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그녀에게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과 같이 하나의 해결책이다. 어머니 품 안에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그냥 안겨 있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그녀는 글이 막힐 때 어머니한테 가끔 전화를 한다. 작업 중 거의 유일한 습관이다. 15세 때 시골을 떠나 어머니와 생이별한 그리움이 배어서일까? 한참 통화를 하다 보면 전혀 다른 얘기를 했음에도 문제가 해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어머니가 해결책이었던 거다.






▲ 북한산이 보이는 평창동 미술관에서 소설가 신경숙씨가 자신의 소설집 <엄마를 부탁해>를 펴들고 앉았다.



그녀에겐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다. 어머니란 말을 써 놓고 더 이상 작품 진행이 안 될 때 ‘엄마’라고 고쳐 놓으니 일사천리로 글이 써졌다고 한다. 엄마가 훨씬 친근한 이미지다. 친근하면 스스럼이 없다. 그녀에겐 엄마가 산이었고, 산이 곧 엄마였던 거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 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행동상으로는 그랬다.

잠시 그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꿈 많던 어린 시절, 형제 많은 집안의 넷째 딸로 성장한 그녀다. 시골에서 오빠 세 명을 대학에 보낼 정도로 부모님은 자식들을 억세게 키웠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편도 아니었다. 형제 많은 집안은 항상 시끌벅적했고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신경숙은 많은 형제들에 치였다. 오빠들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할 때가 많았다. 참을 수밖에 달리 대안도 없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길 원했다. 시골에서는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5세 때 고등학교에 입학하러 서울에 올라왔다. 어린 신경숙이 부모와 언제 다시 같이 지내게 될지 기약도 못하는 생이별의 순간이었다. 실제로 그 이후로 부모와 같이 장기간 생활해본 적이 없다. 결혼 후 보름간 같이 지낸 게 전부다.

상경한 그녀는 오빠들과 같이 어려운 생활을 했다. 가난을 몰랐던 그녀는 서울에서 가난을 알았다. 대도시가 주는 공허함과 비정함을 어린 시절에 느꼈다. 정규 고교 진학도 여의치 않아 산업체 특별학급이 있는 학교로 가야만 했다. 취직하러 온 게 아니라 진학을 위해 왔는데 둘 다 해야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도시의 비정함은 오히려 그녀를 더 강하게 했다.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될 생각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 꿈을 가지게 됐다.






▲ 1. 미 대륙을 기차로 횡단할 때 잠시 휴식을 취하며. 2. 2008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심사장소인 양양 낙산비치호텔 근처 해안가에서 함께 했다. 3. 2006년 중국 여행길에 어느 절에서.



매일 등산하다 요즘은 요가와 병행

“어린 시절 어머니는 책을 읽는 모습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시골의 남자 형제 많은 집안에서 네 번째 여자아이로 자란다는 건 그만큼 뭔가 할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죠. 어머니는 심부름을 시키려고 방문을 열었다가도 책을 읽고 있으면 가만히 문을 닫아 주셨죠. 책 읽기는 오빠들이 빌려온 책부터 시작되었죠. 난독이어서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돕니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책을 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책 속엔 다른 세상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작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하게 된 게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시행착오가 없었으니까.

대학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받았고, 그때는 좋아하는 작품들을 필사해보기도 했죠. 필사하면 그냥 눈으로 읽는 것과는 달라요. 양감이 훨씬 뚜렷하게 감지되고 ‘눈이 내리는군요’라고 써 보면 진짜 눈이 내리는 듯하지요. 꿈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이 있었다기보다는 항상 작가와 책이 곁에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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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올해 최고의 소설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11월 출간된 소설이 5개월 만에 벌써 65만 부 이상 팔렸으며, 베스트셀러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이다.
사회 각계에 ‘모성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저자 신경숙(申京淑·46)씨는 여기저기 낭독회나 강연에 다니느라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 와중에도 북한산이 보이는 평창동 언덕, 그녀의 표현대로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는 조용한 미술관에서 잠시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차분한 복장에 우수에 젖은 듯한 표정은 항상 그대로다. 그녀만의 매력이다.





▲ 미술관 입구에서 포즈를 취한 신경숙씨.



-댁이 이 부근이신가 봐요?

