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베의 건설자, 카드모스

에우로페, 하르모니아, 세멜레, 디오니소스, 이노, 악타이온, 아가베, 펜타우스...

 

1

그리스 신화를 크게 테베 전설권크레타 전설권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전설권의 시작은, 신이든 인간이든 불문하고 미녀만 보면 그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올림포스의 으뜸 신 제우스(Zeus)’로부터 비롯되었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약 7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티로스(또는 시돈)’라는 도시가 있었다. 티로스는 바다의 으뜸 신 포세이돈(Poseidon)’의 아들 아게노르왕이 통치하는 나라였다. 아게노르 왕에게는 에우로페(Europe)’라는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다. 에우로페는 눈망울이 큰 소녀, 또는 넓은 시각을 가진 여인이라는 뜻이다.

어느 날 에우로페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한 두 개의 커다란 땅덩어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아시아 대륙은 에우로페에게 넌 여기 아시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곳에 있어야 한다.’라고 했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에우로페의 이름으로 불릴 거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땅이 지금의 유럽 대륙이다.

얼마 후, 에우로페가 또래 친구들과 여느 때처럼 바닷가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때였다. 따사로운 오후 햇살이, 물을 튀기기도 하고 조약돌을 줍기도 하면서 뛰노는 소녀들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펼쳐진 해변 위로 잔잔한 파도가 밀려왔다가 한 움큼씩의 모래를 품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 따사로운 풍경 속에 때 묻지 않은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가득가득 넘쳐났다. 누구라도 그 광경을 본다면 함께 어울리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천진난만한 모습이 천상에 있는 난봉꾼, 제우스의 눈에 띄고 말았다. 이때 제우스는 잠시만이라도 질투심이 심한 아내 헤라(Hera)’를 떠올렸어야 했는데, 늘 그랬듯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신 줄을 놓아버린 변신의 제왕 제우스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늠름하고 아름다운 수소로 변신했다. 물에서 헤엄쳐 나온 수소는 그 걸음도 당당하게 소녀들이 있는 해변으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에우로페 쪽으로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제자리에 멈춰서서 이 순진한 처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소의 눈을 가까이서 주의 깊게 본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왕방울만 한 소의 눈만큼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것도 드물다. 다른 친구들은 뿔뿔이 달아났지만, 에우로페만은 도망가지 않고 놀란 눈으로 이 수소의 깊은 눈과 기품있는 모습을 호기심 가득 안고 바라보았다. 수소는 목주름이 굵고 깊게 패어 있었고 보석보다 화려한 뿔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녀를 홀렸을까? 마침내 에우로페는 용기를 내 수소의 등에 올라타려고 했다. 수소도 에우로페가 안전하게 올라탈 수 있도록 두 앞발을 가볍게 구부려 주었다. 에우로페가 탈 없이 등에 오르자 소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돌려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석양을 뒤로하고 바다를 가로질러 멀리 헤엄쳐 갔다. 에우로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가느다란 두 팔로 두꺼운 소의 목을 꼬~옥 껴안았다.

수소의 등에 업힌 에우로페가 바다를 건너는 동안 전에 본 적 없던 신기한 일들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크고 드센 파도가 잠잠해지더니 바다 밑에서는 돌고래를 타고 바다의 요정 네레이드(Nereid)’가 나타났고, 인어 모습을 한 바다의 딸림 신 트리톤(Triton)’이 축복의 나팔을 불었다. 그녀의 나풀거리는 옷은 바닷물에도 젖지 않았고, 그녀의 살갗을 적시는 바닷물도 차갑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제우스의 형이자 아우인 바다의 대장 신 포세이돈이 관장하였다.

에우로페를 태운 수소는 무사히 지중해를 건너 마침내 크레타(Creta) 해안에 상륙했다. 그 후 에우로페는 두 번 다시 사랑하는 아버지와 오빠들이 있는 고향 땅, 티로스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돌아가지 않았다.

크레타섬은, 오래전에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Rhea)’ 여신이 독재자 아버지 크로노스(Kronos)’의 눈을 피해 어린 제우스를 숨겨두었던 섬이었으니 제우스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땅이었다. 제우스가 사랑스러운 에우로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자신의 요람 같은 이 섬에서 꿀처럼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포근하고 아늑한 사랑, 꿈같은 사랑 그거 말이다.

이 사건을 사랑하는 연인들의 야반도주로 볼 것인가, 난봉꾼 제우스에 의한 공주(에우로페) 납치사건으로 볼 것인가와 관련하여 의견이 분분했다. 필자는 전자의 견지에서 이야기를 풀었지만,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엉겁결에 애지중지하던 딸을 잃은 아게노르 왕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딸의 친구들에게 그날 있었던 상황을 전해 들었을 아게노르 왕은 그 수컷 황소의 정체를 강하게 의심했을 것이다.

수소의 등에 올라탄 에우로페가 크레타섬에 별 탈 없이 도착한 이후,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불쌍한 아게노르 왕이 있는 티로스 땅으로 가서 딸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 이야기는 계속된다.

 

2

티로스의 왕이자 에우로페의 아버지인 아게노르는 너무나도 딸을 사랑했기에 딸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것에 크게 상심했다. 딸이 가출한 것인지, 누구로부터 납치당한 것인지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기 전에 하루바삐 딸을 찾아 나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아게노르 왕에게는 딸 에우로페 말고도 장성한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다. 역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아게노르 왕은 아들들에게 불쌍한 여동생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오라고 명했다.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도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다섯 아들 중에 카드모스(Cadmos)’가 가장 용감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는 강인하게 보이는 어두운 갈색의 곱슬머리에 깊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어찌나 선명한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짙은 음영이 생겨 때로는 더 용맹스럽게, 때론 우수에 찬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날씨와 밤낮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내는 그의 외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신뢰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카드모스 역시 다른 형제들처럼 에우로페를 찾아 길을 떠났는데, 그가 킬리키아 해안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수소 한 마리가 카드모스 일행에게 다가오더니 카드모스를 어디론가 이끄는 것이 아닌가. 카드모스는 수소를 범상치 않게 여겨 수소가 이끄는 대로 홀로 발길을 옮겼다. 소가 도착한 곳은 킬리키아산 깊숙한 동굴 입구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동굴 안쪽에는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이 잠을 자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카드모스에게 수소가 입을 열어 내막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올림포스의 제우스다. 그대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다. 저기 보이는 괴물은 튀폰(Typhon)’이라는 놈이다. 저 흉물이 나의 힘줄과 벼락을 가져가 내가 이 모양으로 어렵게 됐다. 내가 빼앗긴 물건을 찾아다오.”

