낙원상가에서 현악기 매장 ‘언더그라운드’를 운영하고 있는 김선웅씨는 기타반을 각각 맡기로 했다. 12명이 각각의 전공을 살린 10개 반 강사로 나서 하동 평사리 악양 지역 문화와 토착·귀농민들을 위한 열린학교를 열었다. 현재 10개 반이지만 지역민들과 논의해서 영농법, 국악 등을 오는 9월 가을 학기부터 개설할 예정이다.

이들의 중심은 사진작가 이창수씨였다. 그는 ‘한국의 슬로시티’ 지리산 악양면에 살면서도 시간 단위로 사람 만날 약속을 잡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마저 괜히 바빠지는 것 같다.

“시골에 살면서 왜 그렇게 바쁘게 삽니까?”

“남들 편하고 느리게 살게 하기 위해서 바쁘게 삽니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그는 ‘바쁜’ 지리산 사람이다. 그는 또한 하동군 악양면이 국제 슬로시티로 지정되기 전까지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악양은 지난 1월 슬로시티 국제연맹으로부터 한국의 다섯 번째 슬로시티로 공인받았다. 슬로시티는 2009년 현재 세계에서 16개국 111개 도시뿐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되면 관광명소로 전 세계에 알려지는 기회를 잡게 된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슬로시티로 지정된 국가다. 일본에는 아직 없다. 2007년 12월 전남 신안군·담양군·장흥군·완도군에 이어 올 1월 하동군 악양면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원래 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악양면에서 강권했지만 “외지인보다는 토착민이 맡는 것이 좋고, 나는 외곽 지원을 하겠다”고 해서 부위원장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추진력이 있다. 그의 말대로 “길이 보이면 무조건 지르고 본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러한 소신은 사진기자를 하면서 길러졌는지 모른다. 그는 언론사 사진기자 출신이다. 1985년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샘이 깊은 물’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 국민일보, 월간중앙에서 사진기자를 했다. 기자생활 16년, 할 만큼 했다고 판단했다. 대학 다닐 때 유럽 무전여행을 경험했고, 기자할 땐 한국의 동식물을 찾아 비자가 거의 나오지 않던 시절 가이드 없이 혼자 백두산 천지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다. 사진이 인생의 전부였던 시절 얘기다.

1999년 6월 어느 날 서울 서소문 식당가 십구공탄 연탄 위에 삼겹살을 구우며 동료들과 시끌벅적하게 떠들다 잠시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머리를 스치는 순간 정신이 확 돌아왔다.
‘내년이면 사십이다. 인생의 절반, 사진기자 생활 16년 동안 열심히, 원 없이 일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왔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왜 사는가?’






▲ 사진작가 이창수 / 여성 산악인 남난희 / 염색가 신미원 / 목공예가 김용회 / 화가 오치근






▲ 퀼트 안경림 / 도예가 류대원 / 시인 이원규 / 시인 이원규


초대 교장은 이창수씨가 맡아

본질적 의문이 확 들었다. ‘어차피 내려갈 거면 빨리 내려가자. 한시라도 늦출 이유가 없다.’ 그날의 다짐이었다. ‘지를 거 빨리 지르자’는 그의 습성이 도진 것이다.

IMF도 지났고 별로 어려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 상황은 호의적이었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스스로의 의식이 문제였다. 하나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원래 45세쯤 지리산으로 내려갈 작정이었다. 5년이 당겨진 셈이었다. 그해 12월 회사를 그만두고 지리산에 입산했다.
과거엔 사람이 산에 들어가면 신선놀음이라 했다. 사람 인(人)에 뫼 산(山)이 합쳐지면 신선 선(仙)자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엔 처자식 내팽개치고 입산하면 바로 이혼감이다. 아니, 분명 이혼 각오하고 갈 것이다.

그의 부인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반대하기엔 너무 빈도가 잦았다. 이번엔 ‘저러다 말겠지’ 정도가 아니었다. 잡는다고 될 일도 아닌 것 같아 순순히 내버려뒀다.

그렇게 나이 40에 부인보다 먼저 지리산으로 내려왔다. 서울 용산의 아파트에서 살다 지리산 자락 악양의 초라한 재래식 화장실 집을 월세 7만 원에 얻었다. 그의 지리산 첫 터전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사진기자로 한창 사진 찍을 땐 ‘사진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인생, 그 자체가 전부다’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소중치 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사진도, 일도 삶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죽음도, 삶도 크게 보면 한 흐름이란다. 달관한 수준인 듯했다.

지리산 생활 10년. 이혼 당하지 않고 내려온 지 1년 뒤 부인도 따라 내려왔다. 교사직도 사표 내고. 그렇게 부창부수하며 지낸다. 그의 이름이 창수라서 그런지….

그의 부인 안경임씨는 지난해부터 아강퀼트를 열어 퀼트 이불과 간편한 옷 만들기를 강의하고 있다. 교사를 하면서도 바느질에 소질이 있던 터였다. 지리산에 내려온 초기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남편보다 더 재미있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지금 이 부부는 악양 뒤 지리산 자락 형제봉 가는 중턱의 땅 1만5000여 평을 사들여 터전을 일구고 있다. 사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낸다. 봄엔 송장도 일어나 일을 도울 정도로 바쁘다는 녹차 시즌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녹찻잎을 따는 일부터 시작해서 한밤중 찻잎 덖는 일까지 이창수씨의 손을 거치지 않는 과정이 없다.

한밤중 부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300℃ 내외 되는 가마솥 옆에 서서 녹찻잎을 덖는 과정을 보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더울 지경이다. 장갑을 5개 정도 낀다. 사이 사이에 열전도를 차단하기 위해 비닐장갑도 낀다. 영락없이 깁스한 손이다. 그 손으로 최대한 감촉을 살려 녹찻잎을 정성들여 덖어야 녹차 맛이 제대로 난다고 한다. 하여간 농촌 일은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여름엔 매실 수확 시기다. 매실을 따서 저장하고 술 담그고 하는 데 한여름을 보낸다. 가을엔 감이 기다리고 있다. 감을 따서 박스에 담아 팔기도 하고 저장도 한다. 겨울엔 곶감 시즌이다. 계절마다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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