“한 20년 전부터 북한산 자락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평창동과 구기동을 왔다갔다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 전엔 구기동에서 7년 살다가 평창동으로 이사 온 지 4년 됐어요.”

-이곳에서 계속 사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특별한 이유? 그런 건 없어요. 그냥 산이 좋아서, 특히 북한산이 좋아서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작품 구상을 할 때나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땐 어김없이 산에 올라가죠.”

-산은 언제부터 다니셨습니까?

“특별히 먼 산행을 계획해서 떠나거나 그러진 않아요. 구기동, 평창동에서 거의 20년을 살고 있기 때문에 산에 가는 일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20대부터 산행을 시작했고, 그냥 산이 친구가 됐어요. 특히 북한산은요.”

“산이 친구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면 산에 대한 상당한 깊이가 있어야 한다. 통상적으로 친구라 하면 ‘뜻이 맞고 교감이 잘 되는’ 사람을 말하지 않는가. 1~2년 만에 그 정도 교감이 쌓일 순 없다.

-산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산은 겉에서 보는 것하고 들어가서 걸으면서 보는 것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생명을 기르고 있는 품이 넓디넓죠. 물과 나무가 다 있을 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이 있지요. 사계절 동안 산에 다니며 산을 관찰하다 보면 그대로 한 세상이 보여요. 게다가 항상 변하지 않고 거기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산은 든든하고 안심이 돼요.”

이 정도면 산의 깊이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산에 대한 상당한 내공이 쌓인 그녀의 소설에는 알게 모르게 산이 등장한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산에 놀러 가자며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왜 하필 산이었을까? 그녀의 네 번째 장편소설 <바이올렛>의 주인공은 이름 자체가 ‘산이’ 다.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전부 산에서 교감을 얻었다고 했다. 작품을 쓰다가 글이 막힐 땐 어김없이 산에 올라간다. 그녀가 북한산 자락을 떠나지 않는 이유다.


작품 쓰다 막힐 땐 어김없이 산행

-등산이 소설 작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나요?


“마음이 작품 외의 것으로 산만해져 있을 때 산에 가면 정리가 돼요. 스스로를 향한 질타 같은 것도 생기고요. 계곡의 물이 메말라 있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것 같기도 하죠. 산에 다녀오면 나 자신에게는 혹독해지는 것 같은데, 타인에겐 너그러워지는 마음이 생겨나는 걸 느껴요. 그런 부분들이 영향을 끼치겠죠. 실제로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소설에 등장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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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최고봉 매킨리 등정 운명의 날이 밝았다. 1979년 5월 29일 새벽 5시. 고상돈 대장, 박훈규 부대장, 이일교 대원은 등정에 필요한 장비를 모두 챙겨 등정에 나섰다.


세찬 바람에 가시거리는 불과 몇 미터. 강풍과 혹한을 헤치고 마지막 캠프에 오전 11시 도착했다. 정상을 향해 계속 전진한다는 연락을 취했다. 통상 마지막 캠프에 도착해서 1박을 하며 전력을 정비한 뒤 공격에 나섰으나 정상이 눈앞에 보이자 쉬지 않고 전진했다. 그날 출발 14시간 만인 저녁 7시15분 고상돈 대장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 박훈규 이사장과 고 고상돈씨의 부인 이희수씨가 영전에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 책을 바치고 있다.



“여기는 정상이다. 바람이 너무 세고 추워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하산하겠다. 지원해준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그게 그의 생전 마지막 목소리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에베레스트를 한국인 최초로 등정한 지 2년 만에 다시 한국인으로서 첫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등정하며 한국인의 기개를 세계에 알렸던 그가 하산길에 불귀의 객이 될 줄이야.


하산길은 세찬 바람에 도저히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개썰매 원정대를 취재하던 미국 방송기자가 망원경으로 추락 현장을 목격했다. 그가 전하는 목격담이다.


“갑자기 추락하는 물체가 나타났다. 100m, 200m 점점 가속이 붙더니 간혹 세 조각으로 흩어지기도, 다시 뭉쳐지기도 하며 800m 이상을 추락했다. 해발 5,000m 부근의 설벽으로 부딪히며 떨어졌다.”