수소는 말을 마치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카드모스는 이거 예삿일이 아니로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바짝 긴장했다. 그 수소가 정말 제우스 신이 맞는다면, 카드모스로서는 가만히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동굴 안에 있는 튀폰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시무시해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상반신은 우락부락한 거인의 모습이나 허리 아래로는 뱀처럼 미끌미끌한 비늘과 체액으로 덮여 있었고 그 위로 그보다 작은 독사들 수십 마리가 칭칭 감겨 있었다. 그의 나무둥치만 한 팔뚝 끝에는 손가락 대신 뱀이 백여 마리나 달려 있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이 괴물의 몸집이 웬만한 집채보다도 커 보였다.

카드모스는 힘으로 대적해서는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그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으뜸 신 제우스도 쩔쩔매고 망신을 당하지 않았는가.

동굴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궁리 끝에, 카드모스는 이게 될까?’라고 의심을 하면서도 밑져야 본전이니 생각한 대로 해보기로 했다. 우선 듣기 좋은 피리 연주로 자신의 선의를 보여주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겼고, 적당한 분위기가 조성되면 그땐 또 다른 묘안이 떠오를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리 연주를 곧잘 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러 차례 찬사를 듣곤 했다. 그게 듣기 좋아 항상 피리를 지니고 다녔는데, 이참에 괴수를 상대로 솜씨를 들려줄 생각인 것이다. 자신의 연주를 듣는 사람마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가지고 있던 적의마저도 얼음 녹듯 녹았었다. 이번에도 그렇게만 된다면.

제우스 신이 나를 찾아온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한번 해보자, 어차피 별다른 대안도 없으니까.’

카드모스는 동굴 입구 근처 괴물은 볼 수 없는 곳에 무기를 내려놓고 목동처럼 피리를 불며 동굴에서 잠을 자고 있던 튀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감미로운 음악 소리에 튀폰은 몸을 뒤척이더니 잠에서 깨어 조용히 눈을 뜨고 아무 소리 없이 카드모스의 연주를 들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감미로운 소리였다. 카드모스가 정성스럽게 피리 연주를 마치자 튀폰이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굴 안이라서 그런지 괴수의 음성은 그 울림이 아주 웅장했다.

네 연주가 참으로 듣기에 좋구나, 나를 위해 더 불어줄 수 있는가? 내 너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 내가 너를 여신과도 짝지어 줄 수 있느니라.”

튀폰의 칭찬에 카드모스는 속으로 한 호흡을 가다듬고서 용기를 내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튀폰의 여러 가지 선물 제안은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 즉흥적으로 생각한 한가지 꾀를 풀어냈다.

제가 피리도 피리지만 수금 연주 실력이라면 수금의 명수 아폴론 신보다 낫답니다. 예전에 아폴론 신과 수금으로 대결을 했는데, 모두가 저의 소리에 더 많은 점수를 주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요? 제 실력에 자존심이 상한 제우스 신이 번개로 제 수금 줄을 잘라버렸지 뭡니까.”

그리고 튼튼한 수금 줄만 있으면 당장 줄을 이어 더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데 아쉽다고 허풍을 떨었다. 튀폰은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 넘어갔다. 수금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 소리가 피리 소리보다 좋다는 말에 빨리 들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가 제우스의 벼락으로도 끊어지지 않을 줄을 줄 터이니 세상에서 제일 강한 수금을 만들어 나를 기쁘게 하라. 더구나 제우스의 벼락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면서 제우스의 힘줄을 카드모스에게 선물로 주었다. 카드모스의 손으로 제우스의 힘줄이 넘어오자 갑자기 마른하늘에 번쩍 벼락이 치면서 우르릉천둥소리가 들렸다. 제우스가 끊어진 자신의 힘줄을 이어붙인 다음 재빨리 튀폰이 감추어둔 벼락을 찾아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우스 신은 되찾은 힘줄과 벼락을 이용해 다시 튀폰과의 일전을 치렀는데, 튀폰에게 한번 당한 경험이 있던 터라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 승리를 쟁취했다. 튀폰은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쫓겨나면서 에트나 화산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천하의 으뜸 신이라는 제우스가 이런 수모를 겪게 되었던 것일까? 다소 복잡한 얘기지만 아주 짤막하고 단순하게 살펴보자.

튀폰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가 오만해진 올림포스 신들을 벌하기 위해 낳은 자식이었다. 가이아의 명령으로 튀폰이 천상의 신들에게 기습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난리 통에 제우스를 제외한 올림포스 열두 신들은 제각각 혼비백산, 동물로 변해 도망치기에 바빴다.

유일하게 제우스만이 자신의 강력한 무기인 번개를 던지고 아다마스의 낫으로 튀폰을 상대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거의 무방비였던 제우스는 튀폰에게 낫을 빼앗기고 힘줄까지 잘리게 되었다. 제우스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동굴에 유폐되었고 제우스의 번개와 힘줄은 괴물이 지키게 되었다. 이때 카드모스가 킬리키아산을 지나가게 되었고 제우스가 수소의 형상을 보내 카드모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암튼 카드모스의 도움으로 거의 죽다 살아나게 된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카드모스를 깊이 기억하게 되었다.

 

3

카드모스는 다시 일행들과 합류하여 누이를 찾아 길을 나섰다. 그가 방향을 잡아 도착한 곳은 헬라스 땅이었다. 남달리 영리했던 그는 그냥 무작정 헤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리스 전역에 영험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아폴론 신전으로 가서 예언의 신 아폴론(Apollo)’이 맡겨놓은 신탁(Oracle)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신전은 세계의 배꼽이자 세상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델포이에 있었으므로 델포이 신전이라고 불렸다. 델포이가 그 이름을 얻고 세계의 배꼽이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상상력 사전에서 인용한다.

