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 원정대장, 이아손

이노, 황금 모피, 아르고 원정대, 피네우스, 메데이아...

 

1

옛날이야기이다.

테살리아지역 보이오티아에 아타마스(Athamas)’네펠레(Nephele)’라고 하는 왕과 왕비가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아들, 딸 남매가 있었다. 그러나 왕비 네펠레는 남매만 남겨놓고 일찍 죽고 말았다. 아타마스 왕은 오래지 않아 이노(Ino)’를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여러분은 테베를 세운 카드모스(Cadmos)’와 조화의 여신 하르모니아(Harmonia)’의 딸 이노를 기억할 것이다. 맞다, 바로 그 이노이다.

아타마스 왕은 구름의 요정이었던 전처 네펠레로부터 얻은 헬라프릭소스남매를 금쪽같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이노에게는 그 어린 남매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왕비 이노는 자기가 낳지 않은 자식, 프릭소스와 헬레를 없애기 위해 무시무시한 계략을 꾸몄다. 그들 남매가 후일에 자기가 낳은 자식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노 왕비는 왕궁의 시녀들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어 여염집 아낙들에게 보냈다. 명을 받은 시녀들은 여자들에게 각자의 집안에 저장해 놓은 밀알 씨앗을 남편들 몰래 달달 볶아 놓으라고 시켰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농부들은 싹이 돋아날 수 없는 씨앗으로 농사를 지었으니, 아무리 정성을 다해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도, 아무리 신들에게 경건한 기도를 드려도 볶은 씨앗에서 싹이 날 리가 없었다. 몇 해 동안 계속된 흉작이 이어지자 급기야 나라 안의 인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우환의 까닭을 알 수 없었던 아타마스 왕은 답답한 마음으로 언제나 지침이 있는 그곳, 델포이 신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노 왕비가 이를 미리 알고 선수를 쳤다. 사람을 시켜 재물욕이 많은 여사제 하나를 매수해서 왕을 속일 작정이었다.

델포이 신전에 도착한 황이 절차대로 신의 뜻을 묻자, 여사제는 영매 퓌티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이 나라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모두 왕자와 공주 탓이라고 거짓말로 고했다.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야 할 사랑을 네 피붙이에게만 주고 있으니 어느 신이 좋아하겠는가? 쯧쯧.”

그러면서 자식들을 희생 제물로 삼아 제사를 올려야만 신들이 응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청천벽력같은 말을 떠안고 돌아온 아타마스 왕은 의아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 신을 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납득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민도 잠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 이 소식이 나라 곳곳에 퍼지자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도 모두 왕자와 공주를 탓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원성이 폭동으로 번질 조짐이 보이자, 아타마스 왕은 눈물을 머금고 왕으로서의 책무를 우선하여 자식들을 희생시키기로 했다.

정해진 운명의 제사 날짜가 가까워지자 제단을 쌓는다, 술을 빚는다왕궁 안팎이 소란스러워졌고,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남매도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로 알게 됐다. 자신들의 짧은 운명을 원망하듯 왕자와 공주는 돌아가신 어머니 네펠레를 부르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남매의 어머니 네펠레는 죽어서도, 억울하게 죽게 된 자식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제우스(Zeus)’ 신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때마침 그 순간 하늘의 흰 구름 몇 점이 하나로 모이더니 예술가가 작품을 빚듯 모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곧 구름은 금빛을 발하면서 날개 달린 황금빛 양이 되어 남매 앞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제우스 신이 구름의 요정 네펠레의 기도에 응답한 것이다. 네펠레는 황금양의 등위로 아들과 딸이 차례대로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숨과 함께 위대한 제우스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금양은 남매를 등에 태운 채 하늘로 날아올라 진로를 동쪽으로 잡았다. 금양은 남매의 눈높이로 구름 무리가 지나쳐 갈 정도의 고도로 날아 어느덧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가로놓인 해협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태어나 처음 높은 하늘에서 아찔한 아래쪽 풍경을 바라보던 헬레가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헬라가 엉겁결에 한 손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대는 순간 그녀는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오빠 프릭소스는 자신도 무섭고 정신이 없었던 터라 뒤쪽에 있는 누이가 떨어진 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헬레가 황금 양털을 부여잡은 손으로 오빠의 허리를 둘러쳤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아무튼 그 뒤로 이 바다는 헬레의 바다라는 뜻의 헬레스폰토스(Hellespontos)’라고 불렸다. 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이다.

금양은 계속해서 하늘을 날아 드디어 흑해 동해안에 있던 겨울왕국 콜키스라는 나라에 당도했다. 금양은 여기에다 네펠레의 아들 프릭소스를 내려놓았다. 왕자는 황금양의 등에서 내려온 뒤에야 뒤에 있어야 할 누이가 없는 것을 알고 슬피 울었다.

이때 콜키스는 아이에테스라는 욕심 많은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왕은 변방을 지키던 장군으로부터 프릭소스의 착륙 사실을 보고받고 처음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국의 왕자가 타고 왔다는 황금양을 보자 얼굴빛을 확 바꾸어 왕자를 따뜻하게 대접했다.

프릭소스는 금양을 산 제물로 제우스 신에게 올리고, 금양의 털은 벗겨 아이에테스 왕에게 바치며 자신을 거두어 줄 것을 청했다. 왕은 겉으로라도 사양한다는 말은 일절 없이 마치 빌려주었던 제 물건 돌려받듯이 넙죽 받았다. 왕은 그 황금 모피를 귀하게 여겨 전쟁의 신 아레스(Ares)’에게 봉헌한 숲속에 두고 잠들지 않는 용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이국의 왕자 프릭소스를 첫째 딸 칼키오페와 짝을 지어 주고 사위로 삼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제우스 신은 황금양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 양을 별자리로 만들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양자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프릭소스의 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에테스 왕의 사위가 된 후 여러 해가 흘러 장인이 신탁을 받았는데, 내용인즉슨 이방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다소 모골이 송연한 것이었다. 당시 콜키스 나라의 이방인은 프릭소스 뿐이었으므로 왕은 신탁을 피하려고 사위를 살해하고, 자신의 맏딸을 과부로 만들었다. 그때 프릭소스와 칼키오페 공주는 네 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주인공 이아손이 태어나기 약 50년 전, 그가 아르고 원정대를 이끌고 콜키스를 향해 출항하기 약 70년 전의 일이다.

