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
‘테니스엘보’라는 병으로 팔이 아파 병원에 다니고 있다. 팔이 아픈 환자로 살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컴퓨터 자판기를 누르는 것 같은 일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청소기로 집안을 청소하고 나면 팔에 통증을 느끼고, 무거운 물건을 들고 나서도 통증을 느끼며, 방을 깨끗하게 걸레질을 하고 싶은 걸 팔 때문에 참아야 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해야 할 일이 남았어도 팔을 많이 사용한 날엔 일을 다음날로 미뤄야 하니 말이다. 몸 어딘가가 정상이 아님은 불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각도로 보면 환자이기에 좋은 점이 있다. 가족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친정어머니는 이번 해의 김장을 누군가에게 부탁해 놔서 내가 거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고, 남편은 휴일마다 대청소를 해 주고 있으며, 아이들은 함께 쇼핑을 가면 절대로 내가 물건을 들게 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내 팔에 대한 가족의 따뜻한 배려이고, 그 배려로 난 예전보다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
팔의 병을 생각할 때 나는 현명해야 한다고 다짐하곤 한다. 팔이 아픈 것에 집중할 것인가, 팔로 인해 생긴 가족의 따뜻한 배려에 집중할 것인가.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에 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팔이 아픈 것에 집중하면 불행한 사람이 되고, 가족의 배려에 집중하면 행복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한 애주가가 술을 따라 마시다가 술병에 술이 반만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그는 둘 중 한쪽으로 생각할 것이다. ‘술이 반밖에 안 남았네.’ 또는 ‘술이 반이나 남았네.’ 전자는 술병이 빈 쪽에 집중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이고, 후자는 술병이 찬 쪽에 집중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이리라. 한쪽은 매사 불행해질 가능성이 많고 다른 한쪽은 매사 행복해질 가능성이 많으리라.
내가 만약 술이 반만 남아 있는 술병을 본다면, 술이 빈 쪽을 보지 않고 술이 찬 쪽을 보겠다. 마찬가지로 팔이 아픈 쪽을 보지 않고 가족의 따뜻한 배려 쪽을 보겠다. 이것이 불행보다 행복에 가까운 길로 가는 길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이라고 여긴다.
행복해지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이보다 더한 불행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라.’라는 탈무드의 구절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내가 만일 팔이 아니라 다리가 아팠다면 어땠을까. 다리에 병이 생겼다면 잃기 싫은 직업을 포기해야 하고, 즐거운 친구 모임에 가지 못할 것이며, 내가 좋아하는 산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한 불행’을 가정해 보면 다리가 아니라 팔이 아픈 것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부정적인 시각보다 긍정적인 시각이 행복한 사람을 만들 때가 많은 건 확실하다. 인간의 어리석음 중 하나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부정적으로 보며 스스로 불행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점인 것 같다. 이 점을 나는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노력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행복은 노력의 산물’임을 믿기 때문이다.
2.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어떤 사람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을 한 이유에 대해 두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그가 과거에 경험했던 어떤 일이 그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가 읽었던 어떤 책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전자가 ‘경험의 영향’이라면 후자는 ‘독서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하려는 말은 후자와 맥이 닿아 있다.
내가 즐겨 읽는 책들 중엔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 자세에 대한 책이 많다. 그중 하나가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이다. 이런 유의 책을 많이 읽다 보니 행복에 대한 내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다시 말해 행복에 대해 내가 갖게 된 생각은 이런 유의 책의 영향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에서 내가 공감하며 밑줄을 그었던 글을 뽑아 옮겨 봤다. 옮긴 글들은 위의 1번에 내가 쓴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의 글과 일맥상통하는 글일 것이다.
밑줄 긋기 :
우리에게는 본질적으로 두 종류의 감정 또는 마음의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입니다.(264쪽)
예를 들어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욕하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합시다. 그 사실을 알고서 마음에 상처를 받거나 화를 내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짓입니다. 당신이 겪는 고통은 당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반면에 당신이 부정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비난의 말이 귓가를 스치는 한줄기 바람처럼 그냥 지나가게 놔둔다면 마음에 상처를 받지도 않고 힘들게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스런 상황을 항상 피할 순 없을지라도,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 자신이 받는 고통의 크기를 조절할 순 있습니다.(171쪽)
또한 우리는 종종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느끼고, 사소한 일을 크게 여기고, 그런 일을 자신만 겪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을 키웁니다. 우리는 작은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턱없이 부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진짜로 중요한 일은 무관심하게 지나치곤 합니다. 자신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멀리 내다볼 때 훨씬 더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들을 말입니다.(170쪽)
이것은 여러 시각에서 하나의 현상을 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에는 다분히 선택적인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생각을 갖고 어떤 현상의 특별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특별한 시각을 채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확인하고 물리치거나, 또는 긍정적인 특징을 발전시키려고 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듯 다른 시각을 채택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우리는 제거하려고 하는 우리 안의 일부를 따로 분리시키고 그것과 싸울 수 있습니다.(262쪽)
그 이유는 매순간의 행복이 대개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순간에 행복이나 불행을 느끼는 것은 주변 여건과는 거의 관계가 없고, 오히려 우리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자신이 가진 것에 얼마나 만족하는가에 달려 있다.(25쪽)
마음의 수행이란 긍정적인 생각들을 신중하게 가려내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물리치는 일이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진정한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고 행복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수행이 가능한 것은 바로 우리 뇌의 구조와 기능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유전적으로 본능적인 행동 양식이 배선처럼 깔려 있는 뇌를 갖고 태어난다. (...) 하지만 우리 뇌의 배선은 정지해 있거나 고정되어 있어서 절대로 달라질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적응력을 갖고 있다. (...) 사실 우리의 뇌는 놀라운 적응력이 있어서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생각과 경험에 따라 자신의 배선을 바꾼다.(51~52쪽)
인간 뇌의 이 주목할 만한 특징은 우리 마음이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을 신경학적으로 뒷받침해준다. 생각을 통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연습하면, 우리는 신경 세포를 재구성할 수 있고 뇌가 움직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새로운 학습 과정을 통해 마음의 부정적인 상태를 긍정적인 상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수행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53쪽)
달라이 라마 | 하워드 커틀러,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에서.
나처럼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책들도 좋아할 것 같아서 추천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미움받을 용기>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