 

<어느 날 제우스는 뜬금없이 세계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독수리 두 마리를 동시에 날려 보내고 두 독수리가 어디서 만나는지를 지켜봤다. 두 독수리가 만나는 지점을 옴파로스(Omphalos)’, 즉 세계의 배꼽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양 끝에서 출발한 두 독수리는 파르나소스산 중턱에 있는 한 동굴에서 만났는데, 이 동굴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놓아둔 거대한 뱀이 지키고 있었다. 아폴론은 이 뱀을 죽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신전을 세웠다. 그런 다음 신전을 지킬 사제들을 찾다가 크레타 사람들의 배를 보고 돌고래로 변신하였다. 돌고래로 변한 아폴론은 그들을 신전 쪽으로 이끌었는데, 그때부터 이곳은 델포이로 불리게 되었다.>

 

델포이 신전을 지키는 여사제 퓌티아, 신탁을 전할 때면 대지의 갈라진 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에 취해 몽환적인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그러면 주위의 다른 여사제가 퓌티아의 웅얼거림을 해석해 신이 맡겨놓은 말이라며 찾아온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델포이 신전에 도착한 카드모스가 예를 갖춰 아폴론 신이 자신을 위해 맡겨놓은 신탁이 무엇인지 묻자, 커다란 삼발이 위에 오른 영매 퓌티아는 황홀경에 빠진 듯, 무아지경에 빠진 듯 흐물거리다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누이를 찾지 마라, 찾아봤자 소용없다.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걸어가다 소 떼를 만나거든, 그중에서 옆구리에 반달 모양이 있는 암소를 찾아라, 반달 모양이 있는 암소를 발견하면 발길질을 한번 해주고 짐승이 달리는 대로 쫓아라.”

퓌티아는 이어서 카드모스에게 이르기를, 소가 드러눕는 그 자리에 도시를 세우라고 했다. 신탁은 원래 애매모호 하기로 유명하다. 카드모스와 그 일행은 여동생 에우로페를 찾아야 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그 뜻을 짐작하지도 못한 채 신탁이 일러준 대로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무작정 걷다가 정말로 옆구리에 반달 모양이 있는 암소를 발견했다. 카드모스와 일행은 조심스럽게 암소의 뒤를 따라갔다. 암소는 계속해서 케피소스 강 지류를 건너 파노페 들판까지 나아갔다. 이윽고 발걸음을 멈춘 암소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한바탕 크게 솟아오르더니, 대기를 그 울음소리로 가득 채운 후 비로소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신탁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보자, 카드모스는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카드모스는 대지에 무릎을 꿇고는 그 낯선 땅에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을 바라보며 신에게 받은 큰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4

카드모스는 기진맥진 누운 소를 잡아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자 했다. 특히 포이보스 아폴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제물을 깨끗이 닦을 물과 신에게 올릴 맑은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부하들에게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했다.

근처에는 누구의 손을 탄 흔적이 없는 신성한 숲이 있었고, 숲 깊숙이 풀과 이끼로 뒤덮인 동굴이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동굴 깊숙이 맑디맑은 샘에서 투명한 보석 같은 물이 뽀글뽀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이 동굴에는 크고 사나운 용 한 마리가 이 샘물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용의 눈꺼풀 아래로 이글이글 불타는 눈깔이 숨어 있을 듯했고,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아무리 날카로운 창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두 날개는 접혀 있었지만 펼쳤을 때의 길이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컸다. 무시무시한 대가리 중앙의 뿔과 뾰족하게 솟아난 이빨은 어떤 적이라도 단번에 찢어버릴 것 같았다. 드러나지 않은 앞발의 발톱은 또 얼마나 치명적일지, 웅크리고 누워있는 몸뚱이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운이 공포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티로스의 정예병이었던 카드모스의 부하들은 용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병에 샘물을 담았다. 그러나 그토록 주의를 기울였어도 물동이 속으로 샘물이 들어갈 때 나는 소리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가져간 물동이의 첫 번째가 다 차지도 않았는데 용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이글거리는 눈알이 병사들 쪽으로 향했다. 용이 콧구멍 밖으로 뜨거운 증기를 뿜으면서 한 걸음을 옮기자 동굴 안에서는 확연한 진동이 느껴졌다.

병사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고, 두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용이 비늘 돋은 몸을 잔뜩 사렸다가는 고개를 위로 쳐들며 화염을 쏟아내자 어떤 병사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기도 하고, 어떤 병사는 병장비를 팽개치고 부리나케 동굴 밖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그중 배짱 있는 일부 병사들이 용에 대항하려고 창을 겨누기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병사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동굴 안팎에 널브러져 있는 그들의 팔다리가 현장의 처참함을 말해줄 뿐이었다.

카드모스는 신들에게 제사를 올릴 준비를 끝마치고 물을 뜨러 간 부하들을 기다렸지만, 시간이 되어도 부하들이 돌아오지 않자 손수 그들을 찾아 나섰다. 그에게는 사자 가죽을 붙인 방패가 있었고, 그의 등과 손에는 기다란 창과 날카로운 검이 있었으며, 그의 탄탄한 가슴에는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믿음직스러운 용기와 두둑한 배짱이 있었다.

부하들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숲으로 들어간 카드모스는 동굴 입구에 다다라 즐비한 부하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멀지 않은 곳에서 부하들의 피로 몸뚱이를 붉게 물들인 채 앉아 있는 용도 발견했다. 그제야 전후 사정을 짐작한 카드모스는 분노에 휩싸여 숲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크게 부르짖었다.

, 나의 전우들이여, 제우스 신께 맹세코 내 피와 살과 같았던 그대들의 원수를 반드시 갚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그대들의 뒤를 따르리라. 오라! 이 사악한 괴물아!”