 

2

테살리아에는 아타마스 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올코스라는 또 하나의 도시국가가 있었다. 이 항구도시는 아타마스 왕의 가까운 친척 아이손(Aeson)’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아이손 왕은 젊어서도 영웅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벌써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약했다. 게다가 그다지 현명하지도 못해서 나라 살림 꾸려나가기가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힘이 없고 말도 앞뒤가 정연하지 못하니 신하들에게도 영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 신하들이 왕 생각하기가 지나가는 똥개보다 하등 나은 것이 없었다. 왕은 왕 자리가 하루하루 힘겨웠다.

다행히도 늦둥이 아들 이아손(Iason)’은 자신과 달리 영특한 면이 있어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으나,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던 차에 젊고 야심 많은 이복동생 펠리아스(Pelias)’는 서서히 야망을 드러내며 중신들의 마음을 얻고 있어 왕과 왕비는 연일 앉은 자리가 편안하지 않았다.

왕은 늙어 힘이 없고, 왕자는 너무 어리고, 야심에 찬 왕의 이복 아우가 호시탐탐 왕좌를 노린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보았던, 우리 역사 단종애사에서 보았던, 좋지 않은 전형적인 그림이다. 폭풍전야가 이럴 것이다. 숨 쉬지 않는 바위와 말없이 서 있는 건물도 긴장감에 숨죽이고 있는 상황,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들고 있는 바로 그런 기분.

마침내 중신들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척, 왕의 결단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망설이다가, ‘왕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아우 펠리아스에게 잠정적으로 왕위를 물렸다. 참 지켜지기 어려운, 하나 마나 한 약속이었다. 평화로운 왕위계승을 가장한 실질적인 찬탈이었다. 찬탈은 평화를 가장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피바람을 일으키는 법, 늙은 부왕 부부는 어린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다른 형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한적한 마을로 쫓겨나기 직전에 아이손은 어린 아들 이아손을 아무도 모르게 빼돌렸다. 이올코스에다 두면 아무래도 아우 펠리아스가 해코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손은 자신을 오랫동안 옆에서 보필했던 늙고 충실한 부하의 손에 어린 이아손을 맡기며 당부를 전했다.

이 아이의 운명을 자네 손에 맡기네. 펠리온산으로 가서 현자 케이론(Chiron)’을 만나거든, 사정 이야기를 고하고 이 아이가 스스로 구실 할 수 있을 때까지만 돌봐주십사 부탁드리게나.”

케이론은 허리 위로는 사람이나 허리 아래로는 말인 켄타우로스(Kentauros)’ 족이다. 그는 혹독한 교육법으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스승이었다. 악타이온, 아킬레우스,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도 케이론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이아손도 펠리온산에 숨어 살면서 현명한 케이론으로부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다. 활 당기는 법, 검 쓰는 법, 병 고치는 법, 수금 타는 법, 배 짓는 법, 길보는 법, 쟁기질하는 법에다 웅변술까지 배울 수 있는 것은 죄다 배웠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펠리온산 최고의 무림고수로부터 피땀 나는 수련을 받은 소년 이아손은 어느 순간부터 가슴 한쪽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복수의 불꽃이었다. 그 칼날은 따로 갈지 않았어도 날카로웠고, 점점 더 예리해졌다.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3

스스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세월이 흘러 어느덧 열다섯 살이 된 이아손은 스승 케이론에게 하산을 허가해 줄 것을 청했다. 케이론은 늠름한 제자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10년 전, 어린 이아손을 맡을 때의 상황을 알아듣게 다 이야기한 후,

마지막으로 너에게 두 가지만 당부하겠다. 첫째, 한 번 한 약속은 그것이 누구와의 약속이든 반드시 지키도록 해라. 그리고 너를 보살펴 주시는 신들에게 영광 돌리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고, 제자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이아손은 스승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고 숙부에게 왕위를 요구하러 이올코스 땅으로 향했다. 눈빛은 비장하였고 걸음은 당당하였다. 그런데 펠리온산에서 내려와 이올코스로 가려면 자그마한 강을 하나 건너야 했다. 이 강은 평상시에는 물이 많지 않은 강이었음에도 그날은 좀 달랐다.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이 부분이 잘 서술되어 있어 몇 글자만 바꾸고 덜어 그대로 옮긴다.

 

<이아손은 물살이 약하고 깊은 곳보다는 물살이 강하더라도 깊지 않은 여울목을 찾으려고 강 아래위를 둘러보았다. 이아손이 가까스로 찾아낸 여울목에는 먼저 온 듯한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여울목을 찾고도 물살이 세어 건널 마음을 내지 못하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노파는 이아손에게 자신을 강너머로 건너게 해줄 것을 청했다.

이아손은 등에 메고 있던 창 두 자루를 벗겨 한 손에 모아 쥐고 노파 앞으로 다가가 등을 돌려대었다. 노파는 아무 말 없이 이아손의 잔등으로 올라왔다. 이렇게 이아손은 노파를 등에 업고 여울목으로 들어서는데 강은 여울목인데도 깊어서 한 발 들여놓자 무릎이 잠기고 두 발 들여놓자 엉덩이까지 찼다.

할머니는 입고 있던 옷자락이 물에 젖자 두 팔로 이아손의 목을 감고 위로 자꾸만 기어올랐다. 이아손은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꾹 참고 건너 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에 가벼웠던 할머니가 자꾸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폭도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이, 마치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놈아! 왜 이리 꾸물거리는 게냐! 옷이 다 젖는다, 다 젖어.”

노파의 갑작스러운 호통 때문이었을까, 그 순간 이아손은 바위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비틀거리다가 미끄러운 돌을 밟았고,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가죽신 한 짝을 물살에 떠내려 보내고 말았다. 가까스로 강 건너편 언덕에 닿은 이아손은 노파를 내려놓은 다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파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괴이하다 여기고 발아래를 바라보는데 가죽신이 한쪽에 맨발이 한족이었다.>

 

이 노파는 결혼과 가정의 수호여신 헤라(Hera)’가 변장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이올코스 왕 펠리아스가 헤라의 신전에 경의를 표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남편 있는 여인을 강압적으로 취해 배다른 자식을 여럿 낳은 것이 여신의 화를 돋게 했다. 그래서 노파의 모습으로 변장해 이 못된 가정파괴범을 혼내 줄 영웅으로 이아손을 낙점하고 일종의 시험을 치른 것이었다. 헤라 여신이 보기에 이아손은 완력과 인내도 좋을뿐더러 겸손하고 믿음직스러운 감이 있었다. 이때부터 이아손은 헤라 여신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게 된다.

