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침대에 앉아 티브이를 보다가 침대 옆에 있는 책상 위로 손을 뻗어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펼치니까 이런 글이 있다.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이네.

 

 

....................

“ (…) 어떤 여자가 맞은편에서 오는데 마치 세상에 저 혼자인 것처럼 왼쪽도 오른쪽도 안 보고 그대로 전진하는 거야. 둘이 부딪쳐. 자, 이제 진실의 순간이야. 상대방한테 욕을 퍼부을 사람이 누구고, 미안하다고 할 사람이 누굴까? 전형적인 상황이야. 사실 둘 다 서로에게 부딪힌 사람이면서 동시에 서로 부딪친 사람이지. 그런데 즉각, 자발적으로, 자기가 부딪쳤다고, 그러니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가 하면 또 즉각, 자발적으로 자기가 상대에게 부딪힌 거라고, 그러니까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면서 대뜸 상대방을 비난하고 응징하려드는 사람들도 있지. 이런 경우 너라면 사과할 것 같아 아니면 비난할 것 같아?”


“나라면 분명 사과하겠지.”


“아이고, 이 친구야, 너도 사과쟁이 부대에 속한다는 거네. 사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래, 그렇지.”


“그런데 착각이야. 사과를 하는 건 자기 잘못이라고 밝히는 거라고. 그리고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너한테 계속 욕을 퍼붓고 네가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너를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이게 바로 먼저 사과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과야.”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 (…)

 

-밀란 쿤데라 저, <무의미의 축제>, 57~58쪽.

....................

 

 

 

사과를 하는 건 자기가 잘못한 것이라고 밝히는 것이고, 자기가 잘못한 것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자기한테 욕을 퍼붓게 만드는 것이란다.

 

 

이 글을 읽으니 말에 담긴 속뜻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상대의 말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알아챌 수 있는 어떤 뜻이 담긴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어 본다. 오랜만에 만난 두 남자. 이런 대화가 오간다.

 

 

A : 오랜만이야. 언제 만나 소주나 한잔 하지.
B:너는 아직도 소주냐? (웃으며) 우리 나이가 몇인데...

 

 

B가 별 뜻 없이 한 말처럼 말했지만 A는 기분이 상한다. 그 말에서 속뜻이 저절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너는 아직도 소주냐? 우리 나이가 몇인데... 이젠 몸을 생각해서 양주 같은 고급 술을 마셔야지.”라는 말로 A는 들었다. 그것은 B가 소주를 먹는 사람들을 자기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구분하고 자기는 그런 부류보다 경제적 수준이 높음을 나타낸 것 같았다. 그리고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 같았다. 그 말 한마디로 B가 평소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말 한마디로 그가 사람들의 등급을 매기는 사람으로 보였다.

 

 

다른 예.

 

 

“당신이 좋아지면 어떡하죠? 그러니 그만 만나는 게 좋겠어요.”

 

 

이 말엔 상대가 좋아지고 있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 상대가 좋아지지 않고 있다면 이런 말을 할 생각을 못한다.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앞으로 당신이 싫어지면 어떡하죠?”

 

 

이 말엔 상대가 싫어지고 있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 상대가 싫어지지 않고 있다면 이런 말을 할 생각을 못한다.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이 글은 좋네요.”

 

 

이 말은 이 글만 좋고 그동안 써 온 글은 좋지 않다는 뜻.

 

 

“이 글도 좋네요.”

 

 

이 말은 이 글도 좋고 그동안 써 온 글도 좋다는 뜻.

 

 

내가 어느 댓글에서 “오늘 비가 와서 참 좋아요.”라고 쓴 적이 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실언을 한 것 같았다. 이 말은 내가 비 피해로 인해 생기는 수재민에 대한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나타낸 듯싶어서다. 그래서 비가 와서 좋다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

 

 

아, 어려운 말말말!

 

 

이런 것 저런 것 따지면 말을 하기도 글을 쓰기도 어렵다는 걸 느낀다.

 

 

 

 

 

 

 


(후기)......................................

 

- 우연히 책을 펼쳐 밀란 쿤데라의 글을 본 오늘, 그 글로 인해 글 하나 올리네.
- 난 사과쟁이가 아닌 사람보다 사과쟁이인 사람을 좋아하고, 또 나도 사과쟁이로 살고 싶네.
- 매일 새벽 1시 넘어 자고 아침 5시 50분에 일어나야 하는 생활로 잠이 부족하네.
- 몸은 잠을 자고 싶다는데 몸이 바라는 대로 하지 않고 정신이 이끄는 대로 글을 썼네. 졸음을 깨기 위해 커피를 마셨네.
- 난 눈 오는 풍경보다 비 오는 풍경이 더 좋네. 앞의 글에서 비가 와서 좋다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해 놓고... 그래도 이 말을 해야겠네. ‘오늘 비 한번 참 품격 있게 와서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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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9-03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 ; 비교적 사회문화적인 것에 의해 결정되겠지요. 영어 잘 못하는 한국인이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That's too bad.' 대신 'I am sorry.'라고 하였다가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법판결을 받은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어 선생님의 말씀, 사실 여부는 모르겠고.) 비슷한 경우로 의료 분쟁의 경우 의사의 사과는 100%, 의사 책임으로 인정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도의적 사과까지 하지 못했죠. (지금은 조금 바뀌었지만.)