카드모스는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집어 들고서는 사악한 용을 향해 던졌다. 용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능히 성벽도 부술 수 있는 커다란 돌덩이가 용의 대가리를 정확하게 가격했으나 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을 뿜으며 카드모스를 위협했다. 방패를 이용해 불길을 가까스로 막은 카드모스는 오른손으로 투창을 부여잡고 용의 빈틈을 노리며 기회를 엿봤다. 잘못 던지면 용의 비늘이 창을 튕겨낼 것이기 때문에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생각했다. 카드모스는 비늘이 가장 가늘고 성성하게 박혀있는 용의 모가지 뒤쪽을 향해,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모아 있는 힘껏 투창을 던졌다. 투창은 바위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비늘을 꿰뚫고 용의 뒷덜미 깊숙이 들어간 창머리는 용이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픔에 못 이겨 미쳐 날뛰는 이 괴물은 몸뚱이를 비틀어 뒤쪽에 있는 제 상처를 보려고 했다. 그리고는 창자루를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창자루는 동굴 입구 아치에 부딪혀 부러지고 창날은 계속해서 용의 몸속에서 괴물을 괴롭혔다. 괴물의 목은 독기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괴물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불꽃과 연기는 대기를 더럽혔다. 고통으로 울부짖는 용의 괴성이 울창한 숲을 건드리자 놀란 들짐승, 날짐승들이 서로 앞다투어 튀어 올랐다. 괴물은 몸을 잔뜩 웅크리는가 하면 금방 바닥에 나 뒹굴다가 발작처럼 퍼덕거리기도 했다.

이윽고 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괴물은 카드모스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카드모스는 용의 앞에 딱 버티고 서서 눈도 깜빡하지 않고 흉측한 용의 대가리를 향해 투창을 겨누었다. 용이 그 투창을 물어뜯으려 할 찰나, 카드모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괴물의 주둥이 깊숙이 창을 쑤셔 넣었다. 창은 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목구멍 깊고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이내 괴물의 턱주가리는 피거품으로 범벅이 되었다. 괴물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요동치자 주변의 아름드리나무가 부러지고 어떤 것은 뿌리가 통째로 뽑히기도 했다.

마침내 소리와 함께 용이 쓰러지기 무섭게 카드모스는 괴물의 머리에 올라타 아직 감기지 않은 용의 눈알을 내려 보았다. 이미 초점을 잃은 눈알이었다. 카드모스는 날카로운 검을 치켜세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 강력한 한방으로 가늘게 남아 있던 용의 숨통은 마지막 경련을 끝으로 영원히 끊어졌다.

 

5

이렇게 부하들이 모두 희생당한 후에야 카드모스는 용을 죽이고 샘물을 떠서 신들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카드모스는 큰일 났다. 그가 죽인 용은 전쟁 미치광이 아레스(Ares)’ 신의 것이었으니, 아레스가 자신의 신성을 침범한 카드모스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카드모스에게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아테나(Athena)’ 여신이 있었다. 카드모스를 어여삐 여긴 아테나 여신은 사건이 벌어지자 즉시 카드모스에게 화를 입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 주었다. 카드모스는 누가 말하는 것인지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다음과 같은 소리를 또렷하게 들었다.

용의 이빨을 모두 뽑아 서둘러 땅에 심어라! 곡식의 씨앗처럼 생각하고 여기저기 주변 땅에 심어라!”

카드모스가 아테나 여신의 뜻대로 용의 이빨을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뽑아냈다. 거대한 용이었던 만큼 그 이빨의 크기도 장정 주먹만큼이나 컸다. 뽑은 이빨들은 한 달치 곡식이 들어갈 수 있는 자루로 다섯 자루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카드모스는 땀이 식을 틈도 주지 않고, 주변에서 잡히는 대로 꼬챙이를 들어 땅의 고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랑마다 용의 이빨을 심고 흙으로 덮자, 곧이어 땅이 들썩이더니 그곳에서 창과 방패로 무장한 남자들이 쑤~욱 자라났다. 투구와 갑옷까지 제대로 갖춘 전형적인 병사의 모습이었다. 깜짝 놀란 카드모스는 정체 모를 무장 병력의 출연에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카드모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어떤 병사는 창에 찔려 죽고, 다른 병사는 화살에 맞아 죽는 식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죽어버렸다.

얼떨떨한 카드모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다른 자루에 담겨 있던 용의 이빨을 땅에 던지자 아까랑 똑같이 땅이 들썩이고, 이내 아까와 같은 모습의 사내들이 여기저기서 솟아올랐다. 그러나 두 번째 자라난 남자들은 별로 싸우려는 기색이 없었다.

카드모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발 앞에 놓여 있던 주먹만 한 돌 하나를 주워 그들 사이에 던졌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가 상대방이 돌을 던진 것이라고 오해하여 잘잘못을 따지며 또 치고받고 싸우고 죽이기 시작했다. 싸움은 앞선 것보다 더욱 치열했다. 카드모스는 이 인간들이 다섯밖에 남지 않자 큰 소리로 싸움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다섯 중의 하나가 무기를 내려놓고 소리쳤다.

형제들이여, 우리 평화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소리에 나머지 무장 병사들도 제각기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내려놓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화해하더니, 카드모스 앞에 도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준비가 다 되었는지 일제히 왼 무릎을 땅에 꿇고 큰 소리로 충성을 맹세했다. 카드모스는 그제야 신들의 뜻을 이해하고 이들에게 씨앗을 뿌려 생긴 인간이라는 뜻의 스파르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이때, 카드모스와 다섯 명의 생존 병사들이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카드모스가 병사들 사이로 던졌던 돌멩이는 사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누이이자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Eris)’가 남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었는데, 이들이 화해와 충성 맹세를 하는 동안 그 불화의 돌을 게눈 감추듯이 슬쩍 집어가는 손이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정체 모를 그 손은 카드모스가 땅에 뿌리고 남은 용의 이빨도 같이 가져가 버렸다. 돌멩이는 그렇더라도 카드모스는 성물인 용의 이빨만큼은 간수를 잘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어쨌든 그날 이후 스파르토이는 스스로 맹세한 대로 카드모스의 편이 되어, 그를 위해 도시를 건설했다. 카드모스는 이 도시 이름을 테베(Thebes)’라고 부르게 했다. 이 때문에 테베는 카드모스와 그 다섯 명의 생존자가 세운 도시라고 전해진다. 훗날 헤라클레스, 니오베,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로 이어지는 장대한 테베 전설권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6