이아손이 이올코스로 들어가자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한쪽 신밖에 신지 않은 청년을 보고는 수군거렸다. 가죽신을 한 짝만 신은 청년,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긴 청년,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이 청년을 보고는 다들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까닭을 알 길 없는 이아손은 저잣거리를 오가는 행인에게 물었다.

어찌 사람들이 저를 보고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지요?”

당신이 가죽신을 한 짝만 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 어때서요? 강을 건너다 잃어버린 것뿐인데요.”

펠리아스 왕이 얼마 전에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 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신탁이 참 요상했지요. ‘모노산달로스(Monosandalos)가 내려와서 이올코스의 왕이 된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지금 신을 한 짝만 신고 있지 않소.”

모노산달로스한쪽 신만 신은 사나이라는 뜻이다. 그제야 이아손은 강을 건널 때 자신이 업어 같이 건너게 해드렸던 노파가 천상의 신중 한 분이었음을 깨닫고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임무를 확실하게 정했다.

 

4

이올코스에서 이아손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디에 살고 계신 지부터 수소문했다. 아비 어미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계실지 궁금했다. 혹시 돌아가셨다면? 다행히도 두 분은 지금은 왕이 된 배다른 아우의 관심 밖에서 생존해 계셨다. 주름살 깊게 패인 늙은 부모와 젊은 아들의 10년 만의 해후, 어느 용사와 견주어도 듬직한 아들을 본 부부는 한동안 말없이 눈물만 바다를 이루었다.

세 식구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당장 현실적인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맡겨두었던 왕좌를 되찾는 문제였다. 그러나 펠리아스 왕이 순순히 넘겨줄 왕좌라면 처음부터 가져가지도 않았을 터, 왕가에 거센 태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를 일이니 문제는 큰 문제였다.

이아손은 늙은 부모를 좋은 말로 안정시키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우선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왕궁으로 숙부를 찾아가기에 앞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새 신발을 장만하는 일이었다. 신탁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을 숙부를 자극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멀쩡한 가죽신으로 바꾸어 신은 이아손은 이올코스 궁전으로 들어가 숙부 펠리아스 왕의 알현을 청하였다.

펠리아스는 이아손을 보자 가볍게 놀란 표정을 두꺼운 낯으로 가리고 태연하게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서 온 자이고, 짐을 찾아온 까닭은 무엇인가?”

저는 펠리온산에서 얼마 전에 내려온 이올코스의 왕자, 이아손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이 나라 왕을 지내신 아이손 왕이시고 어머니는 이 나라 왕비이셨던 알키메데(Alkimede)’이십니다, 숙부.”

펠리아스 왕은 옛날 아이손 형님과 약속했던 것을 들먹이며, 적법한 왕위 계승자, 이아손이 나타난 것을 크게 반기는 뜻에서 나라가 시끄러울 만큼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아손은 숙부가 의외로 쉽게 자신을 조카로 인정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숙부 펠리아스가 악랄하고 교활한 인간임을 알았던 이아손이 그 검은 속내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그 위험의 모습과 크기를 섣불리 가늠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예상 밖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숙부와 조카가 상봉한 지 엿새째 되는 날, 펠리아스 왕이 조카 아이손을 불러 잔뜩 뜸을 들였다가 준비된 말문을 열었다.

조카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니 프릭소스의 황금 모피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다. 우리와 가까운 친척이 되는 프릭소스는 차가운 콜키스 땅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이 나라에 있었더라면 나라의 보물이 되고 남았을 황금 모피는 지금 머나먼 콜키스 땅에 있다. 어떠냐? 콜키스 땅으로 가서 황금 모피와 프릭소스의 유해를 수습해 오지 않겠느냐? 나는 이미 늙어 이룰 수 없는 꿈을 네가 이루고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어떠하냐?”

펠리아스로서는 가겠다고 해도 좋고 못 가겠다고 해도 좋을 양날의 검 같은 제안이었다. 머나먼 콜키스. 황금 모피가 있다는 콜키스 땅은 그리스인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땅이다. 그리스인들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땅이다. 적대적인 바다 흑해 너머, 아득히 먼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사실만 어렴풋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던 미지의 땅이다. 어쩌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지도 모르는 땅이다.

만일 이아손에게 그럴 힘과 용기가 있어서 콜키스로 떠나겠다고 한다면 펠리아스는 제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아손을 죽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험한 바다, 야만의 땅,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 그리고 콜키스 왕이 황금 모피를 빼앗으러 온 이아손에게 여기 있소하며 쉽사리 넘겨줄 리도 없지 않은가. 그건 고사하고 단칼에 목을 베기가 쉽다. 더군다나 일설에 따르면 무시무시한 용이 지키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이아손에게 그럴 힘과 용기가 없어서 콜키스로 떠나지 못하겠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펠리아스는, 이아손이 비록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하나 힘도 없고 용기도 없는 풋내기를 위해 왕의 자리를 비워 줄 그렇게 도리에 밝은 위인이 아니었다. 숙부 펠리아스는 이런 흑심은 두꺼운 낯으로 가리고 짐짓 위엄을 갖추고 제안을 한 것이었다.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여 마음의 고삐를 풀게 한 다음에 불리한 조건을 달것임을 짐작하고 있던 이아손은 다음과 같은 말을 홀연히 남기고 더 이상의 군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마땅히 가서 찾아와야지요. 100일 말미를 주시면 새 배를 짓고 뱃사람을 모아 떠나겠습니다.”

 

5

숙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이아손은 곧 원정 준비에 들어갔다. 이아손은 당시 배 짓는 기술로서는 첫째가는 아르고스(Argos)’에게 명하여 자그마치 100명 가까이나 태울 수 있는 범선을 짓게 했다. 당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크기였다.

아르고스는, 노잡이가 노를 놓쳐도 노가 물결에 떠내려가는 일이 없도록 노의 손잡이와 노잡이의 자리를 가죽끈으로 연결하는 당시로선 참으로 획기적인 방법을 겨우 열두 살 때 고안해낸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는 방향잡이 키로는 배의 방향을 바꿀 때 힘이 많이 든다고 해서 바퀴처럼 생긴 키 손잡이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즈음에서는 바람의 방향이 바뀔 경우, 돛대 위에서 저절로 돌아 각도를 바꾸는 돛을 만들어 온 그리스 뱃사람들을 놀라게 한 천재였다.

