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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산 아가씨 [빙벽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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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슬램
l 2009-07-16 23:10
https://blog.aladin.co.kr/722340193/2968810
지난 2월 7, 8일 설악산 토왕성빙폭에서 열린 빙벽등반대회에 참가한 정운화(鄭雲花·39·남양주 체육문화센터 인공암벽 관리요원)씨의 각오는 남달랐다.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가 존경해온 외설악적십자구조대 대원들 앞에서 멋지게 해내고 싶었다.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인 그녀는 젊은 후배들을 물리치고 올해 열린 두 차례의 코리안컵 시리즈 빙벽대회에서 연거푸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1월 10, 11일 판대 아이스파크에서 열린 제5회 노스페이스컵 아이스클라이밍페스티벌에서 우승하고, 설 연휴 다음주에 열린 코오롱스포츠배 청송 주왕산 아이스클라이밍 선수권대회에서는 시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래서 세 번째 코리안컵 시리즈이자 올 시즌 마지막 대회인 제13회 설악산 토왕성폭포 아이스클라이밍 대회마저 우승해 3개 대회를 석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코리안컵 시리즈 종합우승으로 월드컵 참가 꿈 이뤄
20명 안팎이었던 예년과 달리 올해는 무려 41명이나 되는 여성 클라이머가 출전했다. 결선은 그 중 예선을 통과한 12명의 선수가 실력을 겨루는 자리였다. 예선을 2분49초의 기록으로 완등한 정운화씨는 자신이 넘쳤다.
그러나 막상 빙벽에 접어들자 예상과 달랐다. 12개의 블록으로 이루어진 경기 루트는 블록 하나하나가 좁아 그 안에서 바일과 아이젠으로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피크를 박기에 확실한 자리는 블록 테두리를 벗어나 있었고, 발을 조금만 뻗으면 밖으로 나갔다. 잔뜩 움츠린 채 다음 번 블록으로 이동하려면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타격이 필요했다.
세 번째 박스에 진입하는 순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두 번째 박스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끈 탓에 제한시간 5분에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바닥에서 출발한 이후 우측으로 트래버스한 다음 수직 구간을 끝내고 좌측 트래버스 구간에 접어드는 순간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방송소리가 들려왔다.
“등반 마치고 내려서니까 김낙수 심판이 소원 성취했네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서야 우승한 걸 알았어요. 두 번째 박스에서 정말 애먹었어요. 자세가 나오지 않아 긴장도 많이 했고요. 그래서 경기를 마치고 내려와 세터(경기 루트를 내는 사람)들에게 무슨 루트를 이렇게 어렵게 냈냐 한마디 하면서도 고맙다고 했어요. 루트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솔직히 우승할 줄 몰랐어요. 완등한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행복해요. 시어른들 앞에서 목표도 달성했고, 외설악구조대 대원이 되면서 제 입으로 말한 약속도 지켰으니까요.”
▲ 남양주 체육문화센터 인공암벽에서 드라이툴링 등반 중인 정운화씨.<사진=허재성 기자>
정운화씨는 내심 지난해 빙벽대회 코리안컵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해 올 초 월드컵대회에 참가하고 싶었다. 지난해 1월 초와 중순에 열린 용대리 매바위 빙벽대회와 판대 아이스파크에서 연이어 우승하면서 당연히 그 꿈이 이뤄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라이벌인 신윤선씨(노스페이스)가 세 번째 열린 청송대회와 마지막 대회인 토왕폭대회를 휩쓸면서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청송대회에서 9위, 토왕대회에서 5위로 밀려났어요. 앞서 열린 두 대회에서 우승을 하자 자만했던 거예요. 윤선이가 청송대회와 토왕폭대회를 우승하고 나더니 저한테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자만했던 사실을 언니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면서요. 저 역시 그 과정을 그대로 반복했던 거죠. 그래서 올해는 자만심을 갖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월드컵대회에 참가하느라 윤선이가 올 대회에 출전하지 않은 것도 큰 몫을 했고요. 윤선이가 저보다 조금 실력이 낫거든요.(웃음)”
그녀는 도보 산행에 앞서 바위부터 손을 댔다. 1991년 친구 오빠가 회원으로 있는 벽암산악회 야영산행에 참가했다. 등산학교 출신들이 모인 벽암산악회 회원들은 아침에 일어나자 자연스레 어디론가 향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다. 숲을 빠져나가자 어마어마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인수봉이었다. 맨 아래쪽 슬랩을 몇 차례 오르는 것으로 끝났다.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땅을 밟는 순간 재미있다 싶었다. 다음주 또다시 인수봉을 찾았다. 이번에는 기존 B코스였다.