한편, 전쟁의 신 아레스는 카드모스가 자신의 용을 죽인 것 때문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그러나 아테나 여신이 돌봐주고 있는 카드모스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칫하면 신들 사이에 큰 불화가 생길 것이므로 아레스는 궁리 끝에 아테나 여신도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벌을 주기로 했다. 그래서 카드모스에게 8년간 자신에게 봉사하며 죗값을 치를 것을 명했다. 카드모스는 어쩔 수 없이 이 미치광이 전쟁 신 아레스에게 8년간이나 봉사했다. 그것에 만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레스는 8년이 지난 후 카드모스에게 자신이 아프로디테(Aphrodite)’와 바람을 피워 낳은 딸 하르모니아(Har monia)’를 주어 사위로 삼았다.

올림포스에 속한 불멸의 존재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아내로 주어진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지 싶다. 신들은 모두 신계와 인간계의 이 경사스러운 결합을 축하해 주었는데, 특히 아프로디테의 남편이자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는 자신의 의붓딸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다.

그런데, 하르모니아 출생과정이 재미있다. 알고 보면 신들이나 인간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이므로 바쁘더라도 여기서 살피고 가야겠다. 웅진지식하우스의 신화 깊이 읽기아레스 편을 몇 글자만 바꿔 옮겨 적는다.

<변덕스러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희한하게도 온화하고 재주 좋은 남편 헤파이스토스보다 호전적이고 제멋대로인 나쁜 남자 아레스를 더 좋아했다.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태양신 헬리오스(Helios)’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대담한 연애 행각을 발견하고 헤파이스토스에게 알려주었다.

손재주 좋은 헤파이스토스는 분개하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금속을 가늘게 늘여 촘촘한 그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뒹구는 침상을 찾아 그물을 펴둔 다음, 자신은 렘노스로 며칠간 휴양을 다녀오겠다고 신들 앞에 공표했다.

헤파이스토스가 떠나자마자 아프로디테는 물 만난 고기 마냥 아레스를 불러들였고, 두 신은 침대에 누워 불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몰래 지켜보고 있던 헤파이스토스는 이때다!’ 하면서 올림포스 신들을 대동하고 불쑥 방으로 들어왔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달아나려고 해보았지만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 도저히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신들은 남신, 여신 가릴 것 없이 웃고, 손가락질하고, 저급한 말을 내뱉으며 즐거워했다. 그리하여 아레스는 모든 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때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불륜 행각으로 태어난 여식이 바로 하르모니아였다. 하르모니아의 출생은 그렇다손 쳐도 하르모니아의 결혼 생활은 테베의 왕 카드모스와 더불어 얼핏 보면 행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신들은 이 완벽해 보이는 부부에게 축복만 준 것이 아니었다. 신들의 시기와 질투심은 잊을만하면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7

카드모스가 비록 테베를 건설하고 그 도시국가를 위해 수많은 영웅적 업적을 쌓았지만,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는 말년에 테베 국민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두 부부는 자신들의 고국을 떠나서 엔켈레이스 사람들의 나라로 옮겨가서 살았다. 엔켈레이스 인들은 이 둘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카드모스를 자기네 나라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자식들과 손자들이 당한 불행이 견디기 어려운 무게로 두 사람의 마음을 괴롭혔다. 어느 날 카드모스가 하늘을 올려보며 울적한 표정으로 이렇게 한탄했을 정도였다.

용의 목숨이 신들에게는 이렇게도 중요했단 말인가? 차라리 내가 용이었던 것만 같지 못하도다.”

그런데 이 말을 마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이 카드모스의 입술을 떠나자마자 카드모스의 모습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줄어들어 없어지더니 몸이 가늘게 늘어나는가 하면, 이미 탄력을 잃은 피부에는 비늘이 돋아나 다시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편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하르모니아는, 남편의 운명이 그러할진대 자기 역시 남편과 그 운명을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버지인 아레스 신, 어머니인 아프로디테 신을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빌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해서 용을 닮은 커다란 뱀이 되었다. 지금도 이 둘은 뱀의 몸으로 숲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전에 있었던 일을 잊지 않았는지라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치거나 헤치지 않는다.

다른 결말로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 두 부부는 노년에 엘리시온(Elision)’으로 인도되어 그곳에서 영생을 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엘리시온은 서쪽 끝에 있는 땅으로 정토낙원으로 여겨졌다. 이곳은 신들의 총애를 받던 인간들이 가는 곳인데, 여기에서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땅은 행복의 들’, 혹은 축복받은 자들의 섬이라고 불렸다.

그렇다면 카드모스 부부의 자손들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두 부부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토록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야만 했던 것일까? 지금부터는 카드모스의 자손들이 겪은 불행한 사연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봐야겠다.

 

8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는 아우토노에, 이노, 아가베, 세멜레 등 딸 넷과 아들 폴리도로스를 두었지만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노(Ino)’는 상처한 보이오티아의 왕 아타마스와 결혼했는데, 왕은 구름의 요정이었던 전처 네펠레로부터 얻은 쌍둥이 자식, ‘헬라프릭소스남매를 금쪽같이 아끼고 사랑했다. 이노에게는 그 어린 남매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독자들은 긴장해야겠다, 이거 뭐 시작부터 한눈에 보기에도 참 좋지 않은 구도가 형성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재혼, 순진하고 어린 자식들, 질투심 많은 계모 등등. 심청전, 신데렐라나 백설 공주 이야기 등이 바로 이런 구도 아니던가.

예상했겠지만, 새로운 왕비 이노는 자기가 낳지 않은 자식, 프릭소스와 헬레를 없애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이노 왕비는 나라 안 여자들에게 집안에 저장해 놓은 밀알 씨앗을 남편들 몰래 뜨거운 냄비에 달달 볶으라고 시켰다.