아르고스가 배를 짓고 있는 동안 이아손은 모험을 좋아하는 온 그리스 땅의 젊은이들을 이 여행에 초청하느라 바빴다. 더러는 인편으로, 더러는 직접 찾아다니며 멀고 험난한 이 원정에 함께 할 용사들을 불러 모았다. 대략 헤아려 보니 그 수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젊은 용사들 대부분은 후일 그리스의 영웅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으니, 여기에 끼지 못하면 가짜 영웅 소리를 들을 판이었다.

본격적인 항해에 나서기 전에 우선 이 원정대에 포함된 영웅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근래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세계 극장가의 흥행사를 새로 썼던 어벤져스시리즈에 나오는 수퍼 히어로만큼이나 화려하다.

원정대원 중 가장 유명한 영웅은 뭐니 뭐니해도 헤라클레스(Herakles)’였다. 원정 기간 중 그의 옆에는 항상 휠라스(Hylas)’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중도에 대원 노릇을 그만두고 그리스로 돌아가 버렸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당대 최고의 명가수 오르페우스(Orpheus)’도 대원이었다. ‘아폴론(Apollo)’ 신의 축복을 받은 그의 수금 연주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바위가 감동해 눈물을 흘렸고, 나무는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구부렸으며, 꽃은 때가 아닌데도 피어나고 강물이 선율에 따라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디오스쿠로이(Dioskouroi)’로도 알려진 카스토르(Castor)’폴리데우케스(Polydeuces)’도 빼놓을 수 없. 카스트로는 거친 말을 길들이는 솜씨가 좋았고, 폴리데우케스는 권투를 썩 잘했는데 아르고 원정에서도 그의 권투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둘은 어찌나 우애가 좋았던지 무슨 일을 하건 꼭 함께했다.

이밖에도 칼리돈의 왕자 멜레아그로스(Meleagros)’, 활쏘기와 달리기로 알려진 여장부 아탈란타(Atalanta)’,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아버지로 유명한 펠레우스(Peleus)’, 테세우스와 함께 지하 세계로 내려가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내놓으라고 했던 떠돌이 영웅 페이리토오스(Peiritoos)’, 훌륭한 인품으로 트로이 전쟁에도 참전했던 젊은 시절의 네스토르(Nestor)’ 50여 명에 이르는 영웅들이 참여했다.

테세우스(Theseus)’가 원정에 참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배척하기로 하겠다. 여러분은 앞으로 테세우스가 아버지의 신표를 가지고 아이게우스 왕을 찾아갔던 일화를 보게 될 것이다. 이때 독약을 탄 술을 준비하고 테세우스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계모 메데이아(Medeia)’였다. 그때 테세우스는 메데이아를 처음 대하듯 했다. 그가 아르고 원정대원이었다면 이아손의 아내가 되었던 메데이아를 알아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말이다. 그래도 자꾸 억지를 부린다면, 에이 아무리 신화래도 이건 좀 심하다.

 

6

이아손의 부름을 받고 당대 헬라스의 영웅호걸들이 파가사이로 모여든 것은 아르고스가 건조한 배의 이물 앞 대가리에다 말하는 헤라 여신상을 세운 직후였다. 아르고스는 모여든 장수들의 면면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수식 전날 오르페우스는 아름다운 선율로 배 지은 사람 아르고스의 이름을 따 이 배의 이름을 아르고(Argo)’로 명명하였다. 또 이아손은 원정대원들이 둘러선 자리에서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를 지목하며 이 원정의 대장으로 추천했으나, 헤라클레스가 극구 사양하며 이아손이 원정대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다른 영웅들은 헤라클레스의 말을 옳게 여겨, 이 문제는 그대로 결론이 났다.

대장으로 추대된 이아손은 신들에게 성대한 제를 올렸다. 자신의 수호여신인 헤라에게 특별히 더 신경 썼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원정 중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고, 동료들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로 서로 반목하는 일이 없도록 기원했다. 황금 양털을 무사히 가지고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안녕도 기원하였다. 그런 후 함께 한 영웅들과 음복을 하며 먹고 마시는데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긴 항해를 위한 마지막 잔치를 거나하게 벌였다.

해가 다시 중천에 이르러 드디어 진수식 준비에 들어갔다. 아르고선이 진수될 때 배 위에 올라간 사람은 대장 이아손, 키잡이 티퓌스, 그리고 수금을 품에 안은 소리꾼 오르페우스뿐이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일렬횡대로 놓인 통나무 위로 아르고선을 밀어야 했기 때문이다. 배가 바다에 몸을 담그자, 이윽고 대원들이 하나씩 아르고선에 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헤라클레스가 올랐다. 뱃길 잘 보는 아르고스 사람 나우폴리오스가 돛줄을 풀자 돛이 오르면서 바람을 한아름 안았다.

이윽고 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해안의 암초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바다로 나아간 아르고호는 곧 동력을 풀가동하여 쾌속으로 모험을 향해, 미지를 향해 힘차게 항해를 시작했다. 배 앞머리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오르페우스의 수금 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7

아르고 원정대는 테살리아 해안을 떠나 여인들의 섬 렘노스에서 기항하고, 키지코스 왕국에서 몹쓸 경험을 한 후, 뮈시아에 도착하였다.

오랜 항해 중에 식량도 떨어지고 피로가 많이 쌓인 대원들이 상륙한 곳은 강도 없고 시내도 없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대원들이 먹을 물을 얻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가 샘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제각기 물동이를 하나씩 들고 샘을 찾아 산으로 올라갔는데, 다른 대원은 모두 물을 길어 내려왔는데도 미소년 휠라스만은 소식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헤라클레스와 함께하면서 영웅의 시중을 들던 조각과도 같은 소년이었다.

휠라스와 함께 올라갔던 대원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휠라스는 물동이를 샘가에 놓고 물끄러미 샘물을 내려다보고 있습디다. 그런데 샘 안에서 희고 고운 손이 하나 나오더니 그의 손과 팔을 잡더군요. 그렇게 둘이 속삭이나 싶더니 곧이어 샘 아래서 다른 손들이 하나둘, 나중에는 예닐곱이나 나와 휠라스를 끌고 물밑으로 들어가더라구요.”

그 소리에 헤라클레스가 화들짝 일어나서 휠라스가 올라갔던 방향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런데 한참을 지났는데도 헤라클레스는 내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발 빠른 쌍둥이 형제 칼라이스(Calais)’제테스(Zetes)’가 올라갔다. 헤라클레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바위틈에 있는 샘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샘가에는 휠라스의 항아리가 빈 채로 놓여 있었다. 이어서 이아손을 비롯한 대원들이 올라와 주위를 샅샅이 뒤졌지만 휠라스를 찾을 수 없었다. 샘은 바닥없이 아주 깊어 샘을 뒤지던 몇몇 대원들도 별 소득 없이 물 위로 올라왔다.