사람이 아니겠지’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수색에 나섰다. 이들은 밤 12시쯤 세 명의 동양 클라이머가 자일에 엉킨 채 거꾸로 설벽에 걸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입고 있던 옷은 갈기갈기 찢겨졌고, 우모복도 뜯어져 오리털이 모조리 쏟아져 나와 있었다. 착용했던 배낭과 아이젠 등 장비는 추락과정에서 모두 사라졌다. 고 대장은 이미 숨져 있었고, 이일교 대원은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 살아 있었으나 하반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박훈규 부대장 역시 무릎이 탈골된 채 심한 동상 증세를 보였다.





▲ 77에베레스트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영도 전 회장이 고 고상돈씨의 부인 이희수씨에게 감사패를 수여한 후 포옹하고 있다. 오른쪽엔 77에베레스트 대원들이 도열했다.



박훈규 이사장은 1979년 매킨리 등정 동행했다 극적 생환
구조대는 가지고 간 썰매로 우선 생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박훈규 부대장을 후송하고 이일규 대원은 설동에 대피시켰다. 그러나 다시 이일규 대원을 구조하러 올라갔으나 이일규 대원은 이미 숨져 있었다.


매킨리에서 친구 고상돈을 잃고 극적으로 생환한 박훈규 부대장. 그는 고상돈의 고향 친구다. 어릴 적 제주도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다. 산이 좋아 산에 함께 올랐고, 같이 자일을 맸던 운명공동체였다. 운명을 같이 했던 그 친구를 떠나보낸 지 어언 30년. 많이 울기도 했고 회한의 세월을 보냈다. 한때 살아 있는 게 죄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도 매킨리에서 당한 부상 후유증으로 양손가락을 다 잃고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다.


박훈규씨가 (사)고상돈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고향 친구, 저승에 있는 친구 고상돈을 잊지 못해 책도 발간하고 추모제를 지냈다. 이제야 마음의 빚을 조금은 갚은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6월 중 고상돈기념관추진위원회를 발족할 예정이다. 결정된 사항은 아무것도 없다.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 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제주도에서 추진하는 한라산 세계유산탐방관 내에 ‘고상돈관'을 둘 것인지, 따로 독립해서 건립할 것인지를 결정할 방침이다.





▲ (좌)77에베레스트 원정대장이었던 김영도 전 회장이 추모제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우)대산련 이인정 회장이 고상돈 30주기를 맞아 추모하고 있다.



지난 5월 29일 제주 1100고지 고상돈 묘역. 150여 명의 산악인과 관계자들이 모였다. 산악인 고상돈이 이승을 떠난 지 꼭 30년째 되는 날이었다. 고인의 부인 이희수씨, 유복자로 태어나 지금 30세가 된 딸 고현정씨, 대산련 이인정 회장, 제주산악연맹 강만생 회장, 77에베레스트 김영도 대장과 대원들, 고상돈기념사업회 박훈규 이사장 등이 고상돈 30주기를 맞아 제주산악회 주관으로 추모제를 지냈다.


기념사업회 김용삼 상임이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모제엔 1979년 매킨리 등정 당시 동행했지만 다른 조에 있었던 재미교포 주영씨와 미국인 해리 마리나도 자리를 함께 해 분위기를 더욱 숙연하게 했다. 백련사 스님의 독경과 참석자들의 분향으로 식순을 마쳤다. 예전 같으면 주변에서 다과회를 열었으나 그날 저녁 제주 그랜드호텔에서 출판기념회가 예정된 관계로 생략했다.





▲ 이희수씨와 딸 고현정씨가 고 고상돈씨의 영전에 합장 인사하고 있다.



‘고상돈기념관’추진위원회 발족 예정
그날 저녁 6시 제주 그랜드호텔 연회장엔 산악인 고상돈을 잊지 않은 200명에 가까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추모제에 참석했던 인사들 대부분이 자리를 같이 했다. 내빈과 기념사업회 임원에 대한 간단한 소개에 이어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 출판기념회가 시작됐다. 기념사업회 송희창 부이사장이 책이 출판되기까지의 경과를 보고했다. 다음으로 박훈규 이사장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후 산악인 고상돈 악우가 우리 곁을 떠난 지 30년, 산악 후배들은 지금 히말라야 14좌, 세계 7대륙 등정 등 산악 강국으로서의 명성을 전 세계에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뿌리는 고상돈 악우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산악인 고상돈은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오르다 불의의 사고로 떠났지만 쉼 없이 전진하고 도전하는 그의 자세는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충분했습니다.