남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싹이 돋아날 수 없는 씨앗으로 농사를 지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도, 아무리 신들에게 경건한 기도를 드려도 계속된 흉작에 먹을 식량이 부족해지자 마침내 인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아타마스 왕은 답을 찾으러 항상 해답이 있는 그곳, 델포이 신전으로 갔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왕비가 신전의 여사제 중 재물욕이 많은 여사제 하나를 이미 매수해 놓은 뒤였다.

여사제는 퓌티아의 말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왕에게 이 나라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모두 왕자와 공주 탓이라고 거짓말로 고했다. 그리고는 자식들을 희생 제물로 삼아 제사를 올려야만 신들이 응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아타마스 왕이 망설이고 있을 때, 이 소식이 나라 곳곳에 퍼지자 백성들도 모두 왕자와 공주를 탓하기 시작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왕도 결국엔 백성들의 원성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남매를 벌하기로 했다.

정해진 날짜가 가까워지자 제단을 쌓는다, 술을 빚는다왕궁 안팎이 소란스러워졌고, 어린 남매도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됐다. 자신들의 짧은 운명을 원망하듯 왕자와 공주는 생모 네펠레를 부르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남매의 어머니 네펠레는 억울하게 죽을 자식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제우스 신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때마침 그 순간 하늘에서 황금빛 양이 내려와 그들을 태우고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제우스 신이 네펠레의 기도에 응답한 것이다.

이렇게 남매는 금양을 타고 도망치다가 누이 헬레는 하늘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어지럼증을 느껴 바다에 떨어져 죽고, 오빠 프릭소스만 무사히 머나먼 겨울왕국 콜키스에 도착하였다.

프릭소스는 금양을 신의 제물로 바친 뒤, 그 가죽은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훗날 영웅 이아손이 다른 동무 영웅들과 함께 쾌속선 아르고호를 타고 찾아 나서게 되는 황금 양털이다. 제우스가 황금 양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 양을 별자리로 만들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양자리가 그것이다.

이노의 음모로 자식들이 곤란을 겪게 된 사실을 알게 된 아타마스 왕은 순간 광기에 빠져 이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레아르크스를 죽였다. 아타마스 왕은 이노와 또 다른 아들도 제 손으로 죽이려 했다. 이노는 왕을 피해 다른 아들 멜리케르테스와 함께 도망가다가 막다른 벼랑에 다다르자 바다로 몸을 던져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자신의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사실을 이노는 몰랐던 것일까, 이 또한 과거를 거울삼아 지금의 경계로 삼을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운명이었다.

 

9

아우토노에의 아들은 사냥 솜씨로 보나 미모로 보나 그리스 최고의 사냥꾼으로 유명한 악타이온(Actaeon)’이었다. 이아손, 아킬레우스 등 그리스 최고의 영웅들을 훈련 시킨 현자 켄타우로스 케이론(Chiron)’이 사냥 기술을 전수했다니 그 실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어느 화창한 날, 이 젊고 아름다운 사냥꾼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처녀신 아르테미스(Artemis)’와 요정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우연히보게 되었다.

그런데 악타이온은 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우연이라도 처녀 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계곡 근처에서 여인들의 말소리나 첨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면 꼭 그것이 여신의 일행이 아니었더라도 얼른 벌어지는 상황을 예상하고 발걸음을 돌렸어야 했다. 그런데 눈치 없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본 것이다.

악타이온은 이 일로 순결의 여신의 미움을 사 수사슴으로 몸 바뀜을 당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평소 사냥할 때 데리고 다니던 사냥개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 죽었다. 케이론은 악타이온의 충성스러운 개들이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자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은 악타이온의 동상을 만들어 개들의 슬픔을 달래 주었다.

세멜레(Semele)’아가베의 사연은 더 기가 막혔다. 세멜레는 제우스가 사랑에 빠진 여인 중 가장 불행한 여인이었다. 헤라의 저주가 그녀뿐 아니라 아들 디오니소스(Dionysos)’를 끈질기게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아가베는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디오니소스의 광신도가 되었고,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테베의 왕위에 있던 아들 펜테우스(Pentheus)’를 사자라고 착각하여 자매들과 함께 자신의 손으로 찢어 죽였다.

맏아들 폴리도로스는 펜테우스 왕의 뒤를 계승하여 테베의 왕이 되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젊은 나이에 일찍 생을 마감하고 만다.

제우스가 등장하고 디오니소스가 출연하는 세멜레와 아가베의 이야기는 이렇게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아쉽다. 조금 더 들어보자.

 

10

제우스는 세멜레의 아름다움에 빠져 주책바가지처럼 밤마다 그녀의 침실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고 지하 세계를 흐르는 강 스틱스(Styx)’에 대고 약속한 것이다. 이거 왠지 불안하다. ‘무엇이든지 해주겠다.’ 같은 절대 약속은 언제나 절대 비극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옛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다. 즉 절대 약속은 파멸의 전주곡이자 비극의 예고편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제우스가 스틱스강에 약속을 다짐했는지 그 내막부터 알아보자. 여기에는 사실 질투의 다른 이름, 헤라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헤라는 제우스의 사랑을 독차지한 세멜레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제까짓 게 무엇이라고 감히 으뜸 여신과 사랑을 두고 경쟁하려 한단 말인가. 헤라는 우쭐해 있을 세멜레를 혼내주기 위해,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인 계략을 꾸몄다.

헤라는 세멜레가 임신 6개월째 되었을 때 세멜레의 늙은 유모 베로에로 둔갑하여 세멜레를 찾아갔다. 헤라는 태연한 척 자애로운 유모의 얼굴로, ‘혹시 밤마다 찾아오는 그이가 제우스가 틀림없나요?’ 하고 여러 차례 물었다. 세멜레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틀림없다고 답했다. 노파로 위장한 헤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숨을 쉬며 이렇게 덧붙였다.

제우스 신이 틀림없다면 어찌 아니 좋겠습니까 만은, 이 늙은이에겐 어쩐지 바로 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부렁을 내뱉는 자들이 많거든요. 한 번 직접 물어보세요. 제우스 신이 틀림없다고 하거든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세요. 천상에서 입는 갑옷을 몸에 두르고 오라고 하세요. 그러면 틀림없는 제우스가 맞는 것이겠죠.”