아침이 오자 핼쑥해진 헤라클레스가 이아손에게 자신은 휠라스 없이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누구라고 헤라클레스의 말에 토를 달겠는가. 이아손 일행은 결국 감쪽같이 행방불명이 된 휠라스와 휠라스 때문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헤라클레스를 그 땅에 남겨두고 동북쪽을 향해 떠나야 했다.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의 아르고 원정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아니면 주인공 이아손을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에게는 이 일 말고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8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원정대는 비튀니아라는 땅에서 폴리데우케스의 권투 실력을 구경한 후, 어느덧 운명의 힘에 이끌려 트라키아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일행은 눈먼 현인 피네우스를 만났고 그로부터 차후의 항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피네우스는 흑해가 두 개의 조그만 바위 섬으로 막혀 있다고 했다. 곧 이 두 개의 바위 섬은 해상에 떠있다가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서로 부닥치는데 그 사이로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산산조각으로 부숴 놓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섬은 충돌하는 섬이라는 뜻의 쉼플레가데스라고 불린다고 했다. 피네우스는 아르고 원정대원들에게 그 위험한 해협을 통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에 따르면, 비둘기를 이용한 시간차 공격만이 그곳을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피네우스의 말대로 아르고선은 떠난 지 이틀 만에 쉼플레가데스 앞에 이르렀다. 겉보기에는 꼭대기에 구름을 거느릴 만큼 높고 험한, 두 개의 마주 보고 있는 섬에 지나지 않았다. 두 개 의 섬 저쪽으로 보이는 검은 바다, 그 바다가 아르고선을 향해 뿜어대는 듯한 싸늘한 역풍과 물보라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아르고 원정대는 까짓 그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섬 주위에는 부서진 배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부서진 갑판, 찢어진 돛조각, 끊어진 밧줄, 부러진 노자루가 그 바다의 적의를 증언하고 있었다. 물 위로는 부풀어 오른 사람의 사체가 떠다니고 있었고 물밑으로는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거대한 물고기가 섬 그늘로 모이고 있었다. 이아손은 키잡이 티퓌스를 타륜 앞에 세우고, 눈밝고 귀밝은 이도몬에게는 몹소스가 붙잡아온 흰 비둘기를 주어 뱃전에 세운 뒤 나머지 대원들을 모두 노자리에 않게 하고는 영을 내렸다.

이곳이 적대하는 바다의 문 쉼플레가데스, 곧 충돌하는 바위섬, 우리가 마땅히 넘어야 할 관문의 문턱입니다. 피네우스가 예언했듯이, 이 두 섬은 나는 것이든 뜨는 것이든 그 사이에 들어간 것을 향하여 양쪽에서 부딪쳐 옵니다. 우리가 힘과 용기와 지혜로 맞서지 못하면 아르고선은 난파선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섭리를 믿으세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케이론에게서 배운 웅변술이었다. 그러곤 이아손은 먼저 이도몬에게 군호를 보내어 흰 비둘기를 날리게 했다. 비둘기는 역풍을 타고 고도를 높이는 버릇이 있어서 똑바로 역풍이 불어오는 두 섬 사이로 날았다. 비둘기가 섬 사이로 들어가자 거대한 두 섬이 엄청난 속도로 부딪쳐 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르고 원정대의 귀에는 두 섬이 맞부딪쳐 오면서 양쪽으로 산 같은 물결을 일으키는 소리밖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는 누군가가 귓전에 대고 커다란 징을 연이어 때릴 때의 소리와도 같았다.

거대한 두 개의 섬이 흰 비둘기를 덮치는 형국은 거인이 눈앞을 날아가는 벌레를 두 손으로 잡는 형국과 비슷했다. 하늘이 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두 섬이 한 덩어리로 맞붙었다. 섬의 바위산에서 뿌리째 뽑힌 나무와 바위가 우르르 쏟아져 내려와 맞붙은 섬 주위의 엄청난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갔다.

이아손이 한 손을 들었다. 노자리에 앉은 대원들은 일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티퓌스는 키를 잡고 아르고선을 맞붙은 두 개의 섬을 향하여 똑바로 몰고 들어갔다. 피네우스의 말 그대로였다. 아르고선이 뱃머리로 받을 듯이 맞붙은 두 섬을 겨누고 달려들자 두 섬은 조금씩 벌어지다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티퓌스는 열리고 있는 두 바위섬 사이로 아르고선을 몰아넣었다. 두 바위섬이 아르고선을 향해 다시 부딪쳐 오기 위해서는 먼저 원래 있던 자리로 가야 했다. 두 바위섬이 원래 있던 자리고 돌아간 것은 아르고선이 이 섬 사이로 완전히 들어갔을 때였다.

저으시오! ”

키잡이 티퓌스가 타륜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대원들에게 들릴 리 없었다. 두 바위섬이 굉음과 함께 다시 부딪쳐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다는 바닥을 드러낼 듯이 아르고선 양쪽으로 치솟았다. 두 바위섬이 물을 가르는 소리 때문에 들리는 소리가 없었고, 제각기 되돌아오면서 일으킨 물보라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르고선이 두 섬 사이에서 온전히 벗어날 시간은 넉넉했다. 그러나 배는 두 바위섬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쉼플레가데스가 부딪친 순간 아르고선 고물의 키다리가 부서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때 맞붙은 이후로 쉼플레가데스는 아주 붙어버려 이 길로 들어서는 헬라스 배를 더는 부수지 않았는데 혹자는 어찌나 세게 부딪쳤는지 아예 붙어서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라 하고, 혹자는 쉼플레가데스의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은 것을 두 섬의 자살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물건이나 상황의 금기가 깨지면 그것은 더는 금기가 아닌 것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자 벼랑 아래로 떨어진 스핑크스(Spinx)’처럼, 아르고선의 무사통과로 인해 쉼플레가데스는 충돌하는 섬으로서의 존재감이 없어진 것이니 일리 있는 해석이다. 공포나 두려움의 본질이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닐까?

