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으러, 땅의 의미를 찾으러, 땅의 의미를 알러 농사 지으러 내려온 사람이 이렇게 바쁘게 살 줄은 자신도 몰랐다고 한다.

“사진은 이제 안 찍어요? 언제 찍나요?”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찍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시간을 내서 지난해 생애 두 번째 사진전을 서울 학고재에서 열었다. 올해 10월 8일 세 번째 사진전이 성곡미술관에서 예정돼 있다. 대도시의 기계음과 정신없이 얽매인 일정이 싫어 지리산에 입산한 사람이 지리산에 사는 건지, 서울에 사는 건지 모를 정도로 빡빡하게 산다. 그래도 기계음 듣지 않는 시골이 너무 좋다며 대만족하고 있다.

지리산학교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시인 박남준과 이원규, 이창수 3명이 저녁을 하면서  “이대로 있지 말고 지리산을 위해 뭔가 일을 도모하자”고 한 게 발단이 됐다. 이 중 제일 연장자인 박남준씨가 맡아 추진하라고 했으나 세월아 네월아 하고 일이 되지 않았다. 이창수씨가 바로 나섰다. 그래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 1 천연염색가 신미원씨의 작품. 2 목공예가 김용회씨의 목다구. 3 화가 오치근의 작품.


애초 일을 맡았으나 만만디였던 박남준 시인은 원래 성격 자체가 느긋하다. 원체 구도자적 삶을 추구하는 성격인지라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박남준 시인은 지리산에 입산한 지 만 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주 인근 모악산에서 이미 혼자만의 신선 생활, 아니 산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모악산과의 인연은 1984년, 그가 시인으로 등단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가을 모악산 등산을 갔을 때 길을 잘못 들어 날이 저물도록 헤맸다. 랜턴도 없이 어둑한 길을 저 멀리 보이는 불빛만 보고 걸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당도해서 얼핏 엿보니 산속 무속인의 집이었다. 문득 ‘이런 집에 한두 달 살며 무속인의 삶에 대한 시를 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도 하다 삭막한 도시생활에 스스로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던 차 마침 전주에서 문화센터 관장직을 제의받아 바로 낙향했다. ‘산중에서 산책하듯 삶을 객관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산속에 집을 얻어 출퇴근했다. 꼬박 1년을 산속에서 생활했다. 산중 생활이 그와 둘이 아니고, 유리되지 않았다는 감정이 슬며시 들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면 돈을 쓸 일도 없고, 돈을 쓰지 않으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되지 않나’하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바로 사표를 냈다.

그러던 중에 아는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산속 집 지킬 사람을 찾고 있으니 아는 친구 있으면 소개하라고. 마침 사표 낼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선배랑 같이 그 산속 집을 찾아갔다. “혹시 이 집에 무속인이 살지 않았냐”고 물었다. 10여 년 전 모악산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그 산속 집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 선배는 “맞다”며 “어떻게 알았느냐”고 되물었다. 참 기막힌 인연이었다. 산과의 인연인지, 무속인과의 인연인지, 자신과의 무언의 인연인지.
“내가 이 집에 살겠다”며 눌러앉았다. 그렇게 13년의 세월을 습하고, 춥고, 외진 산중에서 보냈다. 보통 사람이면 견디기 힘든 고독과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벌써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어느 정도 추위냐면, 한겨울 방안에서 양철 지붕 밑으로 물이 슬슬 내려와 언 고드름과 같이 지낼 정도였다. 집 옆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바람이 불면 양철 지붕으로 떨어져 지붕이 내려앉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벽에 바짝 붙어 잠을 청하곤 했다.

겨울엔 그렇다 치고 여름엔 웬 습기가 그렇게 많은지. 장마가 한번 오면 바로 그 다음날은 온 방이 습기로 가득 찼다. 밖에서 말린 빨래를 방에 들여놓으면 다시 습기로 축축해져 냄새까지 쿰쿰하게 났다. “겨울엔 추워서 죽겠고, 여름엔 습해서 죽겠더라”며 그는 그때를 돌이켰다.

한 번은 지인이 그 산속 외딴집으로 찾아왔다. 쌀도 떨어지고 없었다. “잠시 기다려라”해놓고선 ‘쑥국이나 끓여 먹여야겠다’며 부근에 널린 쑥을 캐고 있었다. 갑자기 이름 모를 새가 날아와 울었다. 새의 울음소리가 왜 그리도 처량하게 들리는지. “어~허허허허~~~”라고 울며 ‘쌀도 떨어지고 쑥이나 캐는 처량한 인생’이라며 마치 선명하게 비웃는 듯했다. 갑자기 얼마나 서럽던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내 삶이 얼마나 비참했으면 새까지 나를 비웃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어 여기저기 강연에 나가서 “그 새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고 물었다. 어떤 산중 수행자는 “홀딱 벗고, 홀딱 벗고”로 들린다고 했다. 마치 각자의 현재 삶의 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 새 이름은 검은등뻐꾸기라고 했다.

지인들이 ‘도저히 모악산 생활이 안 되겠다’ 싶어 지리산 자락 악양의 아담한 집을 사서 박남준 이름으로 등기를 했다. 법률사무소에서 박남준을 찾아 전화를 했다.

“여기는 법률사무소인데, 박남준씨 맞죠?”

“맞는데, 내가 뭘 잘못했죠?”

법률사무소에서 황당해 하며 “뭘 잘못한 게 아니고, 서류 찾아 가라고 연락했습니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더란다. 그만큼 본능적으로 ‘법’이란 단어만 나오면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정말 자연 속에 파묻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다. 처음엔 ‘나한테 얘기도 않고 누가 이런 일을 벌였나’싶어 자존심이 상한 그는 모악산에서 더 버텼다.

2003년 늦봄 어느 날 며칠간 계속 비가 내렸다. 며칠 전 말려 놓은 옷을 입으려는 순간 곰팡이 냄새가 확 풍겼다. 밤에 자는데, 곰팡이가 몸에 스멀스멀 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 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입산한 게 2003년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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