헤라의 꼬임에 넘어가 귀가 솔깃해진 세멜레는 천상의 신 제우스의 본모습, 헤라 앞에 나타날 때의 그 참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날 밤 자신의 침실로 찾아온 제우스를 보자 세멜레는 우선 부탁이 있다고 속삭였다.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애교를 섞어 졸라댔다. 제우스는 뭔가 평상시의 흐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자신을 기쁘게 하는 세멜레를 위해 뒷일은 따져보지 않고 무슨 부탁이든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 약속을 스틱스강에 걸고 맹세했다. 아뿔싸! 스틱스강에 맹세했다! 세멜레의 입술 밖으로 어떤 말이 새어 나올지 몰랐던 제우스는 조금 두려웠다. 아무리 제우스라고 해도 스틱스강에 한 약속은 절대 취소할 수도 없고 어겨서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세멜레는 자기의 부탁이 무엇인지 수줍게 밝혔다. 세멜레는 낭군에게 제우스 신이 맞거든 신의 본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올림포스산에서 다른 신들과 함께 있을 때의 그 차림을 보여달라고 했다. 제우스는 세멜레가 말을 꺼내기 전에 그 입을 틀어막을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처음에 제우스는 세멜레의 청을 못들을 걸로 하려 했으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틱스강에 두고 한 맹세는 어떤 예외도 허락하지 않으므로 결국, 제우스는 침통한 얼굴로 세멜레의 침상에서 나와 천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세멜레의 침실을 방문하기 위해 잠시 벗어 두었던 천상의 갑옷을 꺼내 입었다. 그러나 그 옛날 타이탄족들과 싸울 때 입었던 무시무시한 갑옷이 아니라, 신들 사이에서는 일상복 수준으로 여겨지는 아주 가벼운 갑옷을 입고 제일 작은 벼락을 하나 쥐었다. 그것이 이 순간 자신이 세멜레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제우스는 약속대로 세멜레에게 신으로서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순간 세멜레는 한마디 작별 인사를 할 새도 없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신의 본모습을, 그것도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참모습을 본 사람은 그 찬란한 광휘를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세멜레의 배 속에 있던 태아가 바로 디오니소스다. 제우스는 헤라가 보지 못하게 불타는 세멜레의 몸속에서 아직 이목구비가 덜 형성된 디오니소스를 재빨리 끄집어내어 자신의 넓적다리에 숨기고 실로 꿰맸다.

그리고 다른 태아들처럼 열 달을 다 채운 후 아기 디오니소스를 세상에 나오게 했다. 제우스는 궁리 끝에 헤라가 찾을 수 없도록 아기 디오니소스를 인간의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불리는 뉘사 계곡의 요정들에게 맡겼다. 이 뉘사의 요정들은 디오니소스가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을 보낼 동안 헤라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맡아 길렀다. 그래서 뉘사의 제우스라는 의미의 디오니소스로 불리는 것이다.

 

11

이렇게 고난 끝에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요정의 사랑을 받으며 대지에 비를 내리고 포도를 여물게 하는 곡식의 신이자 술의 신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헤라는 그마저 용납할 수 없었는지 디오니소스를 미치광이로 만들고는 살던 곳에서 쫓아내어 세계 각지로 떠돌아다니게 했다. 제우스를 아버지로, 인간 세멜레를 어머니로 두었던 젊은 디오니소스는 이렇듯 처음엔 신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광인으로 떠돌던 디오니소스를 구원한 것은 제우스의 어머니이자 디오니소스의 할머니 여신인 레아였다. 디오니소스가 프리기아에 갔을 때 여신 레아가 그의 광기를 치료해 주고는 디오니소스 신앙의 독특한 특징이 되는 비밀 제례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다시 길을 떠난 디오니소스는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땅을 두루 순방하며 사람들에게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양조법을 가르쳤다. 그는 인도에까지 가서 여러 해 동안 여행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또 이렇게 세상을 떠돌면서 제우스로부터 물려받은 신통력 사용법도 터득했다. 그리스로 돌아온 디오니소스는 세상을 주유하며 깨달은 진리로 진짜 신이 되어야겠다며 자신의 신앙을 만들었다.

디오니소스 주변에는 언제나 마이나데스(Mainades)’라고 불리는 여성 숭배자들이 무리를 지어 따라다녔다. 이 여성 숭배자들은 등나무로 만든 지팡이에 솔방울을 달고 이것을 휘두르며 춤과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그들의 신을 찬양하였으나, 신전은 만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나무들과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살았다. 그런 그들에게 약초, 포도, 우유 등의 음식과 술을 준 것은 디오니소스였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이성을 잃는 순간까지도 이 자유를 만끽하고 살았으며, 특히 축제 때에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즐겼다. 그래서 디오니소스 축제는 광란의 축제로도 통한다. 정신 줄을 완전히 놓아버릴 정도로 술을 마시고 흥겹게 노는 축제였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신앙을 그리스 땅 전역에 전파하고자 했으나 그리스의 군주들은 이 새로운 종교가 불러일으킬 무질서와 광란을 꺼렸고 그래서 이 종교의 포교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테베의 왕 펜테우스도 마찬가지였다.

 

12

디오니소스는 광신도 무리를 데리고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드디어 어머니 세멜레의 고향인 테베에 도착했다. , 이거 뭔지 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고향을 오랜 시간 떠나 있다가 돌아오게 되면, 좋은 일보다 좋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이 벌어진다는 것쯤은 저 유명한 오이디푸스 이야기나 오디세우스, 이아손, 테세우스 등의 여러 영웅 이야기에서 이미 우리는 경험한 적이 있다.

각설하고, 디오니소스가 온다는 소식에 테베의 많은 사람, 특히 여성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그 행렬에 가담했다. 이때 테베의 왕은 카드모스의 외손자이자 아가베의 아들인 펜테우스였다. 그러니까 펜테우스와 디오니소스는 이종사촌 간이 되는 셈이었다.