이아손과 아르고 원정대는 현인 피네우스 조언과 한 마리 비둘기의 활약으로 무사히 흑해에 접어들어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9

드디어 아르고 원정대를 실은 아르고선은 목적지 콜키스에 도착했다. 그 사이 주요 원정대원 중 키잡이 퓌토스와 비둘기잡이 이도몬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다. 아르고 원정대가 장대한 포부를 안고 파가사이 항구를 떠난 지 근 2년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 10년을 허비했고, 헤라클레스가 자기의 죄를 씻는 데 12년이나 걸렸으니 2년이면 양호했다.

콜키스는 예부터 시신을 거두어들이는 땅이라고 불리었다. 그만큼 위험한 땅이었다. 그러나 아르고호를 해안에 정박한 이아손은 단신으로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 궁전으로 향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용무를 밝힐 심산이었다.

헤라 여신이 안개를 풀어 대장이 떠난 아르고선을 가려주었는데 어찌나 잘 가렸던지 아르고선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오르페우스가 뜯는 수금 소리만 안개 장막 뒤에서 아련하게 들려왔다.

아이에테스는 먼 서쪽 테살리아의 이올코스에서 손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어 왕궁의 현명한 중신들과 용명한 장군들을 불러 모은 뒤 이아손을 맞았다.

이 자리에는 왕을 비롯하여 왕의 맏딸 칼키오페, 둘째 딸 메데이아도 나와 있었다. 메데이아라는 이름에는 온당하게 충고하는 여자라는 속뜻이 있다. 이 메데이아는 왕녀이자 헤카테(Hecate)’ 여신의 사제이기도 해서 요술과 기술에 능하고 사람 보는 눈이 신통했다. 그녀는 이국에서도 마치 제집 안방처럼 당당하게 행동하는 이아손에게 반하고 말았다.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장난기가 또다시 발동된 것이었다.

아이에테스 왕의 요청에 따라, 이아손이 아이에테스 왕에게 입국한 목적을 말하려 하자 메데이아가 나서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메데이아는 아버지 아이에테스에게 조언했다.

아바마마, 이분이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우선 뜨뜻한 물과 새 옷과 음식과 술을 베풀어 쉬게 한 연후에 온 까닭을 여쭙는 것이 대접하는 도리일 듯합니다.”

아이에테스는 딸의 온당한 충고에 따르기로 했다. 마침 아이에테스의 궁전에는 헤파이스토스가 팠다는 네 개의 샘이 있었다. 우유의 샘, 포도주의 샘, 향수의 샘, 뜨거운 샘이 이것이다. 시간을 번 이아손이 헤파이스토스가 팠다는 뜨거운 샘의 물로 몸을 닦은 뒤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은 마침 아이에테스 왕가의 점심때였다.

메데이아는 아이에테스 왕에게, 이아손을 점심상으로 불러 콜키스에 온 까닭을 물어보자고 했다. 왕이 딸의 말을 좇으니 이로써 아이에테스는 밥상을 함께 한 이아손을 적어도 자기 손으로는 해칠 수가 없게 된 셈이다. 밥상을 함께한 나그네를 죽이는 일은, 제우스를 섬기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자리가 무르익자 이아손은 비로소 자신이 온 목적을 왕에게 아뢰었다.

과거 전하의 사위이셨던 프릭소스는 저희 집안사람입니다. 제 숙부 되시는 이올코스 왕 펠리아스께서 프릭소스의 유해와 황금 모피를 가져올 권리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왕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아이에테스는 속으로 겸상한 것을 후회하면서, 한참을 뜸들이다가 황금 모피를 내놓겠다면서도 조건을 달았다. 이아손이 불을 뿜는 두 마리의 놋쇠 발 황소에 쟁기를 매어 밭을 갈고, 거기에다 카드모스(Cadmos)’ 왕이 퇴치한 저 용의 이빨을 뿌리는 데 성공하면 황금 모피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용의 이빨을 땅에 뿌리면 무장한 병사들이 돋아나 뿌린 자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아손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아이에테스 왕이 내건 조건을 수락한 다음, 다음 날 다시 오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아이에테스의 왕국을 나왔다.

이날 밤 콜키스의 왕궁에는 잠들지 못하는 여인이 몇 있었다. 아이에테스의 맏딸이자 프릭소스의 부인이었던 칼리오페가 그 하나요, 이아손에게 마음을 빼앗긴 둘째 딸 메데이아가 그 둘이었다. 메데이아의 가슴에는 에로스의 화살이 박혀도 너무 깊이 박힌 탓에, 이아손이 돌아간 이후에도 그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애를 태웠다.

그녀가 아는 한 자신이 이 청년을 위해 손을 쓰지 않으면 이아손은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이 청년이 자기 앞에서 죽어가게 할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도와주려면 아버지를 배신해야 할 터라 이아손을 향하는 자신의 마음과 싸웠다. 그러나 메데이아의 이성은 뜨거운 사랑의 불길 앞에서 너무나도 미약했다. 미노스 왕에 반했던 스킬라처럼, 테세우스 왕자에게 눈멀었던 아리아드네처럼, 적장 암피트리온에게 넘어간 코마이토처럼.

날이 밝기 전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신들의 도움으로 아무도 모르게 따로 만났다. 헤카테 여신이 가르침을 받아 마술과 요술을 터득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약, 산 사람을 죽이는 약도 능히 만들어 낼 수 있는 메데이아의 손에는 마법의 약병과 과거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가 가지고 다녔다던 돌 하나가 들려 있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피를 조금 뽑고, 그 피에다 가져온 고약을 으깨어 발라준 뒤, 아버지 아이에테스 왕의 시험에 나설 방도를 일러 주었다.

이 고약을 몸에 바르셨으니, 오늘 하루 용광로에 들어간다 해도 화상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돌은 불화의 돌이니 이 돌을 던지면 아레스 땅에서 나온 인간들끼리 싸우게 될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이어서, 메데이아는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지체 말고 파시스강 상류로 가라고 일러 주었다. 군사들을 대동하지 말고 혼자 가야 한다고 알렸다. 강 상류의 성스러운 숲속에 있는 용을 만나거든 그곳이 황금 모피가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또 황금 모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혼자서 용을 굴복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자기의 모든 과업이 성공하면 아르고선을 타고 함께 이올코스로 가기로 약속했고, 메데이아도 이 약속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드디어 새벽닭이 울고 날이 밝았다.

이아손은 원정대원의 반은 아르고선에 남겨두고 나머지 원정대원과 함께, 메데이아가 준 불화의 돌을 가슴에 품은 채 아이에테스를 찾아갔다. 아이에테스는 이미 아레스의 땅이라고 불리는 궁전 앞 공터에 무장한 군사들을 대동하고 나와 아이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은 왕좌에 앉았고 신민들은 산허리를 메우고 앉거니 서거니 했다. 왕좌 앞에는 커다란 쇠우리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두 마리의 아레스의 황소, 그 앞에는 큼직한 쟁기가 한 틀 놓여 있었다.