“등반 내내 겁에 질려 있다가 정상에 올라선 다음 하강용 로프를 걸자마자 내가 먼저 내려가겠다고 우겼어요. 저렇게 가느다란 로프를 여러 명이 타고 내려가다 보면 자일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죠. 웃겼어요 정말. 자일 하강 경험도 없으면서도 말이에요. 그렇게 겁이 많이 났는데 막상 땅에 내려서니까 또 올라가고 싶었으니 말이에요.”
산과 사람 좋아 선운산에서 7년 가까이 생활
이렇게 겁 많던 소녀가 이후 바위에 흠뻑 빠져들었고, 1994년부터 2000년 가을까지 무려 7년 가까이 선운산에서 ‘입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교 졸업 후 시작한 서울 생활을 1993년 말로 정리한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갔다. 몇 주는 바닷바람도 맞으면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지만 매주 해오던 암벽 등반을 하지 않으니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러다 찾아간 바위가 선운산 암장이었다.
“하도 산으로 나다니니까 ‘다 큰 처녀가 이 시골에서 어쩌자고 커다란 배낭 메고 쏘다니냐’ ‘시집가려면 선을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부모님께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매주 갔어요. 바위도 바위지만 전주, 군산, 목포 등지에서 오는 산꾼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가 좋았거든요. 그러다 아예 선운산에 뿌리를 내렸어요. 1995년 봄 산으로 들어서다 화사하게 핀 산벚꽃에 홀린 거예요. 이런 꽃밭을 내 정원으로 두고 지내야겠다 마음먹은 거죠. 처녀 때 저 참 엉뚱했죠?”
▲ 제5회 노스페이스컵 아이스클라이밍 페스티벌 결선 경기 모습.
6개월쯤 예상했다. 5.12b급 수준에 올라서면 산에서 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더욱 좋아졌다. 바위는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녀를 빨아들였다. 주말이고 주중이고 가릴 것 없이 찾아오는 클라이머들과 산 얘기를 나누노라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셋집에 이어 빈 농가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모아놓았던 돈이 바닥이 나자 동백호텔에서 일하기도 하고 동백호텔에 찻집을 차려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자전거 대여도 했어요. 운동 삼아 자전거 타고 선운산에서 19km 떨어진 고창 읍내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동네 어른들을 마주치면 힘들게 자전거 타지 말고 내 차 타라며 자전거까지 실어주시는 거예요. 운동하는 건데 말이에요. 말이 찻집이었죠. 새벽에 참당암에 올라 108배에서 500배까지 하고 나면 온몸이 땀에 푹 젖어요. 그러면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아침밥 먹곤 다시 산에 올라가요. 속살바위 같은 곳에서 힘이 싹 빠져나갈 때까지 바위를 타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오후 서너 시쯤 내려와 문을 열었어요. 그것도 모자라 호텔 지하에 실내 암장까지 차려놨었으니, 참. 내가 생각해도 미쳐 있었어요.”
선운산은 지리적 특성상 겨울에도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는 산이지만 새로운 암벽에 대한 욕구는 그녀를 외국의 유명 암장으로 이끌기도 했다.
“좋기만 했던 건 아니에요. 계속 떨어지기만 했을 때는 바위를 쳐다보기도 싫었어요. 그러다가 생각한 대로 등반이 되면 정말 하늘을 날 듯 기뻤고요.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지냈던 거예요. 겨울에는 태국 크라비 해벽에도 가고, 대만 양명산 볼더와 기륭시 해벽에도 갔어요. 크라비는 선운산 떠나기 전까지 세 번 갔나 봐요. 지금 생각해보면 코 찔찔이 선배들이었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어요. 다 저녁 때 자기네들은 멋진 노상 카페에서 편안히 맥주 마시면서 저한테는 백사장에서 달리기 하라고 하기도 했어요. 청악산우회 부근호 형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그땐 왜 그렇게 무섭던지, 눈을 부라리면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좋았으니…….아무래도 전생에 산사람들과 깊은 인연이 있었나 봐요.”
선운산 생활 7년 동안 5.12d급까지 수준을 끌어올리고 속살바위에 ‘솔로에서 듀엣으로’(5.9)를 개척하기도 한 그녀의 선운산 생활은 2002년 가을 한반도를 쑥밭으로 만든 태풍 루사가 앗아갔다.
“황당하더군요. 서울 나들이 갔다 돌아와 보니까 선운산 절길 곳곳엔 거목이 쓰러져 있고, 제가 살던 집은 앞뒤가 뻥 뚫린 거예요. 바람이 치고 지나가면서 벽이 무너져 버렸던 거죠. 다시 집을 수리해 살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선운산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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