서양보다 동양, 우리나라에서 암시적인 언어를 많이 쓰니, 공감능력이 없는 남자는 여자들에게 핀잔을 받게 마련입니다.

페크pek0501 2014-09-04 13:42   좋아요 0 | URL
좋은 예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런 걸 알았더라면 좀 영양가 있는 글이 되는 건데 하는 생각... 이 듭니다. ㅋ

그래서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나면 서로 큰 소리부터 치고 보는 겁니다. 목소리가 작으면 자신의 잘못으로 사고가 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니까요. 그러니 매너 좋은 운전자가 되긴 틀린 거죠. 이런 문화권에선...

공감 능력이 없는 남자... 남자가 여자에 비해 센스가 부족한 건 사실 같아요.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4-09-0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말조심하지 않으면 큰 다툼이 일어나는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명절!

페크pek0501 2014-09-04 13:43   좋아요 0 | URL
촌철살인이에요. 하하~~
저도 조심해야 돼요. 시댁에서 3일간...

마립간 2014-09-04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소드 한 가지가 더 생각나는군요. 미국의 한국동포 직장맘이었는데, 직장일을 끝나고 돌아와보니, 아이가 사고로 죽어있었습니다. 직장일을 하느라고 아이를 돌보지 못한 죄책감에 ; '내가 아이를 죽였어'라고 혼잣말을 하였는데, 이 혼잣말이 나중에 재판에서 살인의 유죄 증거가 되었죠. (아이를 혼자 놔두는 것은 아동학대죄이지만, 살인죄는 아닌데.) 한국 동포들이 한국인의 언어습관과 함께 탄원서를 보냈지만 인정되지 않았죠.

페크pek0501 2014-09-04 13:46   좋아요 0 | URL
안타까운 일이군요. 언어습관이 인생을 망칠 수도 있군요.
저도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는지, 말을 하고 나서 '아, 그건 실언이었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글은 수정하면 되지만 한번 뱉은 말은 수정하기 어려우니
신중해야 하는데... 어렵습니다.
어제는 비가 오더니 오늘은 맑음이에요. 좋은 하루 되세요.^^

다크아이즈 2014-09-04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기 보니까 생각나요. 몸을 이기고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그 내공이 부럽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정신이 아닌 몸으로 글을 쓴다는 걸 느꼈어요.
꼭 써야 할 글이 있어서 붙들고 있으면 정신이 몸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 필히 횡설수설하게 되더라구요. 그럴 땐 미련없이 관두고 쓰러져야 합니다. 몸이 글을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허약하기 그지 없는 제 정신력을 탓하곤 하지요.

말도 조심, 몸 언어도 조심... (나쁜) 말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는 게 아니며,(좋은) 말 한다고 다 칭찬하는 게 아님을 공기 중에 흐르는 분위기로 알 수 있지요. 그럴수록 몸과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추석 잘 보내시어요.^^*

페크pek0501 2014-09-04 13:52   좋아요 0 | URL
1. 몸과 마음은 하나다, 이런 말이 책에 많이 나오는데 저는 그 둘이 각각 따로 놀 때가 많다는 걸 느낍니다. 팜 님도 그러시군요...
가령 오늘 같은 날, 몸은 사우나를 하고 싶은데 마음은 귀찮아서 사우나하러 가지 않거든요. 어떤 날은 몸은 잠을 자고 싶은데 그래서 졸리운데 마음은 할일이 많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졸음을 깨거든요. 어떤 때는 몸이 이기고 어떤 때는 마음이 이깁니다.

맑은 하늘이 아름다운 날에 기분이 맑은 하루가 되시길...

마태우스 2014-09-1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간 소홀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글구 저는 "이 글은 좋네!"라는 말이 "이 글도 좋네"보다 좋아요. 그 글만 유독 잘썼다는 말 같아서요. 막상 들으면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그나저나 넌 아직도 소주냐,는 사람이 있다면 저도 같이 안놀 거에요. 소주가 얼마나 좋은 술인데

페크pek0501 2014-09-17 10:28   좋아요 0 | URL
저도 님의 서재에 소홀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도 잘하겠습니다.
이 글은 좋네, 라는 말이 좋으시다니 님의 겸손을 발견하게 되는 대목이군요.

ㅋㅋㅋ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 혹시 양주만 마시는 교수님이 아니신지... 호호~~

마태우스 2014-09-17 11:37   좋아요 0 | URL
아니어용 사람은 이름 따라 간다고 저 정말 소주 좋아해요

페크pek0501 2014-09-21 21:05   좋아요 0 | URL
아, 성함이... 알고 있음...
몰라 뵈서 죄송합니다. ㅋ