이아손이 아이에테스 왕 반대편에 무장한 원정대원을 도열시키자 콜키스의 왕은 전에 보지 못했던 병력을 보고 많이 놀랐다. 그것도 하나같이 범 같은 용사들이 아닌가. 그러나 왕은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자 시작해 보아라.”

이윽고 놋쇠 발 황소가 콧구멍으로 불길을 뿜으며 걸어 나오자 길가의 풀이 타들어 갔다. 황소 두 마리가 다가옴에 따라 용광로 안에서 쇳물이 끓는 소리가 났고, 생석회에 물을 뿌린 것처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아손은 담대하게 두 마리 황소 앞으로 나아갔다. 이아손은 황소가 내뿜는 불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황소의 노기를 가라앉히고는 두려움 없이 벌겋게 달아오른 목을 어루만졌다. 이어서 이아손이 솜씨 있게 황소의 등에 멍에를 채우고는 자신은 쟁기를 잡았다. 그런데도 이아손의 몸은 타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그을리지 않았다. 콜키스 사람들은 아연실색했고 그리스인들은 함성을 질렀다.

이아손은 아레스의 황소로 밭을 갈아 고랑과 이랑을 만든 후 아이에테스 왕 앞으로 가서 용의 이빨을 내어주기를 청했다. 아이에테스 왕은 이아손을 가까이 오게 하기가 두려웠던지 양가죽 주머니를 하나 이아손에게 던졌다. 이아손은 자루를 받아 갈아엎은 땅에 고루 뿌리고는 발로 흙을 덮어 용의 이빨을 모두 묻었다.

그러자 곧 땅이 꿈틀거리더니 무장한 병사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뿌린 씨앗의 수대로 병장기를 든 병사들이 쑥쑥 나왔다. 대열을 갖춘 병사들이 창을 이아손을 향하여 겨누고 달려들려고 하자, 이아손은 품 안에 있는 불화의 돌멩이를 그들 사이로 던졌다. 메데이아가 주었던 그 돌이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서로 누가 돌을 던진 것이냐고 따지면서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찌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치명상을 입은 병사들이 픽픽 나가떨어지자, 영문도 모르고 지켜보던 원정대만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병사 하나만 남게 되자 이아손은 옆에 있던 원정대원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꺼내어 단칼에 목을 베어 버렸다. 이 마지막 무사가 쓰러짐과 동시에 먼저 쓰러진 모든 병사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0

아레스의 땅에서 승리한 이아손은 원정대원들과 함께 아르고선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황금 모피를 지키고 있는 용을 잠재우는 일뿐이었다. 그것도 간단했다. 메데이아가 미리 준비해 준 약을 몇 방울 용의 주위에 뿌리면 될 일이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시킨 대로 살며시 대원들에게 벗어나 홀로 파시스강을 따라 올라갔다. 이 강 상류에는 콜키스 사람들이 신성한 숲이라고 부르는 아레스의 숲이 있었다. 이아손이 들어가기까지, 아이에테스 왕을 제외하고는 이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던 숲이었다.

과연 메데이아의 말대로 숲을 지키는 한 마리 용이 입을 벌리고 앞을 가로막는데 그 입이 어찌나 큰지 사람 한 명 정도는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아손이 재빨리 약병을 열어 용의 주위에 뿌리자, 용은 그 냄새를 맡고는 노기를 가라앉힌 뒤, 잠시 꼼짝 않고 서 있다가 한 번도 감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그 크고 둥근 눈을 감고 모로 누워 잠들고 말았다.

이아손은 재빨리 잠든 용의 뒤로 돌아가 아름드리나무에 걸려 있는 황금 양털을 내린 뒤, 서둘러 배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급히 친구들과 함께 아르고선에 올랐다. 물론 메데이아도 함께였다.

아이에테스 왕에게 출항을 저지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지만, 그 과정에서 뒤쫓아온 콜키스 군대와 아르고선을 목전에 두고 전투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아이에테스 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이방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신탁은 실현된 셈이었다.

메데이아가 없었더라면 이아손의 아르고 원정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아손과 원정대원들은 아름답고 신비한 여인, 메데이아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잔인했다.

콜키스를 떠날 당시 아르고선에는 메데이아의 어린 동생, ‘압시르토스(Apsyrtos)’가 같이 타고 있었다. 혹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 군대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메데이아가 붙잡아 온 인질이었다. 메데이아가 예측했던 대로 콜키스군은 군선이라는 군선은 다 동원하여 아르고선을 추격했다. 메데이아는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동생을 죽이고 그 시신을 아홉 조각으로 토막 내어 바다에 버렸다. 콜키스 함선이 승하한 왕의 막내아들 시신을 모아 장례를 치르는 동안 아르고 원정대는 무사히 북방의 콜키스 해안을 빠져나와 테살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사히 귀환한 이아손은 지금껏 생사고락을 같이 한 원정대원들과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황금 모피를 펠리아스 왕에게 건네주었는데 그 황금 모피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황금 모피가 소중한 물건이라고는 하나 이아손이 원정대와 함께 그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수고한 노력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으리라. 이아손이 진정으로 찾아온 것은 아마 자기 자신이 아니었겠는가.

 

11

황금 모피 이야기는 끝났지만, 이아손에게는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숙부로부터 빼앗긴 왕좌를 찾아오는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펠리아스 왕이 황금 모피를 손에 넣고도 이아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려달라는 왕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펠리아스 왕은 이아손이 황금 모피를 되찾아 온 것을 축하하는 큰 잔치를 열었다. 이아손은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아버지 아이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아손이 콜키스에 다녀오는 사이 그 자리에 올 수 없을 만큼 아버지 아이손이 너무 늙어버린 것이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염치없는 부탁을 한다.

아내여, 내 그대의 마법으로 오늘 이런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도 마음이 허전하오. 나를 위해 그 마법을 한 번 더 써줄 수 없겠소? 남은 내 수명을 빼내 아버지 수명에다 붙여 주었으면 하오.”

이아손은 이 말을 하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러자 메데이아가 대답했다.

제 마법이 제대로 들어준다면, 그대의 수명에서 빼지 않고도 아버지 수명을 늘릴 수 있을 거예요.”