▲ 5월 29일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 출판기념회가 제주 그랜드호텔에서 산악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업적이 잊혀져가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에베레스트 등정 당시 등반대장이었던 김영도 회장과 대산련, 제주도 민속박물관의 협조로 이 자리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게 된 점을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드립니다.”


김태환 제주지사는 축사에서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 등정 소식을 전하던 감격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지금 어디 있나이까”라며 “하지만 제주의 산사나이 고경만 후배가 30주기 추모기념으로 엊그제 매킨리를 등정했다는 소식은 그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줌과 동시에 출판기념회를 개최해 기쁨을 두 배나 느낀다”고 감격해 마지않았다.





▲ 1979년 매킨리 등정에 미국인으로서 동행했던 해리 마리나도 참석해 소감을 밝혔다.



77에베레스트 등정대장 김영도 전 대산련 회장은 “사람은 죽어 책을 남기는데, 그 책은 자서전과 평전으로 나뉜다”며 “산악인 고상돈은 그와 자일을 함께 맸던 박훈규의 노력으로 평전이 나왔고, 그 책 속에 담겨진 우리 산악인들의 힘을 느낄 수 있다”고 격려했다.


대산련 이인정 회장은 축하말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만들었던 5·16도로, 즉 1100도로를 이젠 ‘고상돈로’로 불러야 한다”며 “제주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전 산악인이 나서서 고상돈로로 명명되기를 기원하며, 그렇게 되면 고상돈은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고 고상돈과 함께 매킨리 등정을 시도했던 미국 산악인 해리 마리나도 30년 만에 추모제에 참석, 소감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와 마지막 산행을 같이 한 당사자로서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산악인 고상돈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를 떠나보낸 사실이 내겐 너무 안타까웠고, 막중한 책임감도 느꼈다. 그를 볼 수 없지만 그는 항상 내 가슴속에 있다. 이 자리에서 고 고상돈의 가족과 산악인들을 만나니 매우 기쁘다. 그리고 환대해준 제주 산악인들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그의 고향 제주에 와서 추모제도 지내고 출판기념회를 하니 마치 그가 다시 살아난 듯한 기분이 든다. 돌아가더라도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 고상돈의 부인 이희수씨도 간단한 소감을 밝혔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박훈규 이사장 이하 모든 분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있었기에 이렇게 결실을 맺을 수 있었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박훈규 이사장님, 이인정 회장님, 김영도 전 회장님 등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전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오기까지 힘쓰신 작가 여러분께도 감사합니다.”


이날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산악인과 참석자들은 고상돈의 도전정신이 점철된 말을 되새기는 것으로 이날 행사를 마무리했다.


“산악인들이여, 열심히 훈련하고, 열심히 훈련하고, 또 열심히 훈련하라. 그 밖에 달리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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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회에서 1년간 전국 누비며 자료 모아
딸 고현정씨 30년 만에 소감 밝힌 글 눈길









고상돈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은 제주도의 예산을 지원받아 1년여의 작업 끝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진창기·강경호·강정효·변태보 등 4명의 편집위원이 대산련과 77에베레스트 원정대원, 어릴 적 친구, 언론사,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 등 고상돈의 흔적이 남아 있을 만한 전국을 누비며 찾아낸 성과를 한 권에 담았다.


박훈규 이사장도 “가족과 산벗들을 비롯한 학창 시절 친구들이 기억을 더듬어 주셨고, 77에베레스트 등반대 김영도 대장님과 대원들이 적극 도와주셨다”며 “정성 어린 도움으로 진정한 영웅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만약 부족한 점이 있다면 애정 어린 충고와 조언을 바탕으로 보완해 나갈 것을 약속 드린다”고 답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짧지만 굵게 살았던 영웅’의 내용으로 고 고상돈씨가 산악인으로 성장하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담았고, 2부는 ‘그리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어릴 적 학교 친구와 동료 산악인, 딸 고현정씨의 글이 담겨 있다. 잠시 고현정씨의 글을 보자.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그리움이나 애틋한 감정들은 솔직히 없는 것 같다. (중략) 아버지라는 단어는 내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굉장히 차가운 사전적 의미로 다가온다. 감정을 자극할 만한 추억이 없기에 그저 희뿌연 연기와 같고, 경험해보지 못한 관계이기에 ‘과연 어떤 것일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기한 단어다.