펜테우스는 웬 젊은이가 발목까지 오는 긴 털옷을 걸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여자 무리와 자신의 나라, 테베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펜테우스 왕은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이모 세멜레의 아들이고 자신의 사촌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또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세멜레 이모가 죽을 때 제우스가 살려낸 으뜸 신의 아들이라는 것도 몰랐다. 펜테우스 왕은 오로지 현란한 춤을 추고 시끄러운 노래를 부르며 풍기를 문란케 하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 제식 금지령과 함께 부하들에게 디오니소스를 반드시 잡아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거라, 가서 저 미친 군중을 현혹하고 있는 떠돌이 미치광이를 잡아들여라. 그자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나, 내 이 진상을 밝혀 가짜 신앙을 내치겠노라.”

그런데 그때 그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왕이 죽이려고 하는 자는 새로운 신입니다. 그는 제우스가 생명을 불어넣어 준 세멜레의 아들이며 앞으로 최고 신들 사이에 앉게 되실 분입니다. 명을 거두어야 합니다.”

다름 아닌 테베 최고의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였다. 그의 말에 발끈한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테이레시아스를 환영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의해 전달된 신의 음성을 애써 무시했다.

이윽고 디오니소스를 잡으러 갔던 펜테우스 왕의 부하들이 돌아왔다. 디오니소스는 펜테우스의 부하들에게 붙잡혔지만 저항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디오니소스가 아무런 동요 없이 엷은 웃음을 보이며 순순히 잡히자 오히려 그를 잡은 이들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심지어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책임을 애써 모면하려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순전히 펜테우스 왕의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우리를 원망하지 마시오!”

펜테우스 앞에 끌려간 디오니소스는 지그시 펜테우스 왕을 쳐다보며 자신을 감옥에 가두지 말라고, 감옥에 가두어도 헛수고라고 말했다. 펜테우스가 그 말을 무시하고 부하들을 시켜 디오니소스를 묶자 쇠사슬이 저절로 풀어지고 감옥의 문이 스스로 열려, 디오니소스는 감옥을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펜테우스에게 지금 일어난 모든 일은 자신이 신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 이곳 테베에 자신의 신앙이 전파되는 것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는 펜테우스의 화만 돋을 뿐이었다.

결국, 디오니소스는 펜테우스 왕에게 치명적인 제의를 했다. 그 근처에서 행해지는 여사제들의 의식을 훔쳐보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단 여장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펜테우스는 이 위험한 제안을 거부했어야 했지만, 디오니소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식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 대한 의식이 행해지고 있다는 소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거니와 음흉한 관음증이 발동해서였다. 그러나 펜테우스의 이 위험천만한 호기심은 자신의 비참한 죽음을 예고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3

펜테우스 왕은 체통 머리 없이 여장을 한 채 광란의 의식이 거행되는 키타이론산으로 향했다. 키타이론산은 신도들로 덮여 있었고 신도들이 지르는 소리는 산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펜테우스 왕의 노기에 불을 질렀다.

여인의 모습을 한 펜타우스 왕은 숲을 지나 춤판이 벌어지는 벌판으로 나가,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난교 의식을 지켜봤다. 벌판에서 벌어지는 의식은 그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펜테우스 왕이 바위 뒤에서 훔쳐보던 모습을 수상히 여긴 일단의 마이나데스 무리가 광기에 사로잡힌 동무들 앞으로 펜테우스 왕을 잡아끌었다.

펜테우스 왕의 어머니 아가베, 이모 아우토노에와 이노, 누이도 그곳에 있었다. 이미 광란의 제식에 취해 이성을 잃고 눈이 먼 펜테우스의 어머니 아가베는 불순한 야수가 자신들의 축제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에 격분하여 동아리 무리에게 외쳤다.

저기 사자인지 멧돼지인지 불경한 것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저 거대한 괴물이 이 숲을 망치고 있구나! 이 숲속을 휘젓고 다니는 저 괴물을 잡아야 한다. 오너라, 형제여 자매들아! 내 앞장서서 저 괴물을 무찌르리니 나를 따르라.”

그러고는 제일 앞장서서 펜테우스를 잡으러 나섰다. 그제야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엎드려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성난 군중은 펜테우스 왕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뚱이를 잡아 뜯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이모 아우토노에와 이노는 펜테우스 왕의 양팔을 잡아당겨 그의 몸을 찢어 버렸다. 그때까지도 자신이 앞장서 아들을 죽인 것을 모르는 아가베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겼다, 이겼다! 이 영광을 우리의 신 디오니소스와 우리의 신앙에 바친다. 경배하고 찬양하라!”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죽인 괴물이 테베의 왕이자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가베는 경악했다. 마이나데스가 춤과 노래로 그녀를 달래 주었지만,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아버지 카드모스, 어머니 하르모니아와 함께 테베를 떠나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카드모스는 엔켈레이스 땅의 왕이 되었다가 하르모니아와 함께 용을 닮은 커다란 뱀으로 변했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테베를 건설한 카드모스와 그의 자손들에 관한 비극적인 이야기의 전모이다.

 

14

카드모스는 페르세우스(Perseus)’와 더불어 거의 최초 세대의 영웅이다. 후세의 다른 영웅들과 달리 페르세우스처럼 조강지처와 마지막까지 함께 해 그의 이야기에는 막장 드라마같은 자극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효성이 지극하고 충성스러웠으며, 부하들을 위할 줄 아는 훌륭한 리더였지만 신들에 의해 많은 풍파를 겪었다. 비록 제우스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제우스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영웅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다른 신들로부터 질투를 샀던 것이었을까.

카드모스는 그리스에 페니키아 알파벳을 전해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알파벳의 첫 글자 ‘A’는 그리스어의 알파’, 페니키아어로는 알레프에 해당되는데, 이 글자는 다름 아닌 소의 머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쯤에서 모두 궁금할 것이다. 제우스와 함께 크레타섬에 도착한 카드모스의 눈망울이 큰 여동생, 에우로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테베 전설권못지않게 크고 장대한, 오히려 그 이상인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 형성 과정이니, 채비를 다시 하고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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