메데이아는 보름달이 밝은 밤, 산 것은 모두 잠들어 있는 틈을 타서 홀로 일어났다. 고요한 밤, 메데이아는 먼저 별에게 기원하고, 달에게도 기원했다. 그리고 지옥의 여신 헤카테와 대지의 여신 텔로스에게 기원했다. 이러한 여신들이 마법에 쓰이는 식물을 키우기 때문이었다. 메데이아는 숲이나 동굴, 산과 골짜기, 호수와 강, 바람과 공기의 신들에게도 힘을 빌려줄 것을 기원했다.

메데이아가 이렇게 빌자 별들이 한층 더 빛나면서, 날개 달린 용이 끄는 이륜차 한 대가 나타났다. 메데이아는 이 이륜차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세상을 다니며 그 땅에서 나는 갖가지 약초 중에서 필요한 것만을 모았다. 아흐레 밤낮을 약초 찾는데 보내다가, 어느 정도 모으게 되자 두 개의 제단을 만들었다. 하나는 헤카테의 제단이었고 또 하나는 청춘의 여신 헤베(Hebe)’를 위한 것이었다.

메데이아는 이 제단에다 흑양 한 마리를 산 제물로 바치고 우유와 포도주를 제주로 헌작했다. 이어서 메데이아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에게 노인의 생명을 너무 빨리 앗아가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

이윽고 메데이아는 시아버지 아이손을 모셔 들이게 하고 주문을 외어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하고는 신선을 모시듯이 약초를 깐 침상에 눕혔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은 물론 잡인을 모두 그곳에서 내보냈다. 부정한 눈이 비법을 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준비를 마친 메데이아는 머리를 풀고, 불을 붙인 나뭇가지로 산 제물의 피를 휘저으면서 제단을 세 바퀴 돌고, 그 나뭇가지를 제단에다 쌓아놓고 불을 지폈다. 그동안 솥에 넣을 약제가 준비되었다. 메데이아는 가지가지 모은 모든 약제를 솥에 넣고 마른 올리브 나뭇가지로 저으면서 끓였다. 이곳에 들어간 약제로 거북 껍질, 수사슴의 간장, 인간의 아홉 세대를 넘게 산 까마귀 머리 따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약제를 저었던 올리브 나뭇가지에서 잎이 돋고 올리브 열매가 맺는 기적이 일어났다. 모든 준비를 마친 메데이아는 아이손의 목 부위를 찢어 온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고는 입과 상처 구멍을 통에 솥에서 끓인 즙을 부어 넣었다. 그 즙이 모두 몸속으로 들어가자 노인의 흰 머리와 수염은 그 흰 색깔을 버리고 검어지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 초췌한 기색도 사라졌다. 혈관은 따뜻한 피가 흘렀고, 수족은 활기와 기운으로 넘쳐났다.

무려 40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아이손은 이름처럼 아이가 되었으니 세상이 뒤집힐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12

그런데 펠리아스의 딸들이 다시 젊어진 숙부 아이손을 보았다. 펠리아스의 딸들은 교활한 아비와 달리 효심이 지극했다. 딸들은 메데이아를 찾아가 자신들의 아버지도 숙부 아이손처럼 젊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메데이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전처럼 솥을 걸었다. 그리고 온갖 약초를 넣고 끓인 다음 딸들이 보는 앞에서 늙은 백양 한 마리를 솥에 집어넣은 후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러자 새끼 양 한 마리가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기적을 직접 본 펠리아스의 딸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길일을 잡아달라고 메데이아에게 간청했다.

메데이아는 약속한 날에 다시 솥을 걸고 불을 피웠지만, 솥에는 흔하디흔한 평범한 물과 소들에게 먹이는 여물이 전부였다. 이윽고 밤이 되자 메데이아는 딸들과 함께 펠리아스 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부정 탄다며 호위병을 모두 물린 메데이아의 주문으로 왕은 쿨쿨 잠이 들었다.

딸들은 단검을 빼 들고 침대 모서리에 시립하고 있었다. 딸들은 메데이아가 아버지를 찌르라고 해도 차마 찌를 수가 없었던지 자꾸 머뭇거렸다. 메데이아가 딸들의 우유부단함을 꾸짖자 딸들은 고개를 돌리고 아버지를 마구 찔러댔다.

애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아비를 죽이려느냐?”

펠리아스의 말에는 힘도 용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펠리아스가 말을 이으려 하는 순간, 이번에는 메데이아가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도려버렸다. 메데이아는 그러고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지 고깃덩어리가 된 펠리아스의 몸을 가마솥의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렇게 이아손의 숙부를 향한 복수의 과정에도 아내 메데이아의 활약이 있었다. 이아손은 이로써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

 

13

그런데 이올코스의 왕으로 부족했던 이아손은 메데이아와 함께 이웃 나라 코린토스로 옮겨가 살았다. 이아손은 코린토스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에 자신의 젊은 날을 상징하는 아르고선을 바쳤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위해 왕자 둘을 낳고 근 10년 동안은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아들 없이 늙고 병든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이 이아손에게 딸 글라우케를 주겠다고 말하자, 왕의 자리가 욕심난 이아손은 그 나라 공주 글라우케에게 청혼하는 일이 벌어졌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배은망덕한 처사에 분개하여 자신의 복수심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하기로 했다. 그 무렵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델파이 신전을 찾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코린토스에 잠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메데이아는 아이게우스 왕을 찾아가 약속을 하나 받아냈다. 자신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면 그에게 원하는 아들을 낳아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까지 아들이 없었던 아이게우스는 이에 응했다.

이렇게 피난처까지 미리 마련한 메데이아는 신들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신부에게는 선물로 독약을 칠한 웨딩드레스를 보냈다. 보기엔 너무 아름다운 결혼 의상이었으나 글라우케는 옷을 걸치자마자 무서운 불길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다. 그런 다음 메데이아는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제 자식을 모두 죽이고 궁전에 불을 지를 뒤 용이 끄는 이륜차를 타고 아테네로 도망쳤다. 그렇지 않았다면 메데이아는 이아손 왕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이 끔찍한 복수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 후 그는 아르고선이 있는 포세이돈 신전으로 찾아가 아르고선의 갑판 위에서 화려했던 젊은 날을 쓰라린 심정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낡고 빛바랜 아르고선의 돛대가 우지직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아손은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돛대를 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아테네로 도망간 독녀 메데이아는 아테네에서 아직 아들 테세우스를 만나기 전의 아이게우스 왕과 결혼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는 법, 메데이아를 품은 아테네는 평온을 누릴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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