(중략) 어른이 된 지금 아빠에 대해 가장 크게 느끼게 되는 감정은 한국을 빛낸 위인으로서의 존경스러움이나 자랑스러움보다는 외롭고 고달픈 어린 시절과 혹독하고 고독한 자기 단련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던 한 청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다. (중략)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아빠의 모습은 이제 나에게 있어 인생 최고의 스승이자, 조언자로 존재한다.(후략)”


3부는 ‘나는 이렇게 자랐다’ ‘나는 이렇게 산을 배웠다’ ‘나는 이렇게 정상에 올랐다’ 등의 글을 모은 고상돈의 글모음이다. 부록으로 신문 스크랩과 고상돈 연보, 고상돈기념사업회 소개, 자료 제공 명단 등을 첨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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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전부터 둘째에게 약속해 온 에버랜드를 아침 10시에 출발하였다. 원래 서울랜드를 가려고 했지만 50% 할인되는 카드도 있고 에버랜드는 나도 정말 오랜만이라 한번 가고 싶었다. 

1992년 12월에 아내와 찬바람부는 날 갔었지. 군대가기 전 아내와 같이 살적에 군대가지 몇일을 남겨두고 안양에서 몇번 차를 갈아타고 간 용인 자연농원이라는 상호를 쓸 때였지. 참으로 정말 세월 많이 흘렀다. 그때는 가난하고 군대라는 산을 넘어야하는 안쓰러운 연인들이었는데... 

40분도 안걸려 에버랜드에 도착하였다. 과자를 먹으며 음료를 마시고 재미나게 도착했다. 큰놈은 역시 같이 안간단다. 나도 솔직히 2시간 정도만 놀다가 오려고 간것이 사실이다. 일해야 하니까...  매표소에서 한 사람에 하나의 카드로 하나만 계산이 된단다. 아내카드,내 카드로 자유이용권을 50%에 끊고 아들만 정가를 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잘 해놓았다. 에버랜드,에버랜드 하는덴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른인지라 얼마나 재밌을까 했다. 아들 시중들며 여기 저기 작은 놀이기구를 탔다. 심심한 거 몇개 타다가 재미난거 한 두개 더 타니 이거 재미가 붙는게 아닌가? 

특히 청룡열차 같은 티 익스프레스를 보는 순간 저 것을 꼭 타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40분 기다리는데 어휴 저거 장난이 아니겠는데... 은근히 걱정도 들었다. 결과는 정말 재밌었다. 간이 콩알 만할 정도로 스피드와 재미가 장난이 아니다. 큰 놈이라 꼭 한 번 다시 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여름 섬머축제, 물축제 카니발 또한 여러 행사요원들의 노력에 구경할 만 했다. 소고기국밥, 삼겹살덮밥, 잡채는 정말 이런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답지않게 휼륭할 정도로 맛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음식이 맛없었으면 짜증났을 텐대 기대이상 맛있었다. 

여기저기 놀이기구를 하나둘 더 타고 구경다니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내가 아이들보다 더 좋아한다고.. 내가 한마디했다. 이런데 따라와서 어른이라고 뒷짐만 지고 재미없이 다니는 것 보다 어른이 더 재미나게 놀아야 아이들이 더 즐거워한다고 말했다. 솔직히 내가 더 재미나더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8월달 반절중에 쉬고 놀아보고 휴가까지 여유있게 보내본게 언제였던가? 6일가까이 8월달에 놀았지만 후회가 전혀 들지가 않다. 내 사랑하는 가족과 하는 시간이지 않는가? 3년사이에 이렇게 쉬어보고 놀아본게 얼마만이냐? 오늘까지만 정말 재미나게 놀아보자. 그런 심정이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니 사랑의 감정이 더 일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 사랑하는 가족이 이리 좋아하는데... 행복의 의미와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내일도 열심히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할 힘과 용기를 또 얻은 날이다. 나에겐 꿈과 목표가 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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