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글의 제목을 ‘봄날의 수다’로 할까, ‘봄날의 잡담’으로 할까, ‘봄날의 횡설수설’로 할까, ‘봄날의 이야기’로 할까 하다가 ‘봄날의 지껄임 2’로 정했다. 내가 봄날에 지껄인다는 뜻이 되려나.
2.
조금 전, 커피를 마시다가 첫 모금에 입을 데었다. 뜨거운 걸 잊고 아무 생각 없이 마시다가 그랬다. 나, 이럴 때 보면 참 바보 같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한다. 코딱지를 후벼파는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잘못하면 코피가 크게 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코딱지를 후벼팠다가 코피가 났다는 건 아니다. 예전에 귀이개로 귀를 파다가 피가 난 적은 있다. 그래서 이비인후과에 며칠 다녔다. 그 후로 조심한다. 역시 난 먹어 봐야 된장인 줄 아는 사람이네. 똑똑하질 못해.
3.
요 며칠 미세먼지가 없어 창문을 활짝 열고 이불을 털며 청소할 수 있어 좋았다. 하루만 청소를 안 해도 집안엔 먼지가 뽀얗게 앉는다. 사실 주부란 집에서 ‘먼지와의 전쟁’을 치르며 사는 셈이다. ‘먼지’라는 존재가 없다면 아마 집안일의 반이나 줄어들 것 같다.
그렇다면 먼지가 없는 세상이 된다면 주부들은 지금보다 행복할까?
먼지가 없다면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긴 하겠다. 그런데 편한 것만이 좋은 걸까? 어쩌면 청소하는 노동을 통해 얻는 기쁨이 없어서 지금보다 행복한 시간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 어쩌면 청소를 끝낸 뒤에 상쾌한 기분을 느끼는 일이 없어서 지금보다 행복한 시간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
4.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도 익숙해지면 그 불행의 크기는 작아진다. 그 불행의 양과 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신기한 일이다. 걱정이라는 것도 매일 갖고 살다 보면 처음 생겼던 걱정의 크기보다 작아지는 날이 온다. 습관이 되고 나면 무감각해지는 경향 때문이리라.
그래서 영국 속담에 이런 게 있나 보다. ‘습관이 들면 사자굴에서도 살 수 있다.’
인간은 습관이 들면 사자굴에서도 살 수 있다는데, 걱정을 달고 사는 게 뭐 대수겠는가 하는 생각.
5.
큰애가 기숙사 생활을 해 봐서 얻은 게 적어도 두 가지는 있다고 본다.
하나는 부엌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것.
방학이 되어 집에 온 큰애가 말했다.
“엄마, 부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아요?”
기숙사에서 뭘 만들어 먹을 수 없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또 하나는 집 밥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것.
“우리 맛있는 거 뭐 먹을까?” 하고 물었더니,
“피자, 치킨.” 이런 대답이 아니고 요런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해 주는 집 밥이 먹고 싶어요.”
6.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달리기를 잘 하려면 많이 달려 봐야 하는 것처럼, 글을 잘 쓰려면 글을 많이 써 봐야 한다. 이것이 글을 잘 쓰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그러나 달리기를 많이 해 본다고 해서 모두 선수처럼 달리기를 잘하게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글쓰기를 많이 해 본다고 해서 모두 작가처럼 글쓰기를 잘하게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명심할 점은 달리기를 많이 해 보지 않고선 선수처럼 달리기를 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많이 해 보지 않고선 작가처럼 글쓰기를 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의 글쓰기는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없는 그날은 언제?
내가 80세가 되어 기력이 없을 때쯤.
그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도다. 노력할 시간이 많이 남았도다.
이러면서